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84화 (84/142)

84. 암살

행군한 지 나흘이 되었을 때, 켈커티스로부터 전령이 도착했다. 급보였다. 전문을 받아 본 총사령관 우무스는 긴급히 각 군단의 사단장들을 소집했다.

“켈커티스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오누르스 만에 연합의 갤리선이 떴다는 소식이다.”

모여든 사단장들과 참모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한차례 호되게 당한 전력이 있던 켈커티스는 갤리선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켰다.

카샤린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군을 돌려야 합니다. 동맹의 군단만으로는 오누르스 만을 지켜 낼 수 없습니다.”

1군단 1사단 사단장인 스트라우스 장군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오누르스 만 회전 때도 1사단을 지휘했던 장군이었다.

“우리 군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발을 묶기 위한 술책이 아닐까요?”

1군단 작전참모인 후버린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난 경험으로 보았을 때 갤리선으로 이동 가능한 병력 수는 최대로 잡아도 대당 오백 명이다. 지난번 나타났던 갤리선이 총 11대였다는 걸 감안한다면 오천오백 명을 실어 나를 수 있다는 예상이다. 또한 갤리선이 추가로 더 건조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만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은 총 두 개 군단 구천 명이다. 그 정도면 상륙 자체를 저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있기에는 불안감이 너무 컸다. 그곳이 뚫리면 켈커티스까지는 그야말로 무인지경. 본거지를 두고 모험을 할 수는 없다. 더구나 켈커티스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1군단이 모두 이 자리에 있었다. 돌아가는 데만도 나흘이 필요하다.

“기만책이든 저지책이든 어쩔 수 없습니다. 켈커티스 방위가 최우선입니다. 카샤린에서 켈커티스까지는 무려 칠백 킬로미터입니다. 정작 켈커티스가 위험에 처해도 우리는 손가락만 빨아야 합니다. 애초에 1군단을 움직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강경했다. 상대의 의도에 넘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켈커티스가 위험해질 요소는 미리 차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두 개 군단이면 상륙 정도는 저지할 수 있다느니 없다느니, 장시간 갑론을박이 이어진 끝에 우무스가 결정을 내렸다.

“좋소, 1군단은 회군하기로 합시다. 단 2군단은 예정대로 카샤린 시로 향하시오.”

“올바른 선택입니다. 장군!”

우무스의 결단에 작전참모들과 사단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 막사에 모인 이들은 모두 켈커티스 출신이다. 1군단이든 2군단이든 그들에게 있어서 켈커티스의 안위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1군단은 전문적으로 켈커티스 방어에 특화된 군단이다. 성 안팎의 모든 지형을 꿰뚫고 있었으며, 비상사태를 대비한 다양한 작전과 훈련도 완료되어 있었다. 켈커티스에서만큼은 그 어떤 군단보다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1군단이 회군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리고 바실레오스 티모테우스 님이 도착하실 때까지 2군단의 지휘는 부군단장인 커트리안 님이 맡아 주셔야겠소.”

우무스의 지시에 약간의 웅성거림이 있었으나 대부분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체면 세워 주기였다. 동맹의 영토 내에서 이루어지는 행군이다. 누가 지휘하더라도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그리고 티모테우스가 서둘러 갈리온을 달린다면 보병의 행군 속도쯤은 어렵지 않게 따라잡을 터, 잠시 지휘권을 맡겨 두는 것뿐이다.

그래도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모르는 생환자에게 잠시라도 지휘를 맡긴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지못해 수긍하는 사단장들의 표정만으로도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커트리안은 노골적으로 만족감을 표시하며 우무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2군단 소속의 사단장들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티모테우스가 도착해 주기만을 빌었다.

우무스 역시 못 미더운 표정으로 커트리안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1군단이 회군함으로써 2군단 단독 행군이 시작되었다. 커트리안은 지휘를 맡자마자 행군 속도를 올렸다. 병사들은 선도하는 갈리온을 따라붙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이래서는 도착하더라도 전투를 치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쥬시아누스는 여유 있게 흑색 갈리온을 몰며 해바라기 씨를 우물거렸다. 난폭하기로 소문난 갈리온이지만 쥬시아누스의 기세에 눌려 얌전한 고양이처럼 굴었다. 난폭한 성격만 아니라면 갈리온은 아주 안락한 탈것이다. 말처럼 자리가 불편하지도, 허벅지에 잔뜩 힘을 주지 않아도 걱정이 없다. 더욱이 넓적한 등짝으로 인해 절대 돌아갈 염려가 없는 갈리온의 안장은 조금만 격하게 움직여도 획 돌아가 버리는 말안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최고의 탈것이었다.

독전관으로 임명된 헤리엇과 하이오지가 갈리온을 타고 대열의 앞뒤를 오가며 연신 행군을 독촉했다.

지친 병사들을 보다 못한 기대장 하나가 하이오지에게 항의를 했다.

“독전관님은 갈리온을 타고 있지만 병사들은 걷고 있잖소. 너무 심하지 않소!”

그 말을 들은 하이오지가 희죽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나도 걸어가면 되겠군?”

“흥, 제발 그래 보시오.”

하지만 그 기대장은 크로아지크 기대원을 몰랐다. 그들은 행군이라면 이골이 난 자들이다.

하이오지는 그 즉시 갈리온을 헤리엇에게 맡겼다. 그리고 앞뒤로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얼마나 가려나 싶어 비웃음을 머금었던 병사들이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넘도록 지치지 않고 뛰어다니는 하이오지를 보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하이오지가 행렬의 앞뒤로 뛰어다닌 거리가 병사들의 행군 거리보다 족히 서너 배는 넘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생을 했지만 하이오지는 이죽거리는 말투 탓에 병사들의 미움을 독차지했다. 경이적인 체력에 대한 감탄은 감탄이고, 얄미운 것은 얄미운 것이다.

☆ ☆ ☆

이른 새벽, 1군단과 함께 회군 중인 우무스의 막사에 낯선 사내 하나가 스며들었다.

“처리하셨소?”

“내일 정오쯤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른편 숲에 연장을 하나 떨어뜨려 놓았으니 잘 수습해 주시오.”

딱 필요한 말만 하고 사내는 인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연기처럼 사라져 가는 차츠라를 보며 우무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군단 병력을 뚫고 자신의 막사까지 침입했다는 사실보다, 인간의 몸으로 토리도의 권속인 자신의 이목까지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무스는 잠시 아직까지 마계의 문에서 헤매고 있을 토리도의 처지를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노리앙이라는 자가 그곳에 남게 될 줄 알았겠는가? 그의 무기를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신이 그곳에 남아 있을 처지도 아니었다.

다음 날, 우무스는 정신이 반쯤 나간 기대 하나와 마주치게 되었다. 제2 바실레오스 티모테우스의 호위 기대였다.

“무슨 일이지?”

우무스의 호통에 당황한 기대장이 급히 예를 취했다.

“주변을 물려 주십시오.”

눈살을 찌푸린 우무스가 주변을 물리자 티모테우스의 호위 기대장인 보니파시오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뿌렸다.

“티모테우스 공이 살해당하셨습니다. 흑흑.”

전사의 눈물이 어찌 그리 가볍겠는가? 지켜야 할 주인을 지키지 못한 호위 기사는 눈물이 아니라 피를 뿌려도 모자랐다.

“뭣이? 그게 무슨 말인가? 어찌 동맹의 영토에서 바실레오스가 살해당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아침 부관이 갑옷을 챙겨 드리기 위해 들어갔을 때는 이미…….”

우무스는 말을 잇지 못하는 기대장을 향해 재차 호통을 날렸다.

“똑바로 말하지 못할까?”

“흑흑, 기도가 절개되어 있으셨습니다. 경호를 철저히 했는데…….”

“세상에! 그게 호위를 맡은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린가?”

“면목이 없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티모테우스 공은 상급의 소드마스터다. 누가 그런 전사를 살해할 수 있단 말이냐? 정녕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가?”

“야간조 30명의 기사가 막사를 둘러싸고 철통같이 호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하란 말이다! 상급의 소드마스터가 살해되는데 호위란 작자들이 낌새도 차리지 못했단 말이냐?”

보니파시오를 매섭게 질책하던 우무스는 결국 한탄을 토해 놓았다.

“동맹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범인은?”

“잡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것이…….”

보니파시오는 말끝을 흐리며 작은 단검을 하나 내밀었다. 굳은 피가 묻어 있는 것이 일견하기에도 흉수의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아도니아놈 들의 칸자르가 아니던가?”

칸자르는 칼끝이 뒤쪽으로 휘어 있는 외날 단검이었다. 아도니아의 그림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검이었다.

“그렇습니다. 막사 밖 풀숲에서…….”

굳이 찾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연장을 찾아낸 건 기특한 일이었다.

“이크네우몬!”

우무스가 자신의 호위 기사인 이크네우몬을 호명했다. 우무스의 지근거리에서 떨어지지 않던 이크네우몬은 칼같이 복명하고 우무스 앞으로 나와 섰다.

“보니파시오와 함께 이곳에 남아 범인을 추격하라! 또한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여 추가 증거를 수집하라! 보니파시오, 범인을 잡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도 말아라!”

“이크네우몬, 명, 받았습니다.”

이크네우몬과 보니파시오가 예를 취하자 우무스는 티모테우스의 유해와 증거품을 인수한 후 서둘러 군단을 출발시켰다.

우무스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이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정말 오래 돌아왔다. 따지고 보면 모두 이크네우몬이 뿌린 잉크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이크네우몬은 이번 임무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고, 범인은 이미 사라졌다. 누가 있어 자신의 이목까지 속이는 차츠라를 잡아낼 것인가?

☆ ☆ ☆

2군단의 기본 무장은 호프론 방패 하나, 글라디우스 하나, 세 개의 투척용 필라로 구성된다. 거기에 야전에 필요한 개인 군장을 더하면 족히 삼십 킬로그램을 넘어선다. 그런 군장을 짊어지고 고속 행군을 하면 체력은 둘째 치고 무릎의 반월상 연골과 발뒤꿈치 종골 근막이 견뎌 내지 못한다. 평소 훈련 강도가 높기로 소문난 2군단병들이었지만 이런 장거리 고속 행군을 감당하긴 버거웠다. 군단병들이 하나둘 절뚝이기 시작했을 때쯤, 척후로 나섰던 아메조프가 돌아왔다.

“적의 척후가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대장.”

“카샤린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오십여 킬로미터쯤 남았습니다.”

“일단 이곳에 진지를 구축한다. 차츠라가 도착하면 바로 알려라.”

커트리안의 명이 떨어지자 각 사단장이 병사들을 독려했다. 켈커티스군은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진지를 구축한 후에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무리한 행군으로 기진한 병사들은 진지 구축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지를 구축한다는 말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군단장 막사를 중앙에 두고 사방 백 미터씩 거리를 잰 후 십자형 이동로를 만들고 바깥쪽으로는 이중의 참호를 판다.

참호에서 파낸 흙으로는 방벽을 쌓고 굵은 통나무를 허리 높이로 박는다. 만약 주변에 물이 있다면 바깥쪽 참호까지 물을 끌어와 댄다.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높은 곳에 안정적으로 서게 되고,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키 높이로 파인 참호 속에서 방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이렇게 구축된 진지는 침투가 어렵고 외부 관측이 쉽다. 또한 임시 진지임에도 높은 방어력을 자랑한다. 이것이 수많은 몬스터와 싸우며 오백 년간 영토를 개척한 북부인들의 진지 구축법이었다.

워낙 자주하다 보니 군단병 전원이 토목공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약식이라고는 하지만 불과 한 시간 반 만에 모든 작업이 완료되었다.

과도한 행군으로 지친 병사들도 그제야 쉴 수 있게 되었다. 경계 병력을 제외한 전 군단병들은 이른 저녁을 마치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차츠라가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엄정한 군기를 자랑하는 2군단의 경계병들이었지만 차츠라가 숙영지에 스며드는 것을 눈치챈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차츠라는 소리 없이 군단장 막사로 스며들었다.

인기척이 없었음에도 커트리안은 차츠라의 도착을 쉽게 알아챘다.

“왔나?”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수고했군. 내일 카샤린 쪽에 이 전통을 전하기 바란다. 더불어 정찰도 부탁하지.”

“하루입니까?”

“하루면 충분하지 않나?”

“알겠습니다.”

“좌측 두 번째 막사다. 쉬도록.”

차츠라는 말없이 예를 취하고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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