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위기와 기회
다음 날, 카샤린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연합이 카샤린을 노린다는 소식이었다. 카샤린 시는 비교적 소규모의 폴리스로 서이스테르 강 남쪽 마르탄 초원에 위치해 있었다.
제2 바실레오스 티모테우스는 주요 군단장과 유력가문의 가주들을 소환했다. 더글라스 가문에서는 히어데로 대신 커트리안이 참석하게 되었다. 물론 옵저버 자격으로 바라흐하도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제1군단장 우무스의 질문에 카샤린 전령이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두 개 군단 정도로 보고되었습니다.”
“어느 방면 군단이지?”
“깃발로 추측컨대 린드그렌 쪽 군단으로 판단됩니다.”
린드그렌 시는 아도니아 평야 북쪽에 위치한 군사 폴리스로 연합의 주축 중 하나였다.
“방어 병력은?”
“최근 병력 피해가 막심했어서…… 불과 2개 사단 정돕니다.”
그 말에 우무스가 노성을 터트렸다.
“터무니없는 소리! 카샤린 시는 예비군도 없단 말인가? 폴리스가 위험에 처했는데, 불과 두 개 사단밖에 운용을 못한다?”
“동원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복무 기간을 넘긴 노인들이거나 이제 갓 성인이 된 신병들뿐입니다. 린드그렌 시의 정예병들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전령의 목소리가 조금 불퉁해졌다. 폴리스의 고참병들이 다 빠져나간 이유가 뭔데, 그 주체가 이를 추궁하니 목소리가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우무스는 이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초원 부족들을 총동원하고, 성을 배경으로 전투를 벌인다면 충분이 막아 낼 수 있지 않은가? 상대가 열 개 군단이라도 된다던가? 성을 끼고도 불과 두 개 군단을 못 막겠다고 앓는 소리를 하다니 카샤린 시도 다 됐군.”
전령은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언제부터인가 켈커티스의 독선이 도를 넘었다. 동맹의 폴리스를 마치 속지 대하듯 했다. 그건 카샤린같이 작은 폴리스일수록 더했다.
초원을 달리던 수많은 전사들이 켈커티스의 동원령에 속절없이 전장으로 끌려 나갔다. 폴리스의 고참병들은 말을 버리고 보병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낯선 전장에서 죽어 갔다. 결국 두 개 군단이 두 개 사단으로 쪼그라들었다.
전령의 심정과는 무관하게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바실레오스 티모테우스.”
우무스는 형식상 이 회의 주제자인 티모테우스를 바라보았다.
“카샤린 시가 당하면 마르탄 초원을 통째로 넘겨주는 셈이오. 말과 갈리온의 수급에 영향을 받을 것이오. 또한 가장 인접한 동맹 폴리스인 마그누스 시까지만도 이백 킬로미터, 되찾으려면 상당히 애를 먹을 수밖에 없는 곳이오. 전령은 들어라!”
모멸감에 이를 악물고 있던 전령이 고개를 들었다.
“켈커티스는 반드시 지원군을 파견할 것이다. 그리 알고 물러가 있도록!”
전령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물러나자 우무스가 투덜거렸다.
“이보시오. 바실레오스 티모테우스, 지금 켈커티스도 상황이 여의치 않소. 오누르스 만에도 켈커티스 군단이 아닌 다른 폴리스의 군단을 주둔시킨 형편이란 말이오. 이미 포기한 거나 다름없는 카샤린 시를 돕기 위해 직접 나서기라도 하겠단 말이오?”
“동맹을 다 잃고 홀로 아도니아와 맞설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도와야 하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센드버그 시도 한번 건드려 볼 생각이오.”
티모테우스는 슬그머니 바라흐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그가 반대할까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바라흐하는 묵묵히 논의를 지켜보기만 했다.
우무스가 언성을 높였다.
“엘리티아 평야를 수복해 보겠단 말씀이시오? 연합이 손 놓고 지켜보기라도 한단 말이오? 노르드스톰 시와 뱅갈스톤 산성 병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오?”
마르탄 초원과 엘리티아 평야는 인접해 있지만 엘리티아 평야는 네리아 산맥에서 흘러내려온 풍부한 수원 덕에 천혜의 곡창이 되었다. 반면 물이 부족한 마르탄은 초원이 되었다.
마르탄 초원의 카샤린 시와 엘리티아 평야의 센드버그 시는 이백삼십 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있었다. 초원과 평야, 시야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군대의 이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기습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센드버그 시 배후에 위치한 폴리스인 노르드스톰 시와 엘리티아 평야의 유일한 산악지대에 위치한 뱅갈스톤 산성도 문제였다. 노르드스톰에는 최소 두 개 군단 이상의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을 것이 뻔했고, 뱅갈스톤 산성은 전략적 요충지로 역시 상당한 병력이 주둔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불과 이 년 전까지만 해도 전부 켈커티스의 영역이었던 지역이었다.
“수복까지 바라진 않소. 다만 그쪽 병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도록 압박이나 해 보겠다는 말이지.”
“압박을 하려면 상당한 군세를 동원해야 할 텐데…… 설마 두 개 군단 이상 동원하실 생각이오?”
“그럴 작정이오.”
“현재 가용 가능한 군단은 2군단 외에는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소?”
“마리노에 내려가 있는 마티아스 시 쪽 군단을 불러들일 생각이오. 당장 오르비스 평야를 재공략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곳에 2개 군단이나 추가 주둔할 이유가 없소. 그들로 3군단을 대체하고 3군단을 이번 전투에 동원하겠소.”
맞는 말이었다. 오르비스 평야 공략이 무산된 마당에 이미 두 개 군단을 보유하고 있는 마리노시에 추가로 2개 군단을 주둔시키는 것은 낭비였다. 그리고 켈커티스 외곽 예비 병력으로 주둔 중인 3군단은 너무 오래 전투에 동원되지 못했다. 사용하지 않는 검은 녹이 스는 법, 사용할 때가 지났다.
“좋소. 하지만 뱅갈스톤 쪽은 어쩌시려오?”
그랬다. 엘리티아 평야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곡창에 위치한 센드버그 시도, 노르드스톰 시도 아니다. 바로 그곳 뱅갈스톤 산성이었다. 뱅갈스톤은 둔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보통 산성으로 불렸다. 엘리티야 평야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산악에 위치해 있으며 평야 어느 곳으로도 출진이 가능한 요충지였다. 뱅갈스톤이 버티고 있는 한 엘리티야 평야에서의 병력 운용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장기적으로는 뱅갈스톤을 얻은 세력이 결국 엘리티야 평야 전체를 먹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우무스가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군단을 동원했다가 뱅갈스톤 병력에 뒤를 맞게 되면 두 개 군단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군단장의 걱정도 일리가 있으나 내게도 다 생각이 있소.”
“군단의 운용은 모두 티모테우스 님의 소관이니 관여하지는 않겠소만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에 손실이 생길까 걱정이오.”
군단장 우무스가 사실 제2 바실레오스인 티모테우스의 지휘하에 있었음에도 이렇듯 방자할 수 있다는 것은 제2 바실레오스의 권력이 허약하다는 반증이었다. 사실 티모테우스가 실질적으로 운용 가능한 병력은 직속의 2군단이 다였고, 예하 사단장들도 바라흐하가 지명한 인원이었다. 따지고 보면 일개 군단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말인데…… 3군단과 함께 별도로 몇몇 기사들을 지원받고 싶소.”
그렇게 말하며 티모테우스는 켈커티스에서 제법 명성이 높은 기사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때 커트리안이 나섰다.
“바실레오스 티모테우스 님이 허락하신다면 그들 대신 더글라스의 가병들과 나의 동료들을 동원하고 싶소. 모두 일당백의 전사들이오.”
그 말에 회의에 참석했던 여러 가주들이 깜짝 놀랐다.
가병은 개개인의 복무 기간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전쟁에 동원되지 않는다. 가병이 줄면 가문의 위세도 줄고, 가병이 전사하면 그에 따른 비용 지출도 만만치 않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에 더해 최근 골칫거리로 떠오르곤 있지만 실력만큼은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생환자들까지 동원하겠단 말에 티모테우스가 반색했다.
“오호! 더글라스 가문이 돕는다면 큰 힘이 될 것이오. 직접 출진하실 생각이오?”
“물론이오. 그동안 쌓인 게 좀 많소. 아도니아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줄 기회를 마다할 생각은 없소.”
커트리안은 노골적으로 바라흐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단, 작전참모의 지위를 약속받고 싶소.”
티모테우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작전참모란 실질적인 군단의 운용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과거 커트리안은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커트리안은 난폭하고 충동적이며 통제가 불가능한 인물이 되었다. 시민들 사이에서도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었고, 그 소문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바라흐하가 끼어들었다.
“더글라스가의 실질적인 가주에게 참모의 지휘는 어울리지 않지. 부군단장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소?”
부군단장, 직위상으로는 군단장과 작전참모 사이다. 얼핏 들으면 상당한 배려로 생각될 수 있는 직위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부군단장이라는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군단장이라는 직위는 가끔 유력가문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임시로 마련되는 자리다. 즉, 후계자들이 안전하게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가문이 군단에 지원금을 내고 마련하는 자리였다.
부군단장이 되면 모든 작전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 군무를 익히는 데, 전술과 작전을 배우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하지만 군단장이 전사하지 않는 이상 아무런 실권도 갖지 못하는 명예직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군단장이 전사하는 경우는 군단이 궤멸적 타격을 입는 경우 외에는 거의 없었다.
부군단장 자리를 제안한 것은 아직까지 커트리안을 믿지 못하겠다는 바라흐하의 의사 표현이었다.
바라흐하의 의견에 티모테우스는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레오스 바라흐하 님의 의견이 과연 합당하오. 부군단장의 지위를 맡아 주시겠소?”
커트리안은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지만 겉으로는 감사를 표했다.
“바실레오스 바라흐하 님과 바실레오스 티모테우스 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 커트리안,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 후로도 좀 더 길게 회의가 이어진 후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티모테우스가 직접 2군단과 3군단을 동원해 카샤린을 도와 동맹 폴리스로부터 믿음을 얻는다. 그 후 센드버그로 진군하여 연합에 경종을 울린다. 연합의 지원군이 도달하기 전에 카샤린으로 후퇴한다. 간명했다.
회의가 끝나고 일어서는 참에 커트리안이 티모테우스를 불렀다.
“부군단장의 직위까지 내려 주신 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약속드리겠소. 더글라스가는 차기 선거에서 티모테우스 님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오.”
크지는 않았지만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커트리안의 말에 티모테우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런 자리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은밀히 진행하는 일이다. 분명 바라흐하의 의사에 반하는 일, 그가 연임을 노린다는 걸 바라흐하가 알게 된다면 그의 뜻대로 진행되기는 어렵다. 아니 오히려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 그 무슨 말씀이시오? 난 이번 임기를 끝으로 은퇴할 생각이었소.”
하지만 커트리안은 여전히 눈치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말이라니요? 지난번 더글라스가의 지원을 부탁하시지 않으셨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저, 절대 아니오. 나이 탓인지 건강도 좋지 않고, 쉬고 싶을 뿐이란 말이오.”
“허,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누굴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알겠소. 다 없던 일로 합시다, 커험!”
커트리안은 찬바람을 날리며 티모테우스를 지나쳐 갔다.
홀을 빠져나가던 우무스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몇몇 가문의 가주들도 가볍게 혀를 차며 홀을 나섰다. 이렇게 공개된 마당에는 티모테우스를 지원해 줄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