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76화 (76/142)

76. 남겨진 이

주운은 슬그머니 나타난 사내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노리앙만 노려봤다. 그의 뒤에는 헤트르 폰티나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시립해 있었다.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운의 옆에 와 섰다.

“개입 안 하기로 한 것 아닌가?”

주운이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합의를 깬 건 그대도 마찬가지일 텐데?”

사내, 하기는 비꼬는 것으로 되받아쳤다.

“소멸하도록 둘 수는 없지 않나?”

“어리석은 마법사, 당시 우코르바흐가 저 친구를 멸할 수 있었을 거라고 보나?”

“헤트르와 싸우는 걸 보지 못했나? 우코르바흐에겐 아직 힘이 남아 있었다.”

“흥,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우코르바흐에게 남은 힘 이상의 힘이 저 친구에게 있었다. 난 직접 그의 힘을 확인했다.”

주운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조차 알 수 없는 힘이 노리앙에게 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힘이 당시 우코르바흐를 패퇴시킬 정도의 힘이 되었을까? 아무리 하기와의 싸움으로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우코르바흐는 마계의 절대 강자 중 하나다. 설사 하기의 말이 옳다고 해도 헤트르를 보내지 않을 순 없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는다고 치세. 하지만 피치 못할 상황 아니었나? 비긴 걸로 하세.”

“좋다. 하지만 미안하군. 난 조금 더 개입해야겠다.”

“하기!”

“저 친구를 내보낼 수 없다.”

“이런, 미친……?”

주운이 분노의 외침을 토해 놓았다.

“마법사, 죽고 싶은 건가?”

주운의 분노에 맞서 하기도 기세를 피워 올렸다.

그 기세에 주운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전의 하기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강대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뒤에 시립해 있던 헤트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주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 기운이라면 마왕 중에서도 상급의 반열이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많이도 처먹었군.”

“나를 막을 생각인가? 마법사!”

주운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군. 그래, 어쩔 셈이지?”

“흥, 난 저자가 내 눈에서 벗어나길 원치 않는다. 그가 누군지 분명히 확인한 후 결정할 생각이다. 지금은 내보낼 수 없다.”

주운은 고민했다. 그가 소멸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그가 어느 곳에 있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한눈에 봐도 하기의 힘이 눈에 띄게 강해졌다. 그의 보호하에 있다면 그리 나쁜 선택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운이 고민하는 사이에 하기는 코웃음을 치며 사라져 버렸다. 동의를 구한 것이 아니라 통지를 해 온 것이다. 주운의 이맛살이 다시 한 번 찌푸려졌다.

그러다가 비릿하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토리도 놈도 안됐군…….’

선두에 서서 길을 뚫고 있는 허글러의 커다란 등이 낯설다. 마치 이지를 상실한 이처럼 표정도 말도 없었다. 알은체를 해도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인형처럼 일방적으로 티프의 지시만 따랐다. 이전 당당하게 북국의 전사들을 논하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그 무력만은 고골리에 버금갔다. 심지어 싸움 방식도 유사하다. 그 어떤 촉수도, 그 어떤 갈퀴도 허글러의 몸을 뚫지 못했다. 가끔 나타나는 기형 미물들은 그의 투핸드소드에 반쪽이 나기 일쑤였다. 어떤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녹슨 철검만으로 크고 단단한 놈들을 세로로 쪼개 버렸다. 괴물이 따로 없었다.

워낙 단숨에 처치하니 달리는 속도조차 줄지 않는다.

원래 무식하게 싸우는 스타일이란 것은 알았지만 고골리에 버금갈 정도로 무식하게 싸울지는 몰랐다. 모르긴 몰라도 거인이나 데스나이트와도 충분히 맞대 놓고 싸울 것 같다. 그 덕에 기대원들은 달리는 것 말고는 할 일도, 할 틈도 없었다.

기대원들은 곧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에 숨이 찬 줄도 몰랐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커트리안마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매달고 있다.

뽀얀 막이 손만 뻗어도 잡힐 듯 가까워져 온다. 조노량의 경계심도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이제 진짜 탈출이다.

그 순간 갑자기 몰아닥친 회오리바람에 선두에 섰던 서너 명이 동시에 나동그라져 버렸다. 그 와중에도 허글러는 몸을 낮추며 버텨 섰다. 마물에 버금가는 힘이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이런 위력의 바람이 불 수는 없다. 조노량의 몸이 앞으로 달렸다. 아무리 풀어졌다 해도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할 수 있는 존재는 흔치 않다. 막 허글러의 옆에 착지했을 때 멀쩡하던 하늘이 어두워졌다.

귀를 자극하는 비명 소리가 어지럽게 허공을 갈랐다. 오첩도를 곧추세운 조노량의 눈에 시커먼 연기들이 허공을 휘도는 모습이 들어왔다. 흄?

도무지 어떻게 싸워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 놈들이다. 시커먼 연기로 덮어씌우고 갈가리 찢어 버리는 놈들이다. 전신을 강기로 두르지 않는다면 상대할 방법이 없다. 난감했다.

조노량은 진기를 잔뜩 끌어올려 오첩도로 쓸어 넣었다. 검기가 터질 듯 팽팽하게 오첩도를 감쌌다.

그 순간 허글러가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마물을 만날 때마다 보여 줬던 행동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공포도 거리낌도 없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검이나 활처럼 무기의 일종인 것 같은 느낌이다. 회오리처럼 휘도는 검은 연기를 향해 녹슨 투핸드소드가 맹렬히 쏘아져 갔다. 검은 아무런 저항 없이 회오리를 가르고 빠져나왔다. 허공에 대고 빈 칼질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인 듯 검은 연기가 허글러의 전신을 먹어 버렸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 돌이 갈리듯 요란한 파쇄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그리고 허글러의 흔적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기대원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모습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허글러의 육신을 갈아 버린 흄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토해 놓으며 위협적으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이제 둘만 남은 하기의 네 마리 짐승 중 하나인 ‘혼’이었다.

조노량은 오첩도로 손을 뻗다가 가까스로 참아 냈다. 목숨 걸고 복수를 해 줄 사이는 아니다. 조노량은 애써 냉정을 찾았다.

무거운 침묵이 기대원들을 감쌌다.

어려운 상황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대지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번개가 떨어지기 직전 낮은 으르렁거림과 같은 묵직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먹구름이 머리에 닿을 듯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먹구름 속에서 빛줄기가 번져 나오고, 천둥이 떨어지기 직전처럼 낮은 진동음이 새어 나왔다. 곧이라도 쾅쾅거리며 천둥이 칠 것 같은 분위기다. 마치 진짜 먹구름이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누구도 저 먹구름이 진짜 먹구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흘 전 전투에서 이미 한 번 본 광경이니까.

넓게 퍼진 먹구름이 모여들며 더욱 낮게 내려앉았다.

‘제발!’

언제 희희낙락했었냐는 듯 기대원들의 얼굴이 깊은 절망감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다시 분노로 형태를 바꿔 갔다. 도대체 왜!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이제 정말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머리 위에 낮게 가라앉아 있던 먹구름이 지상으로 내려앉으며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거대했던 먹구름이 뭉클거리는 작은 연기 더미로 밀집되었다. 작은 틈조차 찾을 수 없는 짙은 어둠 속에서 가공할 힘이 꿈틀거렸다. 그 어둠 뒤로 수십의 흄들이 시립하듯 내려앉았다.

누구를 원망할까? 적을 원망할까? 아니면 빌어먹을 운을? 아니면 타고난 운명을? 신을?

분출구를 찾을 수 없는 감정이 흄들에게로 향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지만 자포자기(自暴自棄)한 기대원들은 무모하게도 감정의 분출구를 흄들에게 겨누었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기대원들의 눈이 광기로 차올랐다. 제우스가 기도를 시작했다. 이제 누구 하나라도 발광을 시작한다면 허글러처럼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간다 해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조노량을 따라 앞으로 나선 샤마노프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꿈틀거렸다. 조노량은 그런 샤마노프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칠흑의 연기 더미가 단번에 하나의 형체를 구성했다. 일행의 눈앞에 거짓말처럼 한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구멍만 뚫려 있는 육중한 철제 투구를 눌러 쓴, 황금갑옷의 기사였다.

기사는 형형한 눈빛을 번쩍이며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위압감이 도를 넘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군. 지난번 도움은 고마웠다.”

덩치만큼 묵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당신이 하기?”

조노량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설마 검은 연기 속에서 저런 늠름한 기사가 튀어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다. 내가 이 땅의 지배자 하기다.”

하기는 황금빛 광택으로 번쩍거리는 건틀릿을 들어 주변을 빙 둘러 가리켰다. 그런 몸짓에서는 뿌듯한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어때? 멋진 곳이지 않나?”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만 입을 벌려 말하진 못했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은 이유가 무엇이오?”

“가식도, 거짓도 없는 세계다. 저 밖 세상에 진실이 있다고 믿나? 이곳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니 안타깝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조노량은 말없이 기다렸다.

하기는 두 손을 벌려 으쓱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그대가 이곳에 남기를 바란다. 대신, 저들은 놓아주지.”

청천벽력(靑天霹靂), 조노량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왜? 어째서 나만?

“저 친구들!”

하기는 손가락으로 기대원들을 가리켰다.

“나의 군대, 내 권속이 될 이들이었다. 나도 아쉽지만 그대를 위한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그 순간 담담한 목소리가 하기와 조노량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는 없지. 노리앙은 우리와 함께 나간다.”

커트리안이 미지근한 시선으로 고개를 저었다.

커트리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대원들의 눈빛이 형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등짐을 풀어 내리고,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동료에 대한 광적인 집착, 그 끈적거림과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살아남은 열다섯 명, 전원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허글러는 동료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행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도 기대원들의 광기에 한몫을 했다.

조노량은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전투가 개시된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수많은 고생이 허투루 돌아갈 것이다.

“자, 어쩔 텐가? 만약 거절한다면 그대 앞에서 차례로 죽여 주지.”

하기는 커트리안의 의사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물끄러미 조노량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노량은 막 반발하려는 커트리안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시겠소?”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자신의 내공이 마왕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제압할 정돈 아니었다. 지난번 싸움에서 아스르부테를 통해, 그리고 우코르바흐를 통해 확인한 바였다. 그와 함께 싸워 보았기에 그의 강대함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요행히 저 사내를 이길 수 있다 해도 그 사이에 기대원들은 하나 남김없이 전멸할 것이 뻔했다.

‘내 사람이오.’

‘노리앙, 이걸 드십시오. 특별히 잘 구워 놨습니다.’

‘난 안 죽어. 끝까지 살아남아서 크리푸로 돌아갈 거야. 이 정도 실력이면 다들 우러러 보겠지?’

‘나 참, 그러지 말라니까요! 이런 일은 내가 합니다. 쉬세요.’

‘노리앙, 내가 말이야…….’

‘노리앙…….’

‘노리아앙…….’

목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왜 늘 나란 말인가?

머리를 흔들었다.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결론은 같이 죽느냐, 혼자 죽느냐의 문제였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모를까, 무모하게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물귀신처럼 동료들을 다 끌고 들어가는 죽음은 사양이다.

조노량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 있어야 하는 거요?”

하기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모른다. 언젠가…… 때가 되면 돌려보내 주지.”

잠시 침묵하던 조노량이 대답했다.

“남겠소.”

☆ ☆ ☆

거대한 우윳빛 막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커트리안은 지그시 눈을 감고 백열하는 태양을 응시했다. 눈꺼풀 안으로 선홍색의 빛이 사정없이 밀고 들어온다. 지금껏 꿈꿔 오던 그 태양이다. 눈을 뜨고는 감히 마주 볼 수 없는 장엄한 태양이다. 설사 마주 볼 수 있다 해도 그럴 자신이 없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저절로 고개가 떨어졌다. 붉은 흙더미가 눈에 밟힌다. 태양을 응시한 여파가 아니다. 실제로 선명한 붉은 빛을 띤 흙이다.

커트리안은 무거운 마음으로 경계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앞이 아니라 뒤에 있다. 늘 앞에 있을 것만 같았던 경계를 등 뒤에 두다니, 익숙지가 않다.

괜스레 발끝으로 흙더미를 파헤쳐 본다. 고개를 들어 선명한 대기를 마주 보기 부끄럽다.

노리앙을 남겨 두었다.

그가 결정했을 때 차마 말리지 못했다. 말리는 시늉을 했지만 진심이었는지 의심스럽다. 그렇게 그는 남겨졌고, 우리는 나왔다. 이 빌어먹을 경계를 뚫고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밖으로 나왔다.

처음 성지에 들어섰을 때처럼 고통 받았지만, 아니 그 이상으로 끔찍스러웠지만 견뎌 내지 못한 이가 없었다. 남겨진 이 덕분이다. 아무도 포기하지 않았고, 이를 악물었고, 고통을 대체하기 위해 자해를 했다. 그리고 끝내 견뎌 내었다.

머리가 깨진 뮤트가 깨어났고, 자신의 팔뚝을 뜯어먹은 크리들이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손톱에 갈가리 찢긴 가슴을 부여잡으며 벤트가 고개를 들었다.

가장 변이가 심했던 벤트마저 그 끔찍한 고통을 이겨 냈다. 그리고 울었다. 상처도 돌보지 않고 어린애처럼 목 놓아 울었다. 고통 받은 육체 이상으로 마음이 아팠으리라.

오히려 신관 제우스가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경계를 벗어나고서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던 티프, 만약 그가 없었다면 제우스는 마계의 문으로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티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제우스를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코끝을 간질이는 싱그러운 풀냄새에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주르륵 콧물이 흐른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 흐르는 것은 콧물만이 아닐 것이다.

커트리안은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그렇게 날이 저물어 갔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황혼이 지고 밤이 찾아왔다.

툭, 툭, 투툭, 툭툭툭, 투툭.

누군가의 무릎에서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낯익은 박자가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반복되던 박자가 리듬을 타고 조금씩 소리를 키웠다.

그러나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다. 그저 박자만이 조금씩 소리를 키워 나갔다.

둥, 둥, 두둥.

타탁, 탁.

카캉, 캉, 캉캉.

등짐을 두드리고, 무기를 두드렸다.

기대원들은 그 박자가 경계 안까지 울려 퍼지기를 바랐다.

하이오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등짐을 풀어 내리고, 단단히 조여 묶었던 허리띠를 풀어낸 후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경계를 마주 보고 섰다.

“고향집 뒷동산, 눈이 녹으면 돌아가리!”

의외로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기억하는 아내와 아이들!”

크고 청아한 목소리가 텅 빈 허공을 메우고 울려 퍼졌다.

“십 년을 담아 둔 이야기, 웃으며 말하리!

날 기억하는 친구와 형제들!

살찐 칠면조 구워 놓고, 잔을 나누리!”

점점 높아지던 목소리가 기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낡은 지팡이 세워 놓고, 그리움에 취하리!

낡은 외투 벗어 놓고, 그대 이름을 부르리!

낡은 검 내려놓고…… 친…….”

떨리며 잦아들던 하이오지의 노랫소리가 기어이 끊어졌다.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엎드려 흐느꼈다.

하이오지의 노래는 그쳤지만 기대원들의 합창이 이어졌다.

“왜 나를 떠났는가, 친구여!

고향집 뒷동산, 눈이 녹으면 함께 가자했던 친구여!

그대를 기억하는 아내와 아이들!

그대를 기억하는 친구와 형제들!

나 홀로 어이 돌아가리?”

낮고 음울한 가락이 밤새도록 울려 퍼졌다. 그렇게 두고 온 이들을 애도하고, 남겨 둔 사람을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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