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커트리안의 가면
“안 될 말입니다.”
커트리안의 말에 히어데로 더글라스와 원로원의 핵심 원로인 스카르포 사르는 동시에 말을 잃었다.
더글라스 가문의 수장이며 켈커티스 원로원의 최고 원로인 히어데로는 올해 육십오 세로 그리 늙었다고 볼 수 없는 나이였지만, 외견상으로는 팔십도 넘어 보였다. 후계자의 실종, 가문의 쇠락, 심화로 얻은 병이 더해져 이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유일한 자식이자 더글라스 가문을 이을 적자가 돌아왔다. 더구나 폴리스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더글라스가의 도약을 뒷받침했다.
여러 가문들이 삼삼오오 뜻을 맞춰 다양한 제안을 해 오고 있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시민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구심점이 되어야 할 당사자가 이를 거부하고 나섰다.
스카르포 사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절로 굴러온 호박이다. 멀쩡한 호박을 제 발로 걷어차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네가 켈커티스를 떠나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바라흐하의 독선은 이미 도를 넘었단다. 일부 원로들은 바라흐하가 왕정제로의 전환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까지 하고 있다. 어째서 나서지 않겠다는 말이냐?”
“당분간 바라흐하 왕의 독재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켈커티스에게도 득이 될 겁니다. 지금 바라흐하 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커트리안의 의견은 여전히 확고했다. 그의 선언에 스카르포는 머리가 띵해졌다.
켈커티스의 정세와 바라흐하의 실정도 충분히 설파했다. 그럼에도 커트리안은 흔들림 없이 바라흐하를 지지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당사자가 바라흐하라는 것을 모를 리도 없는데, 어째서 이토록 꽉 막힌 자가 되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왕의 호출이 있었습니다. 시민궁으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이만.”
커트리안은 둘을 향해 동시에 목례를 건네고 망설임 없이 돌아 나갔다. 그의 등을 바라보며 스카르포는 한숨을 내쉬었다.
커트리안은 마계의 문, 그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나온 최초의 인간이었다. 무려 오백 년간의 금기가 깨진 것이다. 커트리안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을 이루었다. 북부는 물론 전 대륙이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그런 끔찍한 땅을 헤쳐 나왔으니 그가 겪었을 고초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탓일까? 칠 년 만에 만난 커트리안은 전혀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때 바실레오스에 도전했을 만큼 패기 넘치던 사내는 사라지고 꽉 막힌 고집쟁이만 남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아들은 변했습니다.”
히어데로의 한숨 섞인 고백에 스카르포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한탄했다. 다시 한 번 정치적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스스로 마다하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사르공만 알고 있으십시오. 최근 집안 노예가 다섯이나 죽어 나갔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더글라스 공.”
“커트리안과 그의 일행들의 손에…….”
“설마 그 소문이……?”
스카르포는 급히 말을 멈추었다.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한 것이다.
사실 폴리스는 생환자들에 대한 소문으로 시끄러웠다. 생환자들의 포악하고 잔인한 성격에 대한 것이었다. 그럴만한 사건도 여러 차례 있었다.
“진실입니다. 쿨럭!”
히어데로는 고개를 떨구며 기침을 토해 냈다.
“허어, 이런 일이! 켈커티스가 어찌되려고 이런단 말인가?”
“그나저나 시민궁에서는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아들의 성격이 워낙 급한 터라…….”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너무 심려 마십시오, 더글라스 공.”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들어왔다.
“더드리안 공께서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쥬시아누스의 아비였다.
☆ ☆ ☆
하지만 히어데로의 우려는 당일로 현실이 되었다.
시민궁을 찾은 커트리안이 시민궁 정문 경비대장을 살해해 버린 것이다.
형식은 결투였지만 결과는 처참한 죽음이었다. 성실한 경비대장은 오만한 커트리안으로부터 모욕을 당했고, 결국 먼저 결투를 신청했다.
사유는 이랬다. 커트리안을 잘 알고 있지만 성실한 경비대장은 원칙대로 신분 증명을 요구했다. 신분패를 제시하면 그만일 일이었지만 커트리안은 경비대장의 말을 무시하고 어깨를 밀쳐 버렸다. 그래도 참았다. 그리고 경비대장은 그대로 지나쳐가는 커트리안을 불러 세웠다. 정당한 제지였다. 그 보답은 뺨따귀였다.
경비대장은 부하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자였다. 비록 그가 켈커티스 최고 명문가의 정식 후계자며, 현재 켈커티스를 뜨겁게 달군 주인공이었지만 공식적인 지위는 없었다. 경비대장을 뺨을 때릴 만한 자격이 없는 자였다.
경비대 전체가 커트리안을 포위했다.
비웃음을 머금고 포위가 완성될 때까지 지켜보던 커트리안이 경비대장을 다시 한 번 모욕했다.
“나를 알면서도 침입자 취급인가? 부하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자신이 없나 보지? 언제부터 시민궁 경비를 전사가 아닌 겁쟁이가 맡은 것인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노골적인 도발이었고, 무시였다. 자부심 높은 켈커티스 전사로서 참아 낼 수 없는 모욕이었다.
비록 오십을 바라보는 지긋한 나이였지만 경비대장은 시민궁 정문을 담당할 만큼 건실한 실력자였다.
결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니, 시작되는 듯했다. 시작되자마자 끝났으니까 말이다.
단 일 검이었다. 단 일 검에 경비대장의 몸은 투구부터 스케일 아머까지 세로로 쪼개져 버렸다. 그의 몸은 정확히 이등분되어 천천히 벌어졌다. 이마에 가는 금이 가고 천천히 벌어지고, 내장이 쏟아지고 가랑이에 이르기까지 완벽히 양단되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 경비대원 전체가 분노했다. 대단한 전사는 아니었지만 순후한 성격으로 인해 따르는 병사들이 많았다. 별것 아닌 일로 모욕당하고 이렇게 허무하게 살해당할 정도로 잘못한 적이 없는 자였다.
경비대는 이 무도한 자를 응징하기 위해 칼과 창을 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만약 바라흐하 왕의 참모인 독토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커트리안이 죽거나 시민궁 경비대가 전멸하는 결과가 초래되었을 터였다.
독토르는 커트리안이 규정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나 결투 자체는 정당했음을 선언했다.
독토르를 따라 접견실로 향하는 커트리안의 등을 향해 증오심에 불타는 사십여 개의 눈이 비수처럼 꽂혔다.
이 사건은 그 즉시 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커트리안의 이미지는 마계의 문에서 생환한 영웅에서 흉포한 살인귀로 전락해 버렸다. 더불어 또 하나의 은밀한 소문이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접견실로 들어서기 전 바라흐하는 이미 정문에서의 사건을 보고받았다. 바라흐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껏 미소 지었다. 유쾌했다.
더글라스 가문에 심어 둔 간자의 보고가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시커먼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 자체도 변했다고 했다. 마물과 다름없이 흉포하고 성급한 자가 되었다고 했다. 커트리안뿐만 아니라 함께 돌아온 생환자 모두가 그런 성격이 되었다고 하니, 마기가 그들의 정신을 망가트린 것이 틀림없었다.
한때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경계 대상 일호였던 커트리안이지만 이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물론 자신에 대한 증오심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호위는 든든히 할 필요가 있었다.
바라흐하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호위를 구성했다. 호위대장인 하이블루, 켈커티스 최강 전사인 크룬기어를 대동하고 제1군단장 우무스를 동석시켰다. 지난 오누르스 만 회전에서 로크리안까지 패퇴시켰던 용맹한 전사들이다. 감히 발작했다가는 천하의 커트리안이라 하더라도 접견실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바라흐하가 두 명의 호위와 1군단장 우무스 그리고 참모 독토르까지 대동하고 접견실로 들어섰을 때, 커트리안은 양발을 테이블 위에 올린 채 품속에 손을 넣어 겨드랑이를 긁고 있었다. 방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직위는 차치하고라도 아비의 친구를 대하는 태도로서도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바라흐하는 바실레오스답게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 차마 잘 지냈느냐는 말은 못하겠구나.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바라흐하의 공식 명칭은 켈커티스 제1 바실레오스였으며 제1 왕이라고도 불린다.
히어데로보다도 한 살 위인 바라흐하였지만 오십 초반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젊은이들과 힘을 겨룰 정도로 건강했다. 사 년마다 치러지는 선거에서 내리 다섯 번을 이기고 벌써 이십 년간 켈커티스의 제1 바실레오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지 가늠할 수 없는 자였다.
커트리안은 그제야 한 팔은 가슴 앞으로, 다른 한 손은 뒷짐을 진 후 오른 무릎을 꿇어 예를 취했다.
당연하게도 무기는 소지하지 않았다. 접견실로 들어서기 전 순순히 회수에 응한 것이다.
“염려 덕분에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바실레오스.”
바라흐하는 흐뭇한 표정으로 커트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의외로 고분고분하다.
“우리 사이에 예는 무슨! 일어서게.”
“감읍할 따름입니다.”
커트리안은 순순히 일어나 바라흐하를 마주했으나 그의 눈빛은 이전처럼 차분하고 안정적이지 못했다. 연신 주변을 살피며 끊임없이 흔들렸다. 도발적으로 바라흐하의 눈을 직시했다가 시선을 돌리며 건들거렸다.
자신의 나약한 심성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자들의 전형적인 눈빛이었다. 평생을 정치판에서 구른 노회한 정치가 바라흐하가 이런 자들을 모르겠는가? 이런 자들은 상대방의 지위에, 재력에, 혹은 기세에 주눅 들었을 때 거꾸로 반항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럴 때 완전히 기를 꺾어 버리거나 적당히 분위기를 맞춰 주면 다루기가 쉽다.
바라흐하는 커트리안의 상태를 단박에 눈치챘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으면 이 지경이 됐을까?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전사가 되지 못한 뒷골목 건달들은 싸움은 곧잘 하지만 정서가 불안하다. 기분에 따라 어디로 튈지 모른다. 커트리안이 그랬다.
성정이야 어쨌든 간에 시민궁 정문을 책임진 경비대장을 단칼에 쪼갤 실력이라면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런 자는 적당히 따뜻하게 대해 줘야 한다. 잘못 대응하면 막나가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실제 실력에 대한 테스트는 필요하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리고 하이블루는 믿을 만한 전사였다.
“자자, 이러지 말고 가서 앉지.”
바라흐하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커트리안을 소파로 이끌었다.
바라흐하가 따뜻하게 대우하자 커트리안의 눈빛이 안정을 되찾았다. 역시 자신의 안목은 틀림이 없었다.
“자네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르네. 그래도 이렇게 건강히 살아 왔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디의 축복일세. 그저 감사할 따름일세.”
“하하, 바실레오스께서 저를 이토록 생각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공무에 바쁘신 거 같아서 불러 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좀 진작 불러 주시지 그랬습니까?”
부를 때는 무시하더니? 뭐, 상관없다. 어디 예뻐서 불렀겠는가? 다 정치적 제스처였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역시 자신의 눈이 틀림없었다. 예전의 커트리안의 모습은 이제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조금만 인정해 줘도 금방 기세가 오르지 않는가? 전형적인 소인배다. 바라흐하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커트리안이 겸손을 가장하며 말했다.
“작은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받아 주십시오.”
“어허, 우리 사이에 무슨 격식을 차리는 겐가?”
“들여라!”
커트리안이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시종이 작은 함을 하나 받쳐 들고 들어왔다. 하지만 커트리안을 향하지 않고 바라흐하에게 직접 전달했다. 내용물 때문이다.
함을 열어 본 바라흐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함 속에서 나온 물건은 완만하게 휜 하얀색 단검이었다. 마치 상아를 깎아 만든 장식용 단검 같았다. 순백의 색상과 정교하게 다듬은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골곤이라는 마물의 뼈를 다듬어 만든 단검입니다. 비록 뼈로 만든 검이지만 강철보다 단단합니다.”
“허, 놀라운 물건이구나?”
“나중에 호위를 시켜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허, 안 될 말이네. 행여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런 공예품은 잘 간직해야 하는 법일세.”
“만족해하시니 다행입니다.”
“고맙구나. 그래 마계의 문은 어떠했는가? 소문대로 그렇게 무서운 곳이던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곳이죠.”
“어떤 마물들이 있던가?”
“오크나 고블린, 놀 등은 발에 채일 정도였습니다. 물론 트롤이나 오우거도 무섭지만 정작 무서운 놈들은 따로 있지요. 그 골검의 주인도 그중 하나입니다. 결국 제 검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후후, 그리고…….”
한창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을 때, 바라흐하 뒤에 시립해 있던 호위대장 하이블루가 노골적인 조소를 날렸다. 바라흐하의 지시에 따른 떠보기였다.
“입으로 마물을 잡았나 보군.”
커트리안의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 나왔다.
“클클, 감히 나를 비웃는 건가?”
하지만 크룬기어와 함께 켈커티스 최고의 전사라 칭송받는 하이블루는 커트리안의 살기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비웃긴! 과연 그 정도 실력이 되는지 의문을 표한 것뿐이다. 그 잘난 실력을 한번 견식해 보고 싶군.”
“클클클, 젊은 친구가 겁이 없군. 목을 걸어야 할 거다.”
커트리안도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바라흐하의 경각심을 적당히 늦춰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대도 같은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아니, 자네들 왜 이러는가? 이 좋은 자리에서! 하이블루 자네, 어서 사과하게!”
그 순간 바라흐하가 나서 짐짓 하이블루를 꾸짖는 시늉을 했다. 물론 진짜로 말릴 생각이었으면 좀 더 강경했겠지만 말이다.
바라흐하의 기대대로 하이블루는 전혀 사과할 생각이 없었다.
커트리안도 무슨 상황인지 대략 짐작이 갔다. 장단을 맞춰 줄 필요가 있었다. 커트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건방진 호위를 두셨습니다, 바실레오스? 허락하신다면 제가 교육을 해 드리지요.”
마지막 말을 이을 때는 진짜 살기를 흘렸다.
아까와는 격이 다른 살기였다. 하이블루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검을 잡아가다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자신도 모르게 반응해 버린 것이다. 자존심을 상했다.
“빌어먹을 자식! 뼈마디를 자근자근 분질러 주마. 바실레오스, 허락해 주십시오. 더글라스가의 대는 끊어 놓지 않겠습니다.”
‘대를 끊지는 않겠다?’
커트리안은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담았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좋은 의견을 제시해 줬으니 실수로 목숨을 잃는 불상사는 면했다. 사실 그런 불상사는 검투사 시절에 수도 없이 경험했다. 아주 전문적으로 말이다.
바라흐하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승낙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를 죽일 수 있다면 죽이는 것이 좋으니까.
“좋네. 단, 시합만 허락하겠네. 결투는 용납할 수 없어. 둘 모두 켈커티스의 동량들일세! 서로를 해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게!”
둘이 모두 동의하자 바라흐하가 말했다.
“시민궁 기사를 위한 전용 수련관이 있지. 그리로 가세. 단 나 외의 입회인은 여기 있는 세 명만 허락하겠네.”
맨 뒤를 따르는 우무스는 커트리안을 비웃었다. 켈커티스를 오랫동안 떠나 있던 커트리안은 모르겠지만, 하이블루는 자타가 공인하는 켈커티스 최강자 중 하나다. 커트리안이 마계의 문에서 어떤 마물들을 상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지에 오른 전사를 상대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반면 커트리안은 뒤를 따르는 우무스를 애도했다. 그의 시간은 오늘밤으로 끝나게 될 것이니까.
쾅!
하이블루는 숨을 헐떡이며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가빴다. 제일 참기 힘든 건 아직까지도 얼얼한 아랫도리였다. 축축한 것이 출혈도 느껴졌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더글라스가에서 어찌 저런 망종이 나왔단 말인가? 전사로서의 긍지도 자부심도 없는 자였다. 어찌 남자가 되어서 그곳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것도 빌어먹을 발로 말이다.
그 한 방으로 전세가 기울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격통에 웅크린 하이블루의 등으로 비열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러곤 큰 소리로 비웃었다.
하이블루의 눈에 바라흐하와 우무스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았다. 이미 전세는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 돼 버렸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겨우 몸을 추스른 하이블루는 분을 이길 수 없었다. 그의 검에 어린 오오라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올랐다. 뒷일이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상대를 베고 짓이기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불과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하이블루는 기진하고 말았다. 하긴 하초에 힘이 빠진 상태에서 무리했으니 이 지경이 된 것도 당연했다.
솔직히 커트리안의 실력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검이다. 흥분으로 오오라가 폭주했다. 짧은 시간 동안은 그가 낼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기까지 했다. 그런 검격을 받아 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은 증명되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더 싸워 봐야 사나운 꼴만 보일 것이 뻔했다.
그때 마침 바라흐하가 대결을 중지시켰다.
“자, 이제 그만. 그 정도면 됐네. 한 식구들끼리 죽기 살기로 싸울 일은 없지 않나?”
바라흐하 역시 북부의 전사다. 힘의 우열을 구분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예상대로 커트리안은 힘으로 누를 상대는 아니었다. 비록 비겁한 수를 사용했지만, 싸움은 시합이 아니다. 그건 시합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무슨 수를 쓰든 이기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런 면에서 커트리안이 이긴 싸움이었다.
다만 생환자라고 해서 아주 대단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하이블루가 커트리안의 수를 미리 예상하고 대비했더라면 이렇게 밀릴 시합도 아니었다. 크룬기어를 바라보자 그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 듯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바라흐하의 중재에 커트리안이 검을 거두었다.
“알고 있겠지만 발 대신 검을 썼다면 넌 죽은 목숨이다.”
하이블루는 이를 악물 뿐 반박하지 못했다. 비열한 놈이니 뭐니 해 봐야 사실은 사실이었다. 다음에, 다음 기회에 제대로 뜨거운 맛을 보여 주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자, 다들 목이 마를 텐데 차라도 한잔하지.”
일행은 다시 접견실로 자리를 옮겼다.
차가운 과일 음료로 갈증을 달랜 후 바라흐하가 물었다.
“자네 검을 보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이 가네. 놀랍도록 강해졌구나?”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커트리안은 한껏 득의한 표정으로 거드름을 피웠다.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할 바라흐하가 아니었다. 투견처럼 살기를 뿌리다가 수탉처럼 의기양양해한다.
감정의 기복이 가볍기 짝이 없다. 그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런 상태라면 정치가로선 완전 실격이었다. 더 이상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신진이 아니었다. 적당히 대우해 주고 기분만 맞춰 준다면 이용해먹기 딱 좋은 놈이다.
“정말 무서운 곳이로군. 트롤과 오우거에 키메라까지? 그런 곳에서 어찌 살아나왔나? 놀라울 뿐일세.”
그 정도만 해도 끔찍했지만 바라흐하는 커트리안이 얼마나 축소해서 말하고 있는지 몰랐다. 트롤이나 오우거는 물론 골곤도 다른 강대한 존재들에 비하면 논할 가치도 없는 마물이었다.
또다시 시작된 자랑질에 하이블루는 이만 갈았다. 가죽바지 안쪽이 축축이 젖었다. 당장 신관이라도 찾아야 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런 처참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바라흐하의 감탄에 커트리안은 뿌듯한 미소를 지은 후 입을 열었다.
“북국의 전사 수백이 목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살아나와야지요. 허약한 아도니아 놈들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나저나 어쩌다가 켈커티스가 이 꼴이 된 겁니까? 제게 한 개 군단만 맡겨 주십시오. 당장 연합 놈들의 목을 비틀고 잃었던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커트리안은 가슴을 탕탕 치며 허세를 부렸다.
‘미친놈, 한 개 군단이 누구 애 이름인 줄 아느냐?’
바라흐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다른 대답을 했다.
“다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네. 켈커티스가 조금만 더 단결했더라면 이런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터인데…… 안타까울 뿐일세.”
“연합 놈들과 달리 우린 작전권이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까?”
바라흐하는 속으로 한탄을 했다. 그 똑똑하던 놈이 바보가 되었지 않은가? 이 정도 떡밥이면 충분히 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말을 이해조차 못한다. 좀 더 풀어서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작전권이야 통일이 되어 있지. 문제는 일부 시민들과 원로원일세. 이런 중차대한 시국에 국론을 통일시킬 생각은 않고, 권리 타령에 정치적 자유나 외치고 있으니……. 심지어 알 만한 원로들까지 거기에 장단을 맞추고 있으니 문제가 아닌가?
어리석은 자들이 폴리스의 장래는 생각지도 않고 비상령을 풀라고만 하는 실정이네. 엘리티야 평야도, 오르비스 평야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시국에 말일세! 정말 한심한 일일세…….”
이렇게까지 자세히 풀어 줬으니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에 따라 커트리안의 쓰임새도 결정될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커트리안이 직선적으로 반응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 점에 있어선 저도 동감입니다. 연합의 칼이 목전에 닿아 있는데 무슨 권리고 권력이란 말입니까? 심지어 아버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기에 딱 잘라 끊어 버렸습니다. 이 위기를 넘기면 바실레오스께서 어련히 가문을 챙겨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바라흐하는 커트리안의 눈에 어린 욕심을 알아보았다.
정말 쓸 만한 놈이지 않은가?
바라흐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만간 생환자들을 위한 만찬을 준비할 걸세.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시켜 주게. 정세가 아무리 어려워도 마계의 문에서 살아 돌아온 자랑스러운 전사들을 대접하지 않을 수 없지! 근사하게 챙겨 주겠네. 그래야 자네 체면도 설 것 아닌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켈커티스의 영광을 위해 목을 내놓겠습니다.”
커트리안의 반응에 바라흐하는 껄껄거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멀리 배웅은 못하네. 워낙 바쁜 시국이지 않은가?”
들어올 때와 달리 커트리안은 깊은 목례만으로 예를 다하고 접견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만한 걸음걸이로 정문을 통과했다. 등 뒤로 쏟아져 들어오는 매서운 시선은 가볍게 무시했다.
켈커티스 중앙 대로를 거슬러 내려가며 커트리안의 눈빛이 조금씩 변해 갔다. 그리고 가문의 저택에 들어서면서부터 예의 그 미지근한 시선을 회복했다.
☆ ☆ ☆
그날 밤 우무스는 한 명의 그림자에게 방문을 받았다. 우무스도 잘 알고 있는 사내, 제3 레인저 부대의 두 번째 손가락, 차츠라였다. 하지만 우무스는 차츠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한 번도 눈을 떠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무스의 육체가 먼지로 사라질 때 우무스가 누워 있던 방으로 또 한 명의 우무스가 들어섰다.
우무스는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본체와 끊어져 있던 시간의 기억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본체는 존재 자체를 잃었다. 애초에 없던 것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하나였을 것들이 기나긴 시간을 격하고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티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완성체가 된 것이다.
그는 옷장을 뒤져 수많은 수면복 중 하나를 찾아 걸쳤다. 그리고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상에 드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우무스가 누워 있던 침상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입가엔 아주 만족스런 미소가 어려 있었고, 감긴 눈은 평화로웠다.
금방이라도 안락한 수면에 빠져들 것 같았던 그는 뭔가 잊은 것을 생각해 낸 사람처럼 눈을 뜨고 차츠라를 바라보았다.
“고맙소.”
그의 인사에 차츠라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차츠라가 사라지자 우무스는 다시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우무스의 표정은 모든 것을 이룬 후 고향으로 돌아온 노인처럼 편안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