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실지수복(失地收復)
방패가 단단히 고정되자 아메조프가 먼저 나섰다.
“슬슬 가 볼까요?”
전투에 나서면서도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계의 문에서의 전투를 경험한 탓일까? 인간의 전장 정도는 약간 위험한 놀이 정도로 생각한다.
“엇차, 헛, 헛! 다 보이잖아! 이래서야 지나가던 거북이도 못 맞히겠다.”
아메조프는 놀이를 즐기듯 날아오는 화살과 필라를 겅중겅중 피하며 장난을 쳤다. 쥬시아누스가 엄한 표정을 짓고 나서야 몸을 솟구쳤다. 그의 몸은 단숨에 십오 미터 높이의 성벽 위로 날아 떨어졌다. 놀라운 기사(奇事)에 병사들의 움직임이 순간 멎었다.
아메조프는 성벽 위 회랑에 내려서자마자 굳어진 병사들을 향해 양손에 나눠 쥔 두 개의 흰색 글라디우스를 휘돌리기 시작했다. 아메조프는 어려서부터 두 개의 글라디우스를 사용하고 싶었다. 왜? 멋있으니까!
하지만 마계의 문에서는 그럴 만한 실력이 되지 못했다. 겉멋을 부리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능했다. 이 얼마나 멋진 자세인가?
“칼칼칼, 느리다, 느려!”
오른쪽 글라디우스로 뒤늦게 달려드는 고참병의 목을 떨구고, 왼쪽 글라디우스로 화살을 메기던 궁수의 마빡을 쪼갰다. 몸을 회전하며 창대를 쳐 내고 그대로 도약해 궁병의 이마를 활과 함께 부숴 놓았다. 아메조프는 온갖 폼을 다 잡으며 회랑을 달렸다. 필라를 던지려던 병사를 스치고, 장전된 활 앞을 지나며 웃어 주었다. 두 병사의 목에서 피가 뿜어졌다. 두 개의 글라디우스가 바람개비처럼 휘돌았다.
아메조프의 손은 샤마노프나 예니에프처럼 빠르지 않다. 힘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그러나 그의 발은 그들보다 배는 빠르다. 손이 느리면 발로 대신하면 된다. 힘이 없으면 속도로 대신하면 된다.
아메조프의 신형이 쭉 늘어나며 십오 미터의 거리를 한 번에 건너뛰었다. 막 장전되던 캐터펄트 장축에 감긴 밧줄이 절단되었다. 힘이 잔뜩 응축되었던 밧줄이 튕기며 돌덩이를 장전하던 병사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아메조프는 지렛대를 당기던 병사의 엉덩이를 차서 성벽 아래로 밀어 버리자마자 몸을 돌렸다. 순간 아메조프의 신형이 쏘아졌다. 아메조프에게 있어서 거리는 의미가 없었다.
그의 몸이 스치는 순간 피가 튀고, 사지가 분리됐다. 아메조프는 마음껏 성벽 위 회랑을 헤집었다. 그가 난입한 것만으로도 회랑은 혼란에 휩싸였다. 궁병이 활을 놓고 글라디우스를 뽑아 들었고, 투창을 찌르기용으로 바꿔 쥐었다.
그 시간, 쥬시아누스는 방패 뒤에 쭈그려 앉으며 두 손을 깍지 꼈다.
“에구구, 이거 미안해서 어째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출발해.”
제일 먼저 하이오지가 쥬시아누스의 손 위에 발을 올렸다.
하이오지가 올라서자마자 쥬시아누스가 허리를 쭉 펴며 하이오지를 뒤쪽으로 집어 던졌다. 하이오지 역시 마지막 순간 무릎을 튕기며 뛰어올랐다. 하이오지의 점프력과 쥬시아누스의 힘이 합쳐지자 그의 몸은 가볍게 성벽을 넘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쥬시아누스 님.”
샤마노프가 올라타고, 다시 날았다. 예니에프와 헤리엇이 날고 브리오티스만 남았다.
다른 자들과 달리 제법 덩치를 가지고 있는 브리오티스다. 브리오티스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시간 없다, 가자.”
브리오티스의 발이 올라오자 쥬시아누스는 폭발적으로 힘을 주었다. 브리오티스의 몸이 성가퀴에 걸려 뒤집어지며 가까스로 회랑에 올라섰다.
“더 세게 던질 수 있으면서…….”
브리오티스는 툴툴거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브리오티스와 하이오지와 헤리엇이 회랑에 떨어졌고, 샤마노프와 예니에프는 성벽 밑까지 날아갔다. 성벽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교전이 펼쳐졌다. 성벽 위에 떨어진 자들은 회랑 위의 병사들을 거침없이 쓸어버리고 성벽 안쪽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았다. 성벽보다 높은 킵(방어탑)들에서 연신 화살이 날아왔지만 풍뎅이 스케일을 넣어 만든 레더아머를 뚫을 수는 없었다.
교대해 쉬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성벽 쪽으로 밀려들었다.
샤마노프는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필라를 간단히 쳐 내고 찔러 오는 글라디우스를 창날로 동강 냈다. 샤마노프가 신바람을 내며 단창을 내지르고 가죽 주머니로 감싼 촉수를 사슬처럼 휘돌렸다. 병사들은 관성을 무시하고 자유자재로 휘는 삼 미터 길이의 가죽 주머니에 얻어맞아 나동그라졌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죽 주머니로 싸지 않았다면 얻어맞는 게 아니라 꿰뚫렸을 터였다.
회랑에 떨어졌던 생환자들이 성벽 아래로 내려서자 예니에프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성문을 열어!”
샤마노프와 예니에프, 브리오티스가 병사들을 막아 내는 사이, 헤리엇과 하이오지가 성문으로 접근했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막아섰지만 시간을 조금 지체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메조프가 성벽 틈 사이에 고정해 둔 도르래를 향해 점프했다.
두꺼운 밧줄로 감긴 도르래를 지키던 병사가 앞으로 나섰다가 아메조프의 글라디우스에 허리가 양단되었다. 잠시 기다리는 사이 하이오지와 헤리엇도 반대편 도르래에 도착했다. 병사들의 다급한 비명과 함성을 뚫고 아메조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나, 둘, 셋!”
셋을 외친 아메조프는 망설임 없이 오오라가 어린 글라디우스로 팔뚝 굵기의 거대한 밧줄을 내리쳤다.
동시에 헤리엇의 브로드소드도 어긋남 없이 밧줄을 끊어 냈다.
쾅!
천천히 내려져야 할 도개교식 성문이 육중한 몸체를 떨어트렸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며 도개교가 부서질 듯 요동쳤다.
해자에 걸쳐진 성문을 확인한 생환자들이 성문 앞으로 모여들고, 쥬시아누스가 천천히 방패를 둘러메고 성문으로 진입했다. 성문 앞에 방패가 놓이자 킵에서 떨어지던 화살과 투창은 의미를 상실했다.
뒤늦게 도착한 상급의 기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생환자들의 벽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처음 방패가 세워졌을 때 진군을 시작했던 커트리안군이 별다른 견제도 없이 성문에 도달했다.
군단병들은 열려진 성문으로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성문이 군단병들에게 완전히 장악되자 쥬시아누스가 방패를 받쳐 놓았던 굵은 통나무를 뽑아 들었다.
방패 밖으로 나선 쥬시아누스는 겨누기 좋은 타깃이다. 쥬시아누스의 거체로 화살과 필라가 날아들었다.
퉁, 퉁
위력이 약한 화살은 가죽옷도 뚫지 못했고, 필라는 가죽옷만 뚫었다. 하지만 쥬시아누스의 강체는 웬만한 오오라가 아니고선 뚫을 수 없었다. 날아다니는 무기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쥬시아누스가 중앙대로로 밀려드는 존스캐빈 병사들을 향해 우악스럽게 달려 나갔다. 쥬시아누스는 마치 오오거처럼 삼 미터 길이의 두꺼운 통나무를 휘둘렀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우르르 쓸려 나갔다.
성문과 시청을 잇는 중앙대로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괴물 같은 생환자들이 난동을 부릴 때마다 피와 살이 터졌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몇 명도 감당하기 힘든 판국에 켈커티스 최정예 2군단병들이 밀려들었다.
노르드스톰의 수비군은 실력에서도 숫자에서도 켈커티스 2군단을 당할 수 없었다.
시청은 순식간에 장악됐고, 시내 곳곳에서 항전을 펼치던 저항군도 오래지 않아 제압되었다.
숨죽이던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정오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노르드스톰의 성은 난공불락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전선에서 연합군을 막아 내던 성이다. 성벽이 높고, 두껍다. 생환자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뚫릴 곳이 아니었다.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
커트리안의 명이 떨어지자 킨샤르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2군단 사상자는 삼백칠십오 명입니다. 그중 사망자가 구십 다섯이고 중상자는 백여 명입니다. 나머지는 경상자로 일주일이면 전투에 투입할 수 있습니다. 후위에 섰던 센드버그와 노르드스톰 징집병들의 피해는 미미합니다.”
“노획품 상황은 어떤가?”
“이 자식들 엄청 모아 놨군요? 금화가 천칠백오십 골드가량 됩니다. 비축된 식량도 엄청납니다. 장비는 추가로 두 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을 양입니다. 기타 군수품도 넉넉합니다.”
“음, 좋군. 이곳에서 사흘을 휴식할 것이다. 시민군을 조직하고, 연합에 협조한 자들을 추려 체포하라. 그리고 켈커티스로 보낼 전령을 대기시켜라. 전문은 곧 작성해 주겠다.”
“명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킨샤르는 기꺼이 커트리안의 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제2 바실레오스인 티모테우스의 참모이자 충실한 수족이었다. 사단장들은 모두 바라흐하의 추천에 의해 임명되었지만 킨샤르만큼은 티모테우스의 의지로 임명했다. 킨샤르는 티모테우스의 유일한 측근인 셈이다. 때문에 티모테우스와 함께 많은 것을 준비했다.
킨샤르는 공화제야말로 궁극적인 정치 이념이라고 생각했다. 바라흐하가 독재를 획책하고, 원로원의 기능이 상실되는 걸 지켜보며 혁명을 준비했다. 그의 상관이며 제2 바실레오스인 티모테우스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티모테우스를 부추기고 미래를 계획했다. 정보를 긁어모으고 여러 세력을 포섭했다. 그 와중에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바라흐하는 오누르스 만 상륙 작전 직전에 정보를 획득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미리 저지하지 않았을까? 알고 있었다면 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1군단만 먼저 동원했어도 상륙 자체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바라흐하는 시간을 끌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갤리선의 출항지인 라쿠스 시에서 벌어진 소요 사태였다. 그 사태가 없었다면 켈커티스는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라쿠스 시는 이스테르 강 최강의 해군 도시다. 연합이 이스테르 강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라쿠스 때문이다. 오누르스 만에 상륙한 거대한 갤리선들도 라쿠스 시에서 건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동맹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한 아도니아의 준비는 철저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갤리선의 건조 자체는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륙 지점과 일자는 특급 기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라흐하는 그런 기밀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림자들? 어림없는 소리다. 아도니아 최고 지휘부만 알고 있던 작전을 그림자 몇이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로크리안은 오누르스 만에 상륙하고 열하루를 버텼다. 정상적이었다면 사흘이면 2차 상륙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리고 열흘째에는 최소 3차 상륙이 이뤄졌을 터였다. 작전 당시 라쿠스 시에 집결한 연합군의 병력은 무려 일곱 개 군단이었다. 도시 하나를 끝장내기에 모자라지 않은 병력이다.
최초 로크리안 군단이 상륙하고 갤리선은 2차 상륙군을 실어 나르기 위해 라쿠스 시로 돌아갔다. 그리고 야간 정박 중인 갤리선에 정체불명의 특공대가 투입됐다. 특공대는 갤리선에 구멍을 내고, 타와 돛을 모두 망가트린 후 유유히 사라졌다.
그 덕에 2차 출항이 나흘이나 지연됐다. 오누르스 만 상륙 작전이 실패한 결정적 이유였다. 잘 막아 낸 것이 아니고,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 특공대는 켈커티스의 특수부대로 알려졌지만 켈커티스에서 동원된 병력은 없었다. 그런 병력이 있었다면 군무를 담당한 바실레오스가 모를 리 없다. 또 사후에라도 알려졌다면 영웅이 되었을 병력이다. 전공을 떠벌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부대 명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로크리안의 직할 군단은 적 앞마당에서 열하루나 홀로 고립되고 말았다. 자칫했으면 아도니아의 제1 목민관이 죽거나 사로잡힐 치명적 작전 실패였다. 실제로 로크리안은 그 작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었다. 아무리 북부 최강의 무인이라도 밤낮으로 열흘을 싸웠으니 버텨 낼 재간이 없다.
그 일로 인해 아도니아의 권력 향방이 바뀌었다. 승승장구하던 로크리안 대신 제2 목민관인 피온 치프만이 권력의 핵으로 등장했다. 킨샤르는 이 부분에 주목하고 은밀히 조사를 진행했다.
부관들에게 이러저러한 지시를 마치고 들어온 킨샤르가 굳은 표정으로 커트리안을 바라보았다.
“은밀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