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85화 (85/142)

85. 카샤린 방어전

다음 날, 그렇게 서둘러 행군을 하고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작전참모 킨샤르가 사단장들과 커트리안을 찾았다. 쥬시아누스와 스마르가 그들을 맞았다.

“카샤린이 코앞입니다.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까?”

“오늘 하루 더 이곳에 머문다. 병사들에게는 휴식을 주도록!”

“벌써 여러 날이 흘렀습니다. 카샤린의 병력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서둘러 이동해야 합니다.”

“킨샤르! 휴식하라 명했다.”

“바실레오스 티모테우스 공께서는 부재 시 작전권을 저에게 일임한다고 하셨습니다.”

“호오, 부군단장은 명목상 직위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커트리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생환자들의 성급함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질문해 오자 답변이 궁해졌다.

“그게 아니라 통상적으로…….”

“통상적? 나의 작전 능력을 못 믿겠다는 말 아닌가?”

커트리안 뒤에 시립해 있던 쥬시아누스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어찌 감히 커트리안 님의 지휘력을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관례상 작전참모가 입안하고 부군단장님께서 승인하는 방식을 취함이 옳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군단장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커트리안은 앞으로 나서려는 쥬시아누스를 손짓으로 제지하고 말했다.

“그래? 그럼 킨샤르 경의 의견을 듣고 싶군. 말해 보라!”

“감사합니다. 우선 척후를 먼저 출발시킨 후…….”

“이미 출발시켰다.”

“아니, 누구를……?”

“내 직할 기대원이다.”

“하오나 척후는 전문적인 병과가…….”

“척후 병과보다 뛰어난 자들이 있지.”

“설마? 레인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최고는 따로 있지.”

“헉? 그림자들을 말씀하시는?”

커트리안은 미지근한 시선으로 킨샤르를 응시했다.

“조, 좋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본대가 바로 따라야…….”

“어제 우리 군단도 그에게 뚫렸다. 혹시라도 눈치챘나?”

보고받은 바가 없으니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귀관이 그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유능한 그림자라 하더라도 오천에 가까운 군단병들을 뚫고 군단장 막사까지 침투했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하지만 그렇다 하니 대꾸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카샤린이…….”

“카샤린에는 이미 전통을 넣었다. 하루, 이틀을 더 못 버틴다면 어쩔 수 없는 일!”

“벌써…… 말입니까?”

“명을 시행하라, 킨샤르 작전참모!”

“며, 명 받들겠습니다.”

결국 킨샤르는 말만 더듬다 물러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전날 경비를 담당했던 3개 기대장과 기대원들은 킨샤르에게 불려가 고된 기합을 받아야 했다. 침입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경비 기대원들도 킨샤르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물론 기합을 주고 있는 킨샤르 역시 스스로 믿지 못했기에 기합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중대한 과오였다.

하루를 더 쉬게 된 군단병들은 행군의 고단함을 풀고 출진 준비를 서둘렀다.

그 시간 커트리안은 차츠라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의 요지는 이랬다.

카샤린을 포위한 연합군이 당장 공성을 하려는 기미는 없다.

지원 병력과 장비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지원 병력은 현재 카샤린 동북쪽 40킬로미터 지점까지 진군해 있는 상황이다.

보고를 받은 커트리안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동진을 명했다.

킨샤르가 또 한 번 불만을 토로했지만 커트리안의 의지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군단은 동진을 시작했다.

꼬박 반나절을 동진한 후에 척후의 보고가 들어왔다. 카샤린으로 향하던 연합군에 관한 내용이었다.

“한 개 전투 군단과 사단 급 보급대입니다.”

“거리는 얼마나 되던가?”

킨샤르의 질문에 척후대원이 절도 있게 대답했다.

“불과 십여 킬로미터 정도입니다.”

“방향은?”

“이대로 직진한다면 한 시간 내에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킨샤르의 시선이 커트리안을 향했다. 어떻게 연합군의 이동 상황을 파악해 냈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는 동진을 명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좋은 기회였다. 킨샤르는 커트리안을 향해 기습을 제안했다.

“기습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초원에서 말인가?”

“구릉을 끼고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전면에서 조우하는 건 피할 수 있습니다. 즉, 측면을 노릴 수 있습니다.”

“적의 척후는 허수아비라던가?”

커트리안이 떠보듯 물었다.

“전면으로 다가선다면 오히려 척후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좋은 의견이다, 킨샤르. 하지만 우리는 그대로 전속 전진한다. 척후는 신경 쓸 필요 없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적도 눈치챌 것입니다.”

“아니, 적은 맞닥뜨린 후에야 우리 존재를 알게 될 거다.”

“적의 척후는 허수아비랍니까?”

킨샤르는 슬쩍 짜증이 났다. 이런 좋은 기회를 잡고서 정면승부를 하겠다니? 커트리안은 기초적인 전술 운용조차 무시하고 있었다. 적보다 먼저 발견했다면 이를 이용함이 당연하다. 그냥 전진할 거면 뭐 하러 척후를 운용하겠는가?

커트리안이 킨샤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죽은 척후는 허수아비만도 못하지. 지금부터 전속 전진한다.”

“적의 척후가 죽는단 말씀이십니까?”

“보면 알게 된다. 명을 수행하라!”

“전 작전참모입니다. 모든 작전에 대해 알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호기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항명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커트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군단병들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납득시켜 주십시오.”

그 순간 묵묵히 서 있던 쥬시아누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투핸드소드를 날렸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캉!

쥬시아누스의 투핸드소드가 킨샤르의 목 바로 앞에서 스마르의 검에 의해 막혔다.

킨샤르 역시 엄연한 북부의 전사며 소드마스터다. 그럼에도 쥬시아누스의 검이 뽑아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만약 스마르가 막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쥬시아누스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으니까.

스마르가 말했다.

“커트리안 님의 명이 떨어지지 않았소.”

쥬시아누스의 눈은 여전히 킨샤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감정도 살기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신념이 담겨 있었다.

“군인의 덕목은 복종에 있소. 항명의 대가는 죽음이오.”

쥬시아누스의 항의에도 스마르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갑작스런 상황 전개에 당황하던 사단장들이 급히 검을 잡아 갔다. 그 순간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자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인 예니에프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단결이 잘되는 군단이군요. 항명도 단체로 하시고 말입니다.”

제2군단은 켈커티스의 창으로 불리는 정예 군단이다. 그 군단을 이끌고 있는 사단장들, 비록 정치적 배분에 의해 획득한 자리지만 그에 걸맞은 자격도 갖췄다. 결코 약한 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군단의 지휘권은 엄연히 커트리안에게 있었다. 만약 검을 뽑아 든다면 엄연히 항명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커트리안 님, 어찌할까요? 이참에 싹 갈아엎어 버릴까요?”

☆ ☆ ☆

조노량은 오랜만에 무아지경에 들었다. 노도처럼 사지백해를 힘차게 돌아 드는 기운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시끄러운 오크들의 고함도, 가을을 맞은 북지의 거친 바람소리도, 천공에 걸렸던 뿌연 빛무리가 마침내 서산으로 기울어 갔지만 그 시간의 흐름도 잊었다.

인을 맺은 조노량의 손에서 무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가는 반지였다. 이곳의 태양은 뭔가를 반사시킬 만큼 강하지 못했다. 반지는 스스로 발광하고 있었다. 커트리안이 나가기 전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며 전해 준 반지였다.

그런 조노량의 뒤에 한 여인이 그림자처럼 붙어 서 있었다. 여인의 길고 매끈한 다리가 황혼 빛을 받아 순백으로 빛났다. 소담히 드러난 가슴과 달리 음부는 빈약한 거웃에 속살을 감추고 있었다. 북지의 차가운 바람이 여인의 나신을 매섭게 할퀴고 지나갔지만 여인은 일말의 움츠림도 없었다.

여인, 샤는 벌써 반나절이 넘도록 미동도 없이 조노량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일말의 표정도,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샤의 가슴은 아주 낯선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샤는 하기의 네 마리 짐승 중 하나이자 이 땅을 지배하는 두 번째 흄이다.

샤는 이 사내의 등을 볼 때마다 밀려드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혼란을 느꼈다. 뭔가 아련한 느낌, 이제는 잃어버린 기억이지만 오래전 자신의 가슴속을 가득 채웠던 그 어떤 감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무엇인지 인식할 수는 없었다. 기억할 수도 없었다. 광기와 살육으로 존재해 온 오백 년의 시간을 격하고 이제는 완전히 소멸했을 것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감정이 싹을 틔웠다.

순백의 나신이 일그러지며 검은 어둠이 뭉클 피어올랐다. 그 어둠 위에 낙인처럼 찍힌 로리안의 징표가 백열했다.

흄이라 해서 모두 이지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영력이 강해지자 잃었던 이지를 되찾았다. 사리판단이 분명해지고, 경험과 기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기의 네 마리 짐승이라 불리던 사대 수신호위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기억이라는 엄청난 권능은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기억은 경험을 만들고, 경험은 판단과 선택을 만든다. 육에 어린 권능과 기억이라는 후천적 힘이 지금의 샤를 있게 했다.

그리고 샤는 최근 또 한 번 영력의 상승을 경험했다. 네 마리 짐승 중 다른 하나를 먹었다. 다른 흄을 사냥하는 것은 오백 년간 하기에 의해 금지된 일이지만, 소멸된 흄의 마력을 먹는 것은 인정되었다. 동류의 마력은 너무도 오랜만에 맛본 강대한 것이었다. 흡수한 순간 그 즉시 새로워졌다.

이제 하기의 네 마리 짐승은 두 마리 짐승으로 줄었지만 네 마리 짐승보다 강력한 두 마리 짐승이 탄생했다.

뜻과 의지가 더욱 명료해졌고 정신이 깨어났다.

육화를 유지하는 시간도 영원처럼 길어졌다. 이제 원한다면 해가 다섯 번 지고 뜰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샤는 또렷해진 정신으로 노리앙이라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는 누구일까? 왜 내게 이런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아련함? 그리움?

스스로 존재의 근원이 인간이었음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동류를 사냥하고 성장하여 마침내 스스로 존재하고 있음을 처음으로 인식한 그날, 그날 이후로 처음 접한 인간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이제와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저 포식의 대상일 뿐,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만은 전혀 식욕을 느낄 수 없었다. 식욕을 느끼기는커녕 소중함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돋아났다. 아니, 소중함뿐만 아니라 기쁨, 슬픔, 아쉬움, 조급함, 불안함, 우울함, 기대감, 뿌듯함, 서운함, 설렘, 한심함, 아련함…… 수만 가지 감정이 생성되고 있었다. 오직 먹고 싶다는 감정 하나만으로 오백 년을 보낸 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홍수였다. 그리고 그 감정들의 끝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는 단지…… 주인의 명에 의해 감시하고 보호하도록 정해진 대상일 뿐이다. 샤는 애써 고개를 저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떨쳐 버렸다.

샤는 습관적으로 영력을 뽑아내 작은 팽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팽이를 손 아래 두고 회전시켰다. 까만색의 팽이가 맹렬한 속도로 회전했다.

이게 아닌데…… 또다시 뭉클 솟아오르는 그리움, 그 낯선 감정이 샤의 영력을 흔들었다. 영력이 흔들리자 팽이의 회전이 느려졌다.

팽이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샤의 눈부신 나신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 ☆ ☆

커트리안의 눈이 킨샤르를 향했다.

“묻겠다. 군단장이 부재할 시 두 번째 명령권자는 누구인가?”

킨샤르는 조금 전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만약 스마르가 없었다면 지금쯤 자신의 목은 바닥을 구르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상황이 끝난 게 아니었다. 쥬시아누스는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고, 성정이 폭급한 생환자들이 사단장들을 막아선 상태였다. 병사들 앞에서 자칫 내분이라도 일어난다면 보통일이 아니었다. 킨샤르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규, 규정상으로는 부군단장님이십니다. 하지만 관례…….”

“관례 따위는 집어치워라! 누구라고?”

“부군단장님이십니다.”

“전시 상황에서 항명의 대가는?”

“주, 죽음입니다.”

“따를 텐가? 죽을 텐가?”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티모테우스 공이 돌아오시면 그냥 넘어가시지는 않을 겁니다.”

“흥, 돌아가서 각자의 자리를 지켜라!”

코웃음을 친 커트리안은 차갑게 명령했다.

킨샤르는 어쩔 수 없이 사단장들에게 전속 전진을 명했다. 상대가 어느 쪽 군단인지 모르겠지만, 최정예 2군단을 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필요한 희생이 생기겠지만 모두 부군단장의 잘못된 작전 지시에서 발인한 것이니 티모테우스 공이 복귀한 후 책임을 물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킨샤르는 오래지 않아 시체가 된 적의 척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체는 두세 명씩 짝을 이루고 죽어 있었다.

척후의 첫 번째 임무는 교전이 아니다. 정찰병과 달리 교전도 수행하지만 월등한 전력 차가 아니라면 정찰 임무를 우선시한다. 지금 죽어 있는 적의 척후들은 부대 단위가 아니었다. 정찰병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척후가 연달아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말은 도주도 못하고 당했다는 말이다. 그런 시체가 일 킬로미터마다 규칙적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커트리안의 예상대로 적은 켈커티스 2군단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상대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 아직 적아도 구분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상대가 이쪽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양 진영이 대치 상태에 들어간 후였다.

커트리안은 킨샤르와 사단장을 소집한 후 명령을 내렸다.

“100열 방진을 구성하라. 공격보다는 방어를 우선하고 적이 혼란이 확인되면 돌진한다.”

사단장 중 가장 고참인 40대 장군 에지디오가 나섰다.

“100열? 이제 와서 방어를 우선하라니요? 최대한 펼쳐 쓸어버리면 됩니다.”

“매번 번거롭군. 여러 말 말도록!”

“우리 2군단은 적을 섬멸하기 위해 이곳에 왔소. 방어하며 버티려고 온 게 아니란 말이오, 부군단장님!”

에지디오도 전장에서 뼈가 굵은 전사다. 목숨이 아까워 할 말도 못하는 자가 아니었다. 자연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크크, 누가 버티자고 하더냐? 피해를 줄이라 한 것뿐이다! 더 이상의 항명은 용납지 않겠다. 모두 위치로!”

사단장들은 전면승부를 외치다가 적과 조우하자마자 소심한 명령을 내리는 커트리안을 비웃었다.

적의 지원군과 보급대를 발견한 건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버리면 그조차 의미 없는 일이 돼 버린다.

최대한 빨리 적을 괴멸하고 카샤린으로 달리는 것이 타당했다.

그것이 군단에 내려진 임무가 아니던가?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2군단은 그럴만한 실력이 있는 군단이었다. 두세 개 군단쯤은 가볍게 찜 쪄 먹을 전력이다. 그런데 방어용 방진을 구성하라니? 버티다 보면 적이 저절로 혼란에 빠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 예측이란 말인가? 이러다가 카샤린이 함락되기라도 하면 작전 실패는 물론 적아(敵我) 모두에게 비웃음을 살 것이 뻔했다.

경험이 부족한 지휘관 하나 때문에 군단의 명예가 개박살 나게 생겼다.

하지만 대치 상황에서 분란을 만들 수도 없는 일, 어쩔 수 없이 이번 교전까지는 명령대로 따르기로 했다. 단 교전이 끝난 후에는 징계를 각오하고라도 그의 지휘권을 박탈할 생각이었다.

사단별로 100열 종대를 구성했고 사단 간의 간격은 제로였다.

1열은 켈커티스 군단의 트레이드마크인 호프론(직경 1m의 대형 원형 방패)과 글라디우스를 들었고, 2, 3열은 길이 오 미터에 이르는 장창 파이크를 들었다. 4열부터는 글라디우스를 거치한 후 왼손엔 호프론, 오른손에 가벼운 투창인 필라를 준비했다.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다. 그 상태로 양군은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병사들의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반면 생환자들은 방진의 좌우에서 갈리온을 몰며 아직까지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에 이르자 1사단장인 에지디오 장군의 목소리가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투창!”

팽팽히 당겨진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 2군단은 물론 연합의 군단도 동시에 투창을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덮고 투창이 서로의 진영을 향해 날았다. 방패를 담당한 열이 머리 위로 방패를 씌워 투창을 방어하면 필라를 담당한 병사들이 재차, 삼차 투창을 날렸다. 상대의 투창에 당한 병사들이 곳곳에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방진은 쓰러진 동료의 자리를 메우며 거침없이 돌진했다. 맞붙은 두 방진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개의 방진이 맞닿았다.

방패와 방패가 부닥치고, 파이크가 방패와 방패 사이 틈을 비집었다. 남은 필라를 적의 후미를 향해 던진 병사가 글라디우스를 뽑아 들었다.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된 것이다. 양 군단의 병사 수는 비슷했으나 연합군은 2군단보다 두 배나 넓은 200열로 방진을 뽑아냈다. 한 번에 교전할 수 있는 병사 수가 늘어난 것이다. 당연히 전선을 길게 뽑아낸 연합군이 2군단을 감싸기 위해 좌우로 날개를 펼쳤다.

그 순간 생환자들이 갈리온을 그대로 탄 채 양익을 달리기 시작했다.

길들여지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갈리온은 몬스터였다. 피를 보면 통제가 불가능해진다. 때문에 전투가 시작되기 전 갈리온은 후미에 남겨 두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생환자들은 갈리온을 탄 채 적 방진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쥬시아누스의 도리깨가 사각 방패를 앞세운 적 병사들에게 떨어져 내렸다. 골곤의 척추뼈를 이어 만든 도리깨였다. 무게만 해도 오십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대물이다. 나무에 청동을 덧씌운 방패로 막아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사각 방패가 터지듯 깨져 나갔다. 도리깨의 늘어진 머리가 방패의 저항을 받고 휘돌아 후열의 병사들까지 한 번에 쓸어버렸다. 쥬시아누스의 활약과 별개로 쥬시아누스의 갈리온도 거침없이 방패를 들이받으며 방진 내부로 진입해 들어갔다. 하이오지가 부러운 시선으로 쥬시아누스의 도리깨를 바라보았다. 그 쓸모를 보니 하나 만들어 나오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물론 만들었다고 해도 얍삽이 하이오지가 그 무게 덩어리를 끝까지 들고 나왔을 리는 없었다.

하이오지는 애꿎은 화풀이를 자신의 갈리온에게 했다. 피를 보고 막 발광하려던 갈리온의 뒤통수로 하이오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주먹보다 찍어누르는 기세에 갈리온이 정신을 차렸다. 들었던 앞발을 얌전히 내려놓고 고분고분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방진일지라도 갈리온의 돌격을 막아 낼 수는 없다. 적의 양익이 돌진해 들어온 갈리온의 발굽에 갈가리 찢겨 나갔다. 갈리온의 눈이 붉게 충혈되고 콧김 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갈리온은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광분해야 했다. 기수의 통제를 벗어나 적과 아군 모두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할 것이다. 또한 기수들은 앞뒤로 발광하는 갈리온의 등에서 떨어져 그 발굽 아래 짓이겨져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생환자들의 갈리온은 흥분할망정 광분하지는 않았다.

기수의 기세가 갈리온의 기세를 눌렀다. 갈리온은 상급의 포식자에게 제압당해 소심한 암말이 되었다. 어설픈 글라디우스는 갈리온의 두꺼운 가죽을 뚫지 못했지만 필론(무거운 필라)의 관통력은 갈리온의 가죽을 뚫고 상처를 입혔다. 상처를 입은 갈리온이 흥분할 때마다 기사들은 갈리온의 갈기를 부여잡고 기세를 흘렸다.

갈리온과 함께 방진 깊숙이 난입한 적을 향해 연합의 기대장들이 몸을 날렸다. 아무리 두꺼운 가죽도 오오라를 감당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생환자들은 갈리온의 힘만 믿고 적진으로 뛰어든 하루살이가 아니었다. 예니에프의 브로드소드에서 오오라가 터져 나왔다. 오오라는 그대로 브로드소드를 벗어나 달려드는 기사를 포함해 열 이상의 병사를 관통하고서야 힘을 다했다.

우측으로 난입한 쥬시아누스의 투핸드소드와 도리깨가 번갈아 휘둘러질 때마다 대여섯 명의 병사가 한 번에 나가 떨어졌다. 샤마노프의 단창이 날고, 크리들의 글라디우스가 오오라를 발했다. 뮤트와 벤트가 오랜만의 살육에 핏발을 세웠고, 하이오지와 헤리엇도 거침없이 적진을 헤집었다. 갈리온의 흥분을 걱정하는 게 아니고 생환자들의 흥분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가시 달린 고슴도치처럼 단단한 방어력을 자랑하던 방진이 턱없이 깨져 나갔다. 적의 난입을 허용한 연합군은 앞을 막아야 할지, 뒤를 막아야 할지 혼란에 빠졌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방진이 찢겨 나갔다.

늑대가 난입했는데 양떼가 무리를 유지할 수는 없다. 연합의 진형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켈커티스 2군단은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적진을 보자마자 두말할 것도 없이 돌진을 시작했다. 단단히 뭉친 2군단이 연합의 방진을 양단하고 반전했다.

양쪽으로 크게 찢긴 연합군의 선택은 도주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물러나 다시 진형을 갖추고 반격해야 했다. 하지만 중장갑 보병이 아무리 뛰어 봐야 갈리온의 속도를 당할 수는 없는 일, 도주를 위한 진형도 순식간에 네 갈래, 여덟 갈래로 찢겨져 나갔다. 그리고 더 이상 반격을 위한 진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전투를 지켜보던 후미의 보급대가 수레를 버리고 줄행랑을 놨다.

전투가 발발한 지 불과 한 시간만의 일이었다. 군단이 궤멸한 시간으로는 북부 전쟁사 중 최단 시간이었을 것이다.

1사단장 에지디오를 비롯한 세 명의 사단장들은 이 어이없는 승전에 검까지 내리고 개미 떼처럼 흩어져 달아나는 연합군을 바라보기만 했다. 초원은 삽시간에 피로 뒤덮여 있었다.

그나마 무리를 이루고 달아나던 연합군도 생환자들의 갈리온을 따돌리지 못했다. 저항할 무기도 없는 양떼 사이를 신나게 누비는 맹수와 다름 아니다.

에지디오는 혀를 내둘렀다. 군단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최상급 소드마스터가 십수 명이나 모여 있다. 한눈에 봐도 개개인의 무력이 자신을 까마득히 상회했다. 대부분 자신보다 젊은 친구들이었다. 생환자들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과연 저들에게 2군단이 필요했을까 라는 의문까지 들었다. 저들만으로도 한 개 군단 정도는 가볍게 뭉개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삽시간에 끝난 전투에 군단병들도 어안이 벙벙했다.

쫓겨 달아나는 적병을 유린한 갈리온들이 본대로 귀환했다.

“보급품을 태워라!”

커트리안이 다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애써 탈취한 보급품을 태우라니?

군단병들이 머뭇거리자 샤마노프가 횃불을 들고 갈리온을 달렸다. 횃불은 순식간에 보급 수레를 화마로 감쌌다. 생환자들이 환호하며 불씨를 날랐다. 두 개 기대가 한 달은 먹을 양식과 보급 무기들이 불탔다.

당황한 킨샤르가 커트리안에게 달려왔다.

“아니, 부군단장님, 저 아까운 식량을?”

“저것들을 끌고 속도를 낼 수 있다고 보나? 그대로 남겨 두면 어디로 갈까?”

“그래도…….”

커트리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킨샤르의 말을 끊어 버렸다.

“적들의 군기는 남김없이 수습해라. 지금부터 카샤린으로 전속 행군한다. 금일 자정 전에 도착할 것이다.”

킨샤르는 잃어버린 보급품에 대한 애통함 달래며 연합의 군기를 주워 모으고 군단을 정비했다. 더 이상 커트리안의 명에 반발하기에는 명분이 없었다.

군단은 휴식도 없이 꼬박 열두 시간을 달렸다. 대승으로 한껏 고양된 병사들이 힘든 줄도 모르고 힘껏 달려 카샤린 성이 마주 보이는 들판에 도착했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 ☆ ☆

카샤린 시 성문 앞에 당당히 포진한 연합군의 숙영지가 눈에 들어왔다. 막사만 해도 대략 400여 동, 그 숫자로 판단하건대 한 개 군단은 넘고 두 개 군단에는 못 미치는 병력이었다. 연합군은 적의 성문 앞에서 여유 있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현재 카샤린 시의 병력은 성벽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실정임을, 야간 기습은 감히 꿈도 못 꿀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켈커티스 2군단은 지난 전투에서 수습한 군기를 앞세우고 느긋하게 행군했다. 그러나 언제라도 방진을 구성하고 전투에 돌입할 수 있는 대형을 유지했다.

연합군의 야간 경비 기대가 이쪽 군단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확인에 들어왔다. 척후의 보고대로 척 봐도 연합의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고, 하루 전 전령을 통해 지원군의 도착 소식을 통보받기도 했다. 때문에 경비를 담당한 기대는 대규모 병력을 보면서도 설렁설렁한 분위기였다.

경비 기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존스캐빈의 병력입니까?”

“그렇다. 존스캐빈 제2군단장 바드리우스다. 도착했음을 고하라!”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

“전통을 받긴 했으나, 군단장님은 이미 취침에 드셨는지라……. 잠시 쉬셨다가 아침에 인사를 나누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숙영지를 만들겠다. 장소를 안내하라.”

“그보다 소속 증명서와 작전 명령서를 확인해야…….”

“무슨 소린가? 군단장에게 직접 전달해야 할 비밀문서다. 지금 당장 깨워 올 것이 아니라면 내일 내가 직접 전달하겠다. 불만 있나?”

연합에서도 오만하기로 소문이 난 존스캐빈의 군단장다운 호통이었다.

린드그랜 제3군단 2사단 8기대장인 막심은 기대장들 중에서도 가장 어렸다. 그 때문인지 뛰어난 검술 실력에 비해 성격은 소심한 편이었다.

작전 명령서는 당연히 군단장에게 직접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소속 증명서는 미리 제시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상대 군단장의 호통에 뭉뚱그려서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막심은 적을 친절히 숙영지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지원 군단이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카샤린 전투가 쉽지 않았다거나, 그의 성격이 조금만 철저했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런 경우 커트리안은 그 자리에서 막심을 베어 버리고 돌격할 생각이었지만 어린 기대장이 친절히 안내까지 해 준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켈커티스 제2군단은 적의 안내를 받아 가며 참호와 방책을 넘어 당당히 적의 숙영지에 입성했다.

“수고했다, 기대장!”

“경비 기대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어린 기대장이 겸손을 떨자 커트리안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연합의 군기는 형편없군.”

갑자기 바뀐 커트리안의 말투에 막심은 잠시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막심이 생전 마지막으로 지은 표정이었다.

언제 뽑혔는지도 보이지 않은 커트리안의 검이 막심의 수급을 단번에 떨구었다.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막심의 얼굴에는 고통은커녕 아직까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투 준비를 완전히 갖춘 켈커티스 최정예 군단이 순식간에 경비 기대를 뭉개고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져 있는 적의 막사로 들이치기 시작했다.

쥬시아누스는 투핸드소드와 도리깨를 양손에 나눠 쥐고 군단장 막사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예니에프가 맛있는 먹이를 놓쳤다는 듯 아쉬움을 표하며 다른 막사로 달려 들어갔다. 막사 사이사이 피워 놓은 화톳불이 린넨 천으로 만든 막사로 날아들었다. 막사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비명과 시끄러운 함성 소리, 막사를 태우는 불길에 잠들었던 연합의 병사들이 깨어났다.

연합군 중 군사 폴리스로 유명한 린드그랜의 병사들이었지만 상황은 어떻게 수습해 볼 수 없는 지경까지 흘러 버렸다.

갑옷도 없이 글라디우스 하나만 챙겨들고 막사를 나서 보지만 그 즉시 참살을 면치 못했다.

잠자다 일어나 보니 전후좌우 사방이 적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린드그랜군의 입장에서는 적 병력이 수 배는 많아 보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진지 곳곳이 시뻘건 화염에 휩싸였고, 사방에서 아군의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보이느니 적군이요, 들리느니 적의 함성이었다. 막사 주변은 이미 피바다로 변해 있었다. 전의는 검불처럼 날아가고 혼은 빠져 버렸다.

2군단의 입장에서는 줄지어 튀어나오는 두더지를 잡는 기분이었다.

연합군은 숙영지 한가운데서부터 시작된 기습에 대항은커녕 속옷 바람으로 도망치기에도 바빴다.

일부 병사들은 다급히 목책을 뛰어넘다가 자신들이 설치한 목책에 꿰뚫리는 경우도 있었고, 참호에 거꾸로 처박혀 참호 바닥에 박아 놓은 날카로운 말뚝에 머리가 터지기도 했다. 자기들끼리 밟혀 죽은 병사는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전투는 그렇게 마무리되어 갔다.

반면 켈커티스군의 피해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의 두 개 군단에 이르는 적 병력을 소탕하면서 아군의 사상자는 삼백을 넘기지 않았다. 요란하기 짝이 없었던 전투치고는 매우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다.

하루 안에 치러진 두 번의 전투, 2군단이 오늘 하루 이룬 전과가 근래 동맹군이 이룬 그 어떤 전과보다도 높았다.

적의 숙영지를 점령한 2군단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성 밖이 난리가 났는데도 카샤린 성에서는 무슨 일인지 짐작도 못하다가 켈커티스의 군단임을 확인하고서야 성문을 활짝 열어 열렬히 환영했다.

카샤린 시의 목민관 알렌스 피사니는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켈커티스 2군단을 맞이했다.

“오, 주신 아디여, 섬김 받으소서! 동맹이 카샤린을 버리지 않을 줄 알았소. 어서, 어서 오시오!”

피사니와 카샤린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 속에 켈커티스 2군단은 당당히 성내로 진입했다. 갑옷도 벗지 못하고 쪽잠을 자던 카샤린의 병사들이 서둘러 불을 끄고 전리품을 수거했다.

2군단은 카샤린 시청 중앙광장에 임시 막사를 설치한 후 때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커트리안은 군단병들에게 연합군 진지에서 노획한 술과 고기를 풀어 노고를 치하했다. 오랜만의 대승에 들뜬 병사들은 커트리안의 이름을 연호하며 밤이 깊어 가는 것도 잊고 마음껏 즐겼다.

그 시간 시청 소회의실에 이십여 명이 모여 앉았다. 커트리안과 스마르, 쥬시아누스 등 크로아지크 기대원 일부와 킨샤르를 포함한 사단장들 그리고 카샤린 시의 목민관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이었다.

전승에 대한 치하와 감사의 말이 오가고, 다시 다음 작전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추위가 시작됐습니다. 군단을 움직이는 건 무리라고 봅니다.”

“이번 전투로 센드버그 시가 비었소.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엘리티아 평야를 수복한단 말이오?”

피사니의 염려에도 커트리안은 단호히 센드버그 시 공략을 천명했다.

“하지만 노르드스톰의 병력이 남아 있고, 뱅가스탄 산성의 병력도 언제 뒤를 칠지 모르는 형국입니다. 무리한 병력 운용은 손해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차라리 카샤린에서 겨울을 나고 봄을 노려 봄이 어떻겠습니까?”

카샤린의 입장에서는 센드버그를 공략해 주 전장이 이전처럼 센드버그 시나 노르드스톰 시 쪽으로 옮겨 가는 것이 최상이었지만, 자칫 패전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 불똥이 다시 카샤린으로 튈 것이 분명했으므로 모험을 하기보다는 당분간 켈커티스의 군단을 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연합군의 재편이 이루어진 후에 말이요? 겨우 1개 군단으로?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안 그런가, 킨샤르?”

커트리안이 화살을 작전참모인 킨샤르에게 돌렸다. 하지만 킨샤르로서는 답변이 마땅치 않았다. 사실 제2군단만으로 센드버그 시를 수복한다는 계획은 불가능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커트리안의 군단 운용 방식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놀라운 전술이었다.

기습이라는 매력적인 전술도 마다하고 전속 행군으로 적 지원 병력과의 거리를 최단 시간으로 줄여 냈다. 그 전투에서 보여 준 생환자들의 무력도 놀라웠다.

아무리 강력한 군대라도 전면전이 벌어지면 피해를 각오할 수밖에 없는데, 방어적인 진형 운영과 생환자들의 압도적인 돌파력을 바탕으로 군단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리고 온전히 노획한 어마어마한 보급품을 미련 없이 소각해 버리는 단호함을 보여 줬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결단이었으나, 결과를 놓고 보니 그러지 않았다면 두 번째 전투에서 이런 승리를 일구어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일 보급품이 아까워 끌고 왔다면 늦은 아침에나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훤한 대낮에 적 군단장이 직접 나와 이쪽을 확인했다면 이번 작전은 절대 성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밤중에 도착함으로써 무방비한 적을 사냥한 꼴이 돼 버렸다.

설사 진지 밖에서 이쪽의 정체가 밝혀졌다고 하더라고, 시간이 시간인 만큼 약간의 피해를 입었을망정 전투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마저도 안 되었으니 두 번째 전투에서의 승리는 사실상 거저 주워 먹은 것과 다름없이 되었다.

잠든 적의 방문 앞에서 시작되었을 전투를 침대머리 맡에서 칼 들고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만약 이 모든 과정 중 단 한 가지라도 삐끗했다면 절대 오늘과 같은 성과를 이루어 내지는 못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오늘 하루 부군단장이 보여 준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는 오늘 하루 만에 뚝심과 단호함과 지모를 동시에 증명해 냈다.

그러니 센드버그 공략이 무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도 커트리안의 의견에 대놓고 반대할 수가 없었다.

“잠시 카샤린에 머물다가 티모테우스 2왕이 복귀한 후 결정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도착이 늦어지면 그만큼 작전이 어려워진다.”

“시간이 제법 경과했으니 오늘이라도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좋다. 이틀을 기다리겠다. 그때까지 티모테우스 왕이 나타나지 않으면 전문을 남기고 진군한다. 불만 없겠지?”

“이틀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킨샤르는 내심 티모테우스가 금일 중 도착할 것으로 기대했다. 갈리온을 달린다면 도착했어도 벌써 도착했을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지체할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이 이상 늦어지긴 힘들었다.

“알겠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작전의 변동은 없다. 이상!”

커트리안의 결정으로 카샤린 측의 의견은 단호히 무시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자리에서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카샤린 시의 인사들은 구원을 받은 입장이었고, 킨샤르나 사단장들은 몇 번의 비토 끝에 망신만 당했다. 커트리안의 의견에 토를 달 입장이 못 됐다.

또 사단장들 간에도 슬그머니 커트리안과 그의 기대원들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런 대승은 티모테우스 왕이 직접 지휘할 때도 맛보지 못했던 바였다. 전사의 도시인 켈커티스는 기본적으로 강한 전사와 실력 있는 지휘관을 우러렀다.

커트리안은 회의 참석자들과 함께 매우 이른 아침을 마치고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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