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73화 (73/142)

73. 마지막 전투, 마지막 장

회전 속도가 더 빨라졌다. 우코르바흐의 거구를 완전히 밀봉시키며 엄밀한 회전의 막이 형성되었다. 이쯤 되자 폰티나의 형체는 그가 입은 갈색 가죽옷과 동일한 빛 속에 녹아들어 더 이상 눈으로 찾을 길이 없어져 버렸다. 그 갈색 그림자 속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는 우코르바흐의 신체가 흐릿하게 내비쳤다.

이미 사위가 짙은 어둠에 휩싸이기 시작했지만 우코르바흐의 몸에 남은 불꽃과 헤트르 폰티나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빛으로 인해 전장은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났다.

헤트르 폰티나의 회전 막에서 형성된 바람이 비정형의 파고를 이루며 주변을 휩쓸어 갔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때로는 두두두 끊어지며 날아들었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부정형의 바람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출발한 무언가가 연속적으로 우코르바흐에게 날아들었다. 때로는 발끝으로, 때로는 정수리를, 때로는 앞뒤 무릎으로 날아들었다. 마치 우코르바흐를 둘러싼 거대한 원에서 송곳이 튀어나와 공격을 해대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이 송곳은 결코 송곳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역도를 담고 있었기에 우코르바흐의 몸놀림도 함께 가속되며 손발이 바쁘게 휘돌았다.

기대원들이 거대한 바위 뒤에 숨어 손에 땀을 쥐며 그 결과에만 주목하고 있을 때, 조노량은 안력을 집중해 둘의 격돌을 관찰했다. 어둠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아무리 집중해도 회전 막에 의해 일그러진 대기가 조금씩 비틀어진 시야를 제공했다.

끊임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는 폰티나와 철저히 막아 내고 있는 우코르바흐, 매 충돌마다 우코르바흐는 힘으로 폰티나의 몸을 날려 버리려 했지만 에너지를 힘으로 가속시킨 폰티나의 검도 만만치 않은 무게로 버텨 냈다. 하기와의 싸움에서 이미 대부분의 힘을 소모한 우코르바흐로서는 폰티나의 검을 떨쳐 내지 못했다.

연속적으로 이어진 격돌음이 마침내 하나의 음파로 길게 늘어질 쯤, 우코르바흐의 신체를 타고 간헐적으로 피어오르던 염화가 조금씩 빛을 잃어 갔다. 주먹과 발, 강체화된 육체의 놀라운 방어력으로 버텨 내고는 있었지만 매 격돌마다 터져 나온 충격파가 폰티나가 형성한 엄밀한 회전 막에 가로막혀 우코르바흐에게 되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전력을 더했다지만 폰티나의 육체가 충격파를 견뎌 내고 오히려 되튕겨 낼 정도로 강력했음을 반증하고 있었으며, 그 충격은 하기와의 전투에서 이미 한계에 다다른 우코르바흐의 신체를 조금씩 좀먹어 들어갔다.

조노량은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만약 저 회전 막에 자신이 갇혔다면 과연 얼마나 버텨 낼 수 있을까? 단 몇 초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헤트르 폰티나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비록 가디언이 됨으로써 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투마왕을 가둬 둘 정도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거신이라 불렸던 고골리의 강력함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는데, 폰티나에 대면 그야말로 당랑거철(螳螂拒轍)이다.

반면 우코르바흐의 강력함에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와의 전투로 이미 힘을 다했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한판 붙어 보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이제 보니 어림없는 일이었다.

동급의 존재들과 벌써 한나절을 싸웠다. 그로 인해 몸에 두르고 있던 대부분의 염화가 사그라지고, 신체 곳곳이 찢기고 뒤집혔다.

우코르바흐는 전체 거인족의 수장이지만 불꽃 거인 무스펠족 출신이다. 태생적으로 불의 힘을 가진 종족이다. 몸에 두른 열기로 힘을 가늠하며 그 힘으로 최고에 오른 우코르바흐다. 그런 종족이 몸에 두른 염화를 잃었다는 건 그만큼 힘을 다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몸으로도 벌써 일각이 넘도록 저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버텨 내고 있지 않은가? 과연 멀쩡한 상태의 우코르바흐였다면 어땠을까?

어찌됐든 둘 모두 인외의 힘을 가진 경천(驚天)할 존재들이었다.

엄밀한 회전 막으로 인해 감히 도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때 갑작스럽게 전투가 멎었다. 고막을 울리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적막이 찾아들었다.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철탑처럼 굳건히 서 있는 우코르바흐와 그 앞에 비스듬히 검을 내려트린 헤트르 폰티나의 모습이 그림처럼 멎어 있었다.

폰티나의 가죽옷도 만신창이로 헤져 구릿빛 상체가 거의 드러나 있었다.

싸움의 결과를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헤트르 폰티나가 검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약했다면 멸했을 것이다. 언젠가 정상적인 상태의 힘을 느껴 보고 싶다. 가라!”

그 말을 끝으로 폰티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우코르바흐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비웃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우코르바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방 역시 싸울 줄 아는 자다. 은혜를 베푸는 것도 아니고, 배려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다. 우코르바흐 역시 변명 따위를 쏟아 내지 않았다. 지쳤다면 지친 대로, 부상이 있으면 있는 대로 싸우는 것이 전사다.

즐거웠다. 진정 유쾌한 싸움이었다. 말단 세포 하나까지 쾌감으로 요동쳤다. 이토록 극도의 쾌락을 맛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의 오랜 역사를 뒤돌아봐도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다. 온몸을 지배하는 여러 형태의 통증에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다. 고통이 큰 만큼 쾌감이 컸다. 흥분과 열락의 여운만으로도 몸 전체가 부르르 떨려 왔다.

이 땅! 오래전 떠나갔던 이 땅에 형성된 마계의 속지(屬地), 변두리로 치부했던 이 땅에 대한 애정이 듬뿍 솟아오른다. 패배 따위는 부끄럽지 않다.

투마왕이라지만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내는 존재들이 즐비하다. 창조의 힘을 다루는 존재들, 강대한 마의 법을 가진 자들, 의지만으로 차원 하나를 일그러트리는 자! 하지만 그들과의 싸움은 즐겁지 않다. 대단한 권능을 가졌지만 하나같이 싸움이 무언지도 모르는 자들이다. 그 즐거움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우코르바흐가 원하는 싸움은 이런 싸움이었다. 힘과 힘이, 기술과 기술이 정면에서 충돌하는 이런 싸움이야말로 진정한 전사의 싸움이다. 쉼 없이 단련하고 쉼 없이 정진한 자들 간에 벌어지는 힘과 힘, 기술과 기술 그리고 육체와 육체의 싸움, 그 진정한 즐거움을! 그 치열함을! 느껴 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불꽃이 사그라진 우코르바흐의 두 눈이 새로운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그래, 돌아가리라. 돌아가 몸을 회복한 후 다시 오리라. 다시 와 맛보리라! 자신의 투쟁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자들이 있는 곳! 그들과 싸워 또 한 번 열락에 몸을 떨고, 그들을 꺾고 승리의 희열까지 맛보고 싶다.

그렇기에 웃었다. 오늘의 패배 따위는 염두에도 없었다. 동정? 이런 싸움을 한 상대를 동정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상대의 배려에 고마워할 필요도 없다. 반대의 입장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마왕들은 자신을 그저 피에 굶주린 투귀로 생각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벌써부터 짜릿할 정도로 기대되는 싸움을 아껴 두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이 지루한 삶을 버틸 수 있겠는가?

우코르바흐는 남은 여운을 즐기기 위해 가능한 천천히 귀환의 법을 시행했다.

흐릿하게 사라져 가는 우코르바흐의 거체를 뒤로하고 헤트르 폰티나는 기대원들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마왕도, 마물들도, 그 무엇도 그리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완만한 계곡을 천천히 걸어서 올랐다. 갑옷이 갈가리 찢어져 드러난 그의 알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대원들의 눈에 경외감이 어렸다.

아스르부테를 소멸시킨 이 땅의 지배자 하기, 그를 패퇴시킨 우코르바흐 그리고 그 우코르바흐를 물리친 헤트르 폰티나다. 그토록 우러르던, 하지만 지금은 턱없이 부족한 ‘크로아지크의 전설’이라는 이름도 너무나 하찮아서 감히 칭할 수 없다.

커트리안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커트리안조차 주저하여 먼저 말하지 못했다.

헤트르 폰티나는 그런 커트리안을 지나쳐 조노량 앞에 섰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기운을 피워 올렸다. 그 기운에서 풍겨 나오는 어마어마한 적대감!

순간적으로 전 기대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그 적대감의 당사자인 조노량은 저도 모르게 오첩도에 손을 얹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잔뜩 일그러진 헤트르 폰티나의 얼굴을 마주 대하며 본능적으로 한 발을 뒤로 뽑아 경계했다.

우코르바흐를 상대하면서도 일말의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던 헤트르 폰티나였다. 그런 그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부들거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손을 들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던 헤트르 폰티나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드러났던 악의가 사라졌다. 그 미세한 동작을 주시하며 내공을 끌어올렸던 조노량도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헤트르 폰티나가 무심한 눈길로 조노량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커트리안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의 손도 어느새 검에 얹혀 있었다. 폰티나의 무심한 눈빛을 대하자 커트리안도 잔뜩 들이켰던 숨을 놓았다.

헤트르 폰티나의 시선이 검에 얹힌 커트리안의 손을 스치듯 지나갔다.

“내 충고를 잊은 건가? 아, 그래. 네 손을 보니 너의 선택을 알겠군. 실망이 크다.”

커트리안의 손이 움찔거리며 검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미지근한 눈빛은 헤트르 폰티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 사람이오.”

떨리는 목소리지만 단호함이 느껴졌다.

어느새 조노량의 그림자 속에 숨어들었던 차츠라의 입술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조노량은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다. 하지만 커트리안의 입에서 나온 짧은 문장이 갖는 의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전에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 알 수 없지만 헤트르 폰티나의 적의와 커트리안의 대답에서 무언가를 유추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차츠라의 몸에서 풍겨 나오던 기운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느끼고 있었다. 바늘 끝 같은 긴장감을 풍기다 자신의 그림자로 숨어들며 보인 호의적인 결연함 그리고 커트리안의 입이 떨어졌을 때 풍겼던 안도감과 믿음, 그로써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어쩌면 오늘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일지는 몰라도 손을 놓고 당해 줄 생각은 없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굳건히 감아쥐었다.

조노량이 그러거나 말거나 헤트르 폰티나는 조노량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가디언으로서 스스로의 의지를 갖는다는 건 축복이 아니고 저주로군. 배웅은 않겠다. 부정한 자여!”

말과 함께 헤트르 폰티나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더 가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말했다.

“언젠가…… 홀로 서는 날, 다시 찾겠다. 재회를 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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