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산 자와 죽은 자
약속의 인, 마법으로 약속을 증거하는 증서였다. 그렇다고 특별한 구속력을 갖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법으로써 약속의 내용과 함께 양 당사자를 확인해 주는 역할만 한다.
이 약속의 인을 받게 되면 마법적 작용에 의해 중부 대륙에 위치해 있다는 마탑에도 동시에 기록이 된다. 또한 인을 받은 자가 요청하면 언제라도 공개될 수 있도록 준비된다. 증서에는 이를 마탑에서 증거한다는 표시로 선홍의 살살이꽃(코스모스)이 새겨진다.
주로 중요한 계약이나 국가 간 협정, 상당 금액의 금전적 부채에만 사용된다. 약속의 인을 받기 위한 대가(代價)가 크기 때문이다. 아무런 마법적 구속력도 없으며, 약속 이행 결과에 대한 내용도 없다. 단지 누구와 누가 어떤 약속을 했다는 증명만 해 준다. 그럼에도 치러야 하는 대가는 최소 100골드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만 해도 일반인들은 이용할 엄두도 내지 못할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약속의 대상과 경중에 따라 금액은 기본 금액을 넘어 껑충껑충 뛴다.
그런데도 자주 이용되는 이유는 약속의 내용과 대상을 언제든지 공개할 수 있다는 점과 이를 마탑에서 입증해 준다는 장점 때문이다.
결과로 놓고 봤을 때 약속을 어긴 자가 분명히 가려질 수밖에 없는 형태의 약속, 즉 특정 물건의 권리 양도나 특정 지역의 관할권 등 가부(可否)가 분명한 권리에 대한 약속 시 아주 유용하다.
포트토르의 약속은 이런 권리 관계와는 다르지만 그보다 더 강한 구속력을 갖는다. 스스로 우무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또한 커트리안에게 협조하겠다는 약속으로 구속지어진다. 만일 이 사실이 약속의 인에 의해 증거된다면 그가 홀로 자신의 목적을 이뤘다 해도 배신할 수 없게 된다. 그 증거가 공개되면 모든 것을 다시 잃게 됨은 물론 살아남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바라흐하 왕은 녹록한 자가 아니다. 또한 켈커티스는 그렇게 만만한 폴리스도 아니다. 수십 년간 북부 최강의 도시인 아도니아와 당당히 맞서고 있는 전사들의 도시인 것이다.
“약속드리겠습니다.”
티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기억 속, 아니 본체의 기억 속에 있던 커트리안은 영악한 자였다. 실제로 만나 보니 그 이상이다. 이로써 자신은 그에게 얽매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바라흐하에 대한 충성심이 있을 리도 없었고, 권력에도 큰 관심이 없다. 자신은 오직 존재의 이유만 획득하면 된다. 도플갱어에게 있어 스스로 본체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켈커티스 최고의 권력자가 아니라 범부가 된다고 하더라도 만족할 것이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동행을 만나 길을 나섰다. 아직 정오에도 이르지 못한 시간이니 저녁이 되기 전에는 경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뿌연 대기 너머로 밝은 우윳빛 막이 하늘 끝까지 닿아 있다. 성지를 지켜 주던 막과 동일한 느낌이다. 성지를 떠나온 지 불과 반년을 넘지 않았건만, 벌써 오래된 기억처럼 아련하다. 그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사건을 겪은 탓이다.
하늘 끝에 닿을 듯 거대한 막이라 마치 코앞에 있는 듯 보이지만 적어도 반나절은 더 가야 하리라. 불청객이 끼어들었지만 기대원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경계를 넘는 그 순간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근 사흘간의 여정이 너무 순탄했기에 기대원들의 긴장감이 많이 풀어졌다.
희희낙락하는 기대원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조노량은 반대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기감을 넓히고 주변을 관찰했다. 스마르의 눈빛도 예리하게 곤두서 있다. 조노량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 풀어져도 스마르만큼은 예외다. 다른 사람에게든 자신에게든, 늘 엄격한 사내다.
그런 스마르조차 당장 기대원들에게 주의를 주거나 타박하지는 않았다. 엄격하지만 편협한 인물은 아니다. 대신 스스로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조노량과 눈빛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여 계속적인 경계를 당부한다.
조노량은 마주 끄덕여 주며 살아남은 기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커트리안은 여전히 미지근한 시선을 하고 있다. 저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조노량은 미소 지었다. 아직도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히 울린다.
‘내 사람이오.’
기대원들이 왜 그토록 커트리안을 따르는지 이해가 갔다.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한 사내다.
‘내 사람이오.’
자신을 내 사람이란다. 내가 그의 사람이었나?
그래, 지금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그의 사람이 될 것 같다. 이들 모두 가족 같고, 그는 가장 같다. 가장은 강하다. 힘이 강해서 강한 것이 아니라, 가슴에 짊어진 무게로 강해지는 존재다. 지금껏 그래왔다. 저 한결같이 미지근한 시선이 왠지 믿음직스럽다.
쥬시아누스의 듬직한 등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사십이 넘은 사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굳건한 사내다. 그 우직한 성정은 등을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에게 등을 맡긴 자는 적어도 그보다 먼저 쓰러지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스스로 쓰러지기 전에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슬그머니 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예니에프의 옆얼굴이 보인다. 항상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샤마노프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다. 아직 이십 대의 창창한 나이다. 그의 밝은 성정은 마계의 문에서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가벼운 듯 보이지만 마음은 굳은 자다.
롤의 사건 이후 참 많이 성장했다. 무공도 한 단계 진일보했지만 정신도 크게 성숙했다.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어른이 되었다.
예니에프의 뒤에 서서 걷고 있는 샤마노프의 입가에 슬쩍 불만이 어려 있다. 늘 고집하던 자리를 예니에프에게 내준 탓일까?
참 많이도 변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루드를 떠올릴 정도로 친절했음에도 늘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무던히도 자신을 괴롭혔던 사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커트리안의 지시에 의해 자신을 훈련한 것이었다. 그가 커트리안의 심복이었다는 것은 검투반원들 중 일부만 아는 일이다.
그 정도로 커트리안이 믿었던 사내지만 지금은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냉정하던 사람이 많이도 변했다. 여전히 친절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를 정도로 감정적이다. 좋고 싫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토록 끔찍해하던 마물의 고기를 생으로 뜯으면서도 웃는다. 그야말로 거리낌 없는 성격이 되었다. 아마 필요하다면 살기도 없이 웃는 낯으로 사람을 벨 것이다.
이건 자신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는 차츠라도 마찬가지다. 원래가 어둠의 임무를 담당했던 자답게 감정을 죽이고 있다. 샤마노프와 함께했던 그 이 개월간 드러냈던 적나라한 감정도 본대를 만난 순간에 감쪽같이 감춰 버렸다. 하지만 그의 내면을 들여다본 조노량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감정은 죽은 것이 아니라 감춰졌다는 것을. 마치 자신의 그림자 뒤에 몸을 감추듯 말이다.
조노량은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리들의 불퉁한 시선이 티프를 향해 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맏형처럼 묵묵히 감내하는 사내다. 하지만 티프에 대한 감정은 고울 리가 없다. 따지고 보면 검투반에 들어오게 된 이유도 티프 때문이었고,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이 빌어먹을 땅에까지 떨어지게 된 것 아닌가? 안 그래도 반 내에서 상당히 감정이 쌓였을 터인데, 이런 일까지 겪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원수가 아닌가? 생으로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커트리안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손댈 수도 없겠지만 손댄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그 공포의 계곡에서 보여 줬던 그의 무력은 지금의 크리들이라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애초에 강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티프는 크리들이 성장한 이상으로 강했다.
크리들의 뒤에서 하이오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참 낙천적인 놈이다. 태생이 그런지, 자라 온 환경 탓인지 그야말로 초지일관(初志一貫), 어지간히도 변함이 없는 자다. 이쯤 되니 그토록 비겁하고 비열해 보였던 성격도 그다지 밉지 않다. 그리고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다. 자신을 믿어 준 사람에 대한 철저한 의리. 그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끝까지 크리들을 버리지 않았다. 실로 뜻밖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편협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장점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동안 수많은 강자가 쓰러져 갔다. 그런데 그다지 강하지도 않은 이놈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생존력만큼은 그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 아닐 수 없다.
강하다고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하이오지만큼 약체로 평가받는 헤리엇도 멀쩡히 살아남았다.
조노량과 같이 A클래스 승급심사를 보았다가 코니터스의 해머에 어깨를 맞아 한동안 병상 신세를 졌던 어린 친구다. 피부가 좀 검긴 해도 외모상 변이도 없고 여전히 훤칠하고 잘생겼다. B클래스를 넘지 못하고 이 땅에 들어왔는데, 이젠 어엿한 전사가 되었다. 그래도 다른 기대원들에 비하면 부족함이 많다.
속없는 브리오티스는 왼쪽 팔뚝이 날아갔는데도 실없이 웃고 있다. 신경질적이지도, 변덕이 심하지도 않다. 천성이 밝은 친구다. 그런 성격 탓인지 변이도 별로 없다. 샤마노프가 팔뚝에 촉수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과 달리 그의 팔뚝은 깨끗이 아물어 버렸다. 뭐가 돋아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브리오티스만큼이나 성격이 좋은 친구가 폴이다. 오첩도를 만들 때 클래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줬던 친구다. 귀티 나는 얼굴에 백발이 아주 잘 어울렸던 친군데, 이제는 귀신 취급받기 딱 좋은 외모가 되었다. 허옇게 돋아난 각질이 워낙 두꺼워 표정도 지을 수 없다. 거기에 잡털 하나 안 섞인 백발이 어우러져, 절대 임산부 앞에 설 수 없는 외모가 되었다.
반면 수줍음을 많이 탔던 뮤트는 매우 신경질적인 친구가 되었다. 툭하면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다가도 급격히 우울해진다. 커다란 마물의 갈퀴에 구루가 찍혀 올라갈 때 끝까지 매달린 친군데, 용케 살아남았다. 죽을 고비도 참 많이 넘겼는데, 정상적인 삶을 살아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정의 변화가 극심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음침함으로 따지면 차츠라에 버금갈 친구가 하나 있다. 물고기 벤트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는 물고기라는 별명을 절대 부르면 안 된다.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니까.
이렇게 더운데도 목덜미까지 옷깃을 조여 맨 채 장갑까지 끼고 있다. 아가미와 물갈퀴를 감추기 위해서다. 목덜미 아래쪽 아가미와 팔뚝에 돋아난 비늘은 깃과 옷소매로 가려지지만 물갈퀴가 생겨 버린 손은 참 난감하다. 벙어리장갑 외에는 가릴 방법이 없다.
아, 그리고 벤트는 기대원 중 유일하게 크로아지크 출신이 아닌 자다. 케이 뭐라고 그랬더라? 이름도 헛갈린 모 폴리스 목민관의 아들이라니, 신분상으로는 아마 제일 귀하지 싶다.
그리고 메뚜기 아메조프도 특이하다. 뮤트처럼 신경질적이지는 않지만 이들 중 가장 호전적이다. 실력도 변변치 않은 친구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워낙 걸음이 빠르다 보니 제어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순진한 걸로 따지자면 기대원 중 최고다. 놀려먹기 딱 좋은 놈이다. 그래서 더 정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이 친구와 꼭 한번 달리기를 해 보고 싶다. 경공을 이용해서 말이다.
제우스까지 해서 이 열다섯 명이 살아남은 전부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이도 죽었다. 이백여 명 중 살아남은 자가 고작 이거라니…….
죽은 이들을 생각하니 유쾌해졌던 기분이 싹 달아났다.
조노량은 나지막이 죽은 자들의 이름을 외웠다.
브레우스, 클리브, 푸니킨, 푸트, 코니터스, 안토니아, 테오도르, 제스, 질로, 카우덱스, 세타, 비브리카, 스트라굴라, 멘사…… 그리고 롤…….
성지에서 함께 생활했던 동료들과 검투반에서의 보잘것없는 추억이 전부인 친구들……. 그새 조금씩 잊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