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공성전
청명한 날씨와 목가적인 풍경은 없었지만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이상한 열망을 내비치는 검은 오크의 눈빛을 무시하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배도 부르고 할 일도 없다. 말상대만 하나 있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시간이다. 언제 이런 여유를 즐겨 보았겠는가?
어린 시절에조차 여유 있는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왔다. 이곳에 떨어진 이후의 일은 기억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이렇듯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다니? 그것도 이 마계의 문에서 말이다.
말을 즐기지는 않지만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다르다. 역시 말상대가 없는 것이 가장 아쉽다.
조노량은 힐끗 전라의 여인을 돌아보았다.
“정녕 말을 할 줄 모르시오?”
“…….”
“됐소. 할 줄 알았다면 진작 했겠지. 그나저나 알아듣기는 하는 거요?”
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미색에 표정이 담기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라는 생각이 절로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생각을 느끼자마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끔찍한 흄을 보며 어찌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다 보면 자꾸 그 본색을 잊는다.
“오늘은 산책이나 갔다 옵시다. 뭐, 어차피 따라오시겠지만…….”
조노량은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허적허적 산으로 향했다. 언제부터인가 둘만의 시간이 늘었다.
☆ ☆ ☆
전장을 정리한 커트리안은 따로 묶어 놓았다는 말들을 회수하고 진지 구축을 명했다. 급속 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에게 휴식을 줘야 할 필요도 있었고, 또한 이제 와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노르드스톰의 지휘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이쪽의 규모와 움직임을 모두 파악했을 것이다. 이쪽을 향해 출진했던 병력이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는 척후대의 보고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커트리안군의 전력은 2개 군단을 넘어섰다.
몇 번의 전투를 치렀음에도 2군단의 병력 손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반면 센드버그 쪽 2개 사단이 더해진 데 이어 노르드스톰 쪽 투항 병력이 1개 사단을 넘겼다. 복무를 거절한 오백 명의 포로들은 노르드스톰 공략이 완료되는 대로 풀어 줄 예정이었다. 그들은 향후 노르드스톰의 방위를 담당하게 될 것이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쯤 진지 구축 작업이 완료되었다. 지휘부 주요 인원들이 군단장 막사로 모여들었다.
1사단장 에지디오가 나서서 뱅갈스톤에서의 작전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작전도 기가 막혔고, 운때도 잘 맞았다. 더불어 상당한 숫자의 말을 노획했다. 안타깝게도 절반 이상이 도륙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생들 했다. 선발대도 매우 잘해 주었다. 수고했다, 하이오지.”
하이오지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오늘 2군단의 힘을 봤다. 최강 군단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군단장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킨샤르와 사단장들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칭찬보다 커트리안의 짧은 한마디가 더 기뻤다. 커트리안은 그동안 많은 것을 보여 줬다. 그리고 오늘 2군단의 힘을 보여 달라 했다. 그래서 보여 줬다. 2군단의 힘은 이 정도라고, 당당히 증명해 냈다. 그리고 군단장에게 인정받았다.
킨샤르와 사단장들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이 이토록 기분 좋은 일인지 미처 몰랐다.
전투에 대한 짧은 평가가 끝나자 논의는 노르드스톰의 공략으로 이어졌다.
“이제 공성전이군. 내가 아는 노르드스톰의 성벽 높이는 십오 미터다. 굳이 충차가 필요할까?”
커트리안의 시선이 메뚜기 아메조프를 향했다.
“이십 미터도 문제없습니다요.”
다시 쥬시아누스를 향했다.
“적당히 뛰어 준다면 가능하겠습니다.”
“좋다. 짧게 끝내도록 하자.”
일반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작전이 몇 마디 말로 정리됐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단장들을 위해 스마르가 간략히 작전을 설명해 줬다.
도무지 믿기지 않은 방식에 킨샤르와 사단장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커트리안의 말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킨샤르는 그 비상식적인 방법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세부적인 작전을 구상했다. 역할을 분담하고 부수적인 사항들을 조율했다.
회의가 끝나자 커트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일은 천천히 행군하며 휴식을 취한다. 모레 모든 전투를 끝낸다. 엘리티아 평야는 모레부로 동맹의 품으로 돌아온다. 멋지게 마무리하자!”
그 다음 날 이제 두 개 군단으로 늘어난 커트리안의 병력이 진군을 시작했다. 급할 것 없이 천천히 행군했다. 옆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여유 있는 행군이었다. 적의 요격은 생각지도 않았다.
광활한 밀밭을 지나 가도를 타고 당당히 움직였다.
뱅갈스톤에서 팔백 필의 말을 도륙하고 칠백 필의 말을 노획했다. 말들은 어제 하루 종일 밀밭을 뒹굴었다. 오늘도 밀밭을 벗어나지 않았다. 연이은 포식에 살이 올랐다.
행군 도중에 강폭이 십여 미터에 이르는 샛강을 만났다. 다리는 존스캐빈군에 의해 해체된 상태였지만 북부군은 부대 단위의 토목공들이다. 오래지 않아 강 위에 급조한 다리가 놓여졌다. 커트리안군이 이십 킬로미터를 행군한 후 노르드스톰의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석양이 기울고 있었다. 중간에 다리도 놓고, 휴식도 취하면서 왔다지만, 얼마나 천천히 행군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군단 단위의 토목공들이 개미 떼처럼 움직였다. 불과 두 시간 만에 노르드스톰 성문 앞에 두 개 군단이 숙영할 수 있는 커다란 진지가 완성되었다. 십자형으로 잘 구획된 구간마다 막사와 마구간, 보급창이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았다.
진지는 성벽에서 날리는 활이나 필라의 거리를 조금 넘어선 자리에 위치했다. 노닥거리며 식사를 나누는 켈커티스 병사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잔뜩 긴장한 존스캐빈군과 달리 커트리안의 군단병들은 훈련 나온 병사들처럼 마구 풀어져 있었다. 엘리티아 평야에 남은 유일한 연합군 군단장인 사비노 장군은 저런 방만한 군대가 어찌 엘리티아 평야 가장 안쪽, 노르드스톰까지 진출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제 회군하지 말고 그대로 뒤를 치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드는 참이었다. 멍청이 한다르와 달리 자신의 3군단은 오랜 시간 함께한 고참병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2군단과 달리 단 한 명의 징집병도 섞어 놓지 않았다. 숫자만 불린 2군단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비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어제 내린 판단은 올발랐다. 성의 이점을 포기하고 노지에서 다수의 병력과 싸울 이유가 없다. 한다르가 버텨 주었다면 모를까, 이미 전멸한 마당에 모험을 감행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회군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최소 한 달은 버텨야 한다. 때문에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했다.
연합이 엘리티아 평야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 연합의 영토와 가장 인접한 곳은 남이스테르 강이지만 강안(江岸)을 따라 형성된 넬리아 산맥에 가로막혀 이용할 수 없다. 연합의 병력이 엘리티아 평야에 들어서기 위해선 우디네스 삼각주에서 도하해 북상하거나 서이스테르 강을 넘어 남하해야 했다. 둘 모두 상당히 돌아야 하는 루트다. 처음 엘리티아 평야를 공략할 때도 이 점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반면 동맹 측의 접근은 아주 용이하다. 강도 없고 산도 없다. 장애물 하나 없는 평야를 건너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에 엘리티아 평야를 점령한 후 린드그랜이나 존스캐빈 등 최정예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허무하게 주요 거점 둘을 잃었다. 노르드스톰만큼은 반드시 사수해야 했다.
다음 날, 사비노 장군은 여전히 노닥거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적 병력을 보고 안도했다. 충차(성문 격파용으로 커다란 통나무에 손잡이와 바퀴를 달아 만든다)를 만드는 기미도 없었고, 시즈타워(바퀴 달린 타워로 성벽보다 높게 만든다)를 건조하지도 않았다. 한쪽에서 맨트릿(바퀴 달린 대형 방패)으로 보기에는 너무 작고, 개인 방패로 보기에는 너무 큰 이상한 방패를 만들고 있었는데, 공성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공격을 서두르지 않는 인상이었다. 사비노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진행이었다. 노르드스톰은 엘리티아 곡창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성 안에 비축된 식량과 보급품은 차고 넘친다. 성 안 곳곳에 구축된 우물도 수량이 풍부하다. 한 달이 아니라 일 년도 버틸 수 있었다.
사비노의 예상과 달리 커트리안 진영은 당일로 공격을 준비했다.
“준비됐나?”
커트리안의 질문에 아메조프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준비랄 것이 뭐 있겠습니까요. 그냥 들어가서 성문만 열면 되는 거 아닙니까?”
“후후, 그렇지. 너무 쉽게 가는군. 건투를 빈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단숨에 끝내고 오겠습니다.”
커트리안은 아메조프의 자신감을 확인한 후 쥬시아누스를 돌아보았다.
“쥬시아누스, 부탁하겠다.”
“맡겨 주십시오.”
쥬시아누스는 앞에 놓인 거대한 방패를 세웠다. 너비 오 미터, 높이 삼 미터의 방패로 지름이 삼십 센티미터가 넘는 통나무를 이어 만든 사각 방패였다. 방패 중간에는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두 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었고, 상단에는 통나무 받침을 연결할 홈이 파여 있었다. 투닥투닥 반시간도 안 걸려 만들었다.
“다들 건투를 빈다.”
“걱정 마십시오.”
커트리안의 말에 이번 성문 개방조로 편성된 생환자들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쥬시아누스가 방패를 세워 들자 예니에프, 하이오지, 헤리엇, 브리오티스, 샤마노프가 방패 뒤로 가 섰다.
쥬시아누스는 세워진 방패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일순간 장내가 침묵에 휩싸였다. 저런 방패를 세워 드는 것만 해도 대단한 힘인데, 지금 쥬시아누스가 하려는 행동은 그 방패를 들고 뛰려는 것이다.
“으차!”
쥬시아누스는 두 팔에 힘을 주고 방패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킨샤르와 사단장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장면에 입만 뻐끔거렸다.
“가자!”
쥬시아누스는 우렁차게 외친 후 달리기 시작했다. 성벽 침투조가 방패 우산 밑에서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출발한 방패가 가속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 쥬시아누스 님은 힘이 너무 좋다니까. 사랑받겠습니다.”
“팔 힘이 좋다고 거기 힘도 좋나?”
“서른도 안 된 분이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달리면서도 샤마노프와 예니에프는 연신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장면을 보며 성벽 위에서 난리가 났다. 저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일까?
저런 방패를 상대로 활이나 필라 등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성벽 위에 배치된 캐터펄트에 사람 머리만 한 돌덩이가 장전됐다. 사거리는 대략 백 미터, 아무리 대단한 방패라 해도 캐터펄트로 날리는 돌덩이에 몇 번 가격당한다면 성할 수 없었다. 아니 방패가 견딜 수 있다 해도 그 방패를 받치는 사람은 견딜 수 없다.
거침없이 달려 들어오는 방패를 향해 화살과 필라가 연신 쏘아졌고, 그에 더해 캐터펄트의 지렛대가 정신없이 감겼다.
화살과 필라는 비교적 정확히 방패를 타격했지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반면 캐터펄트는 정확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엉뚱한 곳만 때려댔다.
어어 하는 사이에 방패는 물로 채워진 해자 앞까지 도달했다.
쥬시아누스는 방패를 벽처럼 세우고 다른 이들이 들고 온 세 개의 통나무로 받쳐 세웠다.
그 순간 커트리안의 본대가 천천히 진군을 시작했다. 공성 병기 하나 없이 공성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