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83화 (83/142)

83. 출정

커트리안이 별다른 반대 없이 부군단장의 자격을 얻어 출진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바로 평판 때문이었다. 켈커티스 시민들 사이에 생환자들에 대한 인식은 극도로 나빠져 있었다.

과거 바실레오스 선거에 나섰을 당시만 해도 커트리안은 바실레오스 후보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로 여겨졌다. 명망 높은 가문의 후계자인 데다가 영민하고 강하기까지 했다. 시민들은 늘 더글라스가의 후예를 주목했다.

켈커티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이었으며 삼백 년간 수도 없이 바실레오스를 배출해 온 집안이기 때문이다. 비록 당대 가주는 바실레오스의 영예를 얻지 못했지만, 커트리안의 조부인 롬바르도만 해도 바실레오스를 두 번이나 연임했다.

그랬기에 시민들은 커트리안이 어릴 적부터 성장 과정을 지켜봤다. 커트리안은 다른 세력가의 후계들처럼 집안의 배경을 믿고 안하무인하지 않았으며, 늘 신중하고 현명하게 처신했었다.

커트리안이 젊은 나이에 바실레오스 후보로 나섰을 때도 건방지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시민들은 그가 첫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것조차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커트리안이 정치에 뜻을 둔 이상, 언젠가는 바실레오스의 자리에 오를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바실레오스에 오르는 데 부족하지 않은 가문, 강한 전사이면서도 현명하기까지 한 젊은 정치인. 그건 곧 바라흐하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다음 선거 혹은 다다음 선거에서 바라흐하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의미와 같았다.

더구나 커트리안은 몇 번의 출정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바라흐하의 음모에 어이없이 당하고 말았다. 과한 자신감으로 터무니없는 작전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십 년 가까운 세월을 잃어버렸다.

현재 바라흐하는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를 공고히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외된 가문들과 일부 원로들의 힘을 얻어 봐야 절대 바라흐하를 당할 수 없었다. 힘? 공화제하에서 힘으로 얻을 수 있는 피와 살육 외에는 없다.

그랬기에 무리하게 악명을 쌓고, 스스로 마기에 물든 흉포한 생환자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런 자가 어찌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는가?

희생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덕분에 바라흐하의 경계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지도자가 되기에 부적절한 성정도 증명되었고, 시민들의 지지도 확실히 거두어졌다.

바라흐하로서는 더 이상 커트리안을 경계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부군단장의 지위를 얻어 출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커트리안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바라흐하는 자신이 수용소에서, 그리고 마계의 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자신은 더 이상 쉽게 속고, 음모임을 알면서도 스스로 희생하는 풋내기 전사가 아니다. 바라흐하가 알고 있는 적당히 강한 전사도 아니고, 생각이 단순하며, 종잡을 수 없는 성격 파탄자도 아니다.

바라흐하가 준 것이지만 2군단은 온전히 자신만의 병력이 될 것이다. 켈커티스를 얻는 것은 물론 아도니아까지 진군할 첫 번째 군단이 될 것이다. 바라흐하는 이번 출정을 단기 작전으로 생각하겠지만 아주 긴 원정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군단이 오랜 원정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날, 바라흐하는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 ☆ ☆

카샤린 시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출정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시쿳의 3군단이 아니라 우무스의 1군단이 제2 바실레오스의 2군단과 함께 출정하게 된 사실이었다.

켈커티스의 방어를 담당하던 정예 군단이 출정한다는 말에 켈커티스 시 전체가 들썩였다.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었다. 켈커티스의 양대 군권이라고 할 수 있는 티모테우스와 우무스가 나란히 출진하는 것이다. 물론 최고 지휘권자는 바실레오스인 티모테우스였다.

출정 당일 더글라스가의 별채 중앙 홀에는 크로아지크 기대 15명 전원이 모여들었다. 각자의 폴리스에서 한 달여간의 휴식을 마치고 켈커티스로 집결한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기대원들은 며칠간 술독에 빠져 지내다시피하며 즐거워했다.

사선을 함께 헤쳐 온 동료들과 이토록 여유 있는 시간을 함께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절박하지도 않고, 목숨을 걸어야 할 필요도 없고, 무언가에 쫓기지도 않는 시간. 그들은 이런 시간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다.

제우스 역시 오린토에 있는 로리안의 신전에 들러 그만의 의식을 마치고 폴의 보호 아래 켈커티스로 입성했다. 단, 그는 이번 출정에서 빠지기로 되어 있었다. 아무리 기대원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아도니아인이다. 그에게 아도니아와의 전쟁에 참여하라고 강요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우스는 기대원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기에 알아서 그의 사정을 감안해 주었다.

커트리안은 미지근한 시선으로 기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몸들은 이상 없나?”

눈만 빼꼼히 뚫려 있는 복면을 뒤집어 쓴 폴이 대답했다.

“날아갈 것 같습니다.”

기대원들은 각자 가슴을 펴거나 두드리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고, 건강한 음식을 섭취했다. 하지만 몸에 자리 잡은 마기는 빠져나가지 않았다. 자칫 몸에 이상이 올까 저어했으나, 다행히 이상을 보이는 기대원은 없었다. 다만 이미 변이된 것은 어쩔 수 없기에 각자의 몸에 맞춰 적절히 가렸다.

복면을 쓴 폴과 마찬가지로 샤마노프는 길고 얇은 가죽 주머니로 촉수를 감싸고 팔뚝에 둘둘 말아 감고 있었다. 물고기 벤트는 턱까지 오는 깃으로 아가미를 감추고, 손에는 벙어리장갑을 끼었다. 커트리안이 절대 탈의를 하지 않듯, 각자의 방식으로 변이된 부위를 감춘 것이다.

커트리안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만족스러웠다.

“좋다. 이제 복수를 시작해야지?”

“물론입니다. 아도니아 놈들의 싹을 말려 버립시다!”

브리오티스가 하나 남은 팔을 치켜들며 씩씩하게 외쳤다가 금세 제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신관님은 빼고요.”

“괜찮습니다. 다만 피를 너무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흥, 어림없는 소립니다. 그곳에 두고 온 동료가 몇인 줄 아시면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예니에프가 붉어진 얼굴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다른 기대원들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 제우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변함없지만 아도니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제우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논하기에는 그들이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다. 대신 신께 축원드렸다.

“로리안의 용서와 사랑이 늘 그대들 가슴에 머물기를 축원합니다.”

하지만 기대원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제우스의 마음은 알지만 이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 명의 의인을 위해 아도니아 전체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대원들은 제우스의 눈을 외면했다.

“준비들 되었겠지? 지금 출정하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롤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안토니오의 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클리브와 질로가 울부짖고 있습니다.”

“노리앙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손에 묻은 피를 닦지 않겠습니다.”

기대원들은 각기 동료의 이름을 외며 각오를 다졌다.

“그래, 옳다. 그들의 혼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복수를 완성하지 않고서는 절대 검을 풀어 놓지 않겠다. 준비됐나?”

“준비됐습니다.”

“자 그럼 출진이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아고투스, 아르고스!”

기대원들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 ☆ ☆

켈커티스 제1, 2군단 구천 명의 병사가 북문에 집결했다. 더글라스가의 가병 일백 명과 14명 기대원들도 켈커티스 제2군단 부군단장 직할대의 신분으로 대열을 이루고 서 있었다. 이제 두 명의 군단장만 도착하면 출정이었다.

하지만 정오가 다 되어서야 우무스가 수십의 호위병을 이끌고 병사들 앞에 나타났다.

“바실레오스 티모테우스 공께서는 중한 일로 한발 늦게 따라오시게 되었다. 이에 본 군단장이 제군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켈커티스의 용맹한 전사들이여! 오늘 우리는 맹방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그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던 친구가 그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의 생명이 제군들 손에 달렸다. 켈커티스 전사로서 부끄러움 없이…….”

우무스의 연설은 길게 이어졌지만 누구 하나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매번 마찬가지지만 이번 출정에서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들에게는 용기와 격려가 필요했다. 그리고 우무스의 연설은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피를 끓게 했고, 자부심을 고취시켰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뿜는 열기로 인해 집단으로 취했다. 병사들은 짐승처럼 함성을 질러댔다.

커트리안의 의도대로 티모테우스는 바라흐라로부터 의심을 사기 시작했다. 티모테우스의 막후교섭은 바라흐하에게 불려 간 몇몇 가주들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그에 더해 우무스가 바라흐하의 의심을 부추겼다.

자신이 내세웠던 제2 바실레오스가 자신 몰래 허튼짓을 꾸미고 있는 것을 관대하게 용인해 줄 바라흐하가 아니다. 알게 모르게 진행되는 일들이 있었다. 우무스가 남들 몰래 커트리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임으로써 티모테우스가 제시간에 이 자리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도 그 일 중 하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커트리안은 미지근한 시선으로 출진을 시작한 군단병들을 바라보았다. 이번 원정을 위해 시민들의 평판은 물론 주요 가문과 원로들의 기대를 외면했다. 켈커티스에서의 모든 정치적 기반을 포기한 셈이다. 마계의 문에서 얻은 자금도 남김없이 이번 원정에 쏟아 부었다. 그러니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

동맹의 최고 정예병단은 누가 뭐래도 켈커티스의 군단들이다. 그중에서도 1, 2군단은 최고 중에 최고였다.

30대 고참병들 위주로 편성된 병사들과 경험 많은 기대장들까지, 누구 하나 부족한 점 없는 최고들이다. 바라흐하의 입김에 의해 임명된 사단장들도 단지 인맥으로만 그 자리에 오른 자들이 아니다. 모두 그만한 자격을 갖춘 자들이었다.

방패에 해당하는 1군단, 창에 해당하는 2군단이다. 이번 출진으로 자신은 창을 얻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티모테우스의 희생이 따라 줘야 했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차츠라를 향했다. 뺨에 살짝 찢어진 흔적이 보인다. 손가락들을 몇 정리했다고 한다. 때로는 손가락 하나가 열 손가락을 감당할 수 있음을 안다. 아마도 그를 상대하려면 마계의 문에 있는 클라흐라도 데려와야 할 것이다.

차츠라가 있는 한 티모테우스는 절대 본진과 합류할 수 없다. 준비는 완료되었다.

가도는 출진하는 병사들로 인해 가득 메워졌다. 척후대가 출발하고, 2군단이 선두에 1군단이 후위에 섰다. 맨 뒤로 갈리온이 끄는 백여 대의 수레가 뒤를 따랐다.

갈리온과 말을 나눠 탄 기사들이 병사들과 발을 맞춰 위풍당당하게 켈커티스 북문을 빠져나갔다.

커트리안 역시 기대원들과 함께 갈리온에 올랐다.

사나운 갈리온이 순한 암말처럼 얌전하게 기대원들의 통제에 따랐다. 갈리온들도 그들이 태우고 있는 존재들이 뿜어내는 마기를 인지했다. 상급의 마물을 대하는 하급의 마물처럼 본능적으로 복종했다.

그들이 내뿜는 기세는 아무리 사나운 갈리온이라도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타고 있는 한 갈리온들은 감히 성질을 부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카샤린 시까지의 거리는 대략 칠백 킬로미터, 하루 오십 킬로미터를 행군한다고 해도 보름은 잡아야 했다. 행군에 익숙한 병사들이지만 체력을 고려한다면 이틀을 더 생각해야 했다. 도착 즉시 전투가 발발할 것을 예상하면 적지 않은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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