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배신과 음모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시선이 가문의 수석 기사인 도나티우스를 향했다.
“우리가 궁금한 건, 무슨 이유로 연합의 포로들을 처형했느냐네.”
도나티우스는 지은 죄가 있는 터라 커트리안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거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라고 기억합니다. 당시 잇단 패전에 폴리스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분위기 전환책 아니었을까요?”
“클클, 연합의 반응은 고려하지도 않았다는 얘긴가? 그리고 동맹 측 포로들의 생사는 안중에도 없었고?”
커트리안의 비틀린 말에 기대원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굳혔다. 기실 따지고 보면 기대원들이 마계의 문으로 가게 된 단초는 켈커티스가 제공한 것이다.
켈커티스가 연합의 주요 포로들을 처형하자, 아도니아는 그 보답으로 동맹의 포로들을 마계의 문으로 몰아넣었다.
“가장 득을 본 사람은 역시 바라흐하인가?”
그 말에 도나티우스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설마 바라흐하 왕이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닌가?”
“포로들의 처형을 가장 먼저 주장한 건 우무스 1군단장입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쥬시아누스 님의 아버님이신 더드리안 공도 강력하게 찬성하셨고요.”
“우무스는 바라흐하의 사람으로 알고 있네만?”
커트리안의 말에 도나티우스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목소리를 높여 반박했다.
“포트토르가는 더글라스가에 못지않은 명문가입니다. 바라흐하 왕과 뜻을 같이하고 있지만 사주를 받을 분은 아니십니다. 행여라도 우무스 님이 듣는다면 가만있지 않으실 겁니다.”
“가만있지 않으면? 내게 결투라도 신청할 거란 뜻인가?”
도나티우스는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커트리안 님, 왜 자꾸 이러시는 겁니까? 최근 폴리스에 어떤 소문이 퍼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소문?”
“아시지 않습니까? 생환자들이 마기에 물들어…… 아 죄송합니다. 일행 분들이 툭하면 전사들을 상대로 결투를 신청하고 잔인하게…… 죄송합니다. 불필요하게 상대를 죽인다고…… 커트리안 님도 벌써 셋이나 베셨습니다. 이러다가 시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도나티우스의 입에서 벌써 몇 차례나 감정이 묻어나는 말이 나왔지만 커트리안은 불쾌해하는 표정도 없이 도나티우스를 향해 미지근한 미소를 보냈다.
“마기에 물들었다?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군.”
“제발 조심하십시오.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도나티우스는 성은 다르지만 더글라스가의 방계 가문 사람이었다. 더글라스가의 안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민감한 척해야 했다.
“원로원의 동의는 어떻게 얻어 낸 거지?”
“커트리안 님!”
커트리안이 자신의 충고를 들은 척도 않자 도나티우스의 언성이 저절로 높아졌다.
그 순간 지켜보고 있던 스마르가 나지막한 어조로 경고를 날렸다.
“질문하셨다. 답을 해야지, 도나!”
스마르의 말투에 어린 냉기를 감지한 도나티우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현재는 도나티우스가 가문의 수석 기사지만, 스마르는 두 대 전 수석 기사다. 당시 가문의 전사들은 스마르 앞에서 숨도 쉬지 못했다.
“우무스 님과 더드리안 공께서 강력히 주장했고, 바라흐하 왕도 이를 지지했습니다. 로크리안에게 당한 잇단 치욕에 동맹 전체가 분노하던 시기였습니다. 의견이 나오고 불과 일주일도 안 돼서 원로원의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말을 하는 도중 도나티우스의 눈이 잠시 쥬시아누스에게 향했다. 아들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아비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에 그 아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도나티우스를 주시하고 있던 예니에프는 그의 눈에 어린 조소를 놓치지 않았다. 겉으로는 쥬시아누스의 심정을 헤아리는 듯 가장하지만 그의 본심은 아비에게 버림받은 자식을 조소하고 있었다.
도나티우스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쥬시아누스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라면 능히 그러셨을 거다.”
쥬시아누스가 아는 레오니우스 더드리안은 가문의 안위보다는 폴리스의 안위를, 아들의 안위보다는 군인의 자부심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자신 역시 그러했고 말이다.
쥬시아누스를 힐끗 바라본 커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전후 사정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포로들을 처형한 시기는 묘하게도 켈커티스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맹 체계에 대해 다른 폴리스들의 불만이 높아진 시점이었다. 로크리안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맞아 변변한 대응도 못하는 켈커티스에 대한 신임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 말이다. 또한 내부적으로도 바라흐하의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이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켈커티스의 포로 처형과 아도니아의 강경 대응으로 인해 동서전쟁의 양상은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단숨에 확산되었다. 외환 앞에서 내환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동맹은 다시 켈커티스를 중심으로 세를 집결시켰고, 그 정점에는 바라흐하가 서 있었다. 시민들의 불만도 자연스럽게 진화(鎭火)되었다.
“소도 잃고 외양간도 망가진 꼴이 아닌가?”
커트리안은 탄식했다. 단합된 아도니아 연합의 힘은 막강하다. 병력은 두 배를 상회했고, 보급은 풍부했다. 작전권까지 일원화되었다면 동맹이 버텨 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바라흐하의 권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비상령 선포로 의결권을 잃은 원로원이 당시의 잘못을 들어 바라흐하를 탄핵할 수도 없는 일, 그랬다가는 국론을 분열시키는 소인배라고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절묘하군요. 권력이 흔들리던 시점에 그 한 수로 권력을 확고히 했다?”
샤마노프가 과장되게 감탄사를 토해 놓았다.
“설마?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부 대륙 전체를 전란으로 몰아넣다니? 아무리 바라흐하라 해도 그렇게까지 했다고는 믿기 어렵네.”
쥬시아누스가 그럴 리 없다는 듯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긴, 제가 철이 든 이후로 제1 바실레오스는 늘 바라흐하였으니까……. 참 오래도 해먹었네요. 그만 물러나도 충분히 명예로운 일이죠.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예니에프가 동의하고 나서자 아무것도 모르는 하이오지와 헤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제적으로도 부족한 것 없겠다, 시민들에게도 존경받겠다, 뭐 아쉬워서 미친 짓을 했겠나? 잘못되면 추방까지 당할 위험을 안고서 말이다. 그게 폴리스인들의 상식이었다.
쥬시아누스를 비롯한 기대원들의 반응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자 도나티우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자리를 비웠던 차츠라가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차츠라는 커트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인 후 자리에 앉았다.
도나티우스의 시선도 차츠라에게 향했다. 그림자 출신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할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확인했나?”
“몇 가지 증거품도 챙겨 왔습니다. 발을 빼긴 힘들 겁니다.”
도나티우스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관심을 끊어 버렸다. 생환자들의 이해 못할 행동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더글라스가의 서재, 삼백 년간 모아 왔던 수백 권의 가죽 책자가 마호가니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다. 값비싼 투명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책장과 동일한 재질로 만들어진 책상에 커트리안이 앉아 있었다. 수십 년간 히어데로가 차지했던 책상이지만 이제 공식적으로 커트리안의 차지가 되었다.
커트리안은 찬란한 아침햇살을 등 뒤로 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흘 전 바라흐하와의 면담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도 충분히 전달되었다. 더글라스 가문에 심어져 있는 간자를 통해 생환자들과 자신의 동태를 보고받았을 것이며, 그날 면담으로 자신의 변화된 성향을 확인했을 것이다. 위협적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용해먹기 좋은 대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원한다면 시민궁을 피로 씻어 낼 수는 있으나 시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강한 무력을 가졌더라도 켈커티스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다. 이길 수도 없을뿐더러, 이긴다 한들 시민궁 광장에 혼자 오두막을 짓고 살아야 할 것이다. 죽은 자들의 도시를 떠돌려고 그 힘든 시련을 겪어 낸 것이 아니다. 켈커티스를 갖겠다는 말은 텅 빈 도시를 갖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 힘을 키워야 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전사들은 있으나 그들을 받쳐 줄 병사가 없다. 그러기 위해선 병력을 얻어 전장으로 나가야 했다. 바라흐하가 아무리 경계심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자신에게 순순히 병력을 나눠 줄 리는 없다.
하지만 병력을 확보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켈커티스에는 2명의 바실레오스가 있다. 한 명은 내정과 외무를, 다른 한 명은 군정을 담당한다. 바라흐하가 바로 내정과 외무를 담당하는 제1 바실레오스였다. 군정을 담당하는 제2 바실레오스가 따로 있긴 하지만 유명무실했다. 각 군단장과 사단장 대부분이 바라흐하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2 바실레오스는 그야말로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다.
커트리안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제2 바실레오스 티모테우스다. 바라흐하에 의해 앉혀진 것이나 다름없는 어용 바실레오스다. 배경으로 삼을 가문도 없고, 실질적인 군권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야심이 있었다.
바라흐하 자신은 다섯 번이나 제1 바실레오스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제2 바실레오스의 연임은 허락하지 않았다. 집권이 장기화되면 세력이 붙는다. 세력이 붙으면 야심이 생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상대를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바라흐하의 다섯 번째 파트너, 티모테우스는 그런 바라흐하의 의도에 반하는 움직임을 은밀히 가져 가고 있었다. 커트리안이 알게 된 계기도 티모테우스 측의 접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라흐하의 견제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켈커티스 최고의 명문가 더글라스 가문은 티모테우스에게 있어서 더없이 적합한 가문이었다. 바라흐하에게 소외된 친 더글라스계 원로들과 그 자신과 친분이 있는 원로들만 모아도 과반은 넘길 수 있다.
주요 전장들이 소강상태에 들고 오누르스 만이 뚫림으로 인해 티모테우스는 자신의 2군단과 함께 폴리스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두 달 전 일이다.
임기를 불과 일 년 남짓 남겨 둔 티모테우스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더구나 삼 년 가까이 끌고 있는 비상령으로 인해 일부 원로들과 유력 가문, 시민들의 불만이 누적된 상태. 티모테우스로서는 욕심이 일 만도 했다. 정세를 잘만 이용하면 연임도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으리라.
그가 제시한 조건은 비상령의 해지와 원로원에게 의결권을 돌려준다는 것.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형식적이었지만 비상령의 선포와 해지는 두 명의 바실레오스의 합의에 의해 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바실레오스의 의견이 대립될 때에는 원로원의 판단에 맡긴다는 규정도 있었다. 바실레오스 선출 투표를 제외하면 비상령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원로원이 의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안이었다.
티모테우스는 이런 규정을 들어 일부 원로들과 막후 접촉을 가져 가고 있었다. 물론 바라흐하가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바라흐하의 입김이 닿는 원로들은 철저해 배제시켰다.
커트리안은 그런 티모테우스의 행보에 주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