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92화 (92/142)

92. 켈커티스의 창

센드버그 시와 노르드스톰은 약 백여 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다. 하루 평균 삼십 킬로미터를 행군한다고 쳤을 때 대략 사흘 거리다. 두 폴리스를 잇는 가도는 노르드스톰 앞 이십 킬로미터쯤에서 웨불 대수원과 마주친다.

넬리아 산맥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서이스테르 강의 지류가 만나 직경 십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를 이룬다. 이를 웨불 대수원이라 불렀다. 그 주변 농토는 이 수원을 바탕으로 북부 최고의 밀 생산지가 되었다. 중부 지방은 겨울에 심어 늦은 봄에 거두지만 북부 중에서도 북쪽에 치우친 엘리티아 평야에서는 여름에 심어 가을에 수확한다.

가도는 웨불 대수원을 끼고 너른 밀밭을 가로지른다.

때는 청명한 가을하늘을 가로지른 태양이 천정을 찍고 기운 지 두어 시간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노르드스톰 점령군 사령관인 존스캐빈 제2군단장 한다르 장군은 출정한 지 구 일 만에 녹초가 되어 대수원 인근까지 되돌아왔다.

그의 앞에 가을걷이를 남겨 둔 황금빛 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질적인 무언가가 그의 눈에 띄었다.

한다르의 다급한 외침에 따라 군기가 나부끼고 나팔이 울렸다. 그리고 병사들이 부리나케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장장 구 일간 적 그림자도 구경 못하고 엘리티아 평야를 하릴없이 누벼야 했던 한이라도 풀어 주려는지 한 떼의 병력이 그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다.

휘날리는 독수리 군기만으로도 그 병력이 동맹 최정예 군단인 켈커티스 2군단임을 알 수 있었다.

가도를 따라 이 열로 늘어서 행군하던 병력이 수확도 못한 밀밭을 짓이기며 넓게 진형을 갖췄다. 상대 병력은 존스캐빈군이 다급히 진형을 갖출 동안에도 방진을 이룬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진형이 완성되자 한다르 장군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적 병력을 살필 여유를 되찾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연이어 들려오는 패전 소식에 한껏 긴장한 바람에 적 병력을 대하자마자 허둥대고 만 것이다. 적 병력은 의외로 조촐했다.

대략 한 개 사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쪽은 한 개 군단 반, 즉 다섯 개 사단에 가까운 병력이다. 켈커티스 2군단이 아무리 고참병들로만 이뤄진 정예 군단이라고 하더라도 한 개 사단으로 다섯 개 사단을 막아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다르의 시선이 너른 밀밭과 단단히 방진을 구축한 적 병력을 번갈아 오고갔다. 신중한 성격의 한다르는 매복을 의심했다. 밀은 최고로 자라 봐야 사람 가슴 높이에도 이르지 못한다. 병사들이 서면 뻔히 드러나지만 반대로 앉거나 엎드린다면 충분히 매복이 가능하다.

그때 좌우로 퍼져 나갔던 정찰병이 급히 돌아와 보고를 했다. 좌측으로 오 킬로미터 외곽에 다수의 기마대가 숨어 있다는 전갈이었다.

한다르는 급히 사단장들을 불러 사면방진을 지시했다. 어느 방향이든 머리가 될 수 있는 사각 방진이다.

전술적인 측면을 본다면 한쪽은 진형을 갖췄고, 다른 쪽은 진형을 갖추지 못했다면 볼 것 없이 들이쳐야 한다. 그런데 적은 진형을 갖추고도 일렬로 늘어선 병력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지 않았다.

기습은커녕 오히려 밀집 대형을 만들고 이쪽이 진형을 갖추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전략, 전술에 밝고 타고난 성정이 신중한 한다르는 확신했다. 이건 볼 것도 없이 매복과 포위 전략일 수밖에 없다고.

중앙을 가로막은 병력이 단단히 방진을 구축하고 버티면 매복한 병력이 옆과 뒤를 치고 들어온다. 공격당하는 입장에선 방패에 가로막히고 창에 등을 찔리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전술 중 하나였다. 다행히 적이 기마병이라면 방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기마병 외에도 또 다른 병력이 숨어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인내심 싸움이었다. 진형을 풀고 먼저 움직이는 쪽이 불리해진다. 더구나 이곳은 노르드스톰 시의 영역이었다. 굳이 정찰병이 아니더라도 농민들에 의해 이쪽의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참고 기다리면 노르드스톰에 주둔 중인 3군단과 함께 적을 쓸어버릴 수 있다.

반대로 동맹의 추가 병력이 도착할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염두에 두었다.

징집병들로 구성된 일렬과 이열의 방패병들은 벌써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후위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존스캐빈 병사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니다. 이 얼마나 든든한가?

부임해 맡은 지 오래지 않은 군단이지만 ‘용맹의 숲’이라 불리는 존스캐빈의 병사들답게 누구 하나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랜 행군에 녹초가 됐음에도 눈빛만은 형형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다르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여유를 찾자 자연히 여러 가지 정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우선 지금 길을 가로막은 병력은 센드버그를 쳤던 병력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에게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 자신들을 앞질러 올 수는 없다.

그렇다면 뱅갈스톤을 쳤던 병력이 평야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길을 막았거나 아니면 애초에 이쪽으로 진출한 새로운 병력일 터였다.

그리고 적들은 연합군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모든 병력을 켈커티스 2군단으로 위장했다. 정찰병들은 독수리 군기만 보고 적을 한 개 군단으로 착각한 것이다.

소속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 비열한 족속들이다.

양군 모두 꼼짝도 않은 채 두 시간을 흘려보냈다. 가을 날씨에 땀이 식고 속옷으로 한기가 스며들 때쯤, 존스캐빈 방진 뒤로 일단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트리안은 헛웃음을 날렸다. 지금쯤 한창 전투가 벌어졌을 거라 예상하고 서둘러 달려왔는데 전투는커녕 누가 더 잘 웅크리는지 시합을 하고 있지 않은가?

쥬시아누스야 애초에 시간을 끌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그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존스캐빈의 병력은 그래선 안 되었다.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고작 사단 규모에 막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니?

커트리안은 광활하게 펼쳐진 밀밭을 살펴본 후 상황을 대강 짐작했다. 적 군단장은 신중해도 너무 신중한 작전관인 것이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결과다.

“고슴도치가 따로 없군. 어떤가, 오랜만에 대비하고 있는 적들과 마주했군?”

킨샤르가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략 두 개 군단에 가깝군요. 만만치 않은 대군입니다.”

“우리도 네 개 사단이나 되지 않나?”

“센드버그 시민들로 급조한 병력이 절반입니다. 실질적인 전력은 2, 3사단 두 개로 봐야 합니다.”

“좋아, 그럼 2군단의 전투력을 볼까?”

“갈리온을 내보내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생환자들을 말함이었다. 지금까지 전투에서 생환자들의 위력을 절절히 체험했기에 하는 말이었다.

“너무 싱겁지 않겠나? 난 2군단의 실력을 보고 싶다.”

“좋습니다. 우선 센드버그군을 좌우 양익으로 삼고, 중앙을 2, 3사단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군. 지휘권을 넘길 테니 한번 밀어 보도록!”

새로 나타난 병력이 적 병력임을 확인한 한다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적은 매복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결국 자신의 인내심이 이긴 것이다.

참지 못한 적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멋도 모르고 들이쳤다면 그대로 뒤통수를 맞을 뻔했지 않은가?

이대로 방진을 단단히 하고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버티면 된다. 병력 수로는 아직 존스캐빈 측이 우세했다.

적이 방진을 넓게 펼치며 압박을 시작했다. 한다르는 군기와 뿔나팔을 울리며 방진을 더욱 강화했다.

킨샤르와 사단장들은 커트리안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압도적인 전투를 이끌어야 했다. 지금까지는 커트리안과 생환자들에 의한 수동적인 전투만 해 왔다. 이제 2군단의 힘을 보여 줄 차례였다. 더구나 지금 군단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킨샤르의 지시에 따라 뿔피리와 북소리가 울리고 지휘기가 휘날렸다.

센드버그 1사단은 우익, 2사단은 좌익에 배치되었다. 단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압박하는 포진이었다. 주공은 켈커티스의 2사단과 3사단 병력으로 중앙에서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심산이다. 방진 대 방진, 정면대결은 2군단뿐만 아니라 자부심 높은 켈커티스 군단이 가장 즐기는 전투 방식이었고, 특기였다.

2군단은 7열 횡대로 넓게 늘어서 오와 열을 맞췄다.

쿵, 쿵, 쿵

2군단은 군홧발을 울리며 한 발자국씩 전진을 시작했다. 엄정하고 절도 있는 행진이었다. 각자의 발이 한 동작으로 맞아 돌아가며 한 사람의 무게가 아닌 군단 전체의 무게가 하나로 합쳐졌다. 한 발자국 전진할 때마다 대지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 묵직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비록 존스캐빈의 병력이 연합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강군이라 하더라도 켈커티스의 정예 군단에 비할 바는 아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전진하는 켈커티스의 방진을 보며 존스캐빈 군단이 받는 압박감은 도를 넘었다. 젊은 신병들은 필라를 움켜쥔 손이 땀으로 흥건해졌고, 옆 사람의 작은 움직임에도 화들짝 놀라곤 했다. 고참병들이 다독이곤 있었지만 악명 높은 ‘켈커티스의 창’을 직접 맞대하고 보니 긴장이 풀어지지는 않았다.

가장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건 칼받이로 나선 노르드스톰 쪽 징집병들이었다. 한때는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던 켈커티스 2군단을 적으로 맞았다. 직접 상대하고 보니 오금이 저려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억지로 움켜쥔 방패가 갈수록 무거워졌다.

“투창!”

특정 거리에 이르자 사단장들의 외침소리가 전장을 갈랐다. 2군단은 멈춰 서지도 않고 투창을 날렸다. 2군단의 장기 중 하나였다. 필라가 하늘을 가득 덮고 날자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존스캐빈의 신병들이 명령도 없이 투창을 시작했다.

두 군단의 필라는 사거리 자체가 달랐다. 2군단이 던진 필라는 존스캐빈의 방진 깊숙이 떨어져 내렸지만 존스캐빈군의 투창은 2군단 전열까지도 날아오지 못했다.

“속보!”

2군단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그럼에도 오와 열이 일사분란하게 맞아 들어갔다. 하늘 위로 비스듬히 세워 든 호프론 방패가 자신과 뒷 열의 병사를 함께 보호했다. 뒷 열의 병사는 달리면서도 능숙하게 필라를 내던졌다. 세 번째 필라가 날기도 전에 유효 곡사거리 안까지 병력이 접근했다.

후열의 병사들은 구조적으로 직사를 할 수 없다. 반면 곡사는 일정 거리 이내로 들어오면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더 이상 필라를 고집할 수 없었던 존스캐빈의 병사들이 파이크와 글라디우스를 움켜쥐었다.

쾅!

선두와 선두의 방패가 격돌했다.

☆ ☆ ☆

마계의 문이 또 한 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군주 워리놈은 현실에 생성된 자신들의 영지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마왕들이 흔들린 차원의 틈에 몸을 구겨 넣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견고하게 나뉘어 있던 차원과 차원의 벽이 흔들리고 있었다. 금이 가고 틈이 벌어졌다.

그 작은 틈, 우주적 강대함을 가진 워리놈 자신이 통과하기엔 부족했으나 그의 권속들을 밀어 넣기에는 충분했다.

마계에서도 이름 난 마왕들이 워리놈의 지원을 받아 차원을 넘었다.

☆ ☆ ☆

가속이 붙은 2군단의 힘에 노르드스톰 징집병들이 턱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비스듬히 땅에 고정시킨 존스캐빈군의 파이크가 2군단 1열의 방패병들을 노렸다. 일부는 방패와 방패 틈을 비집고 2군단병들의 몸을 뚫었지만 대부분은 방패에 가로막혀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길이가 오 미터에 이르는 파이크는 동선이 크기 때문에 쉽게 겨냥을 바꾸지 못한다.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은 기마병도 아니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보병들이 멈춰진 것이나 다름없는 파이크를 막아 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방패와 방패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방진이다. 장병기는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전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글라디우스였다. 창을 쓰는 병사들도 장창은 접전 전에 이미 놓아 버렸고, 단장을 움켜쥐었다.

방진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진형이 단단히 유지되어야 한다. 즉 좌와 우의 열이 일치해 적 병기가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진형이 틀어지면 방패와 방패가 맞닿을 수 없다. 그건 틈이 생겼다는 말이다. 그 틈은 죽음의 틈이었다. 병사 하나가 쓰러지면 틈이 더욱 커진다. 순식간에 방진이 무너지는 것이다. 지금 존스캐빈의 방진이 그랬다.

“투항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

켈커티스 2군단 독전관들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자, 안 그래도 지리멸렬 중이던 노르드스톰의 징집병들이 하나둘 납작 엎드렸다. 존스캐빈의 병사들이 어정거리는 노르드스톰 병사들의 등을 찌르며 전투를 강요했지만 2군단의 강력한 차징에 의해 무너져 버린 대열을 수습하기에는 늦었다. 징집병들이 앞뒤에서 찔러 오는 창과 글라디우스를 피해 엎드리자 켈커티스 병사들이 그들의 등을 밟고 밀고 들어갔다. 압도적인 힘에 존스캐빈의 병사들도 어쩔 수 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균형이 무너졌다.

그 틈을 타 켈커티스 2군단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병력 손실을 입은 1, 2열이 맨 뒤로 빠지고 싱싱한 3, 4열이 앞으로 나섰다. 사상자로 인해 발생한 1, 2열의 빈자리는 7열의 예비병들로 신속히 채워졌다. 움직임이 워낙 신속하고 유기적이었기에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징집병들의 벽이 사라진 후 존스캐빈의 병력들이 1선에 드러났다. 정예병들답게 완강하게 저항해 보지만 싱싱한 병사들로 교체된 켈커티스군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방패 차징으로 벌려 놓은 틈으로 글라디우스가 파고들었다.

이런 근접 전투는 2군단이 가장 즐겨하는 전투 방식이다. 2군단은 거침없이 존스캐빈군을 밀어붙였다.

로크리안의 직할대를 제외하곤 북부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 군단이라는 켈커티스 2군단의 진공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공격의 중심은 불과 두 개 사단이었다. 세 배에 가까운 존스캐빈의 병력이 하릴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힘에서 밀렸고, 전투력에서 밀렸다. 훈련도에서 밀렸고, 경험에서 밀렸고, 투지에서 밀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기에서 밀렸다. 그리고 군단장에게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표출했다.

강군이라 소문난 존스캐빈의 병력도 최정예 2군단의 상대는 아니었다. 밀리고 밀려 결국 에지디오의 1사단이 쌓아 놓은 단단한 철벽까지 밀렸다. 좌우로는 센드버그의 2개 사단이 넓게 포진해 존스캐빈군의 탈출로를 봉쇄했다.

만약 스스로 방진을 허물고 탈출을 시도한다면 맞상대가 아닌 사냥감으로 전락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대표적인 탈출 방법은 ‘전진하는 창’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낀 한다르는 그나마 남아 있는 노르드스톰의 징집병들을 포기하고 존스캐빈의 정예병들로만 두 개의 전진하는 창을 꾸렸다. 한쪽은 좌, 다른 한쪽은 우측으로 방향을 잡고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센드버그 병력을 노렸다.

죽음을 각오한 일부 병력이 버티는 동안 두 개의 전진하는 창이 좌우로 빠르게 튀어 나갔다.

하지만 한다르는 그쪽에 버티고 있는 지옥의 사자들을 알지 못했다.

좌측에는 외팔이 브리오티스가 이끄는 센드버그 2사단, 그리고 우측에는 크리들이 지휘하는 센드버그 1사단이 겁 없이 달려드는 존스캐빈의 병력을 노려봤다. 브리오티스에게는 벤트와 샤마노프가, 크리들 쪽에는 예니에프와 아메조프가 있었다.

한 개 사단 천오백의 병력으로 한 방향 전체를 커버하기 위해선 횡대 열을 엷게 가져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몇 년간 주눅이 들대로 들어 있던 센드버그 시민병들로서는 전진하는 창을 막아 낼 수 없다. 병력의 질에서도 밀렸고, 진형 자체의 밀집도도 큰 차이를 보였다. 비록 탈출을 시도하는 병력이었지만 센드버그 시민병들을 얼어붙게 만들 진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는 대륙 오백 년사 최초의 기적을 만들어 낸 사내들이 있었다.

예니에프가 씩 웃으며 크리들을 바라보았다.

“크리들 사단장, 놀 때가 온 것 같지?”

“클클, 그렇군. 아메조프, 준비됐나?”

“물론, 어디? 저 가운데로 떨어져 내리면 되는 건가?”

“그렇다네. 마음껏 분풀이를 하게나!”

“가자!”

센드버그 병사들은 사단장과 그의 동료 둘이 전진하는 창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았다.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전진하는 창에 정통으로 걸리면 그야말로 찔리고 베이고, 갈려 그들의 발아래 짓이겨진다. 전진하는 창을 막으려면 돌격력을 충분히 상쇄시킬 만큼의 두꺼운 방진이 답이다. 단 세 명으로 전진하는 창을 막아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속이 붙은 전진하는 창이 순식간에 세 명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크아앙!

크리들이 마물 같은 포효를 토해 놓았다. 그 소리는 전장의 함성을 파묻고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젠장, 시끄러워서 여기 못 있겠군!”

아메조프가 하늘 높이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전진하는 창의 중심부로 떨어져 내렸다. 절대 인간이 뛸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솟고 떨어지는 포물선만 아니라면 뛰었다기보다는 날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방식은 몰라도 높이와 거리상으로는 그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센드버그 병사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단장과 그의 동료들이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벌어진 입은 이후로도 다물어지지 못했다.

전진하는 창의 첨극으로 예니에프의 오오라가 검을 벗어나 연달아 날았다. 전진하는 창의 가장 강력한 선두가 예니에프의 오오라 두 방에 허리가 동강 났다. 검을 벗어나 발출되는 예니에프의 오오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하는 창의 선두는 날아드는 첫 번째 오오라를 튕겨 낼 정도로 녹록지 않은 실력이었다. 하지만 앞선 오오라에 가려져 날아오는 두 번째 오오라까지는 막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선두의 허리를 가르고 빠져나온 오오라가 이 열의 옆구리를 가르고 삼 열의 가슴에 박히고서야 그 힘을 다했다.

선두가 무너지자 크리들이 중앙을 파고들었다. 풍뎅이표 특제 방패를 왼쪽에 밀착하고 흰색의 글라디우스를 거침없이 휘돌렸다. 글라디우스에 어린 검푸른 오오라가 존스캐빈 전사의 글라디우스를 두 쪽으로 나누고도 모자라 목덜미까지 가르고 빠져나왔다. 힘겹게 크리들의 글라디우스를 막아 낸 기사의 눈에 그의 입가에 어린 음흉한 미소가 들어왔다. 그 순간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빠르게 기사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가 사라졌다. 기사는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도 알지 못하고 죽음을 맞아야 했다.

선두를 차지한 만큼 개개인이 모두 기대장이나 종사급 인물들이었지만 크리들의 글라디우스를 막아 내기엔 수련이 부족해도 많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의 촉수는 눈으로 볼 수도 없었다.

전진하는 창 허리쯤에 떨어진 아메조프도 마냥 신바람을 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한 중앙은 그의 글라디우스를 막아 낼 수 없었다. 방패면 방패, 검이면 검, 닥치는 대로 쪼개고 갈랐다. 살육을 경험해 본 자는 그 기억을 잊지 못한다. 아메조프는 무려 삼 년간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왔다. 온전한 정신상태일 리가 없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마음껏 살육의 향연을 즐겼다. 참아 왔던 체증이 한 번에 쑤욱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전진하는 창’은 오랜 시간 갈고 다듬어져 가장 효율적인 돌파 방식으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마물의 숲을 헤쳐 온 생환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들 또한 가장 즐겨 사용해 왔던 진형이기에 그 허실을 충분히 꿰뚫고 있을뿐더러, 압도적인 무력이 뒷받침되자 존스캐빈군이 펼치는 전진하는 창은 그저 기다랗게 늘어선 진형에 불과했다. 종이로 만든 창처럼 산산이 찢어져 버렸다.

흩어진 진형은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더구나 강제로 흩어진 경우라면 그 시점부터 패닉에 가까운 혼란이 초래된다.

사단장과 그 동료들의 믿어지지 않는 무력을 목격한 센드버그 병사들은 진영이 떠나갈 정도의 함성을 내질렀다. 저 놀라운 전사들이 자신들의 지휘관이고 동료였다. 저들이 함께하는 한 패배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안 그래도 높아졌던 사기가 끝 간 데 없이 치솟았다.

이제는 진형이랄 것도 없이 제각기 흩어져 밀집대형을 뚫기 위해, 아니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스캐빈군은 센드버그 병사들의 사냥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피해 달아나기 위해 싸우는 병사들은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없다. 존스캐빈은 센드버그에게 있어서 직접적인 원수였다. 심지어는 낯익은 얼굴들도 보인다.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당했던 굴욕을 떠올리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센드버그 병사들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원한을 더해 악착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냥감이 사냥꾼보다 강해다 해도 결국은 사냥당할 운명이다. 존스캐빈군은 강한 사냥감이지만 이미 공포에 물들어 버렸다. 사냥개에게 쫓기는 이리와 다름없었다.

그건 좌측의 2사단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중앙을 정리하고 밀어닥친 2군단 정예병들이 그들의 후위로 들이닥쳤다. 존스캐빈군은 또다시 앞뒤로 포위된 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대부분 무기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 엎드렸으며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자는 격살당했다.

지난 아흐레 동안 한다르의 지원군은 적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채 몇 날 며칠을 헤매야 했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적과 조우했다. 그 조우의 결과가 이것이었다.

탈출이 불가능해진 한다르가 항복을 선언했다. 총 다섯 개 사단 7500명 중 4000여 명이 학살당하고 33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부는 탈출에 성공했으나 따질 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포로들은 무장을 해제당하고 출신 지역별로 분류되었다. 살아남은 천여 명은 순수 존스캐빈 군이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노르드스톰의 징집병들이었다.

“존스캐빈의 명예로운 장군으로서 정당한 포로의 예우를 부탁드리겠소.”

결박되어 끌려 나온 한다르가 커트리안을 향해 말했다.

“항복한 주제에 무슨 명예?”

갈리온에 올라탄 커트리안이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한다르를 내려다보았다.

“난 존스캐빈 제2군단장이오. 그대도 명예를 아는 북국의 전사라면 전사의 예로 대해 주면 고맙겠소.”

“하나 묻지. 그대도 마계 검투를 지켜보았나?”

한다르는 흠칫했다. 한다르의 성은 존이다. 즉 존스캐빈의 중추가 되는 가문의 일원이었다. 마계 검투 당시 제2 목민관의 신분으로 대회의에 참가한 숙부 올라니오 존을 수행해 마계 검투를 관람한 바 있었다.

“그중에 하나였소.”

“내기를 걸었다면 기억할지도 모르겠군. 커트리안 더글라스다.”

“헛, 헛소문이라 생각했는데? 정녕 마계의 문에서 살아 돌아왔단 말이오? 설마 그 소문이 진실이었을 줄이야…….”

“우리는 전사의 명예나 도리를 따질 만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한다르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를 느꼈다.

“살려 주시오. 난 그저 수행 기사였을 뿐이오. 모두 애송이 트라쿠스의 음모요. 제발, 포로가 되겠소. 몸값을 지불할 용의도 있소.”

전사의 명예를 논하던 한다르는 전사답지 않게 떨었다. 한다르는 가문의 현 가주와 할아버지가 같았다. 덕분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금의 지위에 올랐다. 죽음이 닥쳐오자 나약한 본성이 표출됐다.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보답하겠소. 동맹의 포로들과 교환해 주시오. 몸값도 따로 지불하겠소. 천, 천 골드를 내겠소. 아니, 이천 골드! 제발, 원하는 대로 주겠소.”

“그대가 나에게 무슨 죄를 지었겠나? 하지만 수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그 수장되는 자로서 목숨을 탐하는 건 죄가 되겠지? 안 그런가, 헤리엇?”

커트리안이 생환자 중 막내인 헤리엇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가슴속에서 뭔가가 자꾸 튀어나오려고 합니다. 참으면 병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군. ‘그대’가 지은 죄는 없을지 모르나 ‘그대들’은 죄를 지었지.”

“아니, 아니야! 언제 봤다고 나를 원망하는 거지? 내가 당신들에게 어쨌다고?”

“시끄럽군. 입을 막도록.”

커트리안이 지시하자 하이오지가 죽은 자의 소매를 끊어 한다르의 입을 틀어막았다.

입이 막힌 한다르가 욱욱거리며 몸부림쳤다.

“우리에게 지은 죄, 죽은 병사들에게 지은 죄, 죽음으로 씻어라.”

커트리안이 선언하자 헤리엇이 앞으로 나섰다.

“난 병사 출신이지. 당신의 얼굴도 오늘 처음 봐. 하지만 그들 중 하나라는 건 확실하잖아? 잘 가시오!”

한다르의 눈이 공포로 물들어 갔다.

헤리엇의 브로드소드가 번득이는 순간, 한다르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한다르의 목이 떨어지는 걸 미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커트리안이 다시 말했다.

“노르드스톰 출신 중 기사와 종사들을 추려내 죽여라! 연합의 개로 지위를 얻었으니 죽어 마땅하다.

노르드스톰 병사들 중 다시 동맹의 이름 아래 싸울 자들을 추리고 아닌 자들은 포로로서 대우하라.

존스캐빈 출신 중 기사와 종사들은 모두 죽여라. 일반병들은 오른쪽 어깨를 자르고 풀어 주도록! 노르드스톰으로는 돌아가지 마라. 차후 오른쪽 어깨가 없는 자를 전장에서 본다면, 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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