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양동작전 – 오해 편
커트리안이 차츠라에게 모종의 임무를 맡겨 보낸 후 막 차 한 잔을 홀짝이고 있을 때, 작전참모 킨샤르와 제3사단장인 치아파 장군이 방문했다.
“어서 오게!”
“부군단장님, 벌써 이틀째인데 전혀 눈치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킨샤르의 우려에 커트리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대꾸했다.
“너무 허술하면 오히려 의심을 사겠지.”
“시간이 지체되면 노르드스톰 쪽 병력이 먼저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병력은 지금쯤 어디로 향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거다.”
킨샤르는 커트리안에게 임무를 부여받고 뱅갈스톤으로 향한 에지디오의 1사단을 생각했다. 모종의 지시가 있었다는 건 알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다.
“과연 작전이 통할 수 있을까요? 군단 규모는 될 텐데 말입니다.”
“킨샤르, 자신의 군단을 그렇게 못 믿나? 그들이 성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센드버그는 함락될 거다. 안 그런가, 치아파 장군?”
“두 시간만 주시면 항복을 받아 보이겠습니다.”
큰 키에 두꺼운 골격, 험악한 인상의 삼십 대 사내 치아파는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좋은 자세다. 조만간 기회가 있을 거다. 활약을 기대하지.”
“맡겨 주십시오!”
천생 무부인 치아파는 벌써 반쯤 커트리안을 군단장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작전참모 킨샤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비록 에디지오의 1사단이 빠져나간 상태였지만 남은 병력만으로도 한 개 군단 정도는 무리 없이 격파하리라 보았다.
“그나저나 뱅갈스톤 쪽으로 간 에지디오 장군은 잘하고 있겠지요?”
“쥬시아누스와 폴이 함께 갔으니 문제없을 거라고 본다.”
“적의 정찰대가 걱정스럽습니다. 숲에 매복한 병력이 들통 나기라도 한다면 성에 틀어박혀 절대 나오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킨샤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네, 걱정이 너무 많군. 정찰병은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다.”
커트리안이 말하는 그 순간에도 또 한 명의 정찰병이 명을 달리하고 있었다. 샤마노프와 크리들, 브리오티스와 벤트의 매복을 뚫고 용케 가문비나무 숲까지 숨어들었지만, 예니에프의 날카로운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정찰병은 어디서 날아온지도 모를 하얀색 단검에 목을 꿰뚫려 가래 끓는 소리를 한 번 토해 놓고는 절명해 버렸다.
멀리서 척후의 기척을 감지하고 다가오던 뮤트는 예니에프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예니에프는 기대원 중에서도 최고였다. 그가 움직였다 하면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보낸 정찰병이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자 코르디안의 마음은 점점 더 심란해졌다. 성내 유일한 마법사인 3서클의 화염계 마법사를 전망대로 올려 보내 적진을 살피도록 지시를 내리고도 모자라 자신도 수시로 적진을 관찰했다.
사실 화염계 마법사나 코르디안이나 관찰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별반 다르지 않은 입장이었다.
3서클의 마법사 파온은 공격 마법, 그것도 화염계 공격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다. 감지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고, 원안을 터득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소환물을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찰이라는 면을 놓고 보면 일반 병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마법사랍시고 마나의 힘을 빌려 거리를 약간 단축시켜 볼 수는 있었다. 전망대에서 꼬박 하루 동안 적진을 관찰하던 마법사, 파온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마법사의 통지를 받은 코르디안이 서둘러 전망대로 오르자 파온이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인가?”
“막사가 비었습니다.”
“무슨 소린가? 막사가 비다니?”
“저기 막사를 들락거리는 병사를 보십시오.”
“그냥 바쁘게 오가는 것 같은데?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코르디안이 의문을 표하자 파온이 설명을 시작했다.
“저기, 지금 막 막사로 들어간 병사의 체형을 기억하고 계십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자, 아까 그 병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방금 막사로 들어간 병사가 맞습죠?”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체형은 비슷하구먼.”
“저 친구는 곧 왼쪽 다섯 번째 막사로 들어갈 겁니다. 보십시오. 제 말이 맞지요?”
“정말이군? 저 병사가 그 막사로 들어갈 걸 어찌 알았나?”
“조금 더 보십시오. 그 옆 막사로 방금 들어간 병사는 이삼 분 후에 들통을 들고 다시 나올 겁니다. 자, 들고 나왔죠? 이제 오른쪽 다섯 번째 막사로 들어갈 겁니다.”
“과연 그렇군. 마법인가? 자네 예지력이라도 있는 건가?”
마법사가 씩 웃으며 답했다.
“그랬으면 오죽 좋겠습니까마는, 그런 마법은 9서클을 통달한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저 막사들이 비었다는 말입니다.”
그제야 코르디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막사마다 두어 명의 병사가 배정되어 있습니다. 그 병사들은 각 막사를 번갈아 오가며 마치 막사 안이 병사들로 들끓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 것입니다. 즉 저 진지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병력은 최대로 잡아도 800명, 여섯 개 기대를 넘지 않습니다.”
“그럼 나머지 병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 순간 부관이 급히 전망대로 올라오며 급보를 전했다.
“방금 뱅갈스톤 쪽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그쪽이 위험할 것 같다는 급보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곳 말고 또 다른 병력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모양입니다. 엘리티아 평야로 들어온 군단이 도대체 몇 개인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보고를 듣고 있던 마법사 파온이 철썩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치며 한탄했다.
“속았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속았습니다.”
코르디안 역시 뭔가 느낀 바가 있는지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이곳의 병력은 미끼입니다. 이미 다 빠져나가 뱅갈스톤으로 향하고 있는 겁니다.”
“아뿔싸! 간악한 켈커티스 놈들이 이런 잔머리를 굴릴 줄이야?”
“이러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이건 오히려 적을 섬멸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얼른 노르드스톰으로 전령을 보내 병력을 그쪽으로 돌리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저 허수아비들을 쓸어버리고 그쪽으로 달려야 합니다.”
하지만 적은 켈커티스 2군단인데…… 아니지, 적은 잘해야 여섯 개 기대, 설사 한 개 사단이라고 해도 문제가 될 숫자는 아니다. 지난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일단 저 병력만 줄여 놓아도 월등히 유리해진다. 그리고 즉시 뱅갈스톤으로 달려, 적 본대의 뒤를 치는 거다.
“부관! 당장 출진 준비를 서둘러라.”
코르디안은 충격적인 사실에 정신이 팔려 전령이 어떻게 성내로 진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생각은 간과하고 말았다. 정찰병은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는 판국에 말이다.
곧 센드버그 성문이 활짝 열리며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비록 한차례 된통 당했다지만 아도니아 연합에서도 전투력이 높기로 유명한 존스캐빈의 정예병들이었다. 대열을 갖춘 후 독전관들의 고함 소리에 맞춰 보무도 당당하게 진군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커트리안이 오랜만에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늦지 않게 걸려든 것이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세계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수많은 간섭과 영향을 끼친다.
개인의 의지와 육체에 개입하려는 다양한 힘이 존재한다. 그것이 자연일 수도 있고, 타인의 의지일 수도 있다. 선의일 수도 있고, 악의일 수도 있다.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과 따뜻한 죽 한 사발, 그런 사소한 간섭도 무언가에 영향을 미친다. 기분을 변화시키고 불만이나 혹은 만족의 감정을 만들고, 다음 목표를 설정하게 한다. 새로운 만족감을 찾기 위해 또는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 낸다. 철학적 사고든 개체보존 본능이든 상관없다.
‘절대적인 가치’와 ‘상대적인 경중’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현시점에서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 춘추전국을 마감했던 진시황도 중원 일통보다 당장의 허기를 달래기 위한 만두 하나가 절실한 순간이 있었다. 아무리 높은 이상과 이념도, 개체가 당장 원하는 무언가를 당할 수는 없다. 지고지순한 절대 이상도 만두 하나를 원하는 보잘것없는 의지에게 앞자리를 내줘야 하는 시간이 있다.
사소하든 절대적이든 이 모든 의지는 결국 내외부적 간섭에 의해 발생한다. 그 간섭으로 인해 의지는 선후가 정해지고, 경중이 정해진다.
조노량은 지금 이 순간, 그러한 간섭에서 벗어났다.
자신도 잊고, 세상도 잊고, 정신과 육신에 영향을 미치던 모든 간섭을 잊었다. 오직 하나의 의지만이 조노량이라는 개체 전부를 지배했다.
조노량이 인지하고 있는 세계란 오직 하나, 깊고 깊은 내면의 세계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계가 유일한 세계고, 유일한 우주다. 그 외의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가 존재하는 현실의 세계도, 그가 가부좌를 틀고 있는 초라한 오두막도, 뼈를 얼리는 대기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가 유일하게 인지하고 있는 우주, 이 거대한 우주를 관통하고 내달리는 힘의 흐름과 이를 막아서는 거대한 장벽, 그의 뇌리는 오직 벽을 넘어서느냐 또다시 가로막히느냐 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주 사소한 욕구도, 그 어떤 번민도, 잡념도 없었다. 하나의 색으로만 똘똘 뭉친, 그가 바라보는 우주와 동일한 질량의 의지가 그의 내면을 하나로 채웠다.
생사현관을 타통한다는 것은 전설적인 고수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생사현관은 임맥과 독맥을 잇는 아주 얇은 막이다. 그 작고 얇은 막은 아주 부드럽고 탄력적이다. 아무리 막대한 기도 너그럽게 포용하지만, 부드러운 낚싯대처럼 파열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내부를 관조하면 분명 그 존재와 움직임을 느낄 수 있지만 육신의 막인지 심상의 막인지 정확히 구별할 수 없다. 이 얇은 막은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유연하게 대응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강하게 두드려도 좀처럼 뚫리지 않는다.
벌써 세 번째 시도, 조노량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호흡까지 얼려 버리는 냉기 속에서도 무럭무럭 김을 피워 올린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육체 덕에 작은 오두막이 화목난로처럼 후끈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조노량의 세계가 하얗게 타올랐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그 충격에 세계가 깨져 나갔다. 육신을 가로막는 벽들이 허물어졌다.
투둑, 툭, 툭, 툭
조노량의 육신에서 무언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뼈마디가 어그러지는 소리가 시작됐다.
두둑, 둑!
주운의 그것처럼 허물이 일어나고 진물이 흘렀다. 뼈마디가 뒤틀리고, 척추가 곧게 서고, 피부가 당겨졌다. 품고 있는 기운에 맞게끔, 또한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도록 육체가 재구성됐다. 키가 반 뼘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