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양동작전 – 섬멸 편
뱅갈스톤에서 센드버그까지 이어진 가도는 작은 수림을 통과한다. 그다지 울창하지 않아서 낮에는 반대편까지 환히 들여다보인다. 그 숲길은 뱅갈스톤의 기마대가 늘상 지나다니는 익숙한 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상현달이 떴다. 상현달은 정오에 떠서 자정에 진다. 대낮부터 떴던 반달이 자정을 지나며 낮게 가라앉았다. 숲 그림자는 그 어느 때보다 짙게 내려앉았다. 익숙하기에 방심하기 쉬운 장소, 경험 많은 사단장 에지디오가 선정한 장소였다.
어둠에 잠긴 가도 한가운데 사내 하나가 횃불을 밝혀 들고 서 있었다. 횃불 빛에 어릿하게 일렁이는 사내의 얼굴은 두껍고 거친 각질로 흉측하게 얽어 있었다. 그런 얼굴과 대조적으로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마주쳐 오는 가을바람에 세차게 흩날렸다.
그 사내 앞으로 삼십여 기의 기마대가 이 열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본대와 삼십여 분 거리를 유지하고 달리는 뱅갈스톤의 척후대였다. 가도를 가로막은 사내, 폴의 왼손에 들려진 횃불 빛이 요기스럽게 일렁였다. 사내를 발견한 척후대가 말을 멈추고 주변을 경계했다.
“웬 놈이냐?”
일단 호통을 치고 상대를 살피던 기마대원들은 폴의 얼굴을 확인하고 질겁했다.
“숲의 악령이다!”
그 외침을 들은 사내가 움찔했다.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 클클, 그 죗값은 죽음이다.”
폴의 신형이 순식간에 기마대의 시야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사내의 말대로 악령의 움직임과 다를 바 없었다.
악령이라고 외쳤던 기마대원의 앞에서 시커먼 신형이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흰색 선이 사내의 입가를 스쳤다. 그 선이 사내의 위턱으로 들어가 뒷목까지 이어졌다.
두개골이 미끄러지는 동안에도 사내의 아래턱은 여전히 목 위에 얹혀 있었다. 흰색 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좌우 기마대원의 가슴과 목을 스쳐 갔고, 뒷 열에 있던 사내의 이마를 쪼갰다.
“친구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죄!”
그 선에서 푸르른 오오라가 귀기롭게 쏟아져 나오며 삼 열과 사 열을 연달아 휩쓸었다.
“그 역시 죽음이다!”
푸른 오오라가 기마대를 관통했다. 뒤늦게 본분을 생각해 낸 척후대원들 일부가 시간을 끌기 위해 폴에게 달려들었고, 일부는 좌우로 말머리를 돌렸다. 폴에게 달려들던 기마대원들이 부나방이 되는 동안 탈주를 시도했던 일부 기대원들은 하이오지와 헤리엇의 마중을 받았다.
그렇게 삼십여 기의 척후대는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전멸했다.
좌우 숲에서 뛰어나온 병사들이 척후대의 말과 시신을 숲속으로 끌어들였다. 가도에 뿌려진 피 얼룩만이 조금 전 참사를 증거했지만, 이 또한 다시 나타난 병사들의 발길질 몇 번에 흙 아래 묻혀 버렸다.
초크가 자랑하는 뱅갈스톤 기마대 일천오백은 듬성듬성 자란 나무들 사이로 질주해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빽빽해져 갔지만 그래 봐야 울창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평소 수도 없이 지나다닌 아주 익숙한 길이었고 빤한 숲이었다. 그랬기에 특별히 경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척후대로부터 신호가 없었다.
그런 본대 앞을 높다랗게 쌓인 나무 더미가 가로막았다. 흐린 횃불 빛 탓에 이를 뒤늦게 발견한 기마대는 가까스로 말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분명 척후대도 이 길을 지났을 텐데 특별한 신호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초크 앞에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커다란 회색 갈리온을 어슬렁어슬렁 기대 앞으로 몰아 왔다. 천오백 기마대 앞에 홀로 나선 사내 하나, 전혀 위협적일 수 없는 모습이지만 초크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거구의 사내가 엄청난 길이의 도리깨와 투핸드소드를 양손에 거머쥐고 천오백 기마대 안으로 돌진해 왔다.
거대한 갈리온 한 마리가 기마대 한가운데를 뚫고 난입했다. 사내의 도리깨가 수확하듯 기마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십여 마리의 말이 피떡이 되어 쓰러졌고, 기대장들이 타고 있던 갈리온들이 피 냄새를 맡고 날뛰기 시작했다. 좌우의 말과 사람들을 들이받고 앞뒤로 발광하며 등에 태운 기사를 떨어트리기 위해 요동을 쳤다. 기마대는 날뛰는 삼십여 마리의 갈리온에 의해 난리가 났다.
하지만 갈리온의 습성을 잘 아는 기대장들은 곧 자신의 갈리온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대장들은 오오라를 끌어올려 자신이 타고 있던 갈리온의 목덜미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날뛰던 갈리온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갈리온을 잃은 기대장들이 분노를 토해 내며 거구의 사내, 쥬시아누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쥬시아누스의 도리깨가 기대장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쥬시아누스의 도리깨는 엄청난 범위를 차단하고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오오라가 어린 글라디우스도 희게 번뜩이는 도리깨를 절단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도리깨의 힘에 글라디우스를 놓치는 기대장들도 있었다.
기마병들의 파이크가 쥬시아누스와 그의 갈리온을 노리고 찔러져 왔지만 쥬시아누스의 투핸드소드에 동강 나기 바빴다.
그 순간 좌우 숲에서 엄청난 숫자의 투창이 날아들었다. 발이 묶인 기마대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투창에 노출되었다.
숲은 사람과 말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일부 기병들이 가까스로 반전에 성공했지만 그 곳에는 어느새 방진을 이룬 일단의 보병들이 방패와 파이크를 앞세우고 전진을 시작했다.
가도 좌우 숲은 나무가 많지도, 크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밤중에 말을 타고 진입하기는 만만치 않다. 더구나 필라가 날아온 숲이니 적이 매복하고 있을 게 뻔했다. 숲 쪽으로의 도주가 차단된 마당에 기마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뒤돌아 돌진하는 일밖에 없었다.
기마대는 필사적으로 돌진을 했지만 좌우에서 들이닥친 세 마리의 갈리온에 또 한 번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 갈리온들의 뒤를 따라 우렁찬 함성 소리가 울리고 일단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후좌우 사방이 막힌 기마대는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다가 서로 충돌하여 낙마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과 갈리온 기사, 뒤를 막은 단단한 방진, 좌우를 울리는 우렁찬 함성 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초크는 뒤늦게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천오백 기의 기마대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연합 최대의 기마대, 이들은 자신의 자부심이며 자신의 무명을 연합 전체에 떨어 울릴 기반이었다. 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쏟아 부은 시간이 무려 일 년이다. 사비까지 털어 최고의 장비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 자신의 기마대가 자신의 앞마당에서 전멸당하고 있었다.
늘 지나다니는 숲이었고, 매복하기 적당한 숲도 아니었다. 교본에 따라 척후대까지 앞세웠다. 그런데 이런 현실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기마대를 잃고 살아 돌아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초크의 눈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눈에 아직까지 갈리온을 타고 날뛰는 거한이 보였다. 한때 폴리스 트렌티니 최강이라고 불렸던 사내, 뱅갈스탄 산성 기마대 사령관 초크 장군의 눈이 돌아갔다.
초크는 거한을 향해 두 발로 달렸다. 거치적거리는 적 병사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겼다.
거한이 초크를 향해 눈을 돌렸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불타오르는 초크의 눈과 달리 거한의 눈에는 투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초크의 몸이 거한을 향해 도약했다.
캉!
거한의 도리깨가 처음으로 막혔다. 트렌티니 최강이라는 이름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초크는 중심도 흩트리지 않은 채 그대로 가라앉으며 쥬시아누스의 다리를 향해 글라디우스를 쓸어 갔다.
그 순간 거한이 초크의 가슴을 향해 발을 질러왔다. 젊은 날을 모두 싸움터에서 보낸 초크였다. 거한의 발길질을 무시하고 계속 뻗었다. 발길질 한 번에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한의 다리 하나는 절단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쾅!
캉!
두 번의 타격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초크는 갈비뼈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흙바닥에 거칠게 팽개쳐졌다. 하지만 그 소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한껏 오오라를 끌어올린 자신의 글라디우스에서 터져 나온 소리, 그게 문제였다. 살과 뼈를 베는 소리가 아니라 강철에 부딪힌 듯한 소리! 초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거한의 다리를 베었다. 가슴을 타격당하는 그 순간까지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거한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분명 베었다.
초크는 격통을 무릅쓰고 몸을 뒤집어 거한을 바라보았다.
거한의 다리는, 멀쩡했다. 어떻게? 강철도 베어 내는 자신의 검을 어떻게?
초크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거대한 도리깨가 초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납작하게 으깨진 두개골을 뚫고 허연 뇌수가 비산했다. 거한은 쓸데없이 자비를 베푸는 성격이 아니었다.
심야에 벌어진 전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연이은 대승에 흥분한 에지디오 장군이 어두운 하늘을 향해 광소를 날렸다. 몇 년간 쌓인 울분이 한 번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이런 통쾌한 싸움을 해 본 것이 언제였던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말과 사람의 피로 진창을 이룬 숲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흥소를 토해 놓았다. 그리고 노장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 ☆ ☆
그 시간 노르드스톰 쪽 병력은 센드버그 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자신들이 엘리티아 평야에 남은 유일한 연합군임을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심야 전투에서 겨우 탈출에 성공한 기마병 삼십여 기가 노르드스톰 쪽 병력을 따라잡은 시점은 센드버그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병력을 이끌던 한다르 군단장은 뱅갈스톤의 비보를 접하고 할 말을 잃었다. 열심히 뛰어다닌 보람도 없이 구원하려던 두 곳이 모두 함락되어 버린 것이다. 센드버그도 잃었고, 뱅갈스톤도 잃었다. 더불어 병력을 끌고 나온 목적도 잃어버렸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한다르는 한탄을 토해 내며 병력을 되돌렸다. 지금 이끌고 있는 병력까지 잃으면 노르드스톰마저 위험했기 때문이다. 성문을 닫아걸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었다.
적어도 한 달, 그 이상을 버텨야 지원군이 도착할 수 있다. 연합의 군대가 엘리티아 평야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넬리아 산맥을 빙 둘러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노르드스톰이라는 교두보마저 잃게 되면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돼 버린다.
모진 행군 끝에 녹초가 되어 버린 군단병들을 이끌고 다시 후퇴를 시작했다. 근 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센드버그 시에 도착하기 전에 뱅갈스톤의 기마대 일부를 만났다는 점 하나였다. 만일 센드버그 시까지 진출했다면 그야말로 추격대를 달고 뭣 빠지게 뛰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초기 정찰의 실패가 이번 패전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 센드버그 시를 점령한 한 개 군단, 그리고 뱅갈스톤을 쓸어버린 또 한 개 군단, 최소한 두 개 군단 이상이 들어왔음에도 겨우 한 개 군단만이 엘리티아 평야로 들어섰다는 첩보만 믿고 섬멸을 노린 것이 패착이었다.
뱅갈스톤만이라도 지켜 냈다면 엘리티아 평야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엘리티아 평야가 연합의 점령지라고 말할 수 없게 돼 버렸다.
과거 엘리티아 평야를 점령하기 위해 무려 일 년 반이나 공방전을 펼쳤던 걸 생각하면 허무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