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노르드스톰으로
커트리안 역시 뱅갈스톤의 일을 보고받았다. 전멸에 가까운 승전보를 알렸고, 수백 필의 말을 노획했다는 보고도 들었다. 최종 목적지를 생각한다면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쥬시아누스와 에지디오가 제법 잘해 주었다. 이제 남은 적은 노르드스톰 측 병력뿐이다. 그들의 동선은 아메조프를 통해 이미 파악해 두었다. 노리앙이 부재한 지금 아메조프의 발을 따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속도만으로 보면 차츠라도 아메조프를 앞서지 못했다.
‘슬슬 출정을 준비해 볼까?’
커트리안은 느긋이 몸을 일으켰다. 굳이 오늘 움직일 필요는 없다. 내일 일찍 병력을 출발시킨다면 웨불 대수림쯤에선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쥬시아누스에게 지시해 놓았던 날짜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일찍 도착한다고 해도 노련한 에지디오라면 그 정도 시간차는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커트리안은 즉석에서 전문을 작성하고 전령을 불러 켈커티스로 전달될 전문을 건넸다. 엘리티아 평원 주둔군을 요청하는 전문이다.
주둔군이 도착했을 때쯤에는 2군단은 노르드스톰 점령을 마치고 크로아지크로 진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켈커티스와의 연락은…… 끊어야겠지. 보급도 당분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센드버그 시에서 노획한 보급품의 양도 만만치 않았지만 황금도 대단한 양이었다. 아마 존스캐빈으로 보내려고 모아 놓았던 모양인데, 모조리 커트리안의 차지가 돼 버렸다.
급한 일을 처리한 커트리안은 시청 광장에 도열 중인 2군단 장병들과 징집병을 점고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징집병은 센드버그 시민들로 대략 두 개 사단 규모다. 징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거부하는 자들을 제외했기에 모병이나 다름없었다. 무장은 적 두 개 군단이 흘리고 간 장비만으로도 충분했다.
2군단은 물론 징집된 시민병들도 제법 오와 열을 맞춰 정렬해 있었다.
징집병들, 비록 징집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들 모두 한때는 동맹의 이름하에 복무했던 병사들이다. 다시 동맹의 깃발을 들고 전선으로 나서는 것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징집병들은 연합군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대부분 밝은 얼굴이었다.
엘리티아 평야가 비록 곡창이라고는 해도 생산물 대부분을 점령군에 수탈당하고 시민들은 형편없는 배급으로 연명해야 했다. 때문에 징집병들 역시 건강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2군단 병사들과 나란히 도열한 지금, 마르고 꺼칠한 얼굴에 투지가 담기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도 복수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커트리안이 시민궁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내자 지휘관이 구령을 붙였다.
“전 군, 군단장님을 향해 거 창!”
시민병의 지휘를 맡은 2군단의 선임 기대장이 ‘부’자를 빼 버리고 군단장이라는 호칭을 택했다. 이미 티모테우스는 암살된 상태였고, 커트리안의 지휘 아래 2군단은 믿어지지 않는 전과를 올렸다. 더불어 병사들의 피해는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뱅갈스톤의 승전 소식까지 전해지자 커트리안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출진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그 대부분의 시간은 행군이었다. 실제로 전투를 벌인 시간은 다 합쳐 봐야 몇 시간 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깨부순 적 군단이 몇 개인지 몰랐다. 이건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전 로크리안의 직할 군단에게 붙었던 ‘무적 군단’이라는 별칭이 우스울 정도다. 진정한 무적 군단의 칭호는 켈커티스 2군단이 받아야 마땅했다. 병사들과 기대장들은 커트리안이 정식으로 2군단장의 직위를 맡기를 은근히 바랐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거대한 함성 소리가 시청 광장을 가득 메웠다.
“제군들! 오늘로써 이십삼 일째다. 그동안 제군들은 동맹의 전사로서 부끄러움 없이 싸워 주었다. 제군들이 보여 준 용맹과 희생은 동맹의 전사(戰史)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대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깃발이, 아도니아 시민궁에 높이 걸릴 때까지 우리의! 전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정렬해 있던 병사들이 검과 창을 높이 치켜들며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러냈다. 이토록 피 끓는 기분을 맛본 적이 있던가? 수십 년간 이어진 지루한 공방전, 그리고 최근 3년간의 일방적인 패퇴, 그들의 기억 어디를 뒤져 봐도 지금같이 화려한 승리는 없었다. 오십이 넘는 고참병 몇은 삼십 년 전 강성했던 동맹을 기억한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렇게 일방적인 승리를 이어 간 적은 없었다.
“제군들! 우리는 내일 다시 출정할 것이다. 제군들이 이뤄야 할 사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금까지 작은 승리는 잊어라! 제군들은 나와 함께 저 노르드스톰까지 일거에 밀어 버리고, 엘리티아 평원을 수복할 것이다. 그 후 본 군단장은 제군들에게 제안할 것이다. 제군들이 앞으로 계속 나와 함께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승리에 안주할 것인지? 선택하게 될 것이다. 또한…….”
병사들의 외침 소리에 커트리안은 잠시 연설을 중단해야 했다.
“지금 선택하겠습니다!”
“군단장님과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언제까지고 군단장님을 따르겠습니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커트리안 역시 스스로 군단장이라 칭했고, 병사들이 자신을 군단장으로 인정하도록 부추겼다. 군정을 담당한 제2 바실레오스가 부재한 지금, 그의 임무를 넘겨받은 제1 바실레오스의 임명장도 없는 지금, 커트리안은 스스로 군단장임을 천명한 것이다.
연설을 듣던 킨샤르가 우려 섞인 눈빛을 보였으나 그야말로 정치적인 우려일 뿐 불쾌함의 표현은 아니었다. 그런 우려를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이 커트리안에게 기울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3사단장 치아파는 병사들과 함께 소리치며 열광하기까지 했다. 반면 코사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연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커트리안은 손을 들어 산발적인 외침을 자제시키고 연설을 이어 갔다.
“용맹스런 켈커티스의 전사들아! 당당한 동맹의 전사들아! 그대들의 용맹은 북국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될 것임을 약속한다. 그대들의 승리가 새로운 역사를 여는 시발점이 될 것임을 본 군단장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커트리안!”
“커트리안!”
광장을 가득 메운 연호가 끝없이 이어졌다.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심지어 열정이 끓어올라 눈물을 머금는 병사들도 속출했다.
킨샤르 역시 울컥하는 기분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카샤린을 지켜 냈고, 여세를 몰아 센드버그까지 해방시켰다. 거기에 오늘 뱅갈스톤 수복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저 함성 소릴 들어 보라! 가슴이 끓어오르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었다.
킨샤르는 커트리안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거둬 버렸다.
폭급한 생환자? 성정이 난폭하고, 감정의 기복이 죽 끓듯 한다? 어디로 튈지 짐작할 수 없다? 다 헛소리다. 저토록 냉정하고, 저토록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또 실행해 낼 수 있는 지휘관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작전의 범위도 전술적 범위를 넘어섰다. 엘리티아 평야 전체를 놓고 거대한 그림을 그렸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믿어지지 않는 작전이었다.
처음 출진하면서 뱅갈스톤으로 수하 몇을 파견해 공작을 펼쳤다. 두 번째 센드버그를 노리는 듯 진지를 구축하고서도 실제적으로 노리는 곳은 뱅갈스톤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뱅갈스톤에서는 물론 센드버그 진지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계략을 펼쳤다.
즉 진지가 꽉 찬 것처럼 가장했으나 실제로는 텅 빈 것을 눈치챌 수 있도록 이중의 함정을 팠다. 거기에 키포인트는 뱅갈스톤의 전령이었다. 전령으로부터 뱅갈스톤의 위험 소식을 전달받자 센드버그는 모든 의심을 거두고 서둘러 출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적은 매복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포석들이 없었다면 적은 매복에 걸려들지도 않았을 터였다. 상황은 물론 적의 심리상태까지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갔다. 압승을 거둘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센드버그의 함락 소식이 거꾸로 뱅갈스톤으로 전해졌다. 뱅갈스톤에서 펼쳐진 작전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센드버그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으리라. 그랬기에 천혜의 요새라는 뱅갈스톤이 저토록 쉽게 탈환되지 않았겠는가?
따지고 보면 하나의 작전인 것 같으면서도 완벽히 연계된 두 개의 작전이었다. 실로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불과 한 개 군단으로 두 개의 목표를 완벽하게 쟁취했다. 더 놀라운 점은 이런 작전을 펼치면서도 병력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아니, 센드버그 시민들을 끌어들여 오히려 병력이 증강되었다. 그동안 전투와, 뱅갈스톤의 탈환, 그리고 몇 마디 연설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야 마땅할 센드버그 병사들의 눈에 주눅 대신 투지를 채웠다.
이 모든 과정을 돌이켜보자 작전참모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향후 에지디오를 만난다면 뱅갈스톤에서의 작전까지 세세히 검토해 볼 생각이었다.
군단장과 함께라면 노르드스톰의 탈환도 어려운 과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무려 일 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잃어버렸던 땅을 이토록 쉽게 되찾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킨샤르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앞으로의 일정이 기대되기까지 했다.
커트리안의 연설이 끝나고 2개 사단에 이르는 징집병들에 대한 조직 구성이 이어졌다. 새로운 분대를 구성하고 기대를 구성했다. 2군단의 고참 종사들이 센드버그군의 기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사단장은 쥬시아누스, 2사단장에는 외팔이 브리오티스가 임명됐다. 현재 부재중인 쥬시아누스를 대신해 1사단의 지휘는 임시로 크리들이 맡았다.
그리고 할 일 없는 폴은 커트리안의 지시로 쓸데없는 짐 덩어리를 하나 맡아야 했다. 막사가 빈 것을 눈치채 줌으로써 커트리안의 작전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파온이라는 화염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복면을 벗은 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잡아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절대 복종을 맹세했다. 폴은 그 귀한 마법사로부터 복종을 맹세받고도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기실 3서클 마법사의 쓰임새는 별로 없었다. 향후 있을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끌고 가는 것뿐이었다.
다음 날 새벽, 커트리안군이 센드버그 시를 나섰다. 성문은 굳게 닫혔고, 동맹의 주둔군이 올 때까지 급조된 자경단원들이 센드버그 시의 방어와 치안을 담당하게 됐다.
노르드스톰 쪽 지원군마저 부리나케 후퇴하고 있는 현재, 센드버그 시를 위협할 병력은 더 이상 없었다.
☆ ☆ ☆
임독맥을 뚫는 과정에서 환골탈태까지 경험했다.
이후 조노량이 바라보는 세계가 달라졌다. 진득한 마기도, 얼어붙은 대기도, 살기를 뿜어내는 마인의 움직임도 하나의 의지가 개입된 흐름으로 여겨졌다. 이 모든 현상은 그 의지의 파편들일 뿐이었다.
이곳 대기에는 그런 흐름을 거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정상적인 흐름을 가로막았다. 느끼기는 하지만 알지는 못한다. 조노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의 도리를 깨닫는 경지는 신선이나 가능할 일,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묻어 두는 것이 섭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부정’은 처리해야 마땅하다.
조노량은 케이드의 의지에 반응해 움직이는 흐름을 끊기 위해 내공을 일으켰다.
조노량의 손이 슬쩍 뒤집히자 막 분화되던 케이드의 육체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분화에 실패한 케이드가 당황한 모습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