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귀환
켈커티스는 연혁으로 치면 불과 삼백 년이 지나지 않은 젊은 폴리스다.
도시의 외관은 젊은이다운 패기와 건강함이 넘쳐흘렀다. 삼사 층이 주를 이루는 건물의 외벽도 다듬지 않은 석재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 투박하고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그 젊은 거리가 들끓고 있었다.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했던 몇몇 인물들의 생환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칠 년 전 바실레오스 선거에 출마해서 놀라운 선전으로 바라흐하 왕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더글라스 가문의 커트리안이 그 하나였고, 과거 켈커티스 최고의 맹장이었던 고골리와 비견되던 쥬시아누스가 또 하나였다. 그리고 유명하지는 않지만 켈커티스가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젊은 전사들이 돌아왔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자로는 스마르와 샤마노프가 있었고, 종사의 신분으로 전쟁에 나가 포로가 되어서야 그 무력이 빛을 발했던 예니에프가 있었다.
생환자의 이름에는 켈커티스 외에도 다른 폴리스 출신의 전사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포로들의 처형으로부터 촉발된 3년 전쟁, 그 참담한 결과로 의기소침해 있던 폴리스에 생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전령을 통해 그들의 생환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의 가문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환영의 목소리를 높였다. 귀환 이전에 벌써 그들의 이야기가 퍼져 나갔고, 영웅시되었다. 전문을 받은 지 삼 일 후 그들은 켈커티스 북문을 당당히 통과해 들어왔다. 한 마리의 갈리온과 다섯 마리의 말들이 무개마차 한 대를 앞뒤로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각 가문의 사람들이 그들을 맞이할 때, 시민들도 함께 몰려나와 개선식에서나 사용하는 종려나무 잎과 꽃을 뿌렸다. 물론 개선군이 아니었기에 몬테언덕의 헤르모스(전투의 신) 신전으로 향하지는 않았지만, 켈커티스 시민들은 그들을 개선군처럼 대우했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에 대한 갈채와 존경의 표시였지만 희소식에 목말라 있던 시민들의 갈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만큼 전쟁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게다가 이제는 동맹의 중심인 켈커티스 자체도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불과 넉 달 전의 일이었다. 바라흐하 왕의 선견지명으로 겨우 막아 내기는 했지만 그 위협은 아직도 상존해 있었다.
폴리스 켈커티스는 켈커티스 평야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켈커티스에서 다시 동쪽으로 한나절을 가면 이스테르 강의 거친 소용돌이가 수억 년 동안 파 놓은 오누르스라는 이름의 만(灣)이 있다. 이스테르 강을 따라 형성된 크랄 산맥이 그 위용을 다하고 완만한 구릉으로 이어져 켈커티스 평야와 만나는 지점이다.
이스테르 강을 중심으로 봤을 때는 너른 우디네스 삼각주에 모였던 풍부한 물줄기가 좁은 크랄 협곡을 통과한 후 다시 강폭을 넓히기 시작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때문에 크랄 산맥을 통과하며 한껏 거칠어진 물줄기가 갑자기 넓어진 강폭을 만나 거센 소용돌이를 형성한다. 그 거센 소용돌이가 수만 년간 깎아 놓은 만이 바로 오누르스 만이다.
이스테르를 항해하는 배들은 이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해 르부르토 산맥이 위치한 동쪽 연안을 탈 수밖에 없다. 어지간한 배들은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순간 산산조각 났고, 규모가 되는 배들도 소용돌이의 힘에 만 바깥으로 하염없이 밀려났다.
지리적으로는 켈커티스 코앞에 있는 만이지만 전혀 경계할 필요가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연합군이 상륙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갤리선들이 소용돌이를 뚫고 연합군을 토해 놓았다.
만약 바라흐하 왕의 적절한 대처가 없었다면 어쩌면 거기서 전쟁이 끝났을지도 모를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동맹의 심장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두 개의 곡창을 잃은 것도 모자라 이런 위협까지 받고 보니 켈커티스 시민들의 사기는 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놀랍게도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명의 귀환자도 없었다는 마계의 문으로부터 생환한 것이다. 3년 전쟁 이후 최초의 희소식이었다.
시민들의 목마름에 화답이라도 하듯 무개마차에서 몸을 일으킨 커트리안이 손을 들어 시민들의 환호에 답했다. 병사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마차를 에워싸고 종려나무 잎과 꽃잎을 뿌려댔다.
“쥬시!”
눈물로 범벅이 된 여인이 병사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퍼레이드를 향해 다가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십 대 소년의 손이 꼭 쥐어져 있었다.
여인이 쥬시아누스의 갈리온 앞에 섰다. 그리고 소년의 겨드랑이를 잡아 쥬시아누스를 향해 자랑스럽게 치켜 올렸다. 쥬시아누스의 얼굴에 한가득 미소가 피어올랐다.
“알프레우스! 멋지게 자랐구나. 이리 오렴!”
쥬시아누스는 소년을 안아 자신의 앞자리에 태웠다. 그리고 여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뒤에 올려 앉혔다. 여인은 쥬시아누스의 커다란 등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이다.
소년은 낯선 아버지의 품에 안겨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잃었던 아버지를 되찾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노년의 신사와 중년 부인을 발견한 샤마노프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잃었던 아들을 찾은 노부부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눈물을 주체치 못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부둥켜안고 재회를 기뻐했다.
냉정한 스마르까지 아내와의 상봉을 기뻐할 때, 차츠라는 쓸쓸한 표정으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크랄 산맥의 제3 레인저 부대의 두 번째 손가락인 차츠라는 애초에 가족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릴 때 전사하셨고, 어머니는 입대 후 돌아가셨다. 형제도 없었고, 아내도 없었다. 어둠의 임무를 맡은 이후 늘 혼자였다. 그런 그의 시선에 제3 레인저 부대 열 번째 손가락의 얼굴이 보였다. 제자처럼 가르쳤던 후배였다. 풋내를 풍기던 젊은이에게선 어느새 노련한 그림자의 향기가 맡아졌다.
차츠라의 모습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리고 조용히 열 번째 손가락의 옆에 나타났다. 마치 환영 인파의 하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첫 번째 손가락은 튼튼한가?”
한껏 웃음을 머금은 젊은이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말고, 일간 찾아간다고 전해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젊은이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름 재회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켈커티스 출신들과 달리 하이오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거리를 둘러보았다. 켈커티스의 거리는 구질구질한 크리푸와 달리 깨끗하고 멋이 있었다. 서너 대의 마차가 나란히 지나가고도 남을 너른 가도를 끼고 삼사 층이나 되는 커다란 석조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아도니아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웅장했다. 역시 동맹의 중심 도시답다는 생각을 했다.
날아든 종려나무 잎을 받아들며 하이오지는 어깨를 폈다. 마중 나온 지인은 없었지만 시민들 모두가 그를 환영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는 더러운 크리푸인이 아니라 위대한 생환자였다.
‘그래, 가족이야 앞으로 만들면 되는 거잖아.’
더 이상 그는 찌질한 삼류 건달이 아니었다. 웬만한 기사는 한 손으로도 가지고 놀 만한 실력자가 되었다. 언감생심 꿈도 꿔 보지 못했던 소드마스터까지 되었다. 그것도 상급의 마스터다. 분위기로 보건대 시민권을 얻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비열한 자의 도시 크리푸의 시민이 아니라 동맹의 맹주, 켈커티스의 당당한 시민권 말이다.
그래, 지금 정도의 실력이라면 어디 가서든 대우받고 살 수 있다. 어깨를 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어깨와 함께 하이오지의 얼굴도 슬그머니 펴졌다. 그리고 열렬히 환영하는 시민들을 향해 그 긴 팔을 흔들며 화답해 주었다. 그런 하이오지를 향해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화답하는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하이오지 팔꿈치가 헤리엇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말 머리를 나란히 해도 정상적이라면 어느 정도 팔을 펴야 닿을 거리였지만 긴팔원숭이 하이오지에게는 팔꿈치로도 족했다.
“이봐, 좀 웃으라고! 이렇게들 환영해 주는데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워낙 검어진 탓에 별로 티가 나지도 않았건만, 하이오지는 헤리엇의 붉어진 얼굴을 용케 알아보았다. 쑥스러워하는 것이다. 데뷔도 못 해 본 검투사가 언제 이런 환호를 받아 보았겠는가?
“허어 이 친구, 계집애처럼 부끄러워하기는? 자자, 팔을 들고 화답을 하라고, 화답!”
하이오지는 헤리엇의 손을 잡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아이 참나, 손 좀 놓으세요. 누가 부끄러워한다고 그래요?”
헤리엇은 하이오지의 손을 뿌리치며 스스로 팔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쑥스러웠지만 몇 번 흔들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잘생긴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때 더글라스 가문의 가주 히어데로 공과 나란히 앉아 기쁨을 나누던 커트리안의 마차 앞에 말을 탄 기사 하나가 십여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기사는 히어데로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네고 커트리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커트리안 더글라스는 제1 바실레오스 바라흐하 왕의 명을 받드시오.”
원로들이나 주요 가문의 가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차에서 내려 예를 갖춘다. 하지만 커트리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기만 했다.
“명을 받드시오!”
기사는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예를 갖추길 기다렸다.
“말해 보라.”
명백한 무시,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예를 갖추시오!”
“무슨 예? 당사자가 내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설마 그대 앞에서 무릎이라도 굽히란 말인가?”
기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억지로 화를 참으며 다시 한 번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커트리안은 마차에서 내릴 생각도 안 했다.
“내가 어디 전장에서라도 돌아온 것으로 보이나? 보고라도 하랴?”
커트리안은 무릎에 팔을 받치며 상체를 기울여 기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익, 무례하지 않소!”
“무례라? 건방진 놈! 보아 하니 기대장 같은데, 내 옛 지위가 그대보다 낮지는 않을 터! 그런 내게 그대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 말하는 것이냐?”
“나를 모욕하는 것이오? 바라흐하 왕의 명이라 하지 않소!”
“내가 왜 아까운 시간을 들여 그대를 모욕하겠는가? 그대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기사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불이라도 붙을 것 같았다. 화를 참지 못한 기사의 손이 글라디우스를 더듬었다. 하지만 기사는 검을 뽑지 못했다.
눈부시게 하얀 브로드소드 하나가 기사의 목덜미에 걸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닿는 것만으로 기사의 목덜미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예니에프의 검이었다.
“죽고 싶다면 한번 뽑아 보시지요, 기사님!”
기사의 붉은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명색이 시민궁 기사였는데, 목덜미에 칼이 들어올 때까지 이렇다 할 반응도 못했다.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칼은 기사의 목 가죽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날카로웠다. 숨을 쉴 때마다 몇 번이나 붉은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 ☆ ☆
기사를 따라온 병사들이 깜짝 놀라 검을 뽑으려다가 물씬 풍기는 살기에 몸이 굳어 버렸다. 두 명의 사내가 병사들의 좌우에 서서 히죽이고 있었다. 사내들은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 허리에 건 하얀 검을 반쯤 뽑았다가 넣었다가 하면서 장난을 쳤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도는 병사들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시민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던 하이오지와 헤리엇이었다.
목이 자꾸 베어지자 기사는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목을 뒤로 빼며 진땀을 흘렸다. 하지만 섣불리 물러나거나 다른 움직임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허튼 동작을 하는 순간 망설임 없이 베겠다는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커, 커트리안,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커트리안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반문했다.
“무례라? 네가 아니고 내가 말인가?”
“그, 그렇…….”
기사는 말을 맺지 못했다. 칼이 슬그머니 목 거죽을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뜨끈한 무언가가 목덜미를 타고 줄줄 흘러내려 앞섶을 축축이 적셨다.
“제가 봐도 예의가 없으신 분이군요. 죽일까요, 커트리안 님?”
그 순간 기사는 커트리안의 눈에 어린 광기를 보았다. 싸늘한 무언가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이거, 진짜 죽는다!
기사는 화들짝 변명을 토해 놓았다.
“그, 그게 아니고…… 커트리안 님과 일행 분들을 모셔 오라는 명이 있어서…….”
“칠 년이다! 무려 칠 년간 사선을 넘어온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모셔 가는가?”
“그저 관습적으로…… 무례를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관습을 논하던 기사의 말이 급히 사과로 이어졌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미지근하게 변했다.
“돌아가라! 바실레오스에게는 내가 미처 여독이 풀리지 않았으니 잠시 쉬었다가 찾아뵙겠다고 아뢰라!”
“그리 전하겠습니다! 공!”
기사는 갓 부임한 신병처럼 바짝 얼어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가문의 수장도 아닌 커트리안에게 공이라는 칭호까지 붙이면서 말이다.
환영을 나왔던 시민들도,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나와 있던 병사들도 싸늘하게 식은 공기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설마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스무 명이 둘러앉아 먹어도 넉넉할 크기의 식탁엔 불과 여섯 명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가주인 히어데로가 중앙 상석에 앉고, 그 우측에 커트리안이 앉았다. 건너편엔 음침한 표정의 차츠라가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하이오지와 헤리엇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또 맞은편에는 스마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식탁 중앙에는 새끼 통돼지가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고, 각종 향신료를 곁들인 거위구이와 성게 알을 채운 돼지 내장과 소시지, 노릿하게 구워 낸 송이버섯, 산비둘기 튀김, 양념을 발라 구운 허벅지만 한 민물 생선, 식초에 살짝 절인 굴과 조개 찜, 살을 발라 놓은 잔새우 프리카세(스튜), 벌꿀에 재어 놓은 각종 건과일과 생과일들 그리고 다양한 모양의 치즈와 거대 바게트, 스위트 브레드, 차파티, 토르티야, 각종 소스를 얹은 샐러드까지, 테이블이 넘칠 지경이었다.
켈커티스는 전사의 도시답게 음식을 찔끔찔끔 내오는 걸 싫어했다. 한 상 가득 쌓아 놓고 입맛대로 마음껏 퍼먹는 것이다.
사람별로 한 명씩 시중을 드는 여자 노예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기껏 하는 일이라고는 빈 잔에 와인을 채워 주거나,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뼈다귀들과 음식물 찌꺼기들을 따로 모아 놓는 일이 다였다.
칠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었고, 잊었던 식탁이었다. 무심한 커트리안이었지만 막상 이 식탁에 앉고 보니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건 다른 기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이오지는 이토록 다양하고, 푸짐하고, 맛있고, 근사한 식사는 평생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걸신들린 듯 먹고 마시고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건 헤리엇도 마찬가지였다.
히어데로는 거침없이 먹어대는 기대원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전사들답지 않은가?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좋지 못한 공기를 마셔서 그렇습니다.”
“신전에라도 들러 보지 그러느냐?”
“그 정도는 아닙니다. 곧 나아질 겁니다.”
“하긴 얼굴이 좀 탔다고 문제될 건 없겠구나. 더 강인해 보이기도 하고, 껄껄.”
히어데로는 분위기도 전환할 겸 하이오지를 향해 농을 건넸다.
“자네는 팔이 무척 길군. 전사로서 아주 좋은 신체 조건을 타고났어.”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하지만 넉살 좋은 하이오지는 헤픈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응대했다.
“헤헤, 그렇죠. 감사합니다.”
만약 한 달 후 쯤 켈커티스로 합류할 폴의 얼굴을 본다면 절대 얼굴이 상했다는 정도의 반응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통 넓은 소매 옷만 입어야 하는 샤마노프의 사정도 그렇고, 아메조프의 장갑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크리들이 촉수를 뽑아내는 모습을 본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런 사정은 커트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슴 안쪽을 갑옷처럼 덥고 있는 각질은 인간의 피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생환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평생을 안고 살아야 할 천형이었다.
히어데로는 가볍게 던진 농이었지만 귀환자들에겐 아픈 현실이었다. 그들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히어데로는 아들의 생환을 마냥 기뻐하고 있었다.
히어데로가 입가에 어린 미소를 지우며 커트리안을 향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커트리안, 낮에는 너무 무리한 것 아니냐?”
커트리안은 통째로 우물거리던 거위 다리를 잔을 가득 채운 레드와인과 함께 단숨에 넘기며 대답했다.
“후후,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노예들은 물러가라!”
커트리안이 크게 소리치자 식사 시중을 들던 노예들이 허둥지둥 물러나갔다. 목소리에 담긴 사나움에 놀란 것이다.
이전 냉정하고 침착하던 커트리안의 모습이 아니었다. 낮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노예들을 대하는 태도도 이전과 달랐다. 히어데로는 우려 섞인 표정으로 커트리안을 바라보다가 발작적으로 기침을 토해 놓았다. 커트리안은 한동안 멈추지 못하는 히어데로의 기침을 보며 걱정스런 눈빛을 했지만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히어데로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두 번 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 이후로 제가 기행을 저질러도 그냥 믿어 주십시오. 조금 더 부풀려서 소문을 내 주셔도 좋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
“켈커티스를 갖겠습니다.”
커트리안의 단호한 선언에 히어데로는 깜짝 놀라며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반역이라도 저지를 셈이냐?”
“그런 방법도 있겠지요.”
“안 된다! 절대 성공할 수 없어. 시민들과 원로원이 절대 지지하지 않을 거다.”
“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주 천천히 갈 생각입니다. 시민들과 원로원의 지지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원성은 좀 사겠지만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비상령이 떨어진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벌써 이 년이나 되었다.”
“독재가 공식화된 셈이군요. 당분간 바라흐하를 지지할 생각입니다.”
“뭣이라? 각 가문과 원로들에게 등을 돌릴 셈이냐?”
“돌려야지요. 그들과 함께 저를 성토해 주시는 것도 좋습니다. 뭐, 저절로 그리될 겁니다.”
“도무지…… 네 생각을 모르겠구나.”
“모르시는 게 좋습니다. 그냥 속으로만 믿어 주시면 됩니다. 오늘 이후로 아버님이 보시는 제 모습은 진실이 아닐 겁니다.”
히어데로는 한참 동안 커트리안의 눈을 바라보았다.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히어데로의 눈빛은 망설이고 흔들렸다. 더글라스가의 가주로서 삼십 년간 가문을 돌봤던 강한 사내였지만 이제 늙고 병들어 기력이 쇠잔해졌다. 일찍 상처한 덕에 피붙이라곤 커트리안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의 심지는 아직 정정했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믿음도 굳건했다.
잠시 망설이던 히어데로의 눈에 결심이 선 듯 안정감을 찾았다. 그는 결국 하고자 했던 말을 접고 간단한 당부의 말만 꺼냈다.
“괜한 우려일지 모르지만 주의하기 바란다. 바라흐하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가문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 먼저 파악해 놓았으면 한다.”
“심려 마십시오. 그나저나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좋지 않구나……. 가문을 네게 맡기고 쉬려 했는데, 어렵겠구나.”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좋은 신관 하나가 찾아올 겁니다. 잠시 참아 주십시오.”
☆ ☆ ☆
조노량은 뿌옇게 터 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인간의 몸이란 참 간사해서 매 계절 변하는 일출 시간을 맞춰 낸다.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자, 기상 시간도 일출에 맞춰 늦어졌다. 의도한 바도 없고, 의식해 본 적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새삼 신기했다.
“췩!”
아, 이놈의 오크 자식들! 새벽 운기를 해야 하는데 이른 새벽부터 시끄럽게 군다.
이놈들은 미명만 비쳐도 어떻게 느끼는지 기가 막히게 알고 일어난다. 동물과 마물을 통틀어 가장 부지런한 종족이지 싶다.
조노량은 그나마 한적한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겨 운기에 들어갔다. 몇 차례 화를 냈더니 운기 중에는 직접적으로 건드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저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일, 떠들고 부산을 떠는 정도는 참아 줘야 했다.
와호공, 삼류 토납법답게 외부의 방해에도 큰 지장을 받지 않는 공부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부쩍 간섭에 민감해졌다. 아무래도 공부보다는 내공의 깊이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아스르부테가 소멸하던 그날 이후 무슨 이유에선지 내공 수련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대략 이 갑자? 놀라운 속도다.
어느덧 생사관을 두드리는 내기의 세기가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먹고 시도한다면 뚫어 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그러려면 우선 저 시끄러운 놈들에게서 벗어나야 할 거다.
대주천을 마치고 상쾌하게 아침을 맞았다.
시커먼 오크 하나가 고깃덩어리를 건넨다. 이 맛에 오크 무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알아서 챙겨 주니 수련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거다. 물론 이 빌어먹을 땅에서 혼자 생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점도 한몫을 하지만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백여 마리의 오크가 길을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마 이동을 시작할 모양이다.
친한 척하는 검은 오크가 다가왔다. 뭐라고 칙칙거리는데, 어차피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 손짓을 보니 떠날 준비를 하라는 의미 같다. 뭐, 분위기만 봐도 짐작했던 내용이니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이백여 마리만 해도 대단한 무리지만, 천여 마리씩 몰려다니던 때를 생각하면 참 초라하게 변해 버렸다. 어디서 된통 당했던 모양이다.
아스르부테가 소멸하고, 우코르바흐가 물러 간 이후 마계의 문은 다시 토착 마물들의 차지가 돼 버렸다.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침략군들은 숨어 다니기 바쁘다. 하긴, 수장을 잃어버린 잔류병들이 무슨 힘을 쓰겠는가?
후릉.
뭔가 무게감이 느껴지는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온다. 태풍이 창호지를 두드리는 소리와 닮았다. 하지만 소리의 여운은 길지 않았다. 일 초?
조노량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소리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소름이 돋도록 무서웠던 마물, 흄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큰둥하다. 해를 끼치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다. 아니, 해를 끼치기는커녕 거의 인형이나 다름없다. 지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충분히 사리분별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인상은…… 마계의 문에서도 가장 상위의 마물, 흄을 대상으로 이런 표현을 써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순수하달까?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까지 더해지니, 이제는 등을 내주고도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
오래전 처음 이 땅에 떨어졌을 때 조노량은 마인들과 싸우던 흄의 모습을 훔쳐본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은 흉포한 검은 연기가 모여들 때마다 순간적으로 하나의 형상을 이루는 모습을 관찰한바 있다.
최근에 와서야 당시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저 검은 연기인 줄 알았더니, 흄은 육화가 가능한 존재였다.
조노량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아무런 표정 없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흄을 힐끗 훔쳐보았다. 하기가 자신에게 붙여 놓은 보호자 겸 감시자의 외양은 뜻밖에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다. 본질이 마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볼 때마다 헛갈린다.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 때문이다. 사리분별은 하지만 조금 맹하달까? 순진하달까? 중원에서는 이런 여인을 보고 백치미(白痴美)가 있다고 표현했다.
끔찍한 흄 주제에 저런 외모라니? 제일 참을 수 없는 건, 그런 주제에…… 벌거벗고 있다는 점이다.
조노량이 정면으로 그녀를 마주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였다.
불끈불끈 일어나는 음심에도 불구하고 허튼수작을 부릴 생각은 차마 못했다. 그 본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노량이 겪어 본 바에 의하면 흄은 기본적으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니 저토록 표정이 없을 수밖에…….
조노량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 ☆ ☆
“그래, 알티스 공동체가 아도니아에 협조했단 말이지?”
알티스 공동체는 중부 대륙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협도(狹道) 머서너리 로드(용병의 길)를 관장하는 3대 폴리스 막시몬, 루체, 알티스를 일컫는 말이었다. 지역 명을 따 베리트 3성이라고도 불렸다. 이들 3개 폴리스는 동맹이나 연합과 별도로 존재하는 공동체였다. 몇 십 년간 이어진 동서전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립을 표방하며 오직 머서너리 로드만 관장해 왔다. 전쟁의 양 당사자들도 머서너리 로드가 전쟁의 여파에 휩쓸리는 것을 저어했기에 묵시적으로 이들 공동체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연합에 길을 내준 것이다. 그 결과 오르비스 곡창이 연합의 손에 넘어갔다.
오르비스 곡창은 남이스테르 강 서쪽에 형성된 백만 헥타르에 이르는 너른 평야다. 비옥한 곡창지대임과 동시에 머서너리 로드로 향하는 가도가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기사 도나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커트리안의 탈출 작전 시 사로잡혀 생사를 알 길 없게 되어 버린 소우루스를 대신해 수석 기사로서 더글라스가의 이백여 가병들을 관리하는 자였다.
“동맹의 보급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겠군?”
“보급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동맹은 머서너리 로드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동맹은 현재 엘리티아 평야를 잃고, 오르비스 곡창까지 빼앗긴 상태였다. 켈커티스 동맹의 4대 곡창 중 무려 두 개가 날아간 것이다. 게다가 중부 대륙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도 날아갔다.
물론 머서너리 로드 자체는 기본적으로 베르트 3성에 의해 관리되며, 어느 곳 출신이든 통행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오르비스 가도를 잃어서는 머서너리 로드로 접근할 통로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베르트 3성을 중립 폴리스로 인정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상태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동안 바라흐하는 무엇을 한 것인가?”
“오누르스 만을 지킨 건 대단한 전과였지만 그 외에는 줄곧 연합에 밀렸습니다. 현재의 교착 상태가 다행이라고 느껴질 지경입니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고, 스마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교착 상태가 다행이라고? 크크, 동맹의 전력 손실은?”
“켈커티스가 7개 군단, 동맹 폴리스들이 30여 개 군단을 겨우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중 공격에 동원할 수 있는 군단은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오린토 같은 변방 폴리스는 겨우 사단 규모로 폴리스를 방어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클클, 형편없군.”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시선이 도나티우스의 눈을 직시했다. 그 눈빛만으로는 전혀 의중을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도나티우스는 커트리안의 눈에서 타오르는 광기를 보았다. 절로 몸이 굳고 소름이 돋았다. 그가 알던 커트리안이 아니었다.
“오누르스 만은 어떻게 뚫린 거지?”
도나티우스는 경직된 목소리로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오르비스 평야를 되찾기 위해 무려 다섯 개 군단이 폴리스 마리노에 집결했습니다. 그 정도 군세라면 오르비스 평야를 되찾는 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출정 직전 바라흐하 왕이 그중 세 개 군단에게 즉시 귀환을 명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명령이 켈커티스를 구했습니다.”
도나티우스의 설명은 이러했다. 마리노에 집결했던 다섯 개 군단 중 핵심 전력인 세 개 군단이 바라흐하의 명에 의해 오누르스 만으로 향했다. 켈커티스 방위의 핵인 1군단도 수도를 비우고 오누르스 만으로 향했다. 무려 네 개 군단이 오누르스 만으로 향한 것이다.
마리노에서 출발한 군단이 오누르스 만에 도착했을 때 동맹군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엄청난 크기의 갤리선 열두 척이 한꺼번에 군단 급의 병사들을 토해 놓았다. 다급해진 동맹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연합군은 대부분 상륙을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륙군은 로크리안의 직할 군단인 아도니아 3군단이었다.
로크리안의 군단은 정예군답게 동맹의 파상 공세를 막아 냈다. 세 배의 전력 차를 극복하고 말이다.
오누르스 만에서 켈커티스까지는 불과 한나절이면 족한 거리다. 지리적인 문제만 믿고 평소 등한시했던 지역이지만, 지정학적 위치상으로는 절대로 내줄 수 없는 장소였다. 동맹군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켈커티스 방위를 책임진 정예, 1군단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전투는 오히려 동맹군이 낭패를 볼 뻔한 전투였다.
켈커티스 정예 군단이 포함된 네 개 군단 대 아도니아 한 개 군단의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그렇게 삼 일을 싸웠다. 그럼에도 로크리안의 군단은 전투와 동시에 진지까지 구축했다. 그리고 그 진지를 배경으로 무려 네 배에 이르는 동맹의 군세를 막아 냈다.
만약 켈커티스 1군단에 켈커티스 최강의 전사인 하이블루와 크룬기어가 없었다면 우무스로서도 로크리안을 감당하기 벅찼을 거라는 중론이었다.
하지만 열흘이 지나자 천하의 로크리안도 버티기 힘들어졌다. 동맹으로서는 로크리안이라는 대어를 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 열하루째에 갤리선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아도니아 최정예 군단이라 하더라도 켈커티스 최강 1군단이 포함된 네 개 군단을 극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종래엔 로크리안 자신마저 부상을 입었다.
상륙한 갤리선에서는 다시 한 개 군단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버티는 사이 겨우 일 개 사단 규모로 쪼그라든 로크리안의 군단은 무사히 갤리선에 승선할 수 있었다. 상륙했던 군단도 약간의 피해를 보고 갤리선으로 빠져나갔다.
로크리안을 잡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었으나 오누르스 만을 지켜 낸 것만도 천운이었다. 만약 바라흐하의 시기적절한 대처가 없었다면 더 많은 연합군이 상륙했을 터였고, 결국 켈커티스 자체가 위기에 빠졌을 것이었다.
덕분에 간담이 서늘해진 동맹은 황량한 오누르스 만에 무려 2개 군단을 상시 주둔시켜야 했다. 동맹 전체 군단 수가 37개임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전력 손실이었다. 그 덕에 오르비스 평야의 수복은 꿈도 못 꿀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말을 하는 내내 도나티우스는 바라흐하의 선견지명을 높이 평가했다.
“바라흐하는 연합의 상륙 작전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왕의 지시로 손가락들이 움직인 걸로 압니다.”
☆ ☆ ☆
그 시간 후미진 뒷골목 찻집에서는 차츠라가 누군가와 만남을 갖고 있었다. 순후한 인상의 오십 대 사내였다.
“복귀는 안 할 생각이냐?”
“가능하겠습니까?”
차츠라는 오히려 반문했다. 오십 대의 사내, 제3 레인저 부대의 첫 번째 손가락 아델치 시실리아니와 차츠라 모두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아델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사실을 시인했다.
“설마 네가 임무에 실패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임무를 재개할 생각은 없느냐?”
“포기했습니다. 전 이미 그의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아델치는 자조적인 미소를 보였다.
“나와 적이 될지라도 말이냐?”
“죄송합니다.”
“우린 최고의 그림자를 잃게 되었구나.”
차츠라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열 번째 손가락이 자신의 제자와 같다면, 자신은 아델치의 제자와도 같았다. 그의 모든 기술은 아델치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니까.
“내일부터는 우리가 너를 쫓을 것이다. 알고 있겠지?”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있는 거냐?”
“손가락들의 손실은 최소로 하겠습니다. 실패한 손가락은 다시 투입하지 말아 주십시오. 두 번째는 사정을 두지 않겠습니다.”
“허허허, 좋구나. 역시 제3 레인저 부대 최고의 그림자답다. 약속하마. 실패한 손가락은 잘린 것으로 치겠다.”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건강해라.”
“아델치 님도 건강하십시오.”
스무 개의 손가락과 이백 명의 레인저로 구성된 크랄 산맥 최고의 부대가 제3 레인저 부대였다.
그렇게 차츠라와 제3 레인저 부대의 인연은 끊기고 말았다.
☆ ☆ ☆
더글라스가의 공식 후계자, 커트리안의 귀환은 일반 시민들은 물론 켈커티스 정치계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포로 처형이라는 원죄와 잇따른 패전으로 궁지에 몰린 바라흐하는 이 년 반 전 비상령을 선포하면서 북부에서는 보기 드믄 공포정치를 펼쳤다.
안 그래도 켈커티스는 군사 폴리스라 불릴 만큼 강력한 전사들의 도시다. 군대가 도시의 정치, 경제, 사법, 치안권을 한 손에 틀어쥐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바라흐하가 서 있었다.
동맹 전체가 위기에 몰린 만큼 강력한 중앙집권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원로원은 의결권이 정지되었고, 시민들의 자유를 속박당했다. 투표권은 제한되었고, 경제활동은 위축되었다. 복무 중인 시민들은 지휘 계통에 따라 복무를 마쳤거나 복무를 면제받은 시민들을 통제했다.
그리고 복무를 끝내고 교대한 후에는 다시 복무를 시작한 시민들에게 통제되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다시 소집되어 복무를 시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커트리안의 귀환은 이런 상황에 빠진 원로 정치인들에게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진 지 오래며 확전의 가능성도 적었다.
동맹은 여력이 없었고, 연합도 손실이 컸다. 점령한 지역을 안정시키기에도 바빴다. 또한 연합의 핵심축인 로크리안도 아직 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는 탄핵의 가능성을 언급한 첩보도 있었다.
이를 빌미로 목소리를 감추고 숨죽였던 일부 원로들이 군사 통제를 풀고 이전 체계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들은 원로원이 다시 정책의결 기구로서의 권한을 회복하길 바랐다.
폴리스의 시발점이 되었던 세 영웅 중 둘의 공동 후예며, 켈커티스 삼백 년 역사를 이끌어 온 명문 더글라스가는 후계자와 함께 활기를 되찾았다.
방계 가문들은 적통의 복귀를 열렬히 환영했고, 켈커티스 주요 가문들이 더글라스가의 행보를 지지했다. 또한 삼백 년간 지연과 혈연으로 엮인 수많은 가문들이 은밀히 더글라스가의 재기를 지원했다.
이 모든 변화가 단지 커트리안이라는 일개 개인의 생환으로 발생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바라흐하의 독재로 인해 입지가 좁아진 원로들과 바라흐하를 지지하는 가문들에게 주요 사업을 물려줘야 했던 상계의 거물들, 저택의 회랑(回廊)이나 돌봐야 했던 각 가문 수장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이는 비상령으로 실권을 잃어버린 원로들이 육중한 대문을 열고 나와 바람을 쐴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찻잔을 기울일 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가장 강력한 지지를 보낸 가문이 쥬시아누스의 더드리안가였다. 비록 우무스로 인해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켈커티스 최고 정예 군단인 제1군단 군단장을 이십 년간 역임했던 노장 레오니우스 더드리안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인물들이 아직까지도 각 군단의 핵심적인 자리에 포진해 있었기에 군대에 대한 영향력도 작다고는 볼 수 없었다.
물론 바라흐하와 함께 독재의 단맛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원로들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