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말썽을 부르는 자
하기는 또다시 쫓기는 신세가 됐다. 짐승의 왕 베히모스를 총사령관으로 마왕 오리아스와 카임, 호리스와 타무즈가 강림했다. 그들은 각자의 권속을 이끌고 데몬 군단과 켈베로스 등의 짐승들을 앞세워 하기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힘 앞에 토착 마물들은 또다시 숨죽이고, 어두운 구석을 찾아 스며들었다. 어둠의 기사들은 육체를 흩트리고 대기 속에 녹아들었으며 흄들은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하기는 아스르부테로부터 흡수한 마력을 녹여 내기 위해 시간을 벌어야 했고, 조노량은 오크들과 함께 테트리카 산맥 깊숙이 숨어들었다.
하지만 반격의 시간은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마계의 문엔 침략군이 흘려 놓은 다량의 마기들로 넘쳐났다.
오백 년 전 벌어졌고, 1차 침공 때 벌어졌던 일들이 또다시 반복되기 시작했다.
흄들은 약한 놈을 주워 먹고, 그를 바탕으로 다시 ‘큰 놈’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큰 놈들’을 계속 잡아먹었다.
본토에서 넘어온 자들은 아직까지 이 땅에 형성된 위대한 권능을 이해하지 못했다. 먹는 대로 자신의 힘으로 흡수해 버리는 흄의 권능은 마계에서도 아직까지 존재한 적 없는 새로운 형태의 권능이었다. 이 새로운 권능은 군주들이 가진 열 갈래 권능만큼 폭발적일 수는 없었지만, 그 은근한 저력은 한 갈래를 추가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위대했다.
반격의 서막이 올랐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권속이 늘어나자 마왕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 ☆ ☆
“어때? 술 맛 죽이지?”
“크아, 뭔 술이 이리 독해요?”
“이건 비밀인데, 크리푸 수제 밀주야. 빠블로보다 두 배는 비싸다구. 정력에 좋거든!”
“어찔어찔하네요. 뭘로 만드는데요?”
“빠블로에 독사와 올챙이를 넣어 담근다던가? 비율이 중요하다더군.”
“우웩!”
“뭘 새삼스럽게!”
뒷골목 후미진 곳에 위치한 이 허름한 주점은 고달픈 인생들의 유일한 쉼터다.
이곳의 안주는 매일매일 바뀌지만 늘 하나다. 무슨 소린고 하니, 그날그날 들어오는 싸구려 재료로 한 가지 안주만 만든다는 말이었다.
시장 통에서도 시들어 팔리지 않아 떨이로 들여오는 채소가 주재료고, 시궁쥐는 물론 몬스터 고기까지 닥치는 대로 그날의 재료로 삼지만, 이 주점의 새로운 주인은 전 주인과 달리 기가 막힌 솜씨로 먹을 만한 안주를 만들어 냈다. 재료가 그런 만큼 가격도 쌌다.
“이 집, 음식 맛이 많이 좋아졌네.”
“이거 좀 익숙한 맛이지 않아요?”
“그러게…… 오크인가?”
“놀입니다.”
“아, 어쩐지 맛있더라.”
“그렇죠? 오랜만에 먹으니 색다른데요?”
둘이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때, 한때의 사내들이 주점 문을 밀고 들어왔다. 사내들의 손에는 몽둥이며, 단검이며, 쇠막대기 같은 싸구려 무기들이 쥐어져 있었다.
“어떤 놈들이 남의 구역에 들어와서 깽판을 놓은 거야?”
하이오지만큼 시커먼 얼굴의 사내가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하이오지를 노려봤다.
하이오지는 옛날 동네에 놀러오자마자 계속 시비에 휘말리니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그 성격에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그래, 맞아! 우리 맞아, 근데 왜?”
“근데 왜?”
크지도 않은 주점이다. 시비가 발생하자 손님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밑바닥 인생들이다. 시비에 휘말려 두들겨 맞아 봐야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자칫 몸이라도 상하게 되면 당장 벌이가 끊긴다. 더구나 시비를 붙는 놈들은 시장 통에서 자릿세를 뜯어먹고 사는 도둑놈들이었다. 알아서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순식간에 주점이 썰렁해졌다. 주방장 겸 주인도 도마에 식칼을 꽂아 놓고 가게 문 밖으로 나와 섰다.
잠시 기다렸다 들어가면 상황은 대충 정리됐을 거고, 자신은 밤새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를 고쳐야 할 것이고, 몇 푼 던져 주면 고맙고 아니면 또 말고.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식상할 정도다.
아니나 다를까 들고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속이 쓰렸다. 다행히 당하는 쪽의 숫자가 적어서인지 금세 조용해졌다. 안 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남을 동정할 처지는 아니잖은가?
가게 주인 피터는 혹여 망가진 의자 값이라도 쳐서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어슬렁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피터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기대와는 달랐다.
양아치 두어 명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너덧 명은 가게 벽에 붙어서 두 손을 번쩍 들고 벌을 서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허벌나게 두들겨 맞은 모습이었다.
반면 손님 둘은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 안주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몇 개 부서졌네요. 야, 자식들아, 손해는 배상해야지. 돈들 내!”
너무 부어 눈도 뜨지 못하는 양아치 하나가 후다닥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 놓았다.
“살려 주십쇼!”
그때 입구로 다시 두 명의 사내가 들어섰다.
“아우, 춥다. 이런 날씨에 불려 다녀야 하다니, 돌겠군.”
후줄근한 차림의 중년 사내와 수염이 덥수룩한 삼십 대 사내가 투덜거렸다.
“어라? 이게 뭔 상황이지?”
중년 사내가 벌을 서고 있는 양아치들과 안주를 쩝쩝거리고 있는 하이오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하이오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내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하이오지도 귀찮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
“어라?”
하이오지와 중년 사내가 동시에 손가락으로 서로를 가리켰다.
“페프!”
“하이오지?”
“이런 씨발! 하이오지 맞아? 씨발! 살아왔잖아? 어디 얼굴 한번 보자! 이야, 멀쩡하잖아!”
“아오, 씨발! 이 노친네가? 그럼 내가 죽기라도 바랐냐? 어이, 존! 잘 지냈냐?”
“하여간 명줄이 보통 질긴 놈이 아니라니까.”
“이여, 하이오지! 멀쩡히 돌아오다니 믿기지 않는군.”
하이오지와 새로 들어온 두 사람은 손바닥을 마주치고 서로의 어깨를 밀쳐대면서 거칠게 인사를 나눴다.
벌서던 양아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페프 형님, 아시는 분들이세요?”
“그럼 알다마다. 끈적이 하이오지가 바로 이분이시다.”
“끈적이라니?”
“뭘 발끈하고 그래. 오랜만에 옛 별명을 들으니 반갑지?”
“미친 노친네!”
“내가 왜 노친네야?”
“그럼 젊은이신가?”
“빌어먹을 이 계통 놈들은 경로사상이 없어!”
“알아서 노친네 인증!”
“됐다, 새끼야. 하여간 반갑다. 복귀 기념으로 좋은 데 가서 술 한잔 거하게 해야지? 병사들 벌이가 만만치 않다면서? 정착금 정도는 모아 왔겠지?”
“쫄병 나부랭이가 뭔 돈을 벌어?”
“약탈 같은 거 하고 그러지 않나?”
“약탈 같은 소리하고 있네!”
“잘 가게! 얘들아, 가자!”
“빌어먹을 노친네!”
“하하, 농담일세, 이 친구야! 몇 놈 더 모아서 한잔 꺾으러 가야지!”
“좋아! 아, 여긴 내 동료 헤리엇이다.”
“반갑군. 젊은 친구!”
“반갑습니다.”
“어이, 너희들은 돌아가라. 이 친구 일은 잊고!”
크리푸 시는 일명 ‘비열한 자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인구의 십 프로 이상이 범죄로 먹고산다. 연관된 직업을 가진 자는 통계도 안 나온다. 범죄 관련 길드가 많아지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하이오지는 그중 북부 도둑길드 소속이었다. 세력이 강한 길드는 아니지만 나름 탄탄한 사업 영역을 가지고 있었기에 먹고살 만은 했다.
북문 도둑길드의 아지트는 이름 그대로 북문 인근 조셉로에 위치한 평범한 목조 주택이었다. 정문은 주택가를 향해 있고, 뒷문은 시장 통에서 이어진 골목에 위치해 있다. 일견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보통의 집단 주택으로 보였기에 주목받지 않았고, 또 은밀한 골목과 통해 있기에 드나듦이 편했다. 물론 삼 년 전 새로 이전한 건물이기 때문에 하이오지로서는 첫 방문인 셈이다.
원래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하이오지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한때 이 조직의 중간 간부까지 지냈고, 또 제대를 했으니 당연히 복귀하는 것으로 이해한 탓이다.
“이봐들, 여기 누가 왔나 좀 보게.”
“이게 누구야? 하이오지 아냐?”
“저 사람 누굽니까? 여기에 함부로 데려오면 어떡합니까?”
“야, 괜찮아. 한 식구야. 어이, 끈적이 살아왔구나?”
거실에 모여 도박판을 벌이고 있던 사내들 몇이 반갑게 하이오지를 맞았다. 반면 절반 이상은 하이오지도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하이오지가 복귀 기념으로 술 한잔 산다는데, 생각 있으면 나서라고!”
“좋지! 끗발도 안 오르는데 술이나 한잔 걸치러 갈까?”
“이 노친네가, 정말? 에이, 좋다! 내가 쏜다. 헤이, 뻑치기! 그동안 잘 지냈지?”
“요즘 벌이가 시원찮아서 못 지냈어. 작슨은 팔 병신이 돼서 돌아왔던데, 끈적끈적하게 다 붙이고 왔는걸?”
또다시 시시껄렁한 농담과 함께 왁자한 인사가 오고갔다.
그때 길드 뒷문이 벌컥 열렸다.
길드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 온 사내는 험상궂은 사십 대 대머리 사내였다. 그의 뒤로는 힘깨나 쓸 것 같은 덩치들이 셋이나 붙어 있었다.
사내가 들어서자 거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어떤 놈이 우리 애들을 건드리고 입을 닦았지?”
노친네 페프가 쭈뼛거리며 나섰다.
“부길드장님, 그게 아니고요. 약간의 오해가 있어서…… 하이오지라고 이전에 길드에 있던 식굽니다. 방금 제대를 하고…….”
페프는 사내의 냉랭한 시선에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내가 언제 네놈에게 물었나? 그런저런 사정은 치료비를 먼저 정산한 후에 들어도 늦지 않아. 어디, 긴팔원숭이 너냐?”
생전 처음 보는 놈이 부길드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데다가 새로 붙은 별명까지 불러대니 하이오지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나참, 페프. 저 자식 뭐냐? 언제 부길드장이 바뀐 거야? 윌리엄은 어디 가고?”
페프가 하이오지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쉿, 말조심해. 어서 인사드리게. 새로운 부길드장 보웬 님이셔.”
“노친네, 왜 찔러대고 난리야? 어이 형씨, 말이 짧잖아? 언제 봤다고 수하 취급이셔? 아, 그래. 아까 그 친구들? 선배로서 후배들 교육 좀 시켰어. 뭐, 잘못됐나?”
순간 장내가 싸늘하게 식었다. 부길드장 보웬은 몇 년 전부터 두각을 나타내다 최근에는 그 위세가 길드장을 넘어설 지경인 그야말로 길드의 실세였다.
보웬 역시 벙찐 표정으로 하이오지를 바라봤다. 근래 들어 자신에게 이런 말버릇을 보이는 자는 처음이었다. 애초에 두들겨 맞고 들어온 놈들에게 들어서 그가 과거 조직원이었던 것도 알았고, 막 제대해 돌아온 것도 알았다. 그래서 적당히 상납도 받고 길도 좀 들일 겸 나섰던 건데 생각도 못했던 반응이 되돌아왔다.
“뭐, 뭐, 뭐?”
“뭐가 뭐?”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전쟁터에서 좀 굴렀다고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냐?”
보웬의 머리가 김이라도 오를 것같이 뻘겋게 물들었다.
그때 페프가 서둘러 하이오지의 입을 막았다.
“이봐, 하이오지 왜 이래? 미친 거야? 전하고 다르다고.”
하이오지가 페프의 손을 쳐 내며 말했다.
“좀! 내버려 둬 봐. 어이, 대머리 아저씨, 나 오늘 기분 좋은 날이니까 그냥 가셔. 괜히 좋은 기분 망치지 말고!”
☆ ☆ ☆
이런 상황에서 따로 지시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보웬의 뒤에 서 있던 덩치들이 알아서 앞으로 나섰다.
“옛 식구라고 해서 적당히 봐주려고 했는데 안됐군.”
덩치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왔지만 하이오지는 코웃음만 쳤다.
“뭐야, 이 잡것들은? 별 시답잖은 것들이 잔뜩 생겼네?”
“입을 찢어 주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덩치 셋 중 둘이 짧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길드 내에서 시체 한둘 치워 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헤리엇, 보고만 있는 거야?”
“또 뭐요? 알아서 하세요. 이번엔 확실히 내가 시비 붙은 거 아니라고요.”
망설임도 경고도 없었다. 그들의 단검은 최단 경로를 통과해 짧게 끊어졌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기습이었지만 하이오지의 입장에선 달팽이 두 마리가 경주라도 벌이는 것처럼 느릿하게 보였다.
“의리 없는 자식 같으니라구. 대신 처리할 수도 있잖아?”
헤리엇의 얼굴을 노려보며 첫 번째 단검을 건드리고, 두 번째 단검을 튕겨 냈다. 그때까지 하이오지의 시선은 헤리엇을 향해 있었다.
단검 하나는 바닥에 박히고 다른 하나는 천정에 가서 꽂혔다.
그 순간 맨손의 사내가 테이크다운을 시도해 왔다. 하이오지가 그 기다란 팔을 쭉 뻗어 사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돌진이 턱하니 멈춰졌다.
하지만 사내도 구르고 구른 싸움꾼이었다. 테이크다운이 막혔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상대의 옷자락이라도 잡아채기 위해 팔을 최대한 뻗어 냈다. 문제는 하이오지의 리치였다. 아무리 팔을 휘휘 저어도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는 덩치가 컸다. 그만큼 팔도 길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용병 생활로 잔뼈가 굵은 노련한 자였다.
반사적으로 하이오지의 팔목을 잡아채며 비틀었다. 아니, 비틀려고 했다. 상대의 팔목을 잡은 채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팔목은 요지부동이었다. 처음으로 사내가 당황했다. 급히 물러나려 했으나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았다. 사내는 하이오지의 팔목을 잡고 떼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머리가죽이 통째로 벗겨지지 않는 한,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의리 없이 굴어 보라구.”
“저놈들 또 덤비는데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좋은 데 안 데려간다?”
단검을 찔러 왔던 사내 둘이 좌우에서 주먹을 뻗어 왔다. 왼쪽으로 달려드는 사내의 발목을 걷어차고, 오른쪽으로 달려드는 사내의 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오른쪽 사내는 숨통이 막혀 컥컥거렸고, 왼쪽 사내는 발목이 부러져 버렸다.
“어이쿠, 미안한걸. 힘 조절을 잘못했네?”
“다 끝났는데요?”
“주인공이 직접 움직이면 폼이 안 나잖아?”
“폼은 무슨, 그 체형으로는 뭘 해도 폼은 안 나요.”
“아니, 이 자식. 한판 붙어 볼래?”
“흥, 누가 겁먹을 줄 알고요?”
둘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보웬은 슬금슬금 문 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저들은 마쯔가 직접 붙여 준 자들이다. 용병길드에서 하나, 암살길드에서 둘. 모두 상당한 수준의 전문가들이었는데, 저자는 그런 이들을 말 그대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오지는 왼손을 슬쩍 튕기고, 오른손을 가볍게 털었다.
머리카락을 붙잡혀 버둥거리던 사내가 거세게 밀려 보웬의 가슴에 안겼고, 왼손의 사내가 날려가 보웬을 덮쳤다.
쿠당탕!
두 덩치가 동시에 부닥쳐 오자 보웬은 사내들을 안고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쓰레기는 치우고 가야지!”
큰 부상을 입은 건 아닌지라 보웬이 후다닥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튀어나 갔다.
“이 자식, 두고 보자!”
보웬이 도망치자 사내들도 부리나케 뒤를 따랐다.
워낙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페프 등은 어어하며 바라보기만 했다.
“뭐야? 하이오지? 어떻게 된 거야?”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페프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 저런 것들은 한 주먹 거리도 안 됐다구.”
페프는 으쓱이는 하이오지를 억지로 끌고 아지트를 나섰다.
늦은 밤, 닫은 문을 두드려 열고 들어선 술집에서 예닐곱 명의 사내가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시로 님을 밀어내고 저 자식이 길드마스터가 되려 한다는 말이군? 자네들은 뭘 한 거고?”
“우린 이제 힘이 없어. 보웬이 데리고 들어온 자들이 중요한 자리는 다 차지했거든. 우리는 새빠지게 현장 일만 한다고.”
“이런 한심한 자식들! 좋아 자네들은 그렇다 치고, 그 표독한 시로 님이 순순히 밀려난대?”
하이오지의 말에 빠블로를 단숨에 들이켠 페프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밀려난다기보다는, 결혼을 한다더라고.”
“왜? 그 암팡진 시로 님의 취향이 저런 자였어?”
“그게 아니고, 길드는 이미 보웬이 거진 장악한 상태고, 이젠 공식적으로 길드장이 되겠단 생각인 거지. 시로 님은 계속 거부했지만 마쯔 님이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했나 봐.”
하이오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쯔? 그가 왜?”
“보웬은 영업할 때 수단방법을 안 가리거든. 돈을 좀 만지지.”
“헤? 그런 이유였어? 전대 길드마스터 때부터 쌓아 온 의리를 저버리고 보웬을 지지한다고? 몇 푼 더 벌자고?”
“뭐, 그런 셈이지.”
“하, 뭐 그런 자식이 다 있지?”
“쉿! 마쯔 님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그의 눈 밖에 나면 크리푸를 떠야 한다고!”
“흥, 뭐가 그리 대단한 자라구.”
“아, 이 친구? 에이,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세.”
페프가 술을 권하자 털보 파운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우울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신나게 마셔 보자고!”
우울한 기분도 잠시, 오랜만에 옛 직장 동료들을 만난 하이오지는 그날 밤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댔다. 헤리엇도 덩달아 마시고 하이오지와 함께 길드 아지트에서 뻗어 버렸다.
마쯔는 크리푸 시의 밤을 지배하는 두 명의 사내 중 하나다. 그런 그의 아침을 불쾌하게 만드는 방문이 있었다.
크리푸에는 수많은 길드가 공존한다. 직업으로 삼아도 부끄러움 없을 떳떳한 길드가 있는가 하면,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길드도 있다. 암살, 정보, 도둑, 도박, 사창 등이 대표적이다.
마쯔는 그중 절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구스타프가가 지배하고 있다.
밤의 지배자 두 명 중 하나인 마쯔의 아침을 불쾌하게 한 건 북부 도둑길드의 부길드장인 보웬이었다. 하는 짓이 제법 똘똘해 조만간 길드장으로 올릴 생각이었던 자다. 그런데 이 병신이 길드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잔뜩 깨지고 와서는 복수를 운운했다.
밤의 조직은 그 조직이 담당한 분야만큼이나 힘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아무리 직업적인 부분에서 뛰어나도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조직을 이끌 수 없다. 때문에 사람까지 붙여 줘 가면서 밀어줬는데, 개망신을 당하고 온 것이다.
“전쟁이라도 벌였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안 그래도 그럴까 했습지요. 그런데 지금 시기에 아지트를 들이쳤다가는 시로 년과 정면으로 붙어야 하니까…….”
“필요하다면 붙어야지요. 왜, 자신 없습니까?”
“자칫 조직이 반 토막 날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서부 놈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그랬다가는…….”
“변변치 못한! 그래서 코 찔찔 흘리면서 형아 손 끌고 가듯 내 손이라도 끌고 찾아가겠다는 겁니까?”
“아니아니, 그게 아니옵고……. 시로 년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몇 마디 말씀만 해 주시면 그놈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요.”
“아시지 않습니까? 내 손으로 시로를 내치기에는 아직 명분이 부족합니다. 그러게 지금까지 그 쥐씨알만 한 조직도 장악 못하고 뭐하신 겁니까?”
“그게…… 전대 길드장 때부터 워낙 탄탄하게 관리를 해 놔서…….”
“닥치십시오. 안 그래도 켈커티스 군단이 주둔해 있는 마당인데,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놨지 않습니까?”
마쯔는 가능하면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북부 도둑길드는 제법 짭짤한 조직이었기에 이대로 손을 놓고 있기도 곤란했다. 더구나 최근 암고양이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구스타프 쪽에 붙기라도 한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초기에 진화하지 못하면 시끄러운 일로 번질 소지가 다분했다. 아예 꿈틀거리지 못하도록 한 번에 밟아 줘야 뒤탈이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저녁에 직접 들어가 볼 테니 대기하고 있으세요.”
그 시간, 북부 도둑길드의 여 길드장 시로는 하이오지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한때 자신의 수하였던 자였고, 어젯밤 말썽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말썽을 일으키다니?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잖아! 군대에 가면 철이 든다는데, 네놈은 어째 그 모양이지?”
“헤헤, 죄송하네요.”
“지금 너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진 줄이나 알아? 이런 빌어먹을 새끼! 어떻게 말썽을 몰고 다니는 거야? 너 오늘 죽어 볼래?”
“누님,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 번만 봐주세요.”
“에이, 한심한 자식…….”
여전히 능글능글한 대답에 시로는 더욱 사납게 쏘아붙였다.
한참 만에 속이 풀린 시로는 가만히 하이오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런데, 몸이 많이 망가졌네? 사람 팔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건가? 안색도 안 좋고? 고생을 하긴 했구만. 하여간 너 때문에 바빠졌잖아! 그만 꺼져라.”
“돌아온 건 아…….”
“시끄러워. 나가 봐!”
하이오지는 한때 남몰래 흠모하던 시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여전히 사납게 굴지만 이전만은 못했다. 상황 탓인지 나이 탓인지 어느새 성질이 많이 죽어 버렸다.
하이오지가 나가자마자 시로는 양피지를 꺼내 편지 한 통을 작성했다.
안 그래도 최근 마쯔의 움직임이 수상쩍었다. 정황을 따져 봐도 이리되면 뭔가 행동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고, 한 번도 틀려 본 적이 없는 ‘감’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망설였던 일을 결행할 시기가 닥쳐온 것이다. 어쩌면 오늘 죽느냐 사느냐가 판가름 날 수도 있었다. 자기 사람들만으로 마쯔를 거역하는 건 그냥 미친 짓이다. 이제는 구스타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별것 아닌 사고는 그동안 곪아 왔던 상처들과 결합해 일파만파로 번져 갔다.
북부 도둑길드는 온갖 역경을 헤치고 삼십 년 전 서부 도둑길드로부터 독립했다. 당시 신의 손이자 업계의 전설로 불리던 마이어의 업적이었다. 시로는 마이어가 뒤늦게 얻은 외동딸이다. 이십 대에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시로는 마이어가 죽자 자연스럽게 나이 서른둘에 길드장의 자리를 이었다. 그리고 다시 십 년이 흐른 지금 일대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동안 북부 도둑길드의 뒤를 봐주던 마쯔가 보웬을 편들고 나섰다.
길드장과 부길드장의 결혼을 통해 파벌을 혁파하고 새로운 단합의 계기가 마련되길 바란다는 그럴듯한 명분이었는데, 실상은 시로를 밀어내고 심복인 보웬에게 모든 실권을 밀어주기 위한 작업일 뿐이었다.
이러한 압력에 시달리던 시로에게 서부 도둑길드의 주인인 구스타프가 은밀한 제안을 해 왔다. 구스타프가에서 마쯔를 대신해 뒤를 봐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구스타프가는 마쯔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