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96화 (96/142)

96. 비열한 자들의 도시

서이스테르 강 하류를 제외한다면 이스테르 강은 대체로 연합이 장악한 상태다. 서이스테르 강 상류에 속하는 이곳 루물루도 연합의 영역권이다. 물론 항시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는 없었지만 켈커티스군이 북쪽으로 도하할 것을 예상했었다면, 도하가 이토록 순조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례히 엘리티아 평야에 주둔하여 방어를 담당하거나 회군할 것으로 예측했다가 켈커티스 정예 군단이 갑자기 이스테르 강 북부로 넘어가 버리자 연합은 골머리를 싸맸다.

이번 켈커티스 2군단의 전격 작전은 연합군을 충격에 몰아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힘들게 빼앗은 두 개의 곡창 중 하나를 억 소리 한 번 못해 보고 잃었다. 엘리티아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쏟아 부은 일 년이라는 세월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또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특히 이스테르 강 북부에 위치한 연합의 폴리스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가능한 시나리오로는 연합의 주요 폴리스 중 하나인 카테네오 시의 공략을 예상해 볼 수 있었지만, 조금 우회한다면 존스캐빈의 목동들도 위험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북이스테르 강을 넘어 다시 남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혹은 연합이 썼던 방법대로 후방을 위협해 군대를 함부로 진격시키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용도일 수도 있었다. 가능한 작전이 너무 많아 지금으로선 그들이 어디로 튈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치프만과 트라쿠스가 머리를 맞댔다.

아도니아의 예상과 달리 커트리안군은 방향 전환 없이 일직선으로 북상했다. 이대로 가도를 타고 북진한다면 하이오지의 고향인 크리푸 시를 거치는 루트가 확정적이다.

하이오지의 얼굴에 슬슬 광채가 돌기 시작했다. 현재 하이오지의 공식 직함은 군단장 직속 호위 기사의 신분이다.

엘리타아 1군단은 생환자들이 사단장을 맡았다. 1사단장으로는 쥬시아누스, 2사단장으로 브리오티스, 3사단장으로 예니에프, 4사단장으로 백발의 폴이 임명되었다. 엘리티아 군단의 작전참모는 크리들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호위 기대장은 스마르였다.

하지만 하이오지는 불만이 없었다. 누가 무슨 직위를 맡든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격의 없었고, 여전히 서로에 대해 집착했다. 그들 모두 같은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함께 걸어야 할 형제들이다.

그리고 사실 삼류 건달 출신이 켈커티스의 최정예 2군단, 군단장의 호위 기사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한 출세였다.

하지만 약간의 연출은 필요했다. 하이오지는 크리푸 시가 가까워 올수록 갈리온을 몰아 커트리안에게 가까이 붙었다. 헤리엇을 밀어내고, 샤마노프를 밀어내고, 마지막으로 커트리안과 벤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커트리안은 자신의 오른쪽에 바짝 붙어선 하이오지를 보더니 피식 웃고는 손짓해서 나란히 달리도록 허락했다. 호위 기대장인 스마르가 왼편 반보 뒤에서 달리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마치 하이오지가 호위 기대장인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이오지는 어깨를 당당히 펴고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군단은 크리푸 시 성문 앞 이백 미터 지점에서 멈춰 섰다. 전령에 의해 이미 협조 공문을 전달한 상태지만 입성을 위해서는 크리푸 측의 승인을 득해야 했다.

두 개 군단, 만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다. 지난번 크리푸 시가 함락될 시 연합군의 병력이 불과 한 개 군단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대로 밀고 들어가도 크리푸 시로서는 막아 낼 수 없는 대병이다.

크리푸 성문 경비대장이 직접 나와 잔뜩 경직된 자세로 군단의 소속과 신분을 확인했다. 확인이 끝나자 경비대장은 오른팔을 가슴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고개를 숙였다. 동맹식 경례법이다. 커트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비대장은 성루를 향해 수신호를 전달했다.

“크리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커트리안 군단장님! 입성하십시오.”

경비대장의 수신호에 무겁게 경직돼 있던 성의 분위기가 탁하고 풀려 버렸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성벽이 일 미터쯤 낮아진 느낌이다.

2군단이 먼저 입성을 시작하고 커트리안과 호위대가 크리푸 시로 입성했다. 마지막으로 엘리티아 군단이 성 안으로 들어섰다.

크리푸의 시장이 성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커트리안을 맞이했다.

크리푸 시장 에미디오 사란은 크리푸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출신이다. 나이는 대략 오십쯤, 하관이 날렵하게 빠진 마른 사내다. 일견 경박한 느낌이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처세에 능숙한 장사꾼의 미소였다.

시장이 커트리안을 향해 격식에 맞춰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군단장님. 본 시에 머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고맙소. 귀 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리다. 병사들의 숙영지를 정해 주시면 고맙겠소.”

“숙영지는 이미 준비해 놓았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크리푸 시는 일명 ‘비열한 자들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어중이떠중이에 범죄자들로 득시글거린다. 도시가 아름다울 리가 없었다. 시청으로 향하는 대로변의 집들도 허름한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이었고, 아무렇게나 내다 버린 쓰레기와 하수들로 보도는 대로인지 진창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이쪽 대로변의 주택들은 상태가 나았다.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난민촌이 따로 없었다.

하이오지가 아무리 턱을 높이 치켜들어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널리고 널린 삼류 건달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설사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켈커티스의 당당한 호위 기사를 그 옛날 별 볼 일 없던 크리푸의 삼류 건달 하이오지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군단병들이 질서정연하게 행군하는 동안 대로변에 나와선 허름한 옷차림의 시민들이 쑥덕거리며 구경했다.

커트리안은 시청을 지나 외곽에 위치한 너른 공터로 안내되었다. 크리푸는 연합과의 접경지에 위치한 폴리스다. 한때 동맹과 연합의 치열한 격전지기도 했던 폴리스였기에 군대의 주둔을 염두에 두고 관리되는 공간이 있었다. 성곽 동문 바로 앞쪽 한 블록을 모두 비워 놓은 너른 마당이다.

북부의 보잘것없는 폴리스 크리푸가 한때 동서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던 것은 게이트 때문이었다. 북부에 서른 개밖에 남지 않은 게이트 중 하나가 이곳 크리푸에 있었던 것이다. 그 게이트가 바로 이곳 너른 공터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상수는 이쪽 수로를 이용하시고, 하수는 이쪽 수로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별도로 깨끗한 우물도 마련되어 있으니 함께 이용하시면 됩니다. 남쪽에는 따로 마구간 울타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군단장님과 사단장님들의 숙소는 시청에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니, 난 병사들과 함께 머물 것이오. 이만 돌아가셔도 좋소.”

“그래도 예가 그렇지 않으니…….”

“마음만 받겠소.”

커트리안의 단호한 말에 시장은 일부러 감동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정히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저녁에 따로 만찬을 준비하였으니 꼭 시간을 내주십시오.”

시장이 호위병들과 함께 돌아간 후 병사들은 서둘러 막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날이 어둡기 전에 작업을 마칠 요량이었다.

군단장 막사가 세워지고, 각 구획별로 각을 맞춰 사단별 막사가 세워졌다. 별도로 참호 작업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숙영지는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숙영지가 완성되자마자 커다란 수레 수십 대가 숙영지로 진입했다. 수레 중에는 소와 돼지, 닭을 실은 수레도 보였다. 시청에서 보내 온 보급품들이었다.

군단병들은 마른 고기만 씹다가 오랜만에 싱싱한 고기를 보더니 환장하며 달려들었다. 보급품은 각 기대장의 지시하에 공평하게 분배되었고, 숙영지 곳곳에 솥이 걸렸다.

시청에서 보급품을 실어 온 기사 하나가 커트리안에게 군례를 취하고 말했다.

“시장님께서 모셔 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알겠다. 스마르, 하이오지, 벤트는 나를 따르고 사단장들은 숙영지를 지키도록!”

호위 기사들만 대동하겠다는 말이었다.

은근히 만찬을 기대하던 2군단 사단장들과 킨샤르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명이 떨어진 이상 숙영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사단장님들도 모셔 오라는…….”

“작전 중이다. 일선 지휘관이 군단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오르시지요.”

가난한 폴리스답지 않게 시청은 대형 석조 건물이었다.

크리푸 시의 주요 인사들이 시청 만찬홀에 미리 자리를 잡고 커트리안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 상탁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악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나머지 좌우 공간에는 벽을 따라 빙 둘러 식탁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홀 중앙은 무도회를 위해 비워져 있었다.

커트리안 일행이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건네 왔다.

“어서 오십시오, 커트리안 군단장님. 다른 일행 분들은?”

“병사들을 지휘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과한 폐는 끼치고 싶지 않소.”

“역시 켈커티스군은 규율이 엄정하군요.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시장의 말에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심지어는 박수를 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름 한 개 폴리스를 대표하는 인사들일 텐데 타 도시의 군단장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크리푸 시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 세월 이리저리 치이고, 약탈당한 크리푸 시였다. 요 근래 전장의 중심지가 중부 이남으로 옮겨 간 덕에 별다른 피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언제 또다시 연합의 수중에 떨어지고, 또 언제 다시 동맹의 검 아래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일. 각 군의 실세들에게 미리미리 잘 보여 놔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간 버텨 온 습성이 몸에 뱄다. 노골적인 굽실거림도 마다하지 않을 판에 이 정도 정중한 관계는 오히려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었다.

“자자, 이리로 오시지요. 기사님들은…….”

시장은 조심스럽게 커트리안의 눈치를 봤다. 사단장들이라면 의례히 함께 자리를 했겠지만 호위 기사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군단장의 호위 기사들이라면 신분이 낮지는 않을 터, 한자리에 앉힐 수도 있는 일이지만 반대로 군기가 엄정하거나 우월의식이 강한 군단장의 경우는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커트리안이 의사를 표해 주길 기다리는 것이다.

“내 수족과 같은 사람들이오. 머리와 손이 따로 자리하는 걸 봤소?”

“아, 물론입니다. 역시 켈커티스의 군단입니다. 자자 자리는 충분하니 어서어서 이쪽으로.”

시장은 호들갑스럽게 감탄사를 토해 놓으며 일행을 상석으로 안내했다.

“우선 다과를 하시면서 인사를 나누시지요. 뵙기를 앙망하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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