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72화 (72/142)

72. 주운의 개입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기대원들이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보이지 않는다 뿐 소리까지 안 들리는 건 아니었다. 처음 휘파람 소리처럼 꼬리를 이은 고음으로 시작된 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뇌성과 벽력으로, 산이 허물어지는 울림으로 변해 갔다.

절대 무너질 리 없는 완만한 계곡이 당장에라도 허물어질 듯 거센 진동을 일으켰다. 둘의 싸움은 조금 전 아스르부테와 하기의 전투와는 다른 형태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기대원들은 제대로 땅을 딛고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대지가 진동했다. 조금씩 자세를 낮추다 보니 절로 엎드린 자세가 되어 버렸다. 날리던 흙더미가 자갈이 되었고, 바위가 되었다. 눈을 가렸던 손이 어느새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쉽게 결판지어지지 않았다. 일각이 흐르고 다시 반 시진을 훌쩍 넘겼다. 조노량은 아까의 경험으로 암경과 오첩도로는 우코르바흐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아스르부테와 달리 염화에 둘러싸인 우코르바흐에겐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기의 전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기와 우코르바흐, 둘 모두 희열에 들떠 모든 것을 잊고 싸웠다.

태양은 넓게 퍼지면 퍼질수록 빛을 잃는다. 밤이 가까워 오자 태양을 둘러싼 뿌연 빛무리가 점점 더 넓게 퍼져 갔고,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기대원들이 바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사이, 사위가 조금씩 어둠에 잠겨 갔다.

그렇게 곧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려는 직전, 가슴을 쥐어뜯는 비명이 계곡을 가득 메웠다. 기대원들은 직감적으로 결말이 지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흄의 비명 소리, 영혼을 찢을 듯한 그 비명 소리가 뜻하는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검은 연기가 터져 나가며 하늘로 튕겨져 올랐다.

산산이 찢어져 흩날리던 연기가 급격히 축소되며 까마득히 멀어져 갔다.

전혀 향방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던 전투가 단번에 마무리 지어졌다.

처음 싸움이 시작된 그 자리에 우코르바흐의 거대한 육체가 굳건히 버티고 서 있었다. 우코르바흐의 거체로 가득 찬 기대원들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하기가 승리한다고 해서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우코르바흐가 승리한 이상 살아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우코르바흐 역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는지 육체를 둘러싸고 있던 불꽃이 대부분 꺼져 있었다. 불꽃이 사라진 부위는 마치 가죽이 벗겨져 나간 것처럼 검고 붉은 피부가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우코르바흐의 두 발은 대지에 단단히 박혀 미동도 없었다.

마치 정물화를 보듯 모든 것이 멈춰져 버렸다. 조노량은 너무 고요한 풍경에 일순간 귀가 먹은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해야 했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광음에 익숙해진 탓이다. 하지만 곧 귀가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완전히 승세를 잡고 아스르부테의 권속들을 전멸에 가깝도록 밀어붙이던 흄과 토착 마물들의 군대가 요란한 소음을 발하며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스르부테의 군대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의지를 가진 존재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행위였지만 이미 죽어 버린 아스르부테의 마지막 명령과 살육의 본능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가능하게 했다.

그 순간 허글러가 말없이 일행들 앞으로 나와 섰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원래도 무표정한 인물이지만 저 정도까지는 아니다. 마치 감정 없는 인형을 보는 것 같지 않는가? 방금 전의 전투에서 드러난 우코르바흐의 가공할 무위를 목격하고도 일말의 공포심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사물을 대하는 느낌이다.

허글러가 대단히 강하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의 기준에서다. 이런 인외의 존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말을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마치 인형처럼 루드의 뒤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을 따름이다. 조노량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가 어떤 존재이든 상관없이 지금은 그와 함께 싸울 때였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굳게 움켜쥐고 허글러의 옆으로 나와 섰다.

우코르바흐는 멀어져 가는 마물들을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의 법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은 강체임에도 하기와의 전투에서 입은 손상이 상상을 초월했다. 육체 곳곳이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찢기고 괴사한 부위에는 염화마저 소멸되어 버렸다. 육체적 완성을 추구하는 마왕답게 그 회복력은 여타의 마왕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왕성했음에도 손실된 부분의 재구성이 불가능함은 물론 복구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코르바흐의 입에서 낮은 하울링이 새어 나왔다. 고통을 쾌락으로 알고 있는 우코르바흐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흘린 신음성이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임무에 실패했음을 자인했다. 이 상태로는 하기를 쫓을 수도 없을뿐더러 멸할 자신도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육체와 달리 실로 오랜만에 마음껏 싸워 봤기에 정신적으로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겠지만 다음 싸움을 위해 우선 마계로 귀환해 육체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우코르바흐는 아스르부테처럼 약한 존재들에 대한 가학증이 없다. 흥미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성향은 결코 인간들에게 긍정적인 결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우코르바흐의 본질은 마왕이었다.

우코르바흐는 단숨에 인간들을 멸하고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우코르바흐의 귀환은 수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상처 입은 야수 우코르바흐의 앞에 한 사내가 당당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내를 확인한 기대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싸움으로는 일생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는 크로아지크의 전설, 헤트르 폰티나였다. 통나무집 앞에 앉아 틈나는 대로 다듬고 있었던 커다란 골검을 아무렇게나 둘러매고 뚜벅뚜벅 걸어 우코르바흐의 앞에 섰다.

헤트르 폰티나의 골검은 중원의 장군검을 닮은 거대한 양날검이었다. 그렇다고 투핸드소드처럼 길거나 두껍지는 않았다.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만든 기다란 검병(劍柄, 손잡이)에는 거친 마물의 가죽이 감겨 있었고, 검격(劍格, 손 보호용 가름막)은 무게중심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작고 둥근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손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작은 원형 운두(雲頭)도 눈에 띄었다.

지극히 실용적인 모습, 그 어디에도 꾸미거나 장식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군대의 지휘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는 장군검과 달리 실전용 검임이 확실했다.

헤트르 폰티나는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검을 들어 우코르바흐에게 향했다. 도전의 의미가 듬뿍 담겨 있다.

일견해도 건방지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설사 동급의 상대를 대하더라도 도전의 의사를 정중히 표해야 마땅하거늘, 인간 주제에 반신을 대함에 있어 공경이나 경배는커녕 마땅히 보여야 할 작은 예의도 생략되어 있다. 우코르바흐의 안면에 남아 있는 불꽃이 이글거렸다. 단매에 응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진대, 지금의 몸 상태는 그마저도 부담스럽다.

검을 겨눈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사를 전달했다고 믿었는지 헤트르 폰티나는 거침없이 우코르바흐의 거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육 미터에 이르는 우코르바흐에게 헤트르 폰티나는 허리도 오지 않는 작은 생명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작은 몸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기세는 투마왕 우코르바흐조차 움찔할 만큼 대단한 기세를 품고 있었다.

투두둑, 헤트르 폰티나의 걸음마다 땅거죽이 푹푹 패이며 뒤집혀 나갔다. 톤 단위의 무게를 지닌 기형 미물이라 해도 이 정도의 발자국을 남기지는 못한다. 그렇게 무거울 리 없는 폰티나의 몸무게라면 메마른 대지에 변변한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해야 한다. 그럼에도 갈아엎는 듯 땅이 패여 나갔다는 말은 속도는 물론 가공할 역도가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결정적인 순간 반발력과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진각이라는 기술을 사용한다. 그런 진각이라면 이해가 될 만한 위력이다. 하지만 조노량조차 연속적으로 진각을 밟지는 않는다. 소모되는 기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매 걸음 진각을 밟는다면 오히려 몸이 굼떠진다.

하지만 헤트르 폰티나의 발걸음은 쾌속하기 짝이 없었다.

헤트르 폰티나의 가공할 진공에 우코르바흐는 한 발을 뒤로 빼며 무게중심을 낮췄다. 마주 부닥치겠다는 심산이다.

자신을 상대로 힘 싸움, 몸싸움을 걸어 오는 존재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런 싸움이 우코르바흐가 가장 즐기는 방식의 싸움이다. 하기와의 싸움으로 기진한 몸이지만 이런 싸움을 마다할 수는 없다.

우코르바흐의 불쾌했던 기분은 날아가고 어느덧 한껏 고조되었다. 기진한 세포가 부들거릴 정도로 재차 흥분이 찾아왔다.

쾅! 쾅!

헤트르 폰티나의 검격이 우코르바흐의 주먹과 연속적으로 격돌을 일으켰다.

육중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검과 주먹이 충돌했다기보다는 충차가 성문을 들이박았을 때나 날 법한 소리였다. 우코르바흐는 중심을 잔뜩 낮추고 헤트르 폰티나의 검을 향해 양 주먹을 번갈아 뻗어 냈다. 곧게, 휘돌아서, 때로는 내리누르며 다양한 형태의 주먹질이 헤트르 폰티나의 몸체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단 하나도 폰티나에게 직접적으로 가 닿지는 못했다. 그의 검이 휘돌 때마다 기둥만 한 우코르바흐의 팔뚝이 튕겨져 나갔다. 골곤의 뼈를 다듬어 만든 만큼 무겁고 큰 검이었지만 우코르바흐의 팔뚝에 비하면 이쑤시개에 지나지 않는다. 단번에 부러져 나가야 마땅하건만 폰티나는 그 검으로 우코르바흐의 팔뚝을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 냈다.

그때마다 발생하는 충격파가 제법 거리를 두고 있는 일행을 밀어낼 정도였으니 폰티나의 검에 실린 역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십여 합을 주고받은 후 폰티나가 우코르바흐를 중심으로 회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낮은 원을 그렸다. 폰티나의 신장을 생각한다면 적절한 높이다. 원에서 산발적으로 무언가 빠르게 튀어나와 우코르바흐를 타격했다. 하지만 우코르바흐의 주먹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회전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드디어는 폰티나의 형체가 흐릿해질 정도로 속도가 붙었다. 속도에 비례해서 폰티나의 검에 실린 무게가 달라졌다. 좀 더 묵직하고 좀 더 파괴적인 기운이 뻗어 나왔다.

하기와의 싸움에서 이미 반쯤 무너진 육체였지만 우코르바흐가 광소를 터트렸다.

웃음에 유쾌함이 묻어난다. 진정 즐기고 있는 것이다.

우코르바흐의 주먹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라졌다. 관절의 가동 범위를 넘어 기이한 각도로 뻗어지고 휘어졌다. 충격파가 콩 볶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폰티나의 회전이 조금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낮은 원이 조금씩 높아지더니 우코르바흐의 머리 높이에 회전이 형성된다. 그러길 잠시, 원이 높고 낮은 사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꿀벌의 경고비행을 연상시키는 타원형 궤도가 형성되었다가 물결치며 반대 방향에서 사선이 형성된다. 그리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옮겨가며 지그재그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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