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82화 (82/142)

82. 첩자

더글라스 가문에는 대략 삼십 명의 기사와 이백여 명의 전사들이 존재했다. 주로 방계 가문의 사람들이었고, 개인적으로 투신해 온 시민들도 있었다. 히어데로는 폴리스 일등 가문임과 동시에 최고 원로로서 공식적으로 최대 오백 명의 가병(家兵)을 거느릴 수 있었다. 그중 자신의 기대를 거느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기사라 칭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전사라 했다. 한때는 편법적으로 팔백여 명의 가병을 거느리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문의 세가 줄어들어 불과 이백 명의 가병도 유지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얼마 전부터 커트리안은 그런 가병들의 훈련을 하이오지와 헤리엇에게 맡겼다.

사실 종사도 아니고 일반병 출신인 둘이 기사급 인물들을 훈련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가문의 기사들과 전사들도 생환자라고는 하지만 근본도 모르는 자들에게 훈련을 받는다는 것이 탐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더글라스가의 방계 가문 야오가의 차남인 무란 야오는 생긴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하이오지의 간섭에 결국 노화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직접 지도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소?”

십 년 전 이십 대의 나이에 오오라를 얻고, 십 년을 수련해 왔다. 복무 중에는 자신의 기대도 거느려 봤고, 제법 높은 전과도 올려봤다. 이제 누구에게 지도를 받아야 할 수준은 넘어섰다고 자부하는 무란이었다. 하지만 이 고릴라같이 팔만 긴 놈이 사사건건 지적질을 한다.

그 말에 하이오지가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킬킬, 그러지 뭐. 어디 몸이나 풀어 볼까?”

하이오지는 연병장 한쪽에 세워진 무기들을 손으로 훑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다. 적당한 연장을 찾는 것이다.

“흥, 차고 있는 검은 국 끓여 드시려오? 몸에 익은 무기를 쓰는 게 어떻겠소?”

“이거? 이건 힘없는 기사님이 감당할 수 있는 검이 아니야. 이 정도가 적당하겠군.”

생각 없이 하는 말이지만 무란의 비위를 긁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하이오지는 약간 녹이 슨 글라디우스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관리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좋은 품질로 태어난 놈이 아니다. 매끄럽지 못한 표면과 기포 자국 안쪽에 박힌 붉은 녹이 보인다.

“쯧, 크로아지크산만도 못하군.”

“훈련용이잖소. 그러게 차고 있는 검을 쓰라지 않소!”

무란이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괜찮아. 부러지지만 않으면 되니까.”

하이오지는 녹슨 글라디우스를 두어 차례 휘둘러보면서 중앙으로 나섰다.

훈련에 열중하고 있던 전사들이 슬그머니 모여들었다.

생환자들이 강한 건 알고 있지만 무란 역시 기사의 칭호를 받은 자, 만만치 않은 강자였다.

“무란 밟아 버려!”

“켈커티스 전사의 실력을 보여 주라고!”

“교관님, 주의하십시오. 무란의 투핸드소드는 무식하기로 정평이 나 있으니까요, 하하하.”

“질질 끌지 말고 단숨에 끝내 버려!”

“맛 좀 보여 드리십시오.”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켈커티스인들이었다. 환호성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며 시합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들의 환호에 하이오지는 기다란 팔을 들며 호응했다. 자신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구는 것이다.

“자 애송이 기사님, 덤벼 보시지요. 오래 끌지 않을 테니까 오오라는 아끼지 마시고!”

무란 야오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자세를 잡았다. 기분이 더럽다고 차기 가주가 임명한 교관을 벨 수는 없으니 글라디우스라도 동강 내 망신을 줄 심산이었다.

화악!

무란의 투핸드소드에 푸른 오오라의 막이 덧씌워졌다. 검신이 가려질 정도로 농밀한 오오라였다. 그것만으로도 무란의 경지가 증명되었다.

준비를 갖춘 무란은 상대가 오오라를 끌어올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하이오지는 느긋하게 검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애초에 오오라를 끌어올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오라를 발하시오.”

“뭔 오오라씩이나? 귀찮으니까 그냥 오라고.”

애송이라는 도발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무란이지만 이렇게까지 무시를 당하고 보니 벨이 꼴렸다.

“후회는 마시오.”

무란의 투핸드소드가 매섭게 하이오지의 몸을 향해 휘돌았다. 막는다면 단숨에 검을 쪼개고 상대방의 목덜미를 겨눌 생각이었다. 무란은 오랜 시간 투핸드소드만 수련했다. 그런 만큼 컨트롤에는 자신이 있었다.

상대의 의도를 눈치챈 하이오지는 비릿한 미소를 날렸다. 미련하게 오오라가 잔뜩 어린 투핸드소드를 정면으로 막아 낼 생각은 없었다.

상체를 우측으로 살짝 비틀어 피하며 쏘아져오는 투핸드소드의 검면에 글라디우스를 얹었다. 슬쩍 얹히는 것만으로도 투핸드소드의 검로가 비틀어졌다.

노리앙이 즐겨 쓰는 흘리기 기술이다. 기대원 중 흘리기 기술을 노리앙 다음으로 잘 쓰는 자가 바로 하이오지였다. 마계의 문에서는 그 기술로 브리오티스의 복장까지 터트린 바 있었다.

무란은 노련한 기사답게 틀어진 검로를 확인하자마자 멈추려 했지만 검속에 더해져 검면을 밀어내는 힘에 순간적으로 제어력이 상실됐다.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힘이 쏠리자 무란의 중심이 돌아갔다.

검면을 타고 오르던 글라디우스의 무게가 갑자기 증가했다.

어어하는 사이에 몸이 팽이처럼 돌았다. 상대에게 완벽히 측면을 잡혀 버린 상황, 급히 몸을 수습하려 했을 때, 녹슨 글라디우스가 무란의 뒷덜미를 툭툭 쳤다.

단 일 수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헤리엇이 혼자서 피식하고 웃었다. 무란의 중심이 흐트러졌을 때 하이오지의 발이 들썩이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마계의 문에서였다면 망설임 없이 무란의 엉덩이를 차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오지가 상대를 배려해 주다니, 참 많이도 성장했다.

하이오지의 글라디우스가 무란의 뒷덜미에서 떨어졌다.

“거 보라고, 너무 힘을 주니까 수습이 안 되잖아? 내 말이 틀렸어?”

아까 지적했던 그 부분이었다.

무란의 얼굴이 빨개졌다. 단숨에 글라디우스를 쪼개겠다는 마음 때문에 무리하게 힘을 주었다.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당할 일은 아니었다.

“한 번 더 부탁드려도 되겠소?”

“싫어, 귀찮아. 훈련이나 하라고.”

의외의 대답에 무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력 있는 자라면 당연히 상대가 승복할 때까지 지도를 해 주는 것이 상식이었다. 우연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최소 두어 번은 더 상대해 줄 거라고 믿었는데, 이 원숭이 같은 놈은 고민도 없이 거절해 버린다. 다른 교관들처럼 엄격한 표정을 짓는 것도 아니고 헤죽헤죽 웃으면서 말이다. 실력은 인정하겠지만 왠지 심하게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 시간 커트리안의 호출을 받은 도나티우스가 별채의 회의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왔나?”

“부르셨습니까? 커트리안 님…….”

평소와 다른 무거운 분위기에 도나티우스는 말끝을 흐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환자들과의 만남은 늘 도나티우스를 긴장시켰다. 이제 더글라스가를 떠날 때가 온 것을 직감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끝이 좋을 리가 없었다.

우무스에게도 더 이상 임무를 지속할 수 없음을 보고했다. 그동안의 공적만으로도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을 것이다.

커트리안은 미지근한 시선으로 도나티우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증조부 때 갈라져 나간 방계 가문의 사내다. 방계 가문의 탄생은 보통 당대 가주와 십촌 이상 차이가 날 때 본가의 승인하에 이루어진다. 이때 가문으로부터 새로운 성을 내려 받는다.

항렬로 치면 지금의 커트리안과 같지만 피는 묽어질 대로 묽어졌다.

본가의 쇠락과 함께 방계들의 상황도 덩달아 나빠졌다. 독립적인 사업을 영위하지 못하고 대대로 본가의 기사로서 존재해 온 도나티우스의 가문은 특히 안 좋았다.

그의 배신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인 면이 충족되어야 충성심도 유지될 수 있는 것, 피가 묽어진 것처럼 본가에 대한 충성심도 묽어졌으리라.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한 남과 다름없는 관계다. 엄밀히 따지면 그의 배신은 그에게서 기인한 일이 아니고 더글라스가로부터 기인한 일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섣불리 바라흐하와 맞섰던 자신에게서부터 비롯되었다.

도나티우스를 바라보면서 커트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계속 첩자로 남아 있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일을 포기하는 순간 그의 쓸모도 다했다. 도나티우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생환자들의 난폭하고 충동적인 성정은 우무스를 통해 바라흐하에게 전달되었다. 물론 우무스에게서 한 차례 걸러진 후에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배신을 용납해 줄 수는 없었다. 출정 전에 마무리 짓는 것이 좋았다.

“가문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나티우스.”

순간 도나티우스는 커트리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가문을 떠난다는 말은 오직 단 한 사람, 우무스에게만 보고한 내용이었다. 누구도 알지 못해야 정상이다. 도나티우스는 뇌리를 울리는 경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나티우스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사방을 훑었다.

커트리안과 스마르는 여전히 평이한 얼굴로 착석해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 도나티우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커트리안과 스마르만 있다고 생각한 회의실 입구에 낯익은 사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도나티우스도 잘 알고 있는 사내, 제3 레인저 부대 두 번째 손가락이었던 차츠라였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바라흐하의 눈매가 많이 부드러워졌더군. 다 그대의 충실한 보고 덕이다.”

“커, 커트리안 님, 도무지 무슨 말씀이신지?”

“그대가 충실히 임무를 수행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다.”

커트리안은 뭔가를 주섬주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작게 말린 양피지 몇 개와 상당량의 보석이 담긴 주머니였다.

“자네 물건이지? 주인의 허락 없이 들고 와서 미안하게 됐군.”

“커, 커트리안 님……?”

“그동안 고생이 많았으니 그만 쉬도록 해라. 그대의 가문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스마르가 몸을 일으켜 주춤주춤 물러서는 도나티우스를 향했다.

“도나, 왜 자꾸 가문의 사정이 외부로 유출되는지 의아했다.”

스마르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도나티우스는 과거 자신이 직접 지도했던 재능 있는 기사였다.

도나티우스의 얼굴이 검게 물들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는데…….”

스마르의 브로드소드가 소리 없이 비산하는 바람에 도나티우스는 마지막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깔끔하게 떨어진 도나티우스의 머리가 테이블 아래로 굴렀다. 도나티우스는 스마르의 검격을 보지도 못했다.

“이제 출정할 일만 남은 것인가?”

커트리안의 중얼거림에 스마르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당분간 도나티우스의 죽음은 외부로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커트리안의 출정 후 비로소 히어데로는 아도니아의 첩자가 색출되었음을 공표할 것이다. 바라흐하와 우무스가 개입된 정보는 감춰지고 더글라스가의 동태를 적은 몇 개의 양피지만 공개될 예정이었다. 실제로 바라흐하나 우무스와의 접점을 시사한 양피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 양피지는 애초에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처리할 것이다.

<8권에서 계속>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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