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95화 (95/142)

95. 크로아지크를 향하여!

커트리안은 미지근한 시선으로 킨샤르를 바라보다가 직접 집무실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지?”

킨샤르가 커트리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작전참모가 군단장에게 충성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다릅니다. 사적인 충성을 맹세합니다. 수족이 되겠습니다. 목을 달라시면 목을 내놓겠습니다. 반역을 주문하셔도 따르겠습니다.”

킨샤르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커트리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의 판단에 맡길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커트리안은 미지근한 시선으로 킨샤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족했다.

“조금 긴 이야깁니다. 들어 주시길 간청합니다.”

“이리 와서 앉지.”

킨샤르가 무릎을 펴고 커트리안과 마주 앉았다.

킨샤르는 결의를 다지듯 자세를 바로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무척 긴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커트리안이 물었다.

“바라흐하와 치프만이 협조한 정황이 있다? 증거는 확보했나?”

“전령의 역할을 맡았던 그림자가 살해당했습니다.”

“증거가 없다는 말이군?”

“죄송합니다.”

“알겠다. 나가 보도록.”

“드릴 말씀이 남았습니다.”

“뭐지?”

킨샤르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비록 바라흐하가 임명했지만 1사단장 에지디오 장군과 3사단장 치아파 장군은 군인입니다.”

행간을 읽지 못할 커트리안이 아니었다.

“2사단장 코사노는 아니라는 말이군? 알겠다. 나가 보도록!”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킨샤르는 직감적으로 커트리안이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킨샤르는 주군을 대하는 예로 허리를 굽혔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군단의 분위기가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분위기는 아직 원정이 끝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수레와 갈리온이 준비되고, 식량과 무기, 기타 보급품이 정비되었다. 복귀보다는 추가 원정을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노르드스톰에 주둔한 지 사흘이 되던 날, 켈커티스로부터 전령이 도착했다. 전령이 전달한 전문을 읽어 본 커트리안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전문의 내용은 별도의 주둔군이 출발했으니 2군단은 여세를 몰아 존스캐빈까지 공략해 들어가라는 지시였다. 따지고 보면 터무니없는 명령서였다. 2군단 하나로 북부 깊숙이 처박혀 있는 존스캐빈을 공략하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존스캐빈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배후에 위치한 카테네오를 먼저 함락시켜야 했고, 폴리스 사르보와 린드그렌의 지원도 격퇴해야 했다. 2군단이 존스캐빈까지 들어가면 아도니아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바라흐하의 목적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대로 2군단을 소멸시키거나 넝마로 만들 심산인 것이다.

전령은 전문 외에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켈커티스의 상황을 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켈커티스는 지금 난리가 났다고 했다.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함성을 지르고 커트리안의 이름을 연호하는 통에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더글라스가의 문턱은 닳아 없어질 정도였고,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라는 거였다.

하긴, 얼마 만의 통쾌한 승전보란 말인가?

전령은 커트리안의 얼굴을 직접 본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워 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커트리안이 화려하게 개선하는 꼴을 두고 볼 바라흐하가 아니다. 명령서의 내용만 봐도 바라흐하의 꼼수를 유추할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커트리안이 원했던 바이기도 했다. 이대로 개선해 봐야 명성과 병력을 맞교환해야 한다. 명성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결국 병력만 빼앗기는 꼴이다. 명령서는 오히려 커트리안에게 명분과 시간을 주었다.

우무스가 바라흐하를 부추겼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계속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패배할 수밖에 없고, 이긴다 하더라도 결국엔 병력이 없어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고 하더라도 군단병을 다 잃고 돌아오는 사령관이 개선식을 치를 수는 없는 일, 안 봐도 뻔했다. 상식적으로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으리라. 하지만 바라흐하는 그 제안이 커트리안을 위한 제안일 거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덕분에 굳이 항명할 필요가 없어졌다. 설사 바라흐하가 회군을 명했다 해도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크로아지크 황야, 원정의 최종 목적지는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

사흘간의 휴식을 마치고 다음 작전을 위한 사열이 시작됐다. 센드버그 징집병 두 개 사단과 노르드스톰의 지원병 두 개 사단을 통합해 4개 사단으로 엘리티아 1군단이 창설되었다. 한 개 군단으로 출정해 두 개 군단을 만들었다. 인원수만 불린 포로병이 아니다. 그들 모두 원래가 동맹의 병사들이다. 그것도 복수심으로 불타는!

출정 연설을 위해 커트리안이 단상에 올랐다.

“제군들! 지난번 약속한 바와 같이 본 군단장은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질문한다. 지금의 성과에 만족하고 회군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믿고 더 큰 승리를 위해 전장으로 나설 것인가?”

군단병들은 이미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고 각오를 다졌다. 수십 년간 이어진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아비와 숙부와 형제를 잃지 않은 병사가 없었다. 쌓인 원한이 많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동맹의 당당한 시민들이었고 북국의 전사였다. 쌓인 원한을 풀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소문이 퍼져 켈커티스에서 원정 명령서가 전달된 것도 알고 있었다. 이왕 갈 거면 당당하게 가기를 바랐다. 더구나 커트리안과 함께라면 절대 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사실 2군단은 켈커티스의 창이다. 원정 전문 군단이다. 커트리안이 아니더라도 다시 전장으로 나서야 한다. 다른 군단장과 나서느니 커트리안과 함께하는 것이 백번 나았다.

“군단장을 따르겠습니다!”

“아도니아까지 진군합시다!”

“회군은 당치도 않습니다!”

군단병들은 커트리안을 지지했다. 작전참모와 사단장들도 커트리안을 지지했다. 특히 3사단장 치아파는 군단병들과 함께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본 군단장도 아도니아로 가고 싶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우리는 북부로 진군할 것이다. 참기 힘든 고난이 제군들을 기다릴 것이다. 추울 것이다. 굶주릴 것이다. 피를 흘릴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다. 그대들 이름 앞에 절대 패배란 단어는 붙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 아도니아가 있을 것이다.”

군단병들의 환호가 터졌다. 센드버그 병사들은 물론 물정 모르는 노르드스톰 쪽 병사들도 분위기에 휩쓸렸다.

“기다리고, 웅크리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은! 제군들과! 나와! 동맹의! 영광스런 미래로 보답할 것이다!”

군단병들의 우렁찬 함성 소리가 노르드스톰 시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 ☆ ☆

커트리안이 이끄는 두 개 군단은 북쪽을 향해 진군했다.

대륙의 북동부, 나탈리나 산맥에서 발원한 북이스테르 강은 로지아 삼각주에서 서이스테르 강과 남이스테르 강으로 분화된다.

노르드스톰에서 넬리아 산맥을 우회해 북진하면 북이스테르에서 막 분화된 서이스테르 강의 초입에 이른다. 커트리안이 향하는 곳은 바로 이곳 서이스테르 강의 작은 항구 마을 루물라다. 어촌이라고 부르기에는 크고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작은 마을이다.

한때 동맹의 병사들이 지키던 마을이었지만 엘리티아 평야가 연합의 수중에 떨어질 때 이곳 병사들도 연합의 병사들로 대체됐다. 그래 봐야 자경단 수준이다.

2개 군단이 들이치자 마을 경비대는 무기를 내던지고 항복해 왔다.

루물라 항은 군항으로 사용하기엔 턱없이 작은 규모다. 그래도 제법 발달한 어항이기에 상당한 숫자의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멀리 로지아 삼각주 인근까지 진출해 낚시를 하는 만큼 고깃배들의 규모도 작지 않다.

마침 로지아 삼각주에서 어로 활동을 하다가 금일 귀항한 일군의 선단이 하역 작업 도중 몰려든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다.

“어이, 배 좀 빌리자고.”

병사들 틈에서 아메조프가 건들거리며 나타났다.

그 배들 중 하나가 몰려든 병사들을 보더니 몰래 출항하려다가 아메조프에게 딱 걸렸다.

“배 멈추라고! 어어, 멈추라니까?”

멈추란다고 멈출 리가 있겠는가? 배는 그대로 항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필 상대가 아메조프였다는 것이 불행이었다. 아메조프는 한 번 도약으로 가장 바깥에 매어져 있던 배를 밟고 항구에서 멀어져 가던 배까지 재도약했다. 거의 이십 미터의 거리를 단번에 건너뛴 아메조프가 뱃전에 내려섰다.

그러자 거친 뱃사람들이 각종 어구를 손에 쥐고 아메조프를 둘러쌌다.

“혼자서 뭘 어쩌려고 그러시오? 그냥 물속으로 뛰어내린다면 봐드리겠소. 어쩌시겠소?”

아메조프는 피식 웃더니 두 개의 글라디우스 모두에 오오라를 실었다.

검푸른 오오라가 위협적으로 글라디우스를 감쌌다.

“빌어먹을, 소드마스터잖아? 튀어!”

숫자로 위협을 하던 어부들 몇이 배를 포기하고 물속으로 후다닥 뛰어들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아메조프는 당황했다. 헤엄을 칠 수 없는데 소드마스터라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설사 헤엄을 칠 수 있다고 해도 이곳에서 나고 자란 어부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런 아메조프를 보며 유유히 헤엄쳐 달아나던 여섯 명의 어부 중 하나가 갑자기 물속으로 쑥 가라앉았다. 물 위에서 잠까지 잘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어부였다. 함께 달아나던 어부들이 당황하여 멈춰 섰을 때, 두 번째 어부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둘이나 사라지고 나자 달아나던 어부는 물론 뱃전에 남아 있던 어부들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연이어 두 명의 어부가 동시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 두 명마저 물속으로 쑥 끌려들어 갔다.

탁한 서이스테르 강물 속에서는 때 아닌 난리가 났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어부들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놓아 버렸고, 수면으로 부상하려고 하면 다시 밑에서 잡아끌었다. 여섯 명의 사내 중 누구 하나 수면에 도달하지 못하고 물속에서 오르락내리락만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아무리 헤엄을 잘 치는 어부들이라 해도 물고기는 아니다. 결국 여섯 명 모두 탁한 강물을 한 바가지나 들이켜고서야 수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기진맥진한 어부들은 헤엄은커녕 물 위에 떠 있기도 힘들어했다. 그런 어부들 옆으로 낯선 사내 하나가 떠올랐다. 케이론 목민관의 아들 벤트였다.

“어때? 갈증이 좀 가셨나?”

그 모습을 본 아메조프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물고기였어!”

벤트는 용케도 그 말을 알아듣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메조프를 쏘아보았다.

“물 좀 마시고 싶나?”

아메조프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도 어이없는 일이다 보니 물고기라는 별명을 극도로 싫어하는 벤트 앞에서 그 소리를 해 버린 것이다.

“메뚜기가 한 말이니 한 번만 봐주지. 조심하라고!”

냉랭한 벤트의 말에 아메조프는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벤트는 녹초가 된 어부들을 뱃전으로 집어던졌다. 디딜 곳도 없는 물속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던져진 어부들은 무려 삼 미터에 이르는 뱃전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컥컥거리며 물을 토해 낸 어부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길, 쓰고 돌려주는 거요?”

뱃사람들이라 그런지 뱃전에 널브러진 상황에서도 거친 말투를 고치지 않았다.

“아, 그렇다니까. 왜 번거롭게 굴어?”

“알겠습니다. 갑시다, 가요.”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항구에 정박된 배들은 순조롭게 징발되었다.

무려 2개 군단이다. 어선들의 숫자가 좀 된다고 해도 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실어 날라야 했다. 커트리안군은 서이스테르 강 도하에만 사흘을 잡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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