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다시 만난 루드
*만남*.
“노리앙, 오랜만입니다.”
나무에 기대 있던 루드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잘 잤어요?’라며 일상적인 대화를 건네 오는 느낌이다. 삼 년 만에, 이런 삭막한 곳에서 하는 인사치고는 너무 평범하다.
싱긋 미소를 짓는 루드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불과 사흘 전 그토록 격한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잔뜩 긴장한 기대원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의미 없는 행동이다. 그날 보였던 위력을 생각해 보면 기대원 전부가 달려들어도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다.
기대원들의 반응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루드는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갔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네요.”
라고 말하며 뒤편을 가리켰다. 그날 케이드의 무리를 상대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허글러 부반장님은 잘 아시겠고, 이쪽은 티프입니다. 5반의 부반장이었죠. 얼굴 정도는 기억하시죠?”
옆에 서 있던 크리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티프는 크리들의 반응엔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조노량을 향해서만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노리앙. 티프라고 합니다.”
음침한 얼굴의 사내, 티프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반면 허글러는 고개조차 까닥이지 않았다.
조노량이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루드를 향했다.
“진짜 루드가 맞는가?”
순진하고 착했던 청년, 오랜 시간 함께해 왔던 동료였지만 그날의 모습을 본 터라 이제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순수하게 반가워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노리앙? 설마 저를 의심하는 건가요?”
루드는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락없는 루드의 표정이다. 하지만 정황상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의심한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니 돌려서 물을 밖에.
“자네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떻게’라는 말에 유난히 강조가 들어갔다.
“뭐, 어쩌다 보니 여기로 왔네요……. 하하, 그 질문이 아니었나요?”
조노량이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드릴 수 없네요. 단지 제가 노리앙이 알고 있는 그 루드가 맞는다는 것, 그리고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정으로 해서 상당한 힘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또 노리앙이나 다른 분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루드가 아니라 토리도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육체와 기억은 분명 루드의 것이고, 루드의 영혼도 여전히 이 육체에 깃들어 있다. 다만 토리도의 정신이 육체를 장악하고 있을 뿐!
“그걸 어떻게 믿지?”
“미련스럽게 왜 그러세요. 제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굳이 이런 말이 필요했을까요? 또 막아 낼 자신은 있으십니까?”
조노량은 침음했다. 그날 보여 준 위용만으로도 기대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아스르부테와도 당당히 맞서 싸우던 자가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없다.”
조노량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전 기대원들의 긴장감을 높였다. 사선을 수도 없이 넘어온 자들이다. 조노량의 말대로 순순히 당할 존재들이 아니었다.
기대원들의 긴장감을 느낀 루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시라니까요.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진즉 손을 썼을 거란 말이죠. 노리앙답지 않게 왜 이렇게 성급히 구시는 겁니까?”
루드의 말투는 여상한 대화를 나누는 듯 평이했고, 반면 조노량은 여전히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용건이지?”
“에효, 우리 사이가 이렇게 딱딱해지다니 안타깝습니다. 한때는 화장실까지 함께 다니던 단짝이었는데 말입니다.”
“무슨 용건이냐고 물었다.”
“뭐, 어쩔 수 없죠. 용건이 있기는 있습니다.”
“말해라.”
여전히 딱딱한 조노량의 음성에 루드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쉬운 건 자신이었으니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검을 잠시 빌려 주시겠습니까?”
“검? 오첩도 말인가?”
“그게 오첩도입니까? 맞습니다. 그 검 좀 잠시 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물론 곧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조노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다들 이 검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제법 쓸 만이야 하지만 대단한 명검도 아니고, 보석으로 치장한 고급품도 아니다.
“그 말이 진심인가? 단지 검을 빌리기 위해 왔다는 말인가?”
루드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용건은 오직 그겁니다. 잠시 검을 빌려 주신다면 제 친구가 당신과 당신의 동료를 도울 것입니다. 그렇지요, 티프?”
음침한 모습으로 서 있던 티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주공!”
“뭘 돕겠단 말인가?”
커트리안이 끼어들었다.
“탈출도 돕겠지만 그보다 훨씬 도움이 되는 일이 있지요. 티프!”
루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티프의 얼굴이 잠시 일렁이더니 스르륵 변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커트리안과 쥬시아누스가 침음을 흘렸다.
“포트토르……?”
“1군단장?”
그랬다. 바뀐 티프의 얼굴은 커트리안과 쥬시아누스가 중얼거리듯 켈커티스의 제1군단장이며 제1 바실레오스 바라흐하 왕의 오른팔인 우무스 포트토르였다.
루드가 커트리안을 향해 살짝 윙크를 해 보이며 말했다.
“도움이 되겠지요?”
그 말에 커트리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진정 우무스 포트토르라면 앞으로의 행보에 엄청난 변수가 될 것이다.
티프의 음성이 중저음으로 낮게 깔렸다. 목소리 자체도 변한 것이다.
“최선을 다해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도 저를 조금은 도와주셔야겠지만 말입니다.”
조노량이 커트리안을 향해 물었다.
“아는 잡니까?”
“잘 아는 자네. 아니, 켈커티스의 지휘관이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자지.”
“도움이 될 수 있는 잡니까?”
“아마도 그럴 것 같네.”
그 말에 조노량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검을 잠시 빌려 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아주 잠시만 빌려 주신다면 여기 티프를 통해 금방 돌려드리겠습니다.”
“좋다. 그리 대단한 물건도 아니니.”
직접 만들었기에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었지만 검 하나에 연연할 생각은 없었다. 루드의 말대로 돌려주면 좋겠지만, 안 돌려준다고 해도 큰 미련은 없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풀어 루드에게 내밀었다.
루드는 감격에 겨운 듯 조심스럽게 오첩도를 받아 들고 살폈다. 역시 혼을 담기에 모자람이 없는 기물이다. 노리앙이 어떻게 드래곤 하트의 기운이 담긴 검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살펴본 바에 의하면 틀림없었다. 마나를 담을 수 있는 법기만이 봉인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검은 법기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모양은 수려하지 않았지만 드래곤 하트의 기운이 녹아 있고 다량의 마나가 담겨 있다. 또한 쉬이 상하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
루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노량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의 우정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반드시 도와드리겠습니다.”
여전히 예의바른 청년이지만 조노량이 알던 루드와는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조노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노량의 뒤를 받치고 있던 크리들이 여분의 골검을 조노량에게 건넸다. 조노량은 그 검을 받아 오첩도 대신 옆구리 둥근 걸쇠에 고정시켰다. 비록 경계가 코앞이라고는 하지만, 한시라도 무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오첩도를 소중히 갈무리한 루드가 허글러만 남겨 두고 티프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멀리서 일행을 지켜보고 있는 주운을 만나러 간 것이다. 늙은 마법사의 도움으로 오첩도에 봉인되기 위해서다. 그 다음일은 노리앙과 티프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었다.
잠시 후 티프가 홀로 오첩도를 받쳐 들고 나타났다.
티프는 오첩도를 들어 공손히 조노량에게 건넸다. 조노량은 건네받은 검을 잠깐 살펴보곤 의문을 담아 티프를 바라보았다.
“주공께서는 잠시 일이 있어서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무사히 탈출하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린다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와 함께 가겠단 말이오?”
조노량의 물음에 티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또 한 명이라도 많은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커트리안 님과는 긴밀히 협조해야 할 일도 있겠고요. 안 그렇습니까, 커트리안 님?”
그 말에 커트리안은 예의 미지근한 시선으로 티프, 아니 포트토르를 바라보았다.
“협조할 일이라? 그보다 이런 곳에서 포트토르 경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의외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군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사실 우무스가 아닙니다. 가문의 비사(秘事)입니다만 전 그의 쌍둥이 형, 움브란 포트토르입니다. 그에게 적자의 자리를 빼앗긴 신세지요.”
놀라운 말이었다. 우무스가 쌍둥이였다고?
스스로 움브란이라 밝힌 티프가 커트리안에게 바짝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겐 서로 협조해야 할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원래의 자리를 찾도록 도와주신다면 커트리안 님이 켈커티스를 갖도록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커트리안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는 말은 우무스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함정에 빠진 이유 그리고 가문이 몰락하게 된 이유는 바로 바라흐하 왕 때문이었다. 그와의 경쟁에서 패한 후부터 일이 꼬였다.
젊은 나이부터 승승장구했던 탓에 경솔히 바실레오스 경선에 출마하는 우를 범했다. 젊은 혈기와 가문의 배경을 믿고 도전한 것이다.
그 상대가 바로 이십 년째 제1 바실레오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라흐하였다.
바라흐하 왕은 노회한 정치가다. 선거 때마다 어용으로 내세운 경쟁자와 의미 없는 표 싸움을 벌였다. 원로원의 절반을 장악한 채 때로는 표 싸움으로, 때로는 상대로 하여금 중간 사퇴를 하도록 만들며 장기 집권을 공고히 했다. 그런 그에게 섣불리 도전장을 내밀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자신이 의외의 선전을 펼쳤다는 점이다. 바라흐하 측 원로를 제외한 나머지 원로들이 커트리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물론 아쉽게 패했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첫 선거에서 당선될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두 번째, 세 번째를 위한 포석이었다. 그리고 정치계 입문은 생각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배경도 튼튼했고, 지지 기반도 확실했다. 원로원 최고 원로인 부친과, 유서 깊은 가문의 적자로서 출신도 훌륭했고, 변화를 원하는 젊은 층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도 받았다. 오히려 그것이 문제였다.
바라흐하 왕은 장래의 정적이 성장할 때까지 두고 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것이 커트리안이 지금 이 마계의 땅에까지 오게 된 배경이었다.
그런데 바라흐하 왕의 최측근이자 켈커티스 양대 군권 중 하나를 쥐고 있는 우무스가 은밀히 자신에게 협력한다면?
“그 말을 어떻게 믿겠소?”
“전 이미 우무스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제 비밀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더 필요합니까?”
“음…….”
커트리안의 명석한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사항이 아니었다. 기대하지도 않은 패가 스스로 굴러들어 온 것이다. 그것도 조커 패다. 물론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도 안전장치 하나쯤은 확실히 마련해 두는 게 좋겠지.
“돌아간 후 약속의 인을 부탁드려도 되겠소? 물론 거부한대도 상관없소. 그때부터는 각자의 길을 가면 될 일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