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86화 (86/142)

86. 센드버그 공략전

커트리안은 아직까지 정체를 밝히지 못한 마법 검을 닦으며 스마르에게 물었다.

“보급품에 대한 보고는 받았나?”

커트리안의 질문에 스마르가 작은 양피지 조각을 꺼냈다.

“이곳에서 노획한 보급품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식량은 빻은 밀과 말린 고기, 건과일 모두 한 달분가량 됩니다. 또 노획한 장비만으로 한 개 군단을 온전히 무장시킬 수 있습니다.”

“절반은 카샤린에 남겨라. 식량은 보름치면 충분하다. 모자라면 뺏으면 되는 일이고!”

“알겠습니다.”

“계획대로 이틀 후 출진이다. 준비하도록!”

“티모테우스 왕의 암살 소식이 곧 도착하리라 생각됩니다.”

“너무 일찍 알려지는 건 좋지 못하겠지? 아메조프에게 일러 늦추도록 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그날 카샤린 가도를 질주하던 티모테우스 호위대 전령은 하늘을 나는 거대한 메뚜기 한 마리를 보았다. 그것이 그가 살아서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결국 킨샤르가 애타게 기다리던 티모테우스는 물론, 사정을 알리는 전령 또한 출진 당일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킨샤르는 어쩔 수 없이 켈커티스로 전령을 보낸 후 출진을 서둘렀다.

반면 에디지오를 비롯한 사단장들은 은근히 출진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두 번의 대승을 거뒀다지만 손 한 번 제대로 풀어 보지 못했다.

그 악명 자자했던 생환자들의 실력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갈리온을 전투에 활용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기정사실을 뒤집어 버린 일이었다.

갈리온을 타고 적진으로 돌격할 수는 있다. 하지만 미쳐 날뛰는 갈리온은 그 주인까지 잡아먹는다. 자신의 갈리온에게 당하지 않더라도 낙상할 경우 적진 한가운데 떨어지고 만다.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갈리온을 타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것은 자살용이다. 그렇다고 적에게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미쳐 날뛰는 갈리온이라도 오오라를 다루는 기사를 만나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비싼 갈리온만 낭비하는 꼴이다.

하지만 방진을 돌파하는 데는 갈리온만 한 도구가 없다. 그 육중한 무게를 이용한 돌진은 병사들이 막아 낼 방법이 없다. 그 이후 발생하는 일은 차치하고라도 아무리 단단한 방진도 일단은 뚫려 버린다.

그런데 생환 기사들은 그런 갈리온을 얌전한 망아지로 만들어 버렸다. 갈리온을 탄 채 적 방진을 돌파했을뿐더러 갈리온을 막으려는 적 기사들을 도륙해 버렸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무력이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적을 만난다 해도 자신이 있었다. 설사 로크리안과 그 직할 군단을 만나더라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군단병들의 사기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런 사기, 이런 전력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사단장들은 넘치는 자신감을 안고 갈리온에 몸을 실었다. 이전 커트리안의 지휘권을 박탈하겠다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오히려 그와 함께라면 무조건 이길 거라는 믿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2군단은 지난번과 달리 비교적 여유 있는 행군을 즐길 수 있었다. 이전의 행군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산책을 나온 기분이었다. 그렇게 이틀째 되는 날 급보가 날아들었다. 그 소식에 군단 전체가 망연자실해졌다.

전령이 전한 소식은 켈커티스 제2 바실레오스며 2군단의 군단장인 티모테우스의 암살 소식이었다. 2군단과 함께 두 해를 넘게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티모테우스가 동맹의 땅에서 누군가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다. 범인도 잡지 못했고, 호위 기대장 보니파시오는 켈커티스로 압송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허나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원정은 그대로 진행되어야 했다.

킨샤르가 침통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바라흐하 왕이 의심스럽습니다.”

커트리안이 설명해 보라는 듯 가만히 킨샤르를 바라봤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는 비밀도 아니지요. 티모테우스 공은 연임을 준비했습니다. 그 정보가 유출되는 바람에 바라흐하 1왕에게 의심을 샀었지요. 출전 전에도 여러 차례 바라흐하 왕에게 불려 갔었습니다. 함께 출정하지 못했던 이유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바실레오스로서 연임을 노리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커트리안은 그게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되냐는 듯 심드렁히 대꾸했다.

“부군단장님은 오랫동안 떠나 있었기에 잘 모르시겠지만, 비상령 이후로 바라흐하 왕이 중부 대륙식 왕정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군단장님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셨습니다. 바라흐하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연임이 필수라고 판단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라흐하는 이를 절대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바라흐하 왕이 일부러 티모테우스 공과 군단을 떼어 놓고 암살을 시도했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딱히 확증은 없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커트리안이 너무 단호하게 말하자 더 이상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심증은 오히려 확신으로 굳어 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하겠다.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다독이도록!”

비보를 접했지만 작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군단병들은 대승을 이끈 커트리안에 대한 믿음이 쌓여 가고 있었다.

군단은 카샤린 시에서 붙여 준 열 명의 초원 전사들의 안내를 받았다. 모두 피리온족 출신으로, 갈리온을 말처럼 다루는 유목 전사들이었다.

카샤린은 초원에 위치한 폴리스다. 때문에 초원 부족들과는 제법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 덕분에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피리온족 유목민들과 조우해서도 가벼운 예물을 나누고 헤어질 수 있었다.

초원에서는 절대 피리온족과 분쟁을 만들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카샤린을 공격했던 아도니아 군단도 피리온족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피리온족은 갈리온을 전투에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부족이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피리온족은 갈리온을 전투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갈리온은 피를 보아도 광란하지 않았고, 최소한 기수를 떨어트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동맹 측에서는 그들의 사육 방식을 따라 갓 낳은 갈리온을 어미와 떨어트린 후 온갖 방법으로 길들여 키워 보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두 번째로 그들에게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갈리온을 사 와도 보았으나 그 결과 역시 신통치 않았다. 갈리온 길들이기는 꽤 오랜 세월 시도되었지만 끝내는 포기하고 말았다.

동맹이 그토록 갈리온을 전투에 활용하고자 갈망했던 이유는 바로 이 피리온 부족의 전투 방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용은 생환자들의 전투에서 확실히 증명되었다.

피리온족은 숫자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켈커티스 전사들도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초원의 전사들이었다. 개개인의 무용도 무용이지만 갈리온을 활용한 전투 방식은 그야말로 무섭기 짝이 없었다.

백여 마리의 갈리온이 질풍처럼 초원을 질주하면 그런 장관이 없었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갈리온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소드마스터뿐이다. 그런 갈리온을 이용한 게릴라전은 군단 규모의 정규병들도 피를 말리게 했다. 정면으로 싸운다면 필라도 있고, 소드마스터도 있는 군대를 당할 수 없지만 기동력이 담보된 피리온족이 정면승부를 해 올 리가 없다. 갈리온을 이용한 치고 빠지기에 몇 번 당하고 나면 혼이 빠질 정도였다. 그들과 분쟁이 생기는 순간 초원을 벗어날 때까지 그런 식의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2군단은 피리온족의 배웅을 받으며 순조롭게 엘리티야 평야로 들어섰다. 그 사이 군단병들과 가장 친해진 건 의외로 하이오지였다. 어디를 가든 적응력만큼은 발군이었다.

하긴, 다른 생환자들과 달리 하이오지는 군단병들과 같이 걸으며 부대끼고 있었으니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쥬시아누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병사는 있어도 하이오지를 모르는 병사는 없었다. 좀 얄미운 캐릭터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이고 거리감도 적었다.

“좀 나눠 먹읍시다.”

병사 하나가 막 구운 토끼 다리를 쭉 찢어 드는 하이오지에게 말했다.

“이 조그만 걸 어떻게 나눠 먹어? 너두 사냥해라. 아니면 육포나 씹든지.”

“행군 중에 어떻게 사냥을 해요. 다리 한 짝만 줘요.”

하이오지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돌아앉아 토끼 고기를 열심히 씹었다.

“안 돼. 못 줘. 혼자 먹기에도 작아.”

그때 헤리엇이 하이오지를 불렀다.

“하이오지, 커트리안 님이 부르십니다.”

“아니 왜? 무슨 일 있나?”

하이오지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병사 하나가 하이오지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쓱 넣어 다리 한 짝을 잽싸게 뜯어 갔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내 다리 내놔!”

병사가 다리 한 짝을 입에 물고 열심히 달아났다.

“뭐 먹을 게 있다고 이 작은 걸 훔쳐 먹냐고?”

“빨리 오라니까요.”

“알았다고! 간다 가! 옜다. 너희들이나 실컷 처먹어라.”

하이오지가 반쯤 뜯어 먹은 토끼를 병사들에게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행군 중 식사 겸 휴식을 위해 잠시 쉬는 중이었다. 커트리안 앞에도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익어 가고 있었다. 하이오지는 입맛을 다시며 다가앉았다.

“대장 무슨 일입니까?”

하이오지의 손이 자연스럽게 토끼 다리를 뜯어냈다.

“발이 빠른 병사 일백을 붙여 주겠다. 뱅갈스톤으로 가라.”

하이오지는 토끼 고기를 우물거리며 반문했다.

“거긴 왜요? 센드버그로 가는 거 아니었나요?”

“뱅갈스톤 병력을 묶어 놔야 뒤가 깔끔하다. 그곳에 도착하면…….”

커트리안의 하이오지가 뱅갈스톤 지역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를 자세히 지시했다.

“헤리엇을 데려가도 될까요? 혼자 가면 좀 심심해서.”

“그렇게 하도록!”

“감사합니다요. 그럼 후딱 다녀오죠.”

“다녀올 필요 없다. 쥬시아누스가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 자리 잡고 기다리면 된다.”

☆ ☆ ☆

이곳은 회색 오크 부족의 근거지였다. 즉, 암컷과 새끼들, 그리고 이제 막 성인이 된 오크들이 모여 있는 그들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테트리카 산맥 인근 낮은 분지에 형성되어 있었다. 너른 마당을 중심에 놓고 수백 개의 작은 오두막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였다.

이들의 우두머리, 검은 오크 칸차는 서리를 하얗게 뒤집어쓴 다른 오두막들과 달리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오두막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오두막 다음으로 큰 오두막이다. 그 오두막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도왔고, 자신은 그를 도왔다. 종족은 달랐지만 동료가 되었다. 함께 사냥하고 함께 먹었다. 누구보다 날랬고 용맹스러웠다. 자신이 인정한 전사였다.

만일 그가 도전해 온다면 무리의 우두머리 자리를 놓고 한판 붙어 줄 용의가 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오크들도 그를 형제로 인정했다. 그가 우두머리가 된다고 해도 아무런 불만이 없다.

칸차는 이해할 수 없었다. 힘이 있는 자가 무리를 이끈다. 오크들의 오랜 규칙이며 절대 선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까지 도전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도전은 이미 오래전에 각오한 일이다. 죽음도 추방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강했다. 암컷들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도전해야 마땅하건만, 그러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두막을 바라보며 칸차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또 한 번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이전에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더 강해진다면 가망이 없다.

하지만 순순히 양보해 줄 생각은 없었다. 무리의 우두머리답게 당당히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 자격 있는 전사에게 마지막을 맡길 수 있다는 건 명예로운 일이다.

칸차의 오해가 깊어지고 있는 그 시점 조노량은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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