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아, 크로아지크!
조노량은 갑자기 변한 흄의 분위기에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여인의 눈이 흰자위만 남기고 돌아갔다. 여인은 그 흰자위만 남은 눈으로 정확히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괴기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워낙에 흉측한 경험을 많이 한 터라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잘 있었나, 인간?”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을 이곳에 남게 만든 바로 그 흄, 하기였다.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반가운 일인 줄은 몰랐군.”
조노량은 시큰둥하게 흄을 마주 보았다.
“반가워하니 다행이구나.”
“용건은?”
“반격의 시간이 왔다. 나의 종 샤와 함께 저 비열한 침략자들을 처리해 주지 않겠나?”
“그녀의 이름이 샤였군? 그런데 내가 왜 그대의 싸움에 끼어야 하지?”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자유를 원하지 않나?”
☆ ☆ ☆
커트리안군은 크리푸 시에서 3일간 휴식을 취하며 다량의 활과 스무 마리의 갈리온과 백여 필의 말을 추가로 구매했다. 기타 필요한 보급도 모두 완료됐다. 센드버그와 노르드스톰에서 노획한 자금이 만만치 않았기에 보급을 완료하고도 상당한 금액이 남았다.
군단은 크리푸 시를 떠나 정북 방향으로 진로를 잡았다. 동진하면 존스캐빈, 동북진하면 카테네오다. 커트리안군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연합의 대응도 달라져야 했다. 카테니오는 그나마 전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존스캐빈은 껍데기나 다름없었다. 엘리티아에서 무려 3개 군단이나 소모한 탓이다. 때문에 연합에서는 커트리안군이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긴급히 존스캐빈에서 가장 가까운 사르보와 라지도니아가 각기 한 개 사단을 존스캐빈으로 파병했다. 자체적으로도 모병을 통해 한 개 사단을 추가로 구성했다. 기존 존스캐빈 1군단을 합하면 대략 두 개 군단이 구성된 것이다. 성의 방어에는 부족하지 않은 병력이었다.
하지만 커트리안군의 작전 범위 내에 위치한 폴리스들로서는 따로 추격군을 편성하기 힘들었다. 자칫 엇갈릴 경우 위험부담이 컸다. 때문에 추격군 편성은 아도니아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도니아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외부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도니아도 정쟁의 여파로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개인의 능력은 출중했지만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로크리안은 결국 작전 실패 하나로 제1 목민관의 권한까지 박탈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던 중요한 작전이었다.
작전 당시 동맹의 특수부대에 의해 갤리선들이 파손되는 사고가 있었다지만 그 역시 작전을 총괄했던 로크리안의 과오였다.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로크리안이 짊어져야 했다. 작전 실패는 물론 연합 최강이라고 불리던 군단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시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로크리안이라도 면책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당시 작전을 입안했던 급진파 치프만이 로크리안의 실패를 물고 늘어지며 탄핵을 주도했고, 로크리안의 중도파와 연대했던 보수파의 트라쿠스가 로크리안에게 등을 돌렸다.
그 이면에는 로크리안의 부상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중도파는 로크리안을 제외하면 정치적 세가 미미했다. 그런데 절대무력을 가진 로크리안이 부상에서 쉽게 회복하지 못하자 연대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실권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심대한 타격이 예상되었다. 아직까지는 권한만 박탈당한 상태지만, 탄핵이 그대로 추인된다면 불명예를 안고 물러나거나 추방까지도 예상할 수 있는 심각한 국면이었다.
갑론을박 끝에 보수파 중견인 제우니푸스가 이끄는 제7군단을 파견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보수파의 수장격인 제3 목민관 트라쿠스는 제우니푸스를 지원하기 위해 검투사로 이름을 날리던 아나스타시오스와 스피로스를 추격군에 포함시켰다.
제우니푸스가 군단을 이끌고 북이스테르 강을 넘기까지는 적게 잡아도 2개월은 잡아야 했다. 소규모 부대라면 존스캐빈이나 사르보에 위치한 게이트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 대군이라면 실효성이 없었다.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인원도 3명이 한계였고, 연속으로 아홉 시간가량을 이용하면 게이트에 축적된 마력이 모두 방전되어 버린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자동으로 재충전되지만 적어도 하루는 이용이 제한되었다.
물론 5서클 이상의 마법사를 동원한다면 이동 인원수를 늘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장거리 텔레포트는 상당히 고위급 마법이다. 한 번에 들어가는 마나가 만만치 않다. 폴리스 내에 고위급 마법사도 흔치 않을뿐더러 설령 동원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군단 단위의 병력을 이동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제우니푸스의 7군단은 편제가 갖춰지자마자 단 하루의 여유도 없이 즉시 원정길에 올랐다.
그 즈음 커트리안군은 북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연합이 주목하고 있는 루트는 동쪽의 존스캐빈과 동북쪽의 카테니오, 만약을 대비해 북이스테르 남쪽의 사르보까지 총 세 군데였다. 대부분의 정찰병들도 이 세 개의 루트에만 집중 배치되어 있었다. 때문에 정북으로 진행 중인 커트리안군은 연합의 촉수를 피해갈 수 있었다.
커트리안군은 중립 폴리스인 발할라를 동쪽으로 우회해서 크로아지크 황야의 경계를 밟아 계속 북진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경로였다.
그대로 북진하면 바흐라 사막이고, 동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크로아지크 황야였다. 바흐라 사막에는 중립 폴리스인 바린토가 있었지만 그야말로 작은 오아시스 도시에 불과했다. 얻을 것이 없는 지역이었다. 마찬가지로 크로아지크 황야에도 오직 철광산 하나밖에 없었는데 일시 점령으로는 얻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장기 점령을 한다는 건 채산성이 맞지 않았다.
무려 켈커티스의 창이라는 2군단이 철광산 하나를 얻기 위해 그런 오지에 틀어박힌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다. 따라서 연합 측에서도 그쪽 방면으로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 덕에 어느 순간부터 커트리안군의 행방은 오리무중에 빠져 버렸다. 크리푸를 벗어난 것까지는 확인되었으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연합은 커트리안군의 행방을 찾기 위해 크리푸 시에서부터 카테네오와 존스캐빈을 잇는 모든 루트는 물론 북이스테르 강을 넘어 남하할 것을 대비해 도하 가능한 모든 항구를 들쑤셨고, 남쪽의 사르보를 잇는 루트까지 철저히 뒤졌지만 전혀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연합의 노력과 무관하게 어느 날 크로아지크에 위치한 게이트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들어왔다. 병사 하나가 가까스로 게이트를 타고 탈출하며 전해진 소식이었다.
대규모 병력이 급습해 게이트를 장악해 버렸다는 급보였다.
연합은 당연히 그 대규모 병력을 커트리안군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겨우 크로아지크를 치기 위해 그 많은 병력이 이동했단 말인가?
의문은 의문이고 연합은 북진 중인 제우니푸스의 7군단에 연락하여 크로아지크로 향하도록 지시하고, 크로아지크 게이트와 연결되어 있는 아도니아 게이트의 좌표를 급히 수정했다. 자칫 별동대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피해를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크로아지크의 지형은 남북으로 길쭉한 땅콩 모양이다. 남쪽이나 북쪽에서 접근하는 건 효율적이지 못했다. 커트리안은 크로아지크 경계를 따라 북진하다가 땅콩 모양의 허리를 관통해 크로아지크로 들어섰다. 그가 제일 먼저 장악한 건 수용소가 아니라 게이트였다. 불과 두 개 기대로 구성된 게이트 주둔군이 커트리안군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게이트가 아도니아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커트리안은 센드버그에서 포로로 잡은 마법사 파온을 협박해 아도니아와의 연결을 끊어 버렸다. 최종적으로는 크리푸 시로 좌표를 연결할 생각이지만, 불과 3서클의 마법사가 이를 계산하고 수정하려면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했다.
게이트의 작동이 멈춘 것을 확인한 킨샤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커트리안이 무모하게 게이트를 이용해 아도니아로 넘어가려는 생각이 아닐까 우려했었기 때문이다. 무려 두 개 군단이다. 이 정도 병력을 게이트로 넘기려면 몇 달을 허비해도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결국 소규모 별동대로 아도니아의 심장부를 타격한다는 말인데, 아무리 커트리안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냥 죽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포로 구출이 목표이십니까?”
게이트의 샘물을 시원하게 들이켠 킨샤르가 물었다.
“물론 구출할 생각이다. 하나 최종 목적은 아니지.”
그 말에 킨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포로 몇을 구출하기 위해 두 개 군단이나 동원해 크로아지크를 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철광산을 욕심내 크로아지크를 점령했다는 시나리오도 말이 안 되었다. 철광산은 그야말로 그냥 산이다. 채광을 하지 않는 이상 철광석을 얻을 수 없었다. 채광을 하려면 수년간 안정되게 그 지역을 점령할 수 있어야 하는데, 크로아지크의 철광산이 아무리 가치가 높다 해도 두 개 군단의 발을 묶어 놓아 가면서까지 점유할 가치는 없었다.
“그럼 다른 목적이라도 있단 말씀입니까?”
잠시 킨샤르를 바라보던 커트리안이 생각을 굳힌 듯 말했다.
“사단장들을 호출하도록! 할 말이 있다.”
커트리안의 호출령이 떨어지자 사단장들이 게이트에 딸린 막사로 서둘러 모여들었다.
커트리안은 사단장들의 얼굴을 한 차례 둘러 본 후 고저 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기 바란다. 지난번 말한 대로 우리의 최종 목표는 북부 통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난 당분간 켈커티스와의 모든 연락을 끊을 생각이다. 이유는 묻지 말도록! 때가 되면 말해 주겠다. 이후 우리 군단은 켈커티스와 독립된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어떻게 들으면 반란을 선포한 것과 다름없었다.
킨샤르를 제외한다면 1사단장 에지디오나 2사단장 코사노, 3사단장 치아파 모두 바라흐하에 의해 임명된 사단장들이었다. 또한 켈커티스의 기득권을 쥔 세력의 일원이었다. 순순히 반란에 가담할 신분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커트리안이 행했던 모든 행동과 말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연이은 성공이 문제가 아니라 성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의 능력이 문제였다. 그동안 함께하면서 그가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젖어 버렸다. 하지만 이건 사안이 조금 달랐다.
동맹은 수십 년간 이어진 동서 전쟁에서 이렇다 할 우세를 가져가지 못했다. 아니 늘 비세를 유지했다. 최근 삼 년간은 더욱 그랬다. 이렇다 할 반격 한 번 못해 보고 일방적으로 몰렸다. 향후 10년, 20년 후에 과연 동맹이 존재할지도 의문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커트리안은 연합을 깨부수고 북부를 통일한다고 공언했다. 다른 사람의 말이면 코웃음을 치겠으나 커트리안의 말이니 그러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아무리 커트리안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이번 사안만큼은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1사단장 에지디오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반란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따르겠습니다.”
☆ ☆ ☆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시선이 에지디오를 향했다.
“반란? 누구에 대한 반란을 말함인가? 나와 그대가 충성해야 할 대상은 오직 켈커티스 하나다! 만약 장군이 생각하는 그 지점에 바라흐하가 있다면 반란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커트리안의 선언에 에지디오와 사단장들은 할 말을 잃었다. 정당하게 선출된 바실레오스를 믿고 따르는 것이 켈커티스에 대한 충성이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커트리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바라흐하의 치하에서 기득권을 획득한 집안의 사람들이었다. 만일 커트리안을 따른다면 남겨진 가족들은 반란군의 식솔이 된다. 향후 어떤 처지에 놓일지 알 수 없었다.
“정당하게 선출된 왕을 따르지 않겠단 말씀이십니까?”
“바실레오스는 폴리스 자체가 아니다. 그 자신이 폴리스 위에 서려고 한 순간 더 이상 그를 켈커티스의 정당한 바실레오스로 인정할 수 없다. 안 그런가, 킨샤르?”
커트리안이 지적하자 킨샤르는 티모테우스와 함께 그동안 모았던 정보를 털어 놓았다.
누구나 미심쩍어 했으나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정보들이 킨샤르의 입을 통해 풀어졌다.
“설마?”
부릅뜬 치아파의 시선을 당당히 마주 보며 킨샤르가 대답했다.
“맞소. 여러 차례 확인했고, 정황 증거까지 잡았던 사안이오. 바라흐하는 아도니아의 치프만과 내통한 것이 틀림없소. 이는 제2 바실레오스인 티모테우스 공과 내 명예를 걸고 증언하는 바요.”
“그럼 티모테우스 군단장의 암살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오?”
“그렇게 짐작만 하고 있소.”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빠졌다. 이들 모두 티모테우스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던 전우들이다. 누구에 의해 임명되었든 간에 그동안 쌓여 온 정이 있었다. 킨샤르는 여전히 티모테우스의 암살에 바라흐하가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턱의 근육이 도드라지도록 이를 악물고 있던 치아파가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나 켈커티스 제2군단 3사단장 치아파는 이 시간부로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커트리안 군단장과 운명을 함께하겠소! 만약 바라흐하가 내 집안의 노예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그의 피로 원한을 씻을 것을 맹세하겠소.”
천생 무골, 치아파다운 말이었다.
켈커티스와 북국 통일을 위해 가족의 안위까지 돌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그 대가는 반드시 받아 내겠다는 전사다운 선언이었다.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지디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반대한다면 돌려보내 주실 겁니까?”
“신념이 다르다 해서 전우를 죽이지는 않는다. 원한다면 돌아가도 좋다.”
그 순간 눈치를 보던 2사단장 코사노가 입을 열었다.
“믿어도 좋소이까?”
“믿어도 좋다.”
코사노를 바라보던 에지디오가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코사노와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좋도록! 전장에서 만나지 않기를 바라겠다.”
“고맙습니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에지디오와 코사노를 잠시 응시하다가 일어섰다.
“이별은 빠를수록 좋겠지.”
커트리안이 막사 문을 열고 나가자 킨샤르가 따라나섰다.
막사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킨샤르가 말했다.
“돌려보내선 안 됩니다.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죽이진 않더라도 감금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사단장들이다. 자신들의 사단장이 구금되면 병사들이 흔들린다.”
킨샤르는 침묵했다. 몇 년을 함께했던 사단장들을 차마 죽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에지디오와 코사노는 그날로 짐을 꾸려 갈리온에 몸을 실었다. 몇 년간 자신이 이끌던 사단병들을 남겨 두고 떠나는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게이트에서 멀어지자 코사노가 분개했다.
“빌어먹을 생환자 놈, 결국 반란이 목적이었던 거요. 그 시커먼 속을 진즉에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안 그렇소, 장군?”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길이나 서둡시다.”
“아니, 최소한 한 개 기대 정도는 호위로 붙여 줬어야 하는 거 아니요? 이 황량한 땅을 갈리온 한 기만 달랑 내주고 돌아가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묵묵히 갈리온을 달리는 에지디오와 달리 코사노는 연신 커트리안을 성토했다. 그 많은 감정을 어떻게 다 감추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반나절을 달린 끝에 해가 저물었다.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해야 할 신세가 되었다. 갈리온을 달린다 해도 최소 사흘을 잡아야 크로아지크 황야를 벗어날 수 있다. 앞으로 적게는 이틀, 길게는 사흘간 노숙해야 할 신세였다.
이에 코사노는 또 한 번 분통을 터트렸다.
“이 계절에 막사도 없이 노숙이라니? 참 한심해서 말도 나오지 않소. 내 돌아가면 바라흐하 왕에게 말해 반드시 토벌군을 끌고 돌아오겠소. 모닥불이나 피워야겠소. 땔감이나 좀 주워 오시구랴.”
에지디오는 말라비틀어진 덤불과 고목 등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품에서 단검 하나를 슬그머니 꺼내 들었다. 덤불 사이에 단검을 감추고 열심히 부싯돌을 치고 있는 코사노에게 다가갔다.
“곧 불이 붙을 거요. 거기다 좀 놔주시오. 사단장 체면에 이게 무슨 꼴인지 원!”
땔감을 바닥에 놓는 것처럼 허리를 숙이던 에지디오가 코사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커억! 이게 무슨……?”
에지디오는 힘을 주어 코사노의 복부에 더욱 깊숙이 단검을 박아 넣었다.
“미안하오. 군단장의 말이 맞았소. 내가 충성할 대상은 켈커티스와 시민들이지, 바라흐하 왕이 아니오.”
“이제 와서…… 허억!”
“이제 와서가 아니오. 그때 이미 결심했었다오. 단, 그대의 입이 걱정스러웠을 뿐이오. 잘 가시오.”
코사노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메조프가 피식 웃음을 흘리곤 사라져 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커트리안은 다시 사단장들을 소집했다. 그 자리에 에지디오도 모습을 드러냈다.
미지근한 시선으로 에지디오를 잠시 응시하던 커트리안이 아무 말도 없이 좌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공석인 2사단장은 당분간 벤트가 맡는다.”
2사단장만 공석이라고 선언했다. 1사단장은 유임이라는 말이었다.
에지디오는 징계를 각오했었지만 보직의 변경조차 없었다. 변명이나 용서를 구하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갔다.
에지디오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킨샤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에지디오를 힐끗 바라본 후 커트리안이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부아칸 산이다.”
“부아칸 산이라면 철광산이 있는?”
킨샤르가 의아심을 표하자 커트리안의 입가에 오랜만에 미소가 앉았다.
“아니, 금광산이다.”
“예?”
킨샤르와 치아파가 의아심을 표했다.
“크리들, 설명해 주겠나?”
“예, 알겠습니다. 사 년 전 부아칸 산에서 광산 작업을 하던…….”
크리들의 설명은 갱도 붕괴와 비밀이 묻힌 사연까지 자세히 이어졌다.
설명을 듣던 사람들의 얼굴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환호를 울렸다. 그건 금광의 비밀을 알지 못했던 생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 매장량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확인되었습니까?”
킨샤르의 질문에 크리들이 대꾸했다.
“전문가에게 문의해 본 결과, 그런 형태로 금맥이 노출된 금광은 통상 톤 단위를 예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질문을 던졌던 킨샤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톤이라니? 수십 킬로그램도 아니고 수백 킬로그램도 아니고, 톤 단위라고?
“물론 채광에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그 수십 배도 내다볼 수 있습니다.”
킨샤르와 사단장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군인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이 정도 규모의 군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들어간다. 만약 진짜로 금을 얻을 수 있다면 군단의 유지 정도가 아니다. 그 자리에 폴리스를 건설한다고 해도 해 볼 만한 액수였다.
마침 이곳에 게이트가 존재했다. 금을 처분할 문제도, 보급품을 받아 볼 문제도 해결될 수 있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선 크로아지크 수용소를 장악해야 하겠지.”
전투를 이야기했지만 누구 하나 우려를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려 2개 군단이다. 인원수로 따지면 2개 군단을 넘긴다. 불과 한 개 군단으로 엘리티아 평야를 수복한 이들이었다.
이런 황야에 주둔 중인 병력 정도는 식전 댓바람 준비 운동으로도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품고 있었다.
“일단 수용소 주둔군 병력은 파악해야겠지요?”
“잊었나 보군. 우린 이곳 출신이다. 아메조프?”
“넷, 군단장님! 따로 정찰해 본 바에 의하면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줄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검투반이 없어진 탓이겠죠. 주둔 병력은 대략 일곱 기대쯤 됩니다. 오후 네 시경이면 광산에 세 개 기대가 배치됩니다. 두 개 기대는 각 작업장에 분산 배치되고, 한 개 기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 곳에 모여 대기 근무를 합니다. 그리고 수용소에 비번인 기대 두 개가 경비 겸 예비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 개 기대는 대장간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데, 지금도 그쪽에 배치되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수용소 인근에 오십여 마리 갈리온과 이백여 마리의 말이 사육되고 있습니다. 그곳에 마지막 한 개 기대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공격 시 포로들의 안전을 위해선 우선…….”
아메조프는 부아칸 산과 수용소의 지리와 막사의 위치, 경비대의 근무 방식, 그곳 출신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세세한 사항까지 자세히 읊었다. 마치 수용소를 들여다보는 듯 자세했다.
“작전의 원칙은 적이 대응하기 전, 기습을 통해 포로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다.”
“적은 아직 우리 존재를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애초에 크로아지크 황야에는 별도의 정찰병을 운용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침 후 행군을 시작한다고 해도 말씀대로 오후 네 시면 수용소와 광산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군단을 넷으로 나눠 동시에 작전을 시작하면…….”
킨샤르가 오랜만에 작전참모다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적을 상대하는 방법으로는 무난해 보였다.
켈커티스 2군단 1사단과 엘리티아 1사단이 상대적으로 범위가 넓은 부아칸 산으로 이동하기로 했고, 갈리온 사육장으로는 엘리티아 4사단 중 네 개 기대가 들어가기로 했으며, 나머지 여섯 개 기대는 대장간과 그 주변 지역을 장악하기로 했다. 나머지 병력은 커트리안과 함께 수용소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이트에 주둔할 병력은 2군단 3사단에서 두 개 기대를 차출했다.
이 정도 배치만으로도 병력은 차고 넘쳤다. 한 개 사단도 안 되는 수용소 병력으로는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커트리안이 염두에 두는 것은 오직 아드리안 하나였다.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고, 넘어야 할 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