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89화 (89/142)

89. 양동작전 - 탈환 편

파온의 예측대로 진지에서 나온 켈커티스 병력은 불과 다섯 개 기대였다. 그들은 막사는 물론 보급품을 실은 수레도 챙기지 못하고 가도를 따라 허둥지둥 후퇴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코르디안은 자신의 예측에 확신을 가졌다.

코르디안은 다급해졌다. 지난 패전에 이어 이번에는 적의 기만에 빠져 꼬박 나흘간 발이 묶였다. 저놈들마저 놓친다면 징계 정도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전속으로 추격하라!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코르디안의 지시에 존스캐빈 병사들은 진형까지 허물면서 전력으로 적을 쫓기 시작했다. 삼백 미터에 이르던 두 군대의 거리가 순식간에 백여 미터까지 좁혀졌다. 가문비나무 숲을 지날 때쯤 센드버그 성문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함성 소리에 묻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추격을 따돌리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는지 켈커티스군이 허겁지겁 반전하여 방진을 구성했다. 겨우 다섯 개 기대로 만든 작은 방진이었다.

지난 패전으로 원한이 쌓인 존스캐빈군은 코웃음을 치며 달려들었다. 방진에서 연달아 필라가 날아 추격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존스캐빈 병사들은 돌격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주춤거리면 피해가 더 커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은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첫 번째 존스캐빈 병사가 파이크를 피해 용맹하게 일렬의 호프론 방패를 들이받았다. 달려오던 기세가 만만치 않았음에도 의외로 호프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병사가 다시 찔러 오는 파이크 창을 피하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할 때, 두 번째 병사의 글라디우스가 호프론을 거세게 두드렸다. 세 번째, 네 번째 병사가 달려들고 치열한 접전이 시작되었다.

존스캐빈의 병사들이 용감하게 방진에 뛰어들 수 있는 이유는 뒤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함성 소리 때문이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엄청난 함성 소리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후위에서 쫓아오고 있는 동료들의 함성으로 오해한 일선의 병사들은 더욱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후미 병사들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지나쳐 온 가문비나무 숲에서 튀어나온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존스캐빈군의 후미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중에는 코르디안을 질겁하게 했던 갈리온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갈리온들은 존스캐빈 병사들만 골라서 들이받고, 물어뜯고 있었다.

코르디안은 어느새 앞뒤로 둘러싸인 꼴이 되고 말았다. 상황을 눈치챘을 때는 존스캐빈의 병력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분노한 코르디안이 무모하게 갈리온 기사를 향해 말을 달렸다. 샤마노프는 이 터무니없이 용감한 군단장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어 버렸다. 그리고 샤마노프가 타고 있던 회색 갈리온은 코르디안이 타고 있던 말의 목덜미를 통째로 물고 끊어 버렸다.

방진을 두드리고 있던 존스캐빈 병사들이 뒤늦게 상황을 눈치챘을 때는 단단히 막아서던 방진이 전진을 시작한 후였다. 하이오지의 말대로 전황을 전체적으로 살필 수 없는 병졸들의 운명은 그러했다.

존스캐빈 병사들 중 살아서 도망친 병력은 수백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 전투 역시 두 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전장을 정리한 켈커티스군이 센드버그 성문 앞에 서자 성문이 활짝 열렸다. 성문을 연 자는 마치 레이디를 맞이하는 기사처럼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뒤로 뻗어 성 안을 가리켰다. 존스캐빈군이 성문을 나서자마자 뛰어 들어갔던 아메조프였다.

점령군에 압정에 짓눌려 있던 센드버그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꽃과 종려나무 잎을 뿌리며 켈커티스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점령군에 협조했던 어용 시장을 비롯한 일단의 무리가 시민들의 손에 결박되어 시청 광장에 끌려와 잔인하게 처형당했고, 지하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시민들이 풀려나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투옥되어 있던 센드버그 시 원로 얀하위스키가 즉석에서 임시 대표로 추대되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형제여!”

얀하위스키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커트리안을 얼싸안았다.

☆ ☆ ☆

센드버그 시의 함락 소식은 이틀 만에 노르드스톰군에 전해졌다. 전갈을 받고 뱅갈스톤을 지원하기 위해 가던 노르드스톰 병력은 또다시 진로를 센드버그 시로 바꿔야 했다.

노르드스톰 병력도 센드버그와 마찬가지로 존스캐빈의 병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엘리티아 평원 공략의 주력군이 존스캐빈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카샤린 공략전의 치명적인 소식을 전해들은 데 이어 동맹군이 엘리티아 평야로 진입했다는 급보에, 존스캐빈 2군단장 한다르는 3군단을 노르드스톰에 남기고 자신의 2군단에 노르드스톰 징집병들을 끼워 넣어 총 다섯 개 사단을 만들어 출진했다. 물론 징집병들의 무장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실제 전투가 발발하면 칼받이로나 써먹을 병력이었다.

그렇게 출진한 한다르의 병력은 곧 허허벌판만 헤매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며칠을 허비했는지 몰랐다. 처음엔 센드버그로 향했다가, 다음은 뱅갈스톤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센드버그로 바뀌었다. 전령만 부리나케 오갔지 적은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전령이 도착할 때마다 행군 방향을 바꿔야 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것도 어디 보통의 행군이었던가? 연이은 위급 소식 탓에 정신없이 몰아붙인 행군이었다. 센드버그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노르드스톰을 출발해 그쪽 방향으로 칠십 킬로미터를 강행군했고, 적의 진짜 목표는 뱅갈스톤이라는 소식을 받고 다시 그쪽 방향으로 이틀을 달려 육십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그리고 방금 센드버그의 함락 소식을 전달받았다. 이곳에서 센드버그까지는 다시 사선으로 칠십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했다.

적군은 코빼기도 못 보고 열나게 뛰어다니기만 한 꼴이니 울화통이 터지는 것도 당연했다. 마치 센드버그 시와 뱅갈스톤이 짜고 노르드스톰을 골려대는 기분이었다. 자연 발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한다르의 존스캐빈 2군단이 망연해하고 있을 때 뱅갈스톤에도 전령이 도착했다.

초크 사령관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뭣이? 센드버그가 함락당해? 도대체 무슨 소리야! 빌어먹을 켈커티스 자식들, 아주 작정을 하고 들어왔구나! 들어온 군단이 모두 몇 개 군단이더냐?”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한 개 군단입니다.”

“장난쳐? 이쪽으로 몰려온 병력만도 한 개 군단이야! 센드버그는 유령 군단에게 점령당했나? 그리고 정찰병들은 다 어디 가서 뒈져 버렸나? 적 병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뭐하는 거야?”

초크가 전령을 상대로 언성을 높이고 있을 때, 적정 수색을 담당한 부관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 그게…….”

“뭔데 더듬어?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아침부터 적 병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파악했던 주둔지도 깔끔하게 비워졌고,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매복이 의심스러워 십 킬로미터 밖까지 샅샅이 뒤졌는데 전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뭐라고? 그걸 왜 이제 보고해? 너 미친 거냐?”

“그게 일단 적 병력 이동 상황을 파악해서 보고드리려고…….”

“이런 개자식!”

초크는 부관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전사에게 발길질을 한다는 건 그야말로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그럼에도 부관은 변변히 항의 한 마디 못했다. 작금의 정세는 개인의 명예나 논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실제로는 이곳이 위장이고 그쪽이 진짜였단 말이잖아? 엉? 도대체 정찰을 어떻게 하는 거야? 적의 계략에 놀아나 전령까지 보내 적을 도와준 꼴이지 않느냔 말이다! 이 쓸모없는 것들! 당장 병력을 점고하고 출정 준비해!”

“곧 해가 질 텐데요…….”

“이 자식 뭐라는 거야? 너 오늘 아주 죽어 볼 테냐?”

“아닙니다. 당장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센드버그 시가 함락된 배경에는 분명 뱅갈스톤의 정찰 실패도 한몫을 했을 터였다. 성문을 틀어막고 방어에만 전념했다면 그리 쉽게 함락될 성이 아니었다. 이쪽 정보가 잘못된 것을 물고 늘어지면 할 말이 없었다. 잘못된 정보를 보낸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추후 책임 추궁이 들어올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것 때문에 초크는 조급한 심정이 되었다. 자신이 비록 사단 병력을 이끌고 있지만 어엿한 군단장급이다. 이번 실패의 만회 여부가 이후 실제 군단 병력을 거느릴 수 있게 되느냐 아니면 사단장급으로 밀려나느냐를 결정짓는 관건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적 병력은 불과 한 개 군단 규모, 센드버그 쪽에서의 교전이 무척 치열했다고 하니 적의 병력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지금 센드버그로 방향을 바꾼 노르드스톰 쪽 지원 병력이 한 개 군단 반이다. 뱅갈스톤의 병력이 합류하면 근 두 개 군단이 된다. 적이 성을 끼고 싸운다 해도 충분히 상대해 볼 만한 규모였다. 아니, 자신의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반드시 센드버그를 재수복해야 했다. 안 그러면 자신의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이 남게 될 것이다.

초크의 조급한 마음도 모르고 주변 마을에 흩어진 말들을 모은다고 부산을 떨고 병사들을 독려해 출진 준비를 마치는 데까지 무려 두 시간이 허비됐다. 결국 산성 문을 나선 건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뱅갈스톤 병력이 북부에서는 보기 드문 기마대라는 점이었다. 원래부터 기마대는 아니었으나 동맹이 뱅갈스톤을 차지하고 있을 때 운용했던 편제를 흉내 낸 것이다. 당시 동맹이 운용했던 기마대와 궁병의 조합은 엘리티아 평야와 같은 지역에서는 더없이 훌륭한 조합이다.

기마대로만 이루어진 사단급 병력, 그들이 펼치는 게릴라전은 그야말로 악몽이다. 엘리티아 평야 전 지역을 아우르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기마대는 보병 위주의 병력을 운용하는 연합군의 혼을 쏙 빼 놓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기마병이란 작은 충격에도 말에서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다. 갈리온은 피를 보면 적아를 구분 못하기 때문에 전투에 동원하지 못하는 반면, 기마병은 이런 면 때문에 숙련된 기사가 아니라면 전투에 직접 활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궁병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기마병으로 접근한 후 활로 적을 타격한다. 그리고 적이 돌진해 오면 유유히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미칠 수밖에 없다.

당해 봐야 무서움을 안다고, 연합도 곧바로 이 편제를 따라 했다.

그 덕에 뱅갈스톤의 병력은 연합군 최고의 기동력을 자랑했다. 오십여 기의 갈리온과 천오백 기의 군마들, 지금 출발한다고 해도 노르드스톰 쪽 군단과 합류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더불어 아침에 빠져나간 동맹군의 후미를 따라잡을 가능성도 다분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동맹 놈들에게 최악의 행군을 맛보여 줄 터였다.

초크는 횃불을 밝히며 갈리온을 달렸다. 갈리온과 군마들의 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자랑스러운 그의 병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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