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87화 (87/142)

87. 양동작전 – 계략 편

뱅갈스톤은 엘리티아 평야에 유일한 산악 지형이다. 그렇다고 규모가 크거나 고도가 높은 산악은 아니다. 단지 경사가 가파르고 거칠어 방어에 용이한 지형일 뿐이다. 평야 한복판에 어떻게 이런 산악이 불쑥 융기되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뱅갈스톤의 두 개 봉오리 중 오른쪽 봉오리에 반경 백여 미터에 이르는 너른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그 분지를 중심으로 사방을 빙 둘러 어른 허리 높이의 석담을 쌓아 놓았다. 위에서 봤을 때나 허리 높이지, 아래에서 볼 때는 수십 미터에 이르는 성벽이나 매한가지다. 그곳에 바로 엘리티아 평야의 유일한 산성인 뱅갈스톤 산성이 위치해 있었다.

산성의 유일한 출입문에서부터 봉오리 아래 평지까지 가파른 협로가 닦여 있었다. 그 외에는 경사가 심한 비탈과 절벽이기에 공략이 쉽지 않다. 협로는 대략 수레 하나가 지나가면 길이 꽉 찰 정도로 좁지만, 이 도로가 산성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 협로를 끼고 중간 중간 여러 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산성 아래에 농토를 일구고 살아가는 지역민들의 마을이었다.

그 마을들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산성의 주인이 몇 번씩 바뀌는 와중에도 그다지 피해를 보지 않았던 마을이었는데, 최근 들어 그 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중늙은이들이 하나둘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젊은이나 부녀자들이 사라졌다면 납치를 의심해 볼 만도 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늙은이들이기에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가 쓸모없는 늙은이들을 납치해 간단 말인가? 하지만 아랫말 윗말 할 것 없이 벌써 열두 명의 늙은이가 사라지고 나니, 이제는 범상치 않은 사건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산성을 찾아가 이 해괴한 사건을 고하고 수색을 의뢰했지만 날고 기는 산성의 병사들도 도무지 늙은이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산성 주둔군 사령관인 초크 장군은 골머리를 싸맸다. 이곳을 점령한 지 이제 겨우 일 년, 그동안의 노력과 수고로 주민들을 안정시키고 연합의 영토로 공고히 다져 놨더니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민심이 동요하고 있었다.

더구나 한동안 잠잠하던 동맹이 또다시 엘리티아 평야를 수복한답시고 병력을 투입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군단 규모의 병력이 엘리티아 북부를 경유해 센드버그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군단장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멍청이가 틀림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고깃덩어리만 보고 뒤통수를 겨눈 필라는 보지 못하는 놈이었다. 아무리 먹음직한 고깃덩어리라도 뒤통수를 얻어맞으면 삼킬 수 없는 법이다. 누구든 간에 자신의 기마대가 있는 한 뒤통수가 성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발생한 실종 사건을 묻어 두고 출병해야 한다는 점이 뭔가 모르게 찜찜했다.

산성의 역할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견제와 기습이다. 엘리티아 평야 남쪽을 앞마당으로 삼고, 북쪽을 뒷마당으로 삼는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갈리온과 말들의 관리였다. 좁은 분지에 사단 급 기마대가 주둔하고 있는 탓에 분지 내에서 사육할 수 있는 갈리온과 말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때문에 평소 절반 이상의 말들을 각 마을에 분산해 관리를 위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과 산성은 공생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마을 주민들의 고충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건의 꼬리도 잡지 못하고 출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찜찜한 기분이 영 가시질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해도 작전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막 병력을 점고하고 출병을 준비하던 초크 장군은 뜻밖의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산성을 염탐하던 첩자를 잡았다는 보고였다.

후송되어 온 첩자는 아쉽게도 죽은 상태였다. 첩자를 잡은 병사의 말에 따르면 첩자는 두 명이었다. 그중 하나는 아쉽게도 도주해 버렸고, 나머지 하나는 도주에 실패하자 자결을 택했다는 거였다. 생포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소지품들을 통해 초크 장군은 여러 가지 정황 증거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초크 장군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급히 이백의 병력을 정찰대로 풀었다. 엘리티아 평야는 수량이 풍부한 덕에 경작지로 개발된 지역 외에는 대부분이 무성한 수림이다. 소규모 정찰로는 겉도 핥지 못한다.

초크는 출정 전에 첩자를 잡아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찜찜했나 했더니 비로소 그 원인을 찾은 것이다.

이런 간교한 놈들 같으니라고! 자칫했으면 양동작전에 말려 뱅갈스톤 산성을 고스란히 내줄 뻔했지 않은가?

첩자의 소지품에서 발견한 건 뱅갈스톤 지역의 상세 지도와 알 수 없는 암호 문서, 그리고 위장포와 대용량 건량 주머니, 켈커티스 방식의 단도와 신호용 피리였다.

지도에는 지역 주민들만이 알 수 있는 특별한 소로와 마을의 위치, 지리적 특성까지 매우 상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그제야 납득이 갔다. 최근 노인들의 실종 사건과 이번 첩자 건은 같은 선상에서 해석해야 할 사건이었다. 이 지역에서 평생을 보낸 노인들만큼 이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지도의 내용으로 봐서 이 지도는 노인들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암호 문서는 산성 병력과 경비 체계 등을 표시한 것이 틀림없었고, 건량주머니는 그가 제법 먼 거리를 이동해 왔다는 것과 장기 잠복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으며, 단도는 그가 켈커티스 출신임을, 또 신호용 피리는 이 지역에 침투한 첩자가 하나가 아니라는 반증이 되었다. 위장포의 용도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단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죽은 자의 용모가 켈커티스보다는 이곳 주민들의 외모와 흡사했다는 점이었다. 하긴 첩자를 파견하려면 그 지역 주민과 비슷한 용모를 선발해 파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곧 잊고 말았다.

이로써 명백해졌다. 적 군단장은 바보가 아니라 영악한 자였다.

최근 노인들의 실종 사건에는 동맹의 정찰대가 개입되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동맹이 노리는 곳은 알려진 바와 같이 센드버그 시가 아니라 바로 이곳 뱅갈스톤 산성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찰대로부터 속속 관련 소식들이 들어왔다. 불과 십여 킬로미터 밖 숲에서 적어도 네 개 기대 이상이 숙영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다시 사단 급 적 병력이 이쪽 방면으로 진군하는 모습이 관측되었다. 발견된 것만 해도 한 개 사단 반, 얼마나 더 많은 병력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초기 정찰 결과에 따르면 엘리티아 평야로 들어선 동맹의 병력은 한 개 군단이었다.

백오십 명으로 이루어진 기대가 열 개 모여 한 개 사단을 이룬다. 그리고 그 사단 세 개가 모여 한 개 군단을 이룬다. 즉, 한 개 군단의 총 인원수는 대략 사천오백 명으로 편성되는 셈이다. 거기에 군단장 직할대, 호위대 등을 더해도 오천을 넘지 않는다.

그 정찰 결과가 틀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분석해 보면 센드버그로 진격한 병력은 최대로 잡아도 천오백을 넘지 않는다. 이곳에서 관측된 병력이 한 개 사단 반이었으니까 말이다.

일반적으로 작전은 사단 단위로 펼치게 된다. 그래야 지휘권이 통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적이 사단을 쪼개지 않았다면 이쪽에 두 개 사단이 이동해 왔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했다. 그렇다면 센드버그로 간 적 병력은 불과 한 개 사단이다.

한 개 사단으로, 아니 최대한 잡아서 한 개 사단 반이라 해도 그 병력만으로 센드버그를 공략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결국 그쪽은 위장이고 이쪽이 진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적은 산성이 비워지길 기다려 거저먹거나 혹은 두 배의 병력으로 직접 공략하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초크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센드버그 시와 노르드스톰 시로 각각 두 번씩 전령을 파견했다.

초크 장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의 계략을 거꾸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버릇없는 동맹 놈들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 시간, 2군단 본진은 센드버그 시 성문 코앞까지 진출해 있었다. 뱅갈스톤 방면으로 빠진 한 개 사단을 제외한 전 병력이었다. 카샤린 공략의 실패로 다수의 병력을 잃은 센드버그 시로서는 감히 켈커티스 정예 군단을 요격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카샤린 공략 때와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대신 백여 킬로미터 밖에 위치한 노르드스톰 시에 급히 지원 병력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센드버그 시의 점령사령관인 코르디안은 북이스테르 강 북쪽에 위치한 폴리스 중 가장 강성한 폴리스인 존스캐빈 출신이었다. 마르탄 초원에서 개박살 나고 후퇴한 군단이 바로 코르디안의 존스캐빈 4군단이다. 그 전투에서 군단장인 코르디안마저 가까스로 도주에 성공했을 정도니 군단이 온전할 리 없었다. 거기에 성내 방어 병력과 카샤린 앞마당에서 군단장을 잃고 쫓겨 온 린드그랜 병사들까지 통합해 놓았지만, 그래 봐야 한 개 군단에도 미치지 못했다.

적은 성문 밖 삼백 미터 지점 가문비나무 숲 바로 앞쪽에 떡하니 진지를 구축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코르디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만 갈고 있었다.

진지 곳곳에 내걸린 독수리 문양 군기를 보고서야 상대가 켈커티스 최정예 2군단임을 알았다. 지난 전투에서의 터무니없는 패배가 조금은 납득이 되기도 했다.

명불허전, 켈커티스 2군단은 전해 들었던 것보다 몇 배나 강력한 군단이었다. 엄정한 군기만 봐도 다른 군단과는 차별이 되었다. 병사들은 늘 제자리를 지켰고, 쓸데없이 이동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한 개 기대씩 교대로 훈련을 진행했고, 나머지 병력은 막사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듯 보였다. 만만치 않은 강도의 훈련이 이뤄지고 있었지만 끝까지 절도를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는 감히 나가서 교전할 생각을 접고 성문만 굳게 닫아걸었다. 다음 날 코르디안은 켈커티스 병사들이 추가로 빈 막사를 설치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는 새로운 병력이 도착한다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가도를 메우고 접근하는 수백의 횃불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날이 밝자 비었던 막사를 가득 메운 병사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모닥불도 두 배로 늘었다.

성내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시민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연합군에 항복한 상황이지만 센드버그는 오랫동안 동맹 측 폴리스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켈커티스군은 일종의 해방군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코르디안은 성벽을 경계하랴 시민들을 통제하랴,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켈커티스 진영에 공성 병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충차가 건조되는 모습이 보였지만 매우 다행스럽게도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이제부터는 노르드스톰 쪽 지원 병력이 먼저 도착하느냐, 공성이 먼저 시작되느냐의 시간싸움이었다. 그렇게 믿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