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69화 (69/142)

69. 구원

조노량과 퓨콤뜨리아리트와 아스르부테와 롤이 맞닥뜨리는 그 순간, 그들로부터 이백여 킬로미터 밖에선 또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의 시작은 오크 한 마리로부터였다. 겁 없는 오크 한 마리가 케이드에게 달려들었다. 케이드는 민머리에 뾰쪽한 귀를 가진 전형적인 마인의 얼굴이었으나 풍기는 기세는 천지 차이였다.

마왕들은 하급의 마물들이나 마인들을 일족으로 쳐 주지 않는다. 반면 ‘마족’으로 분류되는 존재들부터는 일족으로 쳐 준다. 일종의 자격이랄까?

케이드 일족은 마족으로 분류되는 마물이었다. 계급으로 치면 평민에 해당한다. 또한 전사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노예에 해당하는 마인들이나 가축에 해당하는 기형 미물들과는 급이 달랐다. 그렇기에 지닌 힘이 만만치 않았다. 과거 마계 원정대에 속했던 최강의 기사들, 그들의 후신인 듀라한과 맞서서도 밀리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케이드에게 있어서 오크 한 마리는 날파리에 지나지 않았다.

분화할 필요도 없이 그 오크는 목숨을 잃었다. 오크는 마물이라기보다는 몬스터다. 그들의 피에는 복수의 인자가 내재되어 있다. 두 번째 오크가 달려들었고, 죽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열 번째 오크가 달려들었다.

하나하나는 약하지만 무리 지었을 때의 오크는 절대 약하지 않다. 특히 마기에 의해 변이된 오크는 더욱 그렇다. 이십여 마리가 넘어가자 케이드와 평수를 이루기 시작했고, 삼십여 마리가 넘어가자 케이드도 버티지 못했다. 그때 분노의 거인 요툰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의 무리가 천을 넘어가고, 그 뒤를 이어 듀라한이 가세했다. 전장의 포효가 들판을 가득 메아리쳤다. 케이드의 무리가 나타났고, 산의 거인 베르그리시와 서리 거인 흐림두르스가 그 육중한 몸집을 드러냈다.

흐림두르스의 뒤를 이어 어둠의 갈리온에 몸을 실은 데스나이트 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행한 흐림두르스 한 마리가 어둠의 기사대에 갈가리 찢겨 나갈 때 케이드이면서 죽음의 흑법사인 케이지니스 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라 남하하던 수백의 마인들이 줄을 이었다.

오크 한 마리로부터 시작된 전투는 수천의 무리가 격돌하는 본격적인 전장으로 돌변했다. 작은 들판이 미어터지고 어둠의 마법이 전장을 수놓았다. 기사들이 마법사를 잡아먹고 거인들이 권능을 드러냈다. 불덩이가 날고, 얼음 기둥들 사이로 서리가 흩날렸다. 지난날 크로아지크 기대가 건넜던 그 벌판이었다.

전장으로부터 삼십 킬로미터 밖, 불꽃으로 둘러싸여 있는 신장 육 미터에 이르는 거인이 대기를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실로 가공할 속도였다. 보폭은 사 미터, 패이는 깊이는 오십 센티미터,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지축을 울리며 대지가 몸살을 앓았다. 나무가 가로막으면 나무가 터져 나갔고, 불타올랐다. 바위가 가로막으면 바위가 터져 나갔고, 붉게 달아올랐다. 먼지가 불꽃이 되어 흩날렸고, 일직선의 화마가 대지를 갈라놓았다.

마기를 호흡하면서도 수백 년간 굳건히 버티던 고목이 찰나에 터져 나갔다. 수백 년간 끈질기게 종을 이어 가던 덤불이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에 검불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덤불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자유를 찾은 셈이다.

거인이 긋는 화염의 선은 순식간에 이십 킬로미터를 단축해 전장에 도달했다.

콰앙!

거인은 거의 삼십 미터를 뛰어올라 전장 한복판에 떨어져 내렸다. 그 충격에 대지가 진동을 했다. 거인이 떨어져 내린 중심으로부터 화염이 폭발했다. 화염은 거인이 뛰어오른 높이만큼 퍼져 나갔다. 그 폭염에 노출된 마물들이 단숨에 불타올랐다. 탄화된 육신 위로 뒤늦게 끓어오른 피가 한 번에 기화하여 비좁은 육신을 파탈(擺脫)했다. 그라운드 제로, 폭심으로부터 반경 삼십여 미터가 초토화되었다.

반신 무스펠족의 수장이며 전체 거인족을 지배하는 마왕 우코르바흐였다. 오직 싸움과 파괴만을 존재의 목적으로 삼는 투마왕, 아스르부테를 돕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그 강대함으로 인해 아스르부테조차 멀리하는 자였다.

“크르릉!”

붉게 타오르는 우코르바흐의 두 눈이 욕망으로 꿈틀거렸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멸하라. 지상 위에 솟아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라. 그의 뇌리에 각인된 욕망이 살아 있는 마물들에게 머물렀다.

전장을 누비던 거인들이 서둘러 전장을 이탈했다. 욕망에 잠식당한 우코르바하는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머물다가는 우코르바하의 제물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탓이다.

무모한 오우거 한 마리가 우코르바흐를 향해 돌진했다.

덩치로 치면 우코르바흐에게도 밀리지 않는 거구다. 힘으로 치면 마계의 문의 어떤 마물도 오우거를 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정도 급에서나 통하는 힘일 뿐, 우코르바흐에게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존재일 뿐이다.

먼 옛날 거인족이 마계로 넘어갈 때 남겨진 저능아들, 그것이 오우거였다. 같은 거인족이었음에도 그 미천함으로 인해 버려진 일족. 그런 오우거가 감히 거인족의 수장인 우코르바흐에게 덤벼들다니, 하룻강아지가 호랑이에게 덤벼드는 꼴이다.

우코르바흐의 오른손이 오우거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거칠게 돌진하던 오우거가 못 박힌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힘의 차이는 둘째 치고 이글거리는 우코르바흐의 두 눈을 대하자 포식자를 마주한 어린 토끼처럼 얼어붙었다.

목덜미에서 발화된 권능이 오우거의 전신을 치달았다. 오우거의 거죽 위로 불티가 솟는가 싶었을 때는 이미 거대한 불덩어리로 화했다. 그리고 곧, 그 커다란 덩치가 재 한 줌 남기지 못하고 한순간에 공기 중에 흩어졌다.

허공에 치켜 들렸던 우코르바흐의 오른손이 활짝 펴지며 전면을 가리켰다. 선상에 있던 케이드 다섯 마리와 한 떼의 오크들은 그 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거대한 불꽃 회오리를 맞이해 숯덩이가 되어 버렸다.

광기에 젖으면 적아를 구분하지 않는 우코르바흐였다. 그렇기에 아스르부테의 군단과도 함께하지 못하고 별도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오른손이 연신 주변을 휩쓸었다. 어둠을 둘러쓴 듀라한도 그 지옥의 염화는 벗어나지 못했고, 버벅거리던 케이드와 케이지니스가 타올랐다. 대지가 녹아 붙었고, 바위가 형태를 잃었다.

살아 있는 마물이든, 죽어 있는 마물이든, 심지어 자연도 그의 앞에서는 남아나지 못했다. 파괴의 화신 우코르바흐가 그 욕망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영혼마저 태워 버리는 불꽃 바포르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육신을 잃어버린 죽음의 기사, 그들은 바포르에 의해 영체마저 소멸해 버렸다.

우코르바흐는 희열에 몸부림치며 전장을 누볐다. 우코르바흐의 육체는 살육과 파괴가 거듭될수록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한껏 달아오른 우코르바흐는 자신의 팔이 짧음을 한했다.

마물들로서는 다행이었다. 그가 아스르부테처럼 마의 법을 자유롭게 다뤘다면 그 어떤 마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아는 만큼 얻는다고, 침략군에 속한 마물들은 우코르바흐를 피해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토착 마물들은 그렇지 못했다. 악의로 유형화된 듀라한의 검이 우코르바흐를 향해 쏘아졌고, 오크의 글로브가 용감하게 돌진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 누구도 우코르바흐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폭죽처럼 타올랐다. 우코르바흐의 입장에서는 쫓아가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 오히려 좋았다.

거대한 전장이 정리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 하나의 존재감이 들판을 가득 채웠다. 수천의 마물들이 흩어지고 도주하고 소멸했다.

그러다가 우코르바흐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우코르바흐의 감각에 거대한 마기의 용틀임이 감지되었다. 남서쪽 이백 킬로미터? 익숙한 마기다. 자신을 호출한 아스르부테의 마기였다.

우코르바흐의 거체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스르부테가 자신을 불렀을 때는 그만큼 강대한 적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우코르바흐의 광폭한 머리에 한 존재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하기라 했던가? 지난날 자신의 추적을 따돌리고 달아났던 이 땅의 지배자.

이 따위 미천한 존재들을 파괴하는 것보다 훨씬 큰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우코르바흐는 망설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일직선으로 불의 길이 열렸다.

양쪽으로 쭉 찢어진 산양의 노란 눈이 일행을 노려보았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존재! 거신 고골리를 장난감 가지고 놀 듯했던 아스르부테였다. 기대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때 계곡 좌측 언덕에서 마물의 비명과 울부짖음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격렬한 소음에 절로 눈이 돌아갔다. 무언가가 마물들의 저지를 뚫고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내려오고 있었다.

웨어울프?

대지를 때리는 발자국 소리와 그 발길에 채인 자갈들이 뒤따라 튀어 올랐다.

아올!

네 마리의 웨어울프가 미친 듯이 질주해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격전을 치른 듯 처참한 모습이었다.

크앙!

웨어울프 한 마리가 고개를 돌려 일행을 향해 길게 포효를 내질렀다. 한눈에 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인간의 형체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붉게 달아오른 눈빛에 인간의 감정을 담고 있다.

얼굴을 잃어버릴 때 성대도 함께 잃어버린 롤은 짐승의 울부짖음으로써 의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포효하고 위협했다.

제발 달아나라!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점하고 있는 마왕을 상대로 웨어울프 몇 마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붉게 달아오른 눈에 동요하는 기대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시 한 번 위협적인 포효를 내질렀다.

달아나라! 내가 벌어 줄 수 있는 시간은 촌음에 불과하다.

일행의 앞을 막아서며 잠깐 유지되었던 이성이 사라져 갔다. 붉은색으로 번들거리는 눈, 짐승으로서가 아닌 광전사로서 이성을 놓았다.

광전사는 지키는 존재가 아니다. 공격하는 존재, 멸하는 존재, 파괴하는 존재다.

웨어울프의 육체와 광전사의 광기가 한데 어우러져서 종족을 뛰어넘는 강대함을 얻었다.

달렸다. 본능에 각인시킨 적이 저기 있다. 삼 미터에 가까운 웨어울프가 십 미터 높이에 있는 아스르부테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뛰어올랐다.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이었지만,.

퍽!

아스르부테의 기둥 같은 팔뚝이 롤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웨어울프의 거대한 육체가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그 틈을 노리고 웨어울프 한 마리가 아스르부테의 허벅지를 물고 늘어졌다.

뱀의 머리가 허벅지를 물은 웨어울프의 몸통에 독아를 박아 넣었다. 다른 웨어울프가 뱀의 목을 물어뜯었다. 또 다른 웨어울프가 아스르부테의 옆구리를 할퀴었다.

독아에 물린 웨어울프가 한 줌 핏물로 녹아 버렸다. 목덜미에 달라붙었던 웨어울프는 이빨자국 하나 내지 못하고 뭉개져 버렸다. 옆구리를 할퀴던 웨어울프는 두 동강이 났다.

웨어울프 세 마리가 아스르부테의 몸짓 몇 번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크어엉!

나가떨어졌던 롤이 공처럼 튀어 올랐다.

☆ ☆ ☆

아스르부테의 발톱이 날아드는 롤을 향해 휘둘러졌다. 허리를 튕긴 롤이 마주 발톱을 들이댔다. 오오라가 어린 롤의 발톱과 아스르부테의 거대한 발톱이 공중에서 격돌했다. 발톱은 견뎌 냈으나 피지컬의 차이는 극복될 수 없다. 웨어울프의 몸뚱이가 형편없이 튕겨져 나동그라졌다.

광전사는 팔다리가 부러져도 육신이 뭉개져도 움직일 수만 있으면 달려드는 존재다. 비록 변이되었다고는 하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롤은 소에게 달라붙는 쉬파리처럼 끊임없이 아스르부테에게 달려들었다. 그 강대한 거죽에도 몇 줄기나 골이 패였다. 웨어울프에게서 볼 수 없는 강력함이 아스르부테를 괴롭혔다. 놀라운 움직임으로 아스르부테의 발톱을 피해 냈다. 뱀의 머리도 번번이 허공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제법 버틴다 싶었지만, 종내 아스르부테의 발톱이 롤의 팔뚝을 스쳤다. 그것만으로 웨어울프의 탄탄한 근육이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강철보다 단단한 뼈마디가 삭정이처럼 동강 났다. 어이없이 팔 한쪽이 날아갔다.

롤에게는 아직 팔 하나가 남아 있고, 두 다리가 남아 있다. 광포화된 롤은 팔 한쪽을 잃은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 거구의 몸체가 아스르부테를 향해 도약했다. 발톱에 어린 오오라가 아스르부테의 가슴에 기다란 고랑을 파 놓았다. 하지만 아스르부테의 기둥 같은 팔뚝이 롤의 어깨 부근을 스쳤다. 팽이채에 맞은 팽이처럼 정신없이 돌아 떨어졌다. 너무 빠른 회전에 중심을 잡을 수도 없었다. 바위틈에 처박혔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머리와는 달리 몸은 엉망이 되었다. 어깨뼈는 가루가 됐고, 전이된 충격에 왼쪽 갈비뼈도 전부 부러져 나갔다. 전신을 울리는 고통에도 기어이 몸을 바로 세운다.

산양의 머리가 미소 짓고 있다. 아스르부테의 거죽에 난 고랑은 어느새 촘촘히 메워져 있었다. 혼신을 다한 공격이 허투루 돌아갔다.

아스르부테를 향해 롤은 달렸다. 무모한 움직임에 부러진 갈비뼈가 허파를 찌르고, 간을 침범하고, 내장을 토막 냈다.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장기 전체를 찢어 버린 다발성 손상에 웨어울프의 강력한 회복력도 한계에 달했다.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지만 걷는 것보다 느리다. 쓰러지지 않는 것이 용했다.

아스르부테는 즐거웠다.

스스로 포기한 자를 죽이는 것은 싱겁기 그지없다. 반항하는 자를 괴롭히는 것이, 스스로의 한계에 절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백배는 즐겁다. 그런 면에서 저 웨어울프는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좀 더 즐겨 주겠으나, 정작 중요한 일은 따로 있으니 그만 마무리 지어야겠다.

아스르부테가 얼음의 창을 소환했다.

짐승의 상박에 얼음의 창이 직격했다.

쓰러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핀에 꽂힌 곤충처럼 지면에 박혔다.

한계였다. 넘을 수 없는 힘의 차이, 웨어울프의 육체도 광전사의 광기도 통하지 않았다.

바닥에 처박힌 롤이 거칠게 몸부림쳤다. 한쪽 폐를 통째로 날려 버린 채, 쇄골과 부러진 갈비뼈 사이에 단단히 틀어박힌 얼음의 창이 롤의 육체를 놓아주지 않았다.

롤만큼이나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예니에프가 달렸다. 검에 어린 오오라가 자유를 찾아 날아올랐다. 쥬시아누스의 거검이 아스르부테의 가슴을 향해 던져졌다. 스마르의 브로드소드가 뒤를 따랐다.

위잉!

카캉!

회전하며 날아간 오오라가 아스르부테의 몸통에서 소멸되었다. 쥬시아누스의 거검이 튕겨져 되돌아왔다.

아스르부테의 거죽에 작은 긁힘이 남았다. 산양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위잉! 위잉! 위잉!

캉! 캉! 카가캉!

쉼 없이 뿜어지는 오오라가 검을 벗어나 일렬로 날았다. 연달아 아스르부테의 거죽을 타격했다.

단언컨대 예니에프 평생 이토록 강렬한 오오라를 발출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스르부테의 거죽을 긁어 놓은 이상의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롤의 발톱만도 못했다.

터엉!

슬그머니 돌아 들어갔던 조노량의 암경이 발출되었다. 하지만 어느새 소환된 아스르부테의 베리어에 막혀 허무하게 소멸되었다. 암경을 익힌 이후 첫 실패였다.

웨어울프나 인간들은 아스르부테에게 있어선 작은 여흥거리에 불과했다.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하찮은 존재들이다.

산양의 눈은 오직 조노량을 향해 있었다. 단 한 번도 조노량을 시선에서 놓치지 않았다. 슬그머니 빠지는 것도, 묘한 마법을 시전하는 것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인간들은 몰라도 저 이상한 인간의 마법은 주의하고 있었다. 때문에 여유롭게 베리어를 시전했다.

아스르부테의 눈이 커졌다. 7서클의 마법까지 방어해 내는 베리어가 단번에 소멸해 버렸다. 역시 흥미로운 힘이다. 아스르부테는 재차 베리어를 소환한 후 입을 놀렸다.

“어리석은 인간, 이 아스르부테 님이 두 번 당할 거라고 생각했나?”

대답은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뒤쪽에서 들려왔다.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아스르부테여, 워리놈의 발톱이여!”

쿵!

뒤에서 들려온 경박한 목소리에 아스르부테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다가들 수 있는 존재라면? 설마?

돌아선 아스르부테의 눈앞에 박쥐의 날개를 활짝 펴고 허공에 떠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아스르부테는 상대가 엔젤나이트가 아님에 안도하는 한편, 껄끄러움에 눈살을 찌푸렸다.

“퓨콤뜨리아리트? 네놈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인간들을 건드리지 말지어다. 이는 거역할 수 없는 벨제뷰트 님의 명이니 조용히 물러가거라.

육성이 아닌 머릿속을 울리는 전언이다. 강대한 마왕들이나 가능한 마의 법이었다.

-무슨 소리냐? 워리놈 님께서는 그런 명을 내린 적 없다. 내 즐거움을 방해할 셈이냐?

-벨제뷰트 님의 열두 지옥을 고루 경험해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저주받은 변이자 놈 주제에, 벨제뷰트 님의 이름을 팔아 감히 내 행사에 간섭을 하려 드는 것이냐? 그 경박한 주둥이를 뭉개 놓고 그 목을 따 놓아도 입을 놀릴 수 있을지 보고 싶구나.

퓨콤뜨리아리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남의 이름을 팔아 겁박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벨제뷰트의 이름을 팔았는데도 통하지 않는다.

이 꽉 막힌 놈이 초장부터 싸우자고 덤비는구나. 불을 봐야 뜨거움을 알고, 얼음을 봐야 차가움을 아는 무식한 놈이로다. 하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한숨을 푹 내쉰 퓨콤뜨리아리트가 작전을 바꿔 회유를 시작했다.

-이봐, 아스르부테, 농담이 아니라구. 벨제뷰트 님이 엄명을 내리셨다네. 그대가 주목하고 있는 저 친구 말일세.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니까. 정말이야. 그냥 가는 게 어떻겠나? 내 돌아가면 톡톡히 보답함세. 응? 어떤가? 그리고…….

퓨콤뜨리아리트는 아스르부테의 귀가 따가울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아스르부테가 퓨콤뜨리아리트의 말을 끊었다.

-너처럼 천박한 놈이 어떻게 그런 강대한 힘을 품었는지 모르겠구나. 마왕의 수치다. 나 아스르부테는 오직 워리놈 님의 명을 따를 뿐, 벨제뷰트 님이 뭐라 한대도 내 의지를 꺾을 생각이 없다.

-이 친구야, 자네도 생각을 좀 해 보게. 벨제뷰트 님의 본질은 그들이잖은가? 한때 그들과 함께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던 분이셨다네. 그분의 눈은 우리가 모르는 곳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분의 뜻은 헤아릴 길이 없다네. 우리 같은 하찮은 존재들은 이해할 수 없잖은가? 그분이 그렇게 명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심이야. 어디 그분이 다른 군주의 행사에 쓸데없이 간섭하시는 거 봤나? 하지만 이번 일은 사안이 달라. 제발 내 말 좀 들으라구! 내 말을 들어서 자네에게 해가 될 일은 없다네. 아니, 톡톡히 보답하겠다니까. 응? 어떤가?

-쓸데없는 소리! 감히 벨제뷰트 님의 이름을 팔아 나를 겁박하려 든 죄, 내 손에 분시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렌토르 놈이 매우 기뻐하겠군.

-그 빌어먹을 놈 얘기는 왜 꺼내는 거냐? 그만큼 이야기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정녕 내가 손을 써야 후회하겠느냐?

-오랜만에 강대한 마기를 맛볼 수 있겠군. 오래전부터 네놈이 거슬렸다. 죽여 주지!

강대한 두 마왕의 기세가 조금씩 고양되기 시작했다.

둘이 한창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 예니에프와 쥬시아누스는 서둘러 얼음의 창을 부수고 롤의 몸을 빼내어 멀찌감치 물러났다.

직감적으로 새로 나타난 존재 역시 보통의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를 피워 올리고 있는 모습이 격렬한 전투와 다름없었다.

둘이 내뿜는 기세만으로도 살갗이 따끔거릴 지경이었으니, 손발을 섞지 않는다고 하여 전투가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단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잔뜩 경계만 할 따름이다.

롤의 모습은 처참했다. 아스르부테의 손톱에 갈라진 거죽은 처참하게 뒤집혀 있었고, 얼음의 창에 당한 가슴은 쟁반만 한 구멍이 뚫려 그 아래로 흙바닥이 내려다 보였다. 인간이었다면 죽어도 열 번은 죽었을 상처였지만 웨어울프의 육체는 끈질기게 롤의 생명을 부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였다. 지혈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구멍에서 왈칵거리며 흘러나오던 피도 어느새 멎었다. 더 이상 빠져나올 피가 없는 것이다.

제우스가 나서려 했으나 커트리안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에게는 치료가 아니라 공격일 뿐이오.”

제우스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제우스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마물들이 그의 성력에 어떻게 죽어 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변이를 마친 롤에게 성력은 극한의 고통일 뿐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아, 이렇게 손도 못 쓰고 또 다시 롤을 잃어야 하다니!

“크르릉…….”

변이된 롤의 성대에서 짐승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까물거리는 눈빛에는 더 이상 붉은 기가 어려 있지 않았다.

제우스는 롤이 이성을 찾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일렁거리는 눈빛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정을 담고, 걱정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어서 도망가라고, 제발 떠나라고. 오히려 기대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고 있었다.

일행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 동안 기대원들을 보호했던 롤, 얼마나 비참했을까? 얼마나 그리웠을까?

광전사였지만 정이 많은 롤이었다. 젊은 기대원들과도 격의 없이 웃고 떠들던 소탈한 성격이었다.

그런 사람이 마물이 되고, 동료의 피와 살을 삼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제우스는 피가 엉겨 붙은 웨어울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참았던 눈물이 흘러 롤의 털을 적셨다.

제우스를 바라보는 롤의 눈빛에도 따스함이 어렸다. 그것도 잠시, 경련과 함께 부릅떠졌다.

그 순간 제우스는 보았다. 검붉은 색을 띤 탁한 빛무리가 롤의 육체를 벗어나고 있는 것을, 그리고 대기 속에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 안 돼!’

제우스가 단숨에 성력의 막을 생성했다. 기도도 주문도 없었다. 오로지 의지만으로 성막을 생성했다. 그런 후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일반적인 성력의 막이 아니었다. 영혼조차 빠져나갈 수 없도록 촘촘하고 밀도 있게 구성했다.

그 우윳빛 막이 웨어울프의 커다란 주검을 덮었다. 웨어울프의 육체를 감싸고 스스로 빛을 뿜었다. 감히 마주 보기 어려울 정도의 성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그 위엄에 기대원들은 절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하이오지가 덥석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따라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강대한 존재들이 살기를 뿌려대고 있었지만 기대원들은 의식하지 못했다.

동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조노량 역시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 롤의 죽음을 애도했다. 눈을 감고, 자신의 등을 두드리며 껄껄거리던 롤의 웃음을 기억했다. 시민궁 시합에서 자신의 승리를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던 롤의 얼굴을 떠올렸다. 골곤의 뼈를 다듬으며 투덜거리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제우스는 성막에 갇혀 마구 요동치는 영혼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볼 수 있었다. 검붉은 색의 탁한 기운이 성막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들을 수 있었다. 고통에 울부짖는 영혼의 목소리였다. 롤의 비명이었다.

너무도 처절한 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성막을 해제해 버릴 뻔했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다지고 오히려 성력을 높였다. 홀리필드를 연달아 펼치는 것보다 힘들었다. 이제는 정신마저 혼미해지려 했다. 노리앙의 안수가 간절했다. 하지만 입을 열어 말할 수 없었다. 입을 벌리는 순간, 더 이상 성막을 유지할 수 없을 터였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회색의 대기가 노랗게 변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심저(心底)의 밑바닥, 마지막 기운까지 끌어내 성막에 집중했다.

바로 그 순간, 제우스의 영혼에 기대어 안식하고 있던 333명의 영혼이 깨어났다. 마음속 깊은 곳, 무허(無虛)의 공간에 성가가 울려 퍼졌다. 그 영혼들의 힘이 제우스에게 전해졌다.

성막이 급속도로 압축되었다. 점점 작아져, 기어이 수정구슬만 하게 줄어든 성막 속에서 롤의 영혼이 몸부림쳤다. 그리고 영혼에 달라붙어 있던 탁기가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탁기가 하얀 빛무리에 휩싸여 타올랐다. 탁기가 걷힌 영혼이 빛을 품기 시작했다.

오색의 영롱한 빛무리가 수정구슬과 함께 제우스의 몸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갔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기대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롤을 애도하고 있었다. 다만 눈을 떴을 때 웨어울프의 육체가 사라지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롤의 시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기대원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제우스는 정신을 놓으며 까무룩이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미소 지었다. 가슴속에 334명의 영혼이 담겼다. 그의 영혼은 구원받았다.

로리안이여, 찬양받으소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