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97화 (97/142)

97. 하이오지의 고향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앞 다투어 커트리안 일행에게 인사를 해 왔다.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기 힘들었다. 이들이 바로 크리푸 시의 권력과 금력을 나눠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하나같이 만면에 미소를 짓고 커트리안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안달을 했다. 동맹의 중심 도시인 켈커티스의 2군단장, 통상적이라면 제2 바실레오스가 이끌어야 할 군단이다. 그런 군단을 이끈다는 이야기는 바실레오스에 준하는 힘을 가졌다고 봐야 했다.

변방의 작은 폴리스 크리푸지만 켈커티스의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이 ‘더글라스가’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정보가 빠른 이에 의해 커트리안이 더글라스가의 후계라는 것이 금세 알려졌다.

그들로서는 켈커티스의 은밀한 정치 내막까지는 알 수 없는 일, 2군단을 이끌고 있는 더글라스가의 후계자라는 것만으로 커트리안을 현직 바실레오스만큼이나 영향력 있는 인물로 오해하게 했다.

커트리안의 정체가 밝혀지자 사람들은 더욱 안달하며 한마디라도 나누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 관심은 커트리안뿐만 아니라 호위 기사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켈커티스의 창’이라는 2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의 직속 호위 기사라면 정말 대단한 전사거나 혹은 대단한 신분이라고 판단해도 틀리지 않았다.

더욱이 사단장들조차 숙영지에 머물게 한 커트리안이 특별히 대동하고 또 같은 자리에 앉도록 허락한 특별한 사람들이다. 크리푸인들 입장에서는 이들이 지금은 호위 기사의 신분이지만 언젠가는 사단장이 되고, 군단장이 되고, 정치가가 될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서이스테르 강 하구에 위치한 폴리스, 케이론 시 목민관의 둘째 아들인 벤트가 보여 주는 나무랄 데 없는 예법이 그런 의심을 더욱 부추겼다. 벤트의 음침함은 진중함으로 포장되었고, 아가미를 감추기 위해 세운 깃과 단추 하나 허투루 풀어 놓지 않는 몸가짐은 유서 깊은 가문에서 엄정한 예절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인식되었다. 스마르의 날카로운 기도도 마찬가지였다. 근처에만 가도 베어질 것 같은 예기를 뿜어내는 스마르를 하찮은 기사로 인식할 사람은 없었다.

덩달아 하이오지의 주가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비록 생긴 건 좀 이상했지만 이런 이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터무니없는 상상을 부추겼다. 성도 없는 하이오지에게 어느 가문 출신인지를 물어오고, 얼버무리면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감춘다고 생각했다.

하이오지는 이곳저곳 불려 다니며 기억도 못할 이들과 인사를 나눠야 했다. 과거의 하이오지로서는 상상도 못할 대접이었다.

하이오지는 너무나 바뀐 처지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예전이라면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서 끌려 들어오지 않는 이상 발을 디딜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시청에 들어와 무려 시장과 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저 친구, 세모꼴 눈으로 연신 반달을 그리고 있는 사십 대 노란 머리, 하이오지가 잘 아는 자였다. 과거 그가 속했던 조직의 배후며, 실질적인 보스인 마쯔라는 사내다. 과거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는데 전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크리푸의 밤을 지배하는 두 명의 절대자 중 하나다. 그렇다 해도 감히 커트리안에게 접근할 레벨은 안 되니 만만해 보이는 하이오지에게 들러붙어 계속 말을 붙이고 있었다.

“하하, 크리푸를 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켈커티스에 비해 많이 초라하지요?”

‘나도 크리푸 출신이랍니당.’

“예전에 켈커티스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 웅장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높은 건물들 하며…… 하하하.”

‘암요, 웅장하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요.’

“혹시 저택은 어느 거리에 있으신지?”

‘저택은 무슨.’

“입이 무거운 분이시군요. 귀한 분들을 모셔 놓고 준비가 많이 모자랍니다. 너무 욕하지 마십시오.”

‘크리푸에도 이런 훌륭한 요리들이 있는 줄 몰랐군요.’

“혹 늦게라도 시간이 되신다면 제가 따로 한번 모시고 싶습니다.”

‘또 여자 이야기군. 켈커티스에서 풀 만큼 풀었거든요. 암고양이 시로 누님이라도 넣어 준다면 모를까?’

“정말 괜찮은 아이로 준비하겠습니다. 켈커티스에서도 보기 드문 미녀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의를 주던 스마르의 매서운 눈빛이 떠올랐다. 그 눈빛을 떠올리자마자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때문에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제가 죽습니다.”

속으로 생각할 때는 그럴듯한 대답을 떠올렸으나 막상 입을 열고 보니 뜬금없는 대사가 튀어나온다. 스마르에게 이러저런 주의를 들었다. 아참, 스마르는 호위 기대장이다. 함부로 행동하다간 그에게 요절난다. 뭐 이런 취지로 잘 포장해서 말했어야 하는 건데……. 그나저나 마쯔 당신, 이런 사람이었나?

하이오지의 말에 마쯔는 순간 당황했다. 상대는 입이 아주 무거운 기사였다. 허튼소리일 리 없으니 군율을 어길 경우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과연 군기가 엄정하기로 소문난 켈커티스군다웠다.

“이런, 제가 실수를 한 모양이군요. 귀한 분을 모셔 놓고 실언을 하다니 부끄럽습니다. 크리푸 촌놈이 물정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렸다 생각하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숙영지로 돌아온 하이오지는 혀를 내둘렀다. 색색이 모양을 내고 온갖 귀한 재료를 사용해 만든 대단한 요리를 접했지만 사실 맛도 느끼지 못했다. 배는 부른데 뭘 먹었는지도 몰랐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말아라’, ‘켈커티스에서처럼 함부로 굴지 말아라’, ‘모르면 따라 하고, 이해할 수 없으면 답하지 마라’ 등등, 얼음장 같은 스마르로부터 온갖 주의를 듣고 나니 보통 조심스러웠던 게 아니다. 다시는 그런 자리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 커트리안의 호출이 있었다.

“하이오지.”

“네, 커트리안?”

“여기가 고향이지?”

“뭐, 그렇죠. 헤헤.”

“보급이 완료되는 대로 출발할 예정이다. 사흘쯤 걸릴 예정이다.”

“네에…….”

하이오지는 그런 일을 왜 자신에게 말해 주느냐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눈치 없는 하이오지의 반응을 보자 커트리안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출발 전까지 휴가를 주겠다. 귀향을 즐기도록!”

“네? 그래도 됩니까? 정말이죠?”

“나가 보도록!”

“푸하하, 고맙습니다요. 안 그래도 만나 보고 싶은 놈들이 있었거든요. 아 참, 신분은……?”

“부끄러운 신분은 아닐 텐데?”

“그죠? 맞죠? 스마르 님이 괜히…… 다녀오겠습니닷!”

커트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기대원 중 자신을 어려워 않고 스스럼없이 대하는 자는 오직 하이오지뿐이다.

하이오지는 화살같이 막사를 뛰어 나갔다. 그리 늦은 저녁도 아니었다. 이곳에서 생활할 때는 한참 활동할 시간이 아닌가? 혹시라도 스마르를 만나게 될까 봐 서둘렀다.

간단한 짐을 챙겨들고 숙영지를 나서려는 하이오지를 발견한 헤리엇이 소리쳤다.

“하이오지, 어디 가요?”

“넌 들어가 잠이나 자라구!”

“임무를 받은 건가요?”

“임무는 무슨? 참, 넌 뭐 할 거 있냐?”

“아뇨. 자유 시간인데요.”

“그래? 근무는?”

“오늘은 비번인데요.”

“음…… 그렇단 말이지. 좋아, 내가 시내 구경시켜 줄까?”

“정말요? 나야 좋죠. 내일 아침엔 복귀할 수 있는 거죠?”

“난 아니고, 넌 그래야 되겠지.”

“무슨 소리예요?”

“난 휴가거든.”

“정말요? 우와 좋겠다.”

“그럼 스마르 님께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하이오지가 서둘러 돌아가려는 헤리엇을 잡아챘다.

“아니, 안 돼!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모른다구.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골치 아파. 그냥 가자!”

“그래도 될까요?”

“어차피 내일 아침까지는 근무도 없다며?”

“그렇긴 하죠. 그럼 슬쩍 갔다 올까요?”

“그래 가자. 내가 좋은 술집도 알려 주고, 좋은 친구들도 소개해 주지!”

“까짓것 갑시다!”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숙영지를 벗어났다.

하이오지가 찾은 곳은 시 북문 난전과 이어진 뒷골목이었다. 북부 대륙에서도 북쪽에 치우친 크리푸 시, 거기다 다시 북문 쪽에 자리 잡은 시장 통 하고도 뒷골목이다. 조금이라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곳에 자리 잡고 살 리가 없다.

그야말로 삼류 인생들끼리 서로서로 사이좋게 등을 처먹고 사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시장 통과 맞닿아 있는 골목이라면 빤한 환경이다. 일단 골목이니 햇볕이 잘 들지 않을 테고, 시장과 맞닿아 있으니 고약한 냄새가 날 것이며, 밤늦은 시간이니 길거리에서 술판을 벌이는 지지리도 돈 없는 건달들이 있을 것이다.

헤리엇은 코를 감싸 쥐었다. 버려져 썩어 가는 각종 야채, 하수로 질펀해진 흙바닥, 반쯤 썩은 쥐새끼 시체와 사람 똥인지 개똥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똥 덩어리들이 오랜만에 방문한 하이오지와 첫 방문자인 헤리엇을 반겨 주었다.

“아씨, 뭐 이런 데가 있어요? 꼭 이쪽으로 가야 되는 겁니까?”

“이상하다…… 전에는 이렇게 지독한 냄새는 아니었는데?”

“익숙했었겠죠, 뭐. 다른 길 없냐고요?”

“그런가? 그럼 익숙해질 겸 그냥 가자고. 너무 돌거든.”

하이오지는 원래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성격이다. 헤리엇의 요구 따위는 간단히 무시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헤리엇은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말았다.

“우쒸, 이건 뭐, 오크 입 냄새보다 더 고약하네.”

티격태격하며 골목에 들어선 둘 앞에 모닥불을 쬐고 있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자들이 있는 것뿐이다.

사내들은 독한 빠블로를 병째 건네 가며 돌려 마시고 있었다.

“어이, 뭐하는 놈들인데 이 동네를 어슬렁거리지?”

사내 중 하나가 헤리엇을 꼬나보며 불량한 말투를 내뱉었다.

“아나, 이것들 또 뭡니까? 이 동네 시장 통에는 인간쓰레기까지 굴러다니는 겁니까?”

헤리엇은 사내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하이오지에게 항의를 했다. 대놓고 무시하는 말투에 사내들이 쭈그린 몸을 폈다.

“이런 쌍놈의 자식들이, 어르신들을 무시해? 날도 추운데 몸 풀게 만드네!”

사내가 나서려 하자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뜯어말리는 시늉을 했다.

“어허 허씨, 성질 좀 죽이라니까. 위자료나 받고 말자고.”

허씨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건달이 콧김을 뿜으며 참는 시늉을 해 보였다.

“좋아. 나도 사고 치고 싶지 않으니까 참는다. 운 좋은 줄 알아. 어르신들 마음에 상처를 입혔으니, 얼른 위자료나 꺼내 놓고 꺼져라!”

그 말에 헤리엇이 다시 하이오지를 돌아보았다.

“뭐라는 거야? 연극하나?”

“참으라고, 이 동네는 원래 좀 이래. 정겹지 않아?”

하이오지는 신경질을 부리려는 헤리엇을 말린 후 사내들을 향해 말했다.

“이봐, 허씨. 어디 소속이지?”

“소속은 무슨, 얼어 죽을?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이 어르신들 소속은 알아서 뭐할라고? 시궁창에 숨구멍을 처박고 싶지 않으면 잔말 말고 지갑이나 털고 가시지.”

“이거 원, 선배 대우받긴 틀렸나? 일단 버릇을 뜯어고쳐 놓고 물어야겠다. 뭐해?”

하이오지의 시선이 헤리엇을 향했다.

그러자 헤리엇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날 봐요?”

“네가 해야지.”

“내가 왜요?”

“네가 젊잖아?”

“젊은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우리 동네잖아?”

“얼굴도 모르는 자들이라면서요?”

“네가 시비 붙었잖아?”

“누가 시비를 붙었다고 그래요? 저놈들이 그런 거지.”

“아오, 내가 나이가 많잖아?”

“늙은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반복되잖아!”

“그러게 왜 비슷한 질문을 하고 그래요?”

“그냥 네가 해라. 응?”

“쳇, 알겠습니다. 그냥 서서 맞을래? 아니면 덤비다가 맞을래? 한 놈씩 맞을래? 한꺼번에 맞을래?”

“뭔 질문을 그렇게 복잡하게 해?”

하이오지가 뚱한 표정으로 헤리엇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 얼빠진 자식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둘의 만담을 지켜보던 허씨와 사내들이 콧김을 뿜으며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아닌 밤중에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매타작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투덕투덕 몇 번 만에 허씨와 그 일당들은 시궁창에 코를 박고 늘어져 버렸다.

하이오지가 발로 허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러게 술이나 처먹지 왜 시비를 걸고 그래? 그런 눈으로 어떻게 영업을 하겠어, 어어?”

허씨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냥 가자. 얼어 죽지야 않겠지.”

둘이 사라진 지 한참 만에 깨어난 사내들은 절뚝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