101. 아드리안
아침을 마치자마자 치아파의 3사단을 게이트에 남겨 두고 행군을 시작했다.
게이트에서 수용소까지의 거리는 평범한 걸음으로는 한나절, 마계 검투에 끌려갈 때는 반나절보다 조금 더 걸렸던 거리다. 도착 시간이 오후 네 시라면 무리할 필요도 없었다.
행군 중 수용소 출신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감개가 무량할 수밖에 없다.
아무런 이정표도 없는 황야 한복판, 길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일행은 익숙하게 방향을 잡아 나갔다.
다른 수용소 출신인 벤트나 데뷔도 못 해 본 헤리엇처럼 낯설어 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수도 없이 이 길을 지나다녔던 사람들이다. 메마른 비연목 군락과, 드문드문 형성된 덤불숲조차 낯이 익다.
“이 길을 다시 걷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군.”
쥬시아누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왠지 정감이 드는데요? 안 그래?”
예니에프가 브리오티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허허, 오래 지내다 보면 어디든 정이 들기 마련 아닐까?”
사람 좋은 브리오티스가 헤픈 웃음을 흘렸다.
“정은 무슨, 설마 그 빌어먹을 땅도 그리운 건 아니겠지요?”
말투는 시니컬하지만 누구에게나 존대하는 샤마노프의 버릇은 여전했다.
“아니지, 거긴 예외로 치자고. 다시 가고 싶지 않아.”
브리오티스가 손을 내두르며 과장된 몸짓을 해 보였다.
“난 말이지, 다시 이 땅에 정 붙이고 살아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정말 끔찍했다고!”
뮤트가 툴툴거리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때랑 같나? 이제 우리가 주인인데. 싹 쓸어버리고 복수를 해 주자고!”
폴의 목소리가 밝다. 각질로 굳어 있는 얼굴이지만 왠지 웃고 있는 것 같다.
“흐흐, 그 자식들 아직 있으려나 모르겠네. 본때를 보여 줘야지! 안 그러냐, 헤리엇?”
“누가 아니랍니까? 클래스 낮다고 병신 취급하던 자식들을 싹 쓸어 모아서 혼구멍을 내 줄 겁니다.”
“어이 헤리엇, 우리 모두 그랬는데? 우리도 조심하냐?”
예니에프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치는 시늉을 했다.
“왜 그래요? 말만 하면 놀려 먹으려고 하시고…….”
“하하, 장난이잖아! 얼른 혼내 주러 가자!”
예니에프가 헤리엇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힘차게 걸었다.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커트리안의 예상대로 크로아지크 수용소에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크리푸 시 북쪽에서 사라진 커트리안군이 갑자기 크로아지크 게이트에 나타났다. 게이트 탈출병이 아도니아에는 소식을 전할 수 있었지만, 수용소 쪽으로는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못했다.
크로아지크는 그야말로 불모지다. 얻을 거라고는 철광산 하나다.
북부 대륙 자체가 좋은 기후라고 말할 수 없는데, 이쪽은 최북단이다.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일 년 중 농작물을 기를 수 있는 시기는 넉 달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물이나, 토양 등 농작물을 기를 만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가능하다. 크로아지크 황야는 그런 환경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황야다. 이 쓸모없는 황야는 그 누구도 탐내지 않는 지역이었다.
수용소를 노리는 움직임도 의미가 없었다. 상당한 병력이 아니면 들어올 수도 없겠지만, 들어왔다 해도 나갈 수가 없다. 이번과 마찬가지로 게이트를 통해 아도니아로 정보가 전해진다. 그럼 인근 카테니오와 존스캐빈 병력이 크로아지크 황야를 봉쇄하고, 라지도니아의 병력이 최단 거리로 크로아지크에 들어선다. 얻을 것도 없고, 위험부담만 크다.
그런 이유로 크로아지크 황야에는 정규 정찰대가 없었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소규모로 운용했다.
사실 이런 쓸모없는 땅에 게이트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다. 과거에는 철광산조차도 개발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마계대전 당시 어떤 사정으로 인해 게이트를 건설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게이트가 있다는 것만으로 이 지역의 가치가 높아지는 건 아니었다.
이곳 게이트의 역할은 오직 부아칸 산에서 채광된 철광석의 운송에만 소용되고 있었다. 물론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검투사들의 이송 통로로도 사용됐지만, 검투반이 해체된 이후로는 그런 용도로도 사용되지 못했다. 북부 전체에서 가장 쓸모없는 게이트인 셈이다.
세 개 기대로는 감히 대항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할 대병력이 수용소를 통째로 포위해 버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수용소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포로들을 내보낸 후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던 경비대가 질겁하며 비상종을 울렸지만, 그렇다고 뭔가 해 볼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오백도 안 되는 인원으로 이런 대병력에 대항을 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한가롭게 갑옷에 광을 내고 있던 로뜨 부소장은 꽁지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소장 아드리안을 찾았다. 아드리안 역시 보고를 받은 상태, 자신의 무장을 챙기고 일어서던 참이다.
“소장, 괴병력이 수용소를 포위했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어쩌다니, 맞아야 하지 않겠나?”
“한 개 군단은 넘습니다.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럼 항복을 하든가, 자네 뜻대로 하게.”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반가운 얼굴을 볼 것 같은 기분이군. 난 맞으러 가 볼 생각이니, 전멸을 하든 항복을 하든 자네가 결정하게.”
아침에 일어나 지난 밤 안부를 묻는 것처럼 여상한 말투였다.
로뜨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늘 이런 식이다. 저 혼자 달관한 척, 저 혼자 잘난 척!
명색이 소장인 자가 수용소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소장실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소장이라는 직위를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다 내려놓고 돌아가 버리면 될 일 아니냔 말이다!
대부분의 일을 자신이 맡아서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비상 상황에서는 나서 줘야 하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조차 책임을 미뤄 버리다니?
로뜨의 분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막사 문을 나서는 아드리안의 표정은 평온했다. 마치 식후 산책이라도 나서는 분위기였다.
세 개 기대, 오백의 병력이 완전무장을 갖추고 정문 앞에 도열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용소에 남아 있는 전체 병력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들의 긴장된 얼굴을 일견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지나쳐 갔다. 뒤를 따라온 로뜨가 기대 앞에 의연히 버티고 섰다.
적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갈리온을 탄 채 수용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나와서 맞아 주길 기다리는 손님 같다.
소장 아드리안은 친히 수용소 정문의 걸쇠를 벗기고 밖으로 나섰다.
수용소 병사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소장의 등을 바라보았다. 한때 로크리안과 함께 아도니아 최고의 무인이라 불렸던 사내, 비록 지금은 수용소에 틀어박혀 있지만 그 명성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와 쌍벽을 이룬다는 로크리안이 아직까지 아도니아 최강의 전사라는 영예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후, 영광의 귀환인가? 커트리안.”
커트리안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도 아드리안은 놀라지 않았다. 친구의 방문을 받은 집주인 같은 느낌이다.
커트리안 역시 지나가다 들른 친구처럼 대답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생환을 축하하네. 자네라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어. 설마 그 터무니없는 생각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지, 하하. 얼마나 멋진가? 마계의 땅으로 추방된 전사가 당당히 돌아와 복수의 시간을 갖는다? 내가 생각해도 멋지군.”
“그렇게 생각한다면 조금쯤 놀라 주는 것이 어떻겠소?”
“아니, 충분히 놀라고 있네. 그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 안에 있는 놈이 두근거리는군.”
아드리안이 심장 부근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미지근한 시선으로 아드리안을 내려다보던 커트리안이 갈리온에서 내려섰다.
“아드리안,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소. 당신은 정당했으니까. 아니, 여러 가지 배려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오랜 시간 나의 벽이었소. 난 늘 꿈꾸었소. 그대를 넘어서는 꿈이오. 이 역시 부당하지 않소.”
커트리안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물론, 그대의 정담함을 인정한다. 그대는 당당한 북국의 전사다. 추잡한 음모를 평생의 벗으로 삼는 아도니아의 쓰레기들과는 다르지. 그대도 정당하고 나도 정당하다. 어떤가? 더 이상 말이 필요한가? 오랜만에 전사의 피가 끓고 있다. 마계의 문을 당당히 넘어서 온 전사가 어떤 힘을 가지고 왔을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킨샤르가 커트리안 곁으로 붙었다.
“안 됩니다. 군단장님은 혼자 몸이 아닙니다. 군단을 생각하십시오. 절대 안 됩니다.”
킨샤르는 커트리안의 눈에 차오른 열망을 보지 못했다. 무려 팔 년간 꿈꿔 왔던 열망이었다.
아드리안은 생환자들과, 군단과, 켈커티스와, 동맹과, 북국이라는 거시적인 목적 이전에 그가 개인적으로 가진 유일한 소망이며 반드시 넘어서야 할 벽이었다. 이 벽을 넘어서지 않고는 다음을 생각할 수 없었다.
“물러서라, 킨샤르. 이건 누구에게도 간섭받고 싶지 않은 내 싸움이다.”
킨샤르는 그제야 커트리안의 눈에 어린 불꽃을 보았다. 처음이었다. 감정이 담긴 커트리안의 눈빛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다.
지금의 커트리안은 지휘관이 아닌 전사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킨샤르는 조용히 물러나왔다. 전사가 저런 눈빛을 보인다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커트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과는 많이 다를 거요. 나를 벤다면 그대는 물론 저들도 무사할 거요.”
커트리안은 도열해 있는 크로아지크 수용소 경비대와 로뜨 부소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은 자세다, 커트리안. 안타깝게도 난 그런 약속을 하지 못하겠다. 저들이 항전을 하든, 항복을 하든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난 한 명의 전사로서만 그대를 맞이하겠다. 그리고 베겠다.”
“아무래도 상관없소.”
커트리안이 하얀색 브로드소드를 뽑아 들었다. 얼룩 하나 없는 순백의 검신이었다. 마물에서 났으나, 태생의 더러움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좋아 보이는군. 오랜만에 탐나는 물건이구나. 내가 가져도 되겠지?”
이기는 걸 당연한 일로 말했다.
“내게 소용없는 물건이 된다면 그리 하시오.”
로크리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칼이 탐나는 게 아니라 그저 도발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상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만족스러웠다.
팔 년 전 처음 검을 마주할 때부터 느꼈다. 당시 커트리안은 젊은 전사였다. 아직 여물지 않았고, 충분한 경험도 갖지 못한 채 의욕만 앞세운 애송이였다. 하지만 커트리안의 검은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줬었다.
힘도 부족했고,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러나 묘하게 자유롭고, 묘하게 유연했다.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는 로크리안의 검과는 달랐다. 틀 안에 갇혀 굳고 경직된 검이 아니었다. 검은 그 사람의 육체가 아니라 사고를 대변한다. 커트리안은 자유로운 사고를 할 줄 아는 자였다. 수용소에서도 몇 번이고 검을 마주하며 확인했던 바다.
만약 아도니아 출신이었다면 자신이 맡아 갈고 다듬고 싶은 원석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고, 또 자신의 눈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늘 스스로를 감추었다. 전사로서가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길을 택했다. 실망스러웠다.
사실 지금도 수많은 군단병들을 이끄는 군단장으로 이곳에 왔다. 그러나 지금은 실망스럽지 않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완성된 자의 기운이었다. 지도자의 길을 택했지만 전사로서도 완성되어 있다. 그거면 됐다. 기타 쓸데없는 모습은 의미가 없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는 같았다. 궁금했다. 기대됐다. 완성된 그의 검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