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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기-99화 (99/142)

99. 전설의 삼류 건달

헤리엇이 복귀하고 난 후 하이오지는 아지트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며 농땡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해가 지자마자 생업에 종사하려고 장비를 챙기던 옛 동료들을 구슬려 또다시 술판을 획책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떨어진 소집령에 아지트가 부산해졌다. 그리고 곧 비상령이 떨어졌다.

수십 명의 사내들이 골목과 주택가 입구를 봉쇄했다.

마쯔의 패거리가 앞뒤를 에워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구스타프의 패거리가 다시 그 뒤를 둘러쌌다.

시로의 편지를 받은 구스타프가에서 이번 기회에 마쯔를 제거하기 위해 핵심 인력들을 대거 몰아온 것이다. 하지만 마쯔 역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북부 도둑길드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상당한 전력을 동원한 상태였다.

전면전만큼은 서로 피해 왔던 양대 세력이 이상한 계기로 사활을 걸게 된 것이다.

두 세력 간의 대치는 아무래도 미리 준비한 구스타프 쪽이 조금 더 유리했다. 하지만 마쯔에게는 다섯이나 되는 소드마스터가 있었다. 반면 구스타프는 소드마스터가 셋밖에 없었다. 설마 도둑길드 하나를 제압하기 위해 다섯 호위를 모두 달고 왔으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구스타프는 세에서 앞서 있음에도 선뜻 달려들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크리푸의 치안대에서도 이러한 소식을 접했으나 마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처럼 틀어박혔다. 크리푸의 밤을 지배하는 남자들은 치안대 몇이 출동해서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 남문 인근 어느 술집에서 취객이 난동을 부린다는 신고를 받자마자 전 인력을 동원해 출동을 나가 버렸다. 치안대는 그 취객에게 감사의 표창이라도 수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이오지는 이 모든 일이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하필 이럴 때 귀찮은 일이 벌어졌다면서 투덜대고 있었다.

시로는 그런 하이오지를 매섭게 노려본 후, 아지트에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들을 모조리 대동하고 골목을 나섰다. 보웬의 패거리가 빠졌기 때문에 마흔 명도 안 되는 숫자였다. 물론 하이오지 역시 구시렁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골목은 이미 횃불을 받쳐 든 마쯔 패거리들도 북적거렸고, 골목 입구 쪽에 포진한 구스타프와 안쪽의 마쯔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구스타프 경이 왜 이러시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이곳은 엄연히 제가 관리하는 구역 아닙니까?”

“어허, 길드장이 공식적으로 우리 가문과 제휴하기로 합의했다니까. 이제 이곳은 우리 구역이 되었으니 이번엔 자네가 양보하게.”

“이거 논리가 이상합니다. 언제부터 구스타프 경이 그렇게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고요?”

구스타프와 마쯔가 날카롭게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아지트를 나선 시로와 이를 막아서는 마쯔의 세력 간에도 작은 다툼이 생겼다.

“당사자가 빠진 협의가 말이 되느냐? 비켜라!”

“배신자 주제에 어디서 큰소리냐, 계집!”

음침한 중년 사내 하나가 시로를 비웃으며 길을 가로막았다. 암살길드의 주요 간부 중 하나였다.

“계집? 언제부터 네놈이 나를 그렇게 호칭했지? 남의 등이나 노리는 주제에 죽고 싶어졌구나?”

“뭐? 내일이면 사창가에 처박힐 처지에 입은 살았구나! 나이가 많아 지명도 없을 텐데, 내가 첫 번째 손님이 되어 줄까? 흐흐.”

중년인의 걸쭉한 입담에 하이오지의 벨이 꼴렸다. 그래도 한때 남몰래 흠모하던 여인을 저런 식으로 말하다니?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나, 저 비루먹다 고추 떨어질 중늙은이가 뭐라는 거야? 주딩이를 확 찢어 버릴라!”

하이오지가 나서자 시로가 대놓고 타박했다.

“넌 또 왜 나서? 이게 다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저 서지도 않을 늙다리가 깝죽대잖아요!”

대놓고 욕을 하자 중년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어디서 굴러온 원숭이 새낀지 말본새가…….”

무심코 던진 원숭이라는 말이 실수였다. 음침한 중년인은 끝까지 말을 잇지도 못하고 끔찍한 꼴을 당했다. 갑자기 달려든 하이오지가 그의 턱관절을 쑥 뽑아서 주둥이를 막은 다음, 두 팔도 쭉 뽑아서 늘여 버린 것이다. 중년인의 어깨가 탈골되고 팔꿈치와 손목이 두둑 소리와 함께 차례로 빠져 버렸다. 그렇게 늘어난 팔은 거의 무릎에 닿을 지경이었다.

“누가 누구더러 원숭이래? 아예 바닥에 닿게 해 줄까?”

중년인은 말 한번 잘못했다가 졸지에 병신이 되고 말았다.

워낙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뒤늦게 사내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소란이 생기고, 시로가 머리를 감싸 쥐고, 중년인과 잦은 동서 관계를 맺어 왔던 절친한 친구의 눈이 돌아간 것은 동 시간이었다.

“죽여!”

마쯔의 패거리 중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이 한꺼번에 나섰다. 뒤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일급 용병, 쓰레기를 흔적도 없이 치우는 일급 암살자, 사창가의 평화를 수호하는 큰 서방님, 하나하나가 크리푸의 밤을 주름잡는 정예 멤버들이었다. 열쇠 따고 담 타는 데는 최고봉인 길드원들과는 전공 분야가 달랐다. 어깨에 힘 좀 줘 본 젊은 것들이 앞으로 나서 봤지만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아, 난 왜 늘 남의 말썽에 휘말리지? 이제 무게 좀 잡고 살 나이도 됐잖아?”

스스로 재수 없음을 한탄하며 하이오지가 앞으로 나섰다.

검을 뽑을 필요도 없이 긴 팔을 휘두를 때마다 크리푸의 밤을 누볐던 용사들이 퍽퍽 나가떨어졌다.

뒤쪽에서 벌어진 소란에 신경전을 벌이던 구스타프와 마쯔가 동시에 돌아봤다. 골목을 메웠던 마쯔의 패거리가 요란하게 나가떨어지며 일직선으로 길이 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시로의 눈이 부릅떠졌다. 전쟁터에서 싸움 좀 배우고 왔나 했더니, 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마쯔의 뒤를 지키던 다섯 명의 사내 중 두 명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검에서 푸른빛 오오라가 뻗어 나왔다.

오오라를 보자 사내들과 하이오지 사이의 공간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겁 없는 하룻강아지가 죽을 자리를 찾았군. 어디 더 날뛰어 보시지?”

오오라 유저 둘이 나섰는데도 하이오지는 긴장감도 없이 히죽거렸다.

“뭐냐? 이런 시국에 기사님들이 전쟁터에 안 나가 있고 왜 뒷골목에서 껍적대는 거야?”

말과 함께 하이오지는 품에서 칼 등이 완만하게 휜 흰색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 단검에 뽀얀 우윳빛 오오라가 맺혔다. 상대가 놀라는 사이, 하이오지가 몸을 날렸다. 마치 원숭이가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모양새로 두 사내를 덮쳐 들었다.

썽둥!

카앙!

기사의 검이 하이오지의 단검과 교차했다. 두 개의 검이 차례로 베어지고, 연이어 두 개의 팔이 베어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쯔는 다섯 호위를 신뢰했다. 어둠 속에서 건들거리며 나타난 사내의 실력이 제법 뛰어난 것은 인정했으나 이들은 뒷골목 건달들과는 격이 다른 진짜배기 기사들이었다. 그중 선두를 다투는 둘이 나섰으니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발생했다. 오오라로 충만했던 둘의 검이 잘려 나가고, 검을 쥔 팔이 잘려 나갔다.

마쯔는 놀라서 입도 벌리지 못했다. 이건 실력 차가 나도 한참 나는 수준이다. 남은 세 명의 기사는 감히 달려들 생각도 못하고 마쯔의 곁에 바짝 붙어 경계했다.

그건 건너편에 서 있던 구스타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장 꺼리는 자들이 바로 저 다섯 호위였다. 자신은 셋밖에 확보하지 못한 소드마스터를 마쯔는 무려 다섯이나 확보했다. 소드마스터 간의 싸움은 붙어 봐야 결과를 알지만 일단 숫자에서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수적으로 압도하고 있음에도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다섯 호위 때문이었다.

설마 마쯔가 겨우 도둑길드 하나를 제압하기 위해 다섯 호위를 다 달고 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정체도 모를 자가 단 한순간에 두 명의 소드마스터를 건달도 못해먹을 병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거 참, 마쯔 님. 다시 뵙게 되는군요?”

사내가 갑자기 알은체를 하자 마쯔는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다, 당신은 켈커티스의 호, 호위 기사님?”

“하이오집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마쯔는 할 말을 잃었다. 켈커티스 2군단 하면 동맹 내에서는 최강의 군단으로 손가락을 꼽는다. 눈앞에 나타난 자는 그 군단 군단장의 최측근 호위 기사로, 어제 제법 공을 들였던 자였다.

그런 자답게 실력은 놀라웠다. 같은 소드마스터를 단검 하나로 한순간에 무력화시킴으로써 그 실력을 증명해 냈다. 문제는 실력을 증명하는 대상이 천금을 주고 끌어들인 자신의 호위 기사라는 점이다.

“여, 여기엔 어떻게 나타…… 오신 겁니까?”

“뭐, 별일은 아니고요. 누가 제 누님을 괴롭힌다는 소식이 있어서요, 헤헤.”

“누가 감히 호위 기사님의 누이를 괴롭힌다는 말입니까?”

“시로 누님! 누가 괴롭히는 거죠?”

쿵!

그 이름이 호명된 순간 마쯔의 머릿속에는 뇌성이 울렸다.

왜? 어째서? 마이어는 딸 하나밖에 낳지 못했을 텐데?

“누님! 누가 우리 길드를 괴롭혔다고요?”

우리 길드? 왜 켈커티스 2군단 군단장의 호위 기사가 한낱 크리푸의 도둑길드를 우리 길드라고 칭하는 거지?

시로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으나, 여인네들은 본능적으로 이로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재주가 있다. 시로는 태연하게 손가락을 들어 마쯔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마쯔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수십의 수하들과 소드마스터 둘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킨 자다. 모르긴 몰라도 최상급 소드마스터다. 더구나 켈커티스 2군단이라는 배경까지 가지고 있다. 어떻게 머리를 굴려도 견적이 나오질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아,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전 단지 시로 님이 외로우실까 봐서 결혼을 주선…… 아니,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 길드 일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하이오지의 눈이 구스타프에게 향했다.

구스타프도 시류를 아는 자다. 그렇기에 이 도시의 반을 장악한 것 아니겠는가?

“오, 오해입니다. 전 단지 시로 님을 돕기 위해 왔을 뿐이고, 애초에, 처음부터, 애시 당초, 귀 길드 일에 간섭할 생각이 결단코 없었습니다.”

치안대까지 손을 놓게 만든 암흑가 두 거물 간의 전쟁은 그렇게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아지트로 돌아온 하이오지는 귓구멍을 후벼 파며 투덜거렸다.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너 뭐냐?”

페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냐니?”

“너 제대 병사 맞아?”

“정식으로 제대는 안 했는데?”

“그럼 지금 뭐하는데?”

“새로 복무 중인데?”

“그러니까 뭐하고 있냐고?”

“저기 동문에 주둔 중인데?”

“동문? 켈커티스 군단?”

“어.”

잠시 말을 멈추고 하이오지를 응시하던 페프가 다시 물었다.

“보직이 뭔데?”

“호위 기사인데.”

“누구의?”

“군단장.”

순간 아지트가 조용해졌다.

워낙 적막해진 터라 이 층에서 내려오던 뻑치기의 걸걸한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야, 하이오지! 길드장님이 부르셔.”

털보 파운드가 후다닥 달려가 손으로 뻑치기의 입을 막았다.

“아하하, 올라가 보게…… 보세요.”

하이오지는 뚱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시로와 하이오지는 한참 동안 눈싸움을 하다가 이것저것 겉도는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답답해진 하이오지가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누님, 그러니까 내가 말썽을 피우려고 그런 게 아니고요. 이상하게 일이 꼬이는 바람에…… 진짜라니까요.”

“됐어.”

“아이 참, 하여간 미안하게 됐어요.”

“뭘 잘못했는지는 아는 거야?”

“뭐, 그냥 마쯔랑 틀어지고……. 구스타프랑도 문제가 생기게 됐고……. 어떡하죠? 후원이 없으면 일에 지장이 많을 텐데, 미안해요.”

시로는 피식 웃은 후 대답했다.

“후원이 왜 없어? 둘이나 생겼는데? 네가 가서 부탁하면 서로 뒤를 봐주겠다고 난리일걸? 깔깔깔.”

하이오지는 또 귀찮은 일을 떠맡고 마쯔와 구스타프의 저택을 번갈아 방문했다. 지은 죄가 있었기에 나름 공손하게 부탁하긴 했다. 상대 입장에서는 협박 혹은 무척 뻔뻔스런 요구였지만 감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크리푸 시에서는 삼류 건달에 관한 전설이 회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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