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마지막 전투, 첫 번째 장
바야흐로 전쟁의 중심지가 마계의 문 최남단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엔젤나이트에게 호되게 당한 터라 절대 혼자 나설 생각이 없었던 아스르부테는 다음 날부터 동원 가능한 모든 마물들을 남부로 불러들였다. 부상이 생각보다 깊었다. 한동안은 꼼짝 못하고 부상당한 몸의 복구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했으면 소멸로 이어질 뻔한 위기였다. 떠올리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했다.
마계의 문 중심부를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마물들이 그 주인의 명에 따라 대거 남하를 시작했다. 워낙 거리가 멀었기에 하급 마물들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마족과 거인족들 그리고 아스르부테의 부름을 받은 우코르바흐까지 남부로 이동 중이었다.
이를 포착한 하기 역시 친위대를 이끌고 빠르게 남하를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노리앙이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있던 하기였기에 아스르부테가 노리앙을 주목하는 것을 알자마자 주운과의 합의를 깨고 적극적인 개입을 천명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흄들을 모으고 가장 강력한 군대를 남하시켰다.
휘하의 흄들에게 인간들과 노리앙이라는 존재를 수색하도록 명령했다. 피해 다니기만 했던 지금까지의 행보를 접고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아니, 이 정도면 더 이상 도망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검은 구름이 먹이를 노리는 수리처럼 뿌연 하늘을 갈랐다.
☆ ☆ ☆
일행이 발이 묶인 지역은 제법 거대한 계곡이었다. 거대하다는 이유는 계곡 좌우로 높다랗게 늘어진 좌우 능선과 그 능선이 일 킬로미터나 뻗어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일행이 숨어 있는 곳을 벗어나 수십 미터만 내려가도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완만한 경사가 펼쳐진다. 마치 산과 산 사이에 평지가 존재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지형상 이전 고골리가 언급했던 계곡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경계까지 불과 사흘도 남지 않은 셈이다. 문제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저것들은 다 뭐야? 플라누라 평원을 옮겨다 놓은 것 같군!”
바위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던 크리들이 질겁하며 고개를 움츠렸다.
그동안 차츠라의 인도는 훌륭했다. 하지만 사방이 마물의 밭이 돼 버리고 나니,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이곳에 숨어들기까지도 이미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늘로 숨어드는 능력을 가진 차츠라 혼자라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기대원들을 달고는 불가능했다.
도대체 이 많은 마물들이 다 어디서 왔단 말인가? 플라누라 평원처럼 진영이 둘로 나눠진 것도 아니었다. 중구난방으로 돌아다니며 마구 충돌했다. 거의 전 지역이 전쟁터와 같았다. 더구나 어디를 돌아봐도 평범한 마물이 없다. 흄들은 끔찍한 비명을 토해 놓으며 하늘을 갈랐고, 데스나이트와 듀라한이 어둠의 말을 몰고 질주했다.
마인들이 불덩이를 날려댔고, 거인들의 발걸음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기대는 그 틈바구니에서 가까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이대로 숨죽이고 있다 한들 뾰쪽한 수도 없었고, 언젠가는 노출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시간이 갈수록 마물들의 수가 증가했다. 몇 년을 보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마물들이 무리를 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숨어들기까지 해치운 마물들만 해도 이전처럼 여유 있게 잡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일반 기대원들은 나서지도 못했고 쥬시아누스나 예니에프 혹은 조노량이 나서야 겨우 잡아낼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분화하는 마인들도 여러 차례 만나게 되었다. 조노량은 몰랐지만 그 마물이 바로 케이드 일파 중 하나였다. 마족으로 분류되는 강한 마물이다.
이런 형국이니 감히 이곳을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 ☆ ☆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아스르부테는 멀리 있는 부하들을 불러들임과 동시에 조심스럽게 조노량에 대한 추적을 재개했다.
그리고 어느 날 기어이 인간들에 대한 보고를 접할 수 있었다. 모든 권속들에게 보고받은 위치로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준비를 마친 아스르부테는 단숨에 목표를 따라잡았다.
‘교활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골짜기에 숨어 잔뜩 웅크린 인간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고를 마친 케이드 한 마리가 조용히 시립해 지시를 기다렸다. 기특한 놈이다. 인간 몇 마리 정도는 보상으로 내려 줘야겠다.
처음부터 본체로 현신한 아스르부테가 조심스럽게 주변의 기운을 살폈다. 그날의 악몽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이질적이고 치명적이던 엔젤나이트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말만 들어 봤지, 엔젤나이트를 겪어 본 건 처음이었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엔젤나이트에게 당한 마왕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껏 비웃어 주었는데, 직접 겪어 보고나니 두 번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
왜 하필 그 자리에 엔젤나이트가 나타났단 말인가? 창조자들이 워리놈의 계획을 눈치챈 것일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 땅은 창조자들이 만들어 놓은 곳이다. 지상에 진출한 마계의 군대를 이곳으로 몰아넣고 그들 자신의 힘으로 봉인한 지역이다.
오백여 년 전 우주의 에너지에 이상이 생겼다. 그로 인해 차원의 균열이 발생했고, 그 덕에 마계의 군대가 인간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군주들조차 함부로 넘을 수 없던 차원의 벽을 마왕들이 넘었다.
창조자들이 개입을 시작했다. 그들의 대리인이 쏟아져 들어왔고, 결국 마계의 군대는 퇴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창조자들이 지상에 누출된 마기를 몰아넣은 곳이 바로 이 땅이다.
그로부터 오백 년, 창조자들은 이 땅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 덕에 하기란 촌놈이 이 땅을 차지했다. 오백 년간 이상 없이 유지되자 자신의 군주 워리놈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충만한 마기 때문일까, 다른 지역과 달리 넘기가 수월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인가?
하기란 촌놈이 차지하는 건 두고 보았지만 군주가 진출하는 것은 막겠다는 뜻일까?
그럼 그 엔젤나이트는? 이 땅을 살피러 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것일까? 뭐,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왜 이 넓은 땅 중 하필 그 장소에 나타나 자신의 행사를 방해한단 말인가? 짜증이 솟구쳤다. 설마 저 한 줌도 안 되는 인간의 무리를 구하기 위해 왔을 리는 없고……. 결국 지상에 생성된 마계의 영지를 소멸시키겠다는 의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였다.
그렇게 가정한다면 이 땅을 차지하려는 워리놈의 계획은 쓸데없이 권세만 축소시키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군주라고 해도 혼자서 창조자들에게 대항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설마 저 특이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도 발견하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는데, 창조자들의 눈이 여기까지 미쳤을 리는 없다. 괜한 우려일 것이다. 빌어먹을! 머리가 아프다. 이렇게 머리를 쓰는 일은 림몬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아스르부테는 다시 한 번 면밀히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불러들인 군대가 주변을 감싸고 있다.
그들의 기운 외에 이질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엔젤나이트가 떠난 것을 확신했다. 그 정도 기운을 품은 자가 가까이 있었다면 자신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이제 방해자도 없어졌으니 하찮은 인간들 따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주목한 인간, 그 자의 특이한 기운만 조심하면 된다.
지원을 요청했던 우코르바흐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엔젤나이트가 없는 이상 우코르바흐가 없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오롯이 독식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언제 그가 들이닥칠지 모르니 이제 서둘러야 한다.
“후후.”
숨어 있던 곳을 벗어나 조심스럽게 바위 그늘을 타는 인간들을 지켜보며 아스르부테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들의 진로 한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찮은 것들, 겨우 여기까지인가?”
아스르부테는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인간들을 비웃었다.
그를 보고 경악하는 인간들의 표정을 보니 더욱 즐거웠다.
하지만 아스르부테는 미처 자신과 동질의 기운을 지닌 존재가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몸을 감추고 숨어드는 능력만큼은 마계 최고인 존재, 퓨콤뜨리아리트가 아스르부테를 지켜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무사히 도주하나 생각했더니, 결국 꼬리를 밟히고 만 것이다.
저 변태 자식은 늘 말썽이다. 텅 빈 머리는 오직 탐욕으로 가득하다.
평소 점잔을 빼고 있지만 욕심이 생기면 온갖 추잡한 짓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제멋대로 분탕질을 쳐 놓고 슬그머니 워리놈의 뒤로 숨어 버리는 놈이다.
저 키메라 자식이 또 자신을 힘들게 한다. 그 주인이나 종이나 제멋대로인 건 똑같다. 결국 자신이 나서야 하나? 그냥 모른 척하고 귀환하면 되지 않을까?
고개를 저었다. 절대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라는 명을 받았다. 글라키에스의 말대로 그 ‘문제’ 속에는 그분에게 ‘이상’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녹아 있다고 봐야 했다. 소멸은 당연히 ‘이상’의 범주에 들어가겠지? 소멸되도록 지켜만 보고 돌아간다면 비단 빙하의 기사 말이 아니더라도 벨제뷰트가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퓨콤뜨리아리트는 무거운 걸음을 떼어 놓았다. 저 변태 자식이 머저리인 건 사실이지만 실력만큼은 진짜다. 빙하의 기사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솔직히 지금의 힘으로는 자신이 없다. 조잡한 단검을 지키기 위해 많은 힘을 소모했다. 그리고 봉인의 여파도 그대로 남아 있다. 아, 빌어먹을 마법사!
그때 퓨콤뜨리아리트의 눈에 몇 마리의 웨어울프가 현장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뭐지? 저 따위 하급 마물들이 어째서?’
☆ ☆ ☆
롤은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긴, 죽음이 두렵진 않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죽음인들 대수겠는가? 그 죽음이 동료들을 위한 일이라면 오히려 다행이지 않은가.
웨어울프는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다. 언젠가는 다른 마물들의 배 속으로 들어가야 할 숙명. 어쩌면 신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가치 있는 죽음을 내려 준 걸지도 모른다.
아스르부테라 했던가?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하위의 마물은 주인의 권능에 의지하지 않고선 단독으로 상위의 마물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몸이 본능적으로 굴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아스르부테는 마물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존재였다. 웨어울프의 육신 따위가 그의 기운에 대항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 어차피 구원받지 못할 몸, 오래지 않아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릴 것이 뻔하다. 삶에 연연해서 무엇할까? 정신을 잃는 순간 자신은 자신이 아니게 된다. 완전한 마물이 되는 것이다. 그 전에 죽기를 희망한다. 조금이라도 이성이 남아 있을 때 죽어야 했다.
처음 감염 사실을 인지했을 때 그리고 변이한 자신을 처음으로 인지했을 때, 롤은 스스로 이성을 놓아 버렸다. 그러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으니까. 가끔 이성이 돌아오더라도 일부러 피의 광기를 드러냈다.
타고난 전사의 몸, 단련된 전사의 몸은 웨어울프의 무리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 몸에 웨어울프의 강력한 특성이 덧씌워졌다.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도전했고, 압도적인 힘으로 그 우두머리를 찢어발겼다.
웨어울프가 되어서도 오오라는 발현되었다. 하긴 이성을 잃고 광전사가 될 때 더욱 강력하게 발현되는 오오라였으니, 웨어울프가 되었다 한들 발현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미 육체에 깊숙이 체화된 오오라다. 검도 필요 없었다. 오오라가 어린 손톱은 보통의 마물들이 받아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우두머리를 찢어 버리고 스스로 우두머리가 된 롤은 폭군이 되었다. 내재되어 있던 광기가 마음껏 표출되었다. 대항하는 웨어울프들을 잔인하게 물어뜯고 생살을 씹었다. 기형 미물들은 보는 족족 찢어 삼켰다. 자제할 필요도 없고, 성격에도 맞았다. 매 순간순간이 통쾌했고, 희열에 몸부림쳤다.
그 와중에 기대원들을 만났다. 예니에프의 울부짖음에 이성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질로의 살을 씹고 있었다. 차라리 그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이런 기분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웠고, 불결했다. 이성을 잃었다 한들 어떻게 동료도 못 알아보고 사냥감으로 삼았을까? 아,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단 말인가?
동료들을 만나 너무 반가웠고, 기뻤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질로를 찢고 그 살을 씹었는데, 어찌 재회를 즐길 수 있겠는가?
결국 도피를 선택했다.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이성을 잃어 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기대원들을 뒤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리를 이끌고 본능적으로 사냥감을 뒤쫓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늑대들은 본거지로 돌려보냈다. 접근을 자제하고 최대한 정신을 차렸다. 자칫 다시 이성을 잃게 되면 기대원들은 자신과 자신의 무리에게 사냥을 당할 것이다.
이성을 유지해야 했다. 기형 미물을 보아도 사냥하지 않았다. 먹기 위한 최소한의 사냥은 다른 웨어울프들에게 맡겼다. 광분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팔뚝을 씹으며 버텼다.
저급한 좀비들에게서 기대원들을 구해 냈다. 그 덕에 무리의 대부분을 잃었다. 지금 자신을 따라 달리고 있는 웨어울프는 불과 세 마리! 무리 중 가장 강했기에 아직까지 살아남은 권속들이다. 하지만 이들도 곧 죽을 것이다. 자신이 그랬듯이 독수리의 발톱과 뱀의 머리와 산양의 머리가 자신과 자신의 권속들을 남김없이 씹어 삼키리라. 그러나 두렵지 않다. 나는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 세스카의 롤이다!
“크어엉!”
한껏 포효를 내질렀다. 피를 타고 흐르던 공포가 조금씩 광기로 변해 간다. 자신의 포효에 세 마리의 웨어울프들이 함께 포효했다. 우두머리의 명령에 절대적 복종을 표하는 정직한 마물들이다.
가슴속에서 피가 솟는다.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점점 광기에 물들어 간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광희(狂戲)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