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80화 (80/142)

80. 크로아지크의 금광

커트리안 입장에서는 티모테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의 계획이 성공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보다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았다.

커트리안이 아는 바라흐하는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다음 선거에 대한 대비를 해 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대비는 당연히 바실레오스의 선출권을 가진 원로들에 대한 장악이었을 터, 최소한의 정적 수는 확보해 뒀을 터였다. 겉으로 바라흐하에게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원로들 중에는 내심 바라흐하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라는 원로도 있을 것이다. 비밀은 언제든 새기 마련이고 꼬리가 길면 밟히는 게 이치다. 그림자들을 장악하고 있는 바라흐하의 이목은 생각 이상으로 밝았다.

커트리안은 숙고에 들어갔다.

숙고 끝에 커트리안은 티모테오스의 계획에 동조하는 대신 새로운 음모를 구상했다. 커트리안은 티모테우스의 2군단을 손에 넣기로 결정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국지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국지전 중 하나가 이 구상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문제는 보급이었다. 2군단을 먹는다 해도 보급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커트리안은 많지 않은 선택지를 놓고 다시 깊은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그 문제는 귀한 소식을 가져온 손님에 의해 바로 해결되었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서재의 문을 밀고 들어선 인물은 헤리엇이었다.

“대장, 크리들이 도착했습니다.”

고향 폴리스로의 귀환도 마다하고 웨툼 시로 떠났던 크리들이 돌아온 것이다. 노리앙을 제외한다면 목표와 안면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 크리들이었다.

커트리안이 예를 취하는 크리들을 일으켜 세웠다. 마계의 문을 함께 헤쳐 온 동료다. 이제는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둘은 가볍게 포옹을 주고받고 응접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갔던 일은 잘 되었나?”

커트리안의 질문에 크리들은 대답 대신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거기에 뭐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걸 알자고 자네를 보냈던 것 아닌가?”

“킬킬, 그렇군요. 커트리안 님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노리앙의 선물은…….”

크리들은 다시 한 번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 말꼬리를 늘였다.

“말해 보게! 노리앙이 말했던 선물이 무엇인지?”

“놀라지 마십시오. 노리앙의 선물은 황금이었습니다.”

“황금?”

“그것도 아주 많이!”

커트리안은 눈이 커졌다.

“아, 테무아가 부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좀 어려운 상태지요.”

커트리안은 의아한 시선으로 크리들을 바라보았다. 황금이 선물이라면서 선물을 줄 당사자가 어려운 상태라니?

“노리앙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테무아를 찾아 자신이 보내서 왔다는 말을 전하라고요.”

“기억하지. 만약 테무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죽이는 것이 좋다고 했었지.”

“맞습니다. 그리고 그는 올바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물론 달리 방법도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크로아지크의 부아칸 산을 기억하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대장은 잘 모르시겠지만 일반반원들은 늘 그 산에 가서 노역을 하죠.”

“알고 있네. 대규모 철광산이 있지.”

“철광산이 아니고 금광산입니다.”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시선에 놀람이라는 감정이 담겼다.

“금광산이라니? 그럼 철광은 아도니아의 위장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아도니아는 그 산을 철광산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 철광산에서 대규모 금맥이 발견됐습니다.”

커트리안의 가슴이 오랜만에 두근거렸다. 고민해 오던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테무아와 노리앙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금맥은 발견 즉시 폐광 처리했다니까요. 저도 기억하는 사건입니다.”

말을 하면서 크리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갱도가 무너져 여러 사람이 죽고 다쳤던 사건을 떠올린 것이다.

“놀라운 일이군. 매장량은?”

“금맥이 덩어리로 형성되었을 정도라니 상상 이상일 겁니다. 문제는 북중부 꼭대기에 있는 크로아지크를 먹어야 한다는 거지요.”

고민이 말끔히 씻겨 나간 커트리안은 오랜만에 농을 던졌다.

“마계의 문 근처도 가기 싫은데?”

“킬킬, 농담도 참…….”

“좋군. 문제는 그 넓은 크로아지크를 어떻게 먹느냔데, 채광을 하려면 일시 점령으론 곤란하겠지?”

“당연하지요. 광부로서 말씀드리는데, 매장량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지만 ‘선’이 아니라 ‘면’으로 금맥이 형성됐다면 적어도 이 년은 파먹을 수 있을 겝니다.”

“알겠네. 마침 생각해 놓은 일이 있지. 그보다 테무아라고 했나? 그 친구는 어떻게 했나?”

“일 할을 요구하더군요. 더불어 커트리안 님의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재기를 꿈꾸더군요.”

“재기라? 정치적인 제기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애초에 밀려난 정치인이었습니다. 몸값을 지불하고 포로의 신세는 면했지만 재기를 꿈꾸기에는 많은 것들이 모자랐을 겁니다. 그 일 할의 자금과 켈커티스의 후원이라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되겠지요.”

“우리를 어떻게 믿고?”

“마계의 문에서 생환한 영웅들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못 믿어도 달리 도리가 없을 테고요. 웨툼시는 크로아지크를 넘볼 능력이 안 됩니다.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놔 봐야 암살이나 안 당하면 다행일 겁니다. 테무아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일 할이라…… 욕심이 많은 자군. 입단속은 잘해 놨겠지?”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가벼운 자는 아닙니다. 그랬다면 이미 살아 있지 못했겠지요. 다른 자의 손이나 제 손에 말입니다.”

“한 번이라도 입을 열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겠지.”

커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리앙이 직접적으로 비밀을 말하지 않고 테무아에게 들으라고 했던 것은 노리앙 역시 그에게 신의를 지켰다는 말이다. 그건 테무아 역시 신의를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노리앙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오랫동안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노리앙은 무사할까요?”

커트리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사하길 바라야지.”

“그는 최고의 전사니까 무사할 겁니다.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반드시!”

커트리안와 크리들은 잠시 대화를 잊고 노리앙에 대한 추억에 잠겼다.

☆ ☆ ☆

이백여 마리의 오크 떼가 무언가를 쫓아 평원을 질주했다.

무리가 쫓는 것은 세 마리의 거인족이었다.

거인족은 침략군 중 최강의 마물이었지만 머리를 잃은 후 오크 떼에게도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건 거인족뿐만 아니라 마인과 케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의 법을 다루는 케이지니스는 각자 알아서 귀환을 했고, 철모르는 기형 미물들은 덧없이 날뛰다가 죽어 갔다.

살아남은 마물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고, 발각되면 지금처럼 쫓기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 세 마리의 거인족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거인들이 오크로부터 도주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오크들의 짧은 발로는 거인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지금도 오크들과 거인족들의 거리는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주변에 흄이나 어둠의 기사가 없는 한 그들은 무사히 몸을 숨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인들로서는 불행하게도 이 다리 짧은 사냥꾼들 중에 거인들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있는 인물이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슬슬 뒤를 쫓던 조노량의 신형이 갑자기 쭉 뽑아져 나갔다. 경공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조노량은 성격상 일부러 찾아서 싸움을 즐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었다.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자 거인들과의 거리가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암경이 가능한 거리까지 좁혀졌다.

후웅!

소리 없이 발출된 암경이 거인의 등에 꽂혔다. 그 순간 퍼벅 하며 거인의 등이 터져 나갔다.

거인도 조노량의 기에 반응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반응이 표피를 뚫고 나올 정도의 존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암경을 맞은 거인의 등이 끔찍하게 터져 나갔다. 거인은 구슬픈 포효를 내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노량은 다리에 좀 더 힘을 가했다. 쓰러진 거인을 지나치고 두 번째 거인의 등으로 오첩도가 날았다.

퍼엉!

오첩도가 두 번째 거인의 등을 갈랐다. 아니 터트렸다. 무방비 상태로 등을 얻어맞은 흐림두르스는 서너 바퀴를 뒹굴고 나동그라졌다.

맨 앞을 달리던 무스펠이 반전하며 조노량을 향해 불덩이를 집어 던졌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익을 것 같은 열기가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지나갔다. 길게 흩날리던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지직거리며 노린내를 풍겼다.

다시 무스펠의 기둥 같은 팔뚝이 조노량을 향해 휘둘러졌다. 무스펠의 팔뚝에 어린 묵직한 경력에 더해 달려 들어가던 가속도가 더해졌다. 비단 열기가 아니더라도 조노량의 신체가 감당할 파워가 아니다.

그러나 조노량의 움직임은 우코르바흐도 분노케 할 만큼 빨랐었다. 이 정도 공격에 당할 수준이 아니다.

조노량의 신형이 밑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거인의 팔뚝은 바닥에 붙다시피 미끄러지는 조노량의 몸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아래로 가라앉았던 조노량의 몸이 불꽃으로 이글거리는 무스펠의 가랑이 사이를 순식간에 지나쳤다. 동시에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 순간 무스펠의 허벅지가 터져 나갔다. 속도를 잃지 않기 위해 깊이 베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스펠의 허벅지에서 거센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로 터진 자리로 불타오르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마치 불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조노량이 몸을 돌려세웠을 때 무스펠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뒤늦게 질주해 온 오크들이 쓰러진 거인들을 덮쳤다. 두꺼운 몽둥이, 마물에게서 뽑아낸 정강이 뼈, 이 빠진 도끼, 글레이브 등 가지각색의 둔기와 날붙이가 거인들의 거대한 몸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호랑이에게 달려드는 사냥개들 같았다. 심대한 타격을 입은 거인들이지만 발악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 주먹에 걸리면 난폭한 오크들도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하나가 떨어지면 둘이 달려들었다. 둘이 쓰러지면 네 개의 몽둥이가 떨어져 내렸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도 매에는 장사가 없다. 그리고 그 매는 골곤도 두드려 잡는 오크의 매였다. 오래지 않아 거인족 세 명은 처참히 뭉개진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거인을 모두 처리한 오크들이 조노량을 향해 씩씩대며 엄지를 곧추세웠다. 조노량은 어느새 회색 오크족 최고의 전사가 된 것이다.

오크가 조노량을 동류로 취급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조노량은 쓴웃음을 짓고는 방금 전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그 끔찍했던 계곡 전투 후 급격히 증진된 내공의 영향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갑자에 이른 내공은 그를 더 빠르고 강하게 만들어 줬다. 더불어 마물들의 반응이 좀 더 커지고 격해졌다. 늘어난 내공보다 반응의 세기가 월등이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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