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67화 (67/142)

67. 그들의 성장

다시 출발했다. 손발이 모두 절단된 고골리는 턱짓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저런 부상을 입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게다가 혼자서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불구가 되었음에도 표정 변화도 없다. 그 의연함에 조노량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제우스가 이용했던 지게에 고골리가 앉아 있다.

고골리를 들쳐 메고 달리는 쥬시아누스의 이마에 벌써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오늘은 크리들이 제우스를 업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조노량은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크리들은 촉수를 몇 가닥 뽑아내어 제우스를 묶듯이 고정시키고 있었다. 질기고 단단한 촉수가 제우스의 신체를 안정적으로 받치고 있는 덕에 두 손이 자유롭다. 거참, 쓰임새가 무궁무진하구나.

너른 들판을 건넜다. 풀 한 포기 자라나지 못하는 황무지였다. 언덕을 넘었다. 뾰쪽한 암석만 널어진 바위산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나무와 풀들이 사라지고 황량한 모습이 드러났다. 몇 마리의 마물들을 만나고 돌파했다. 일행은 그렇게 하루 종일 달렸다. 전력질주는 아니더라도 평소의 행군 속도와 비교하면 배는 넘는 속도다. 어제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탓이다.

날도 어둡고 지형도 험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무리한 행군을 이어 갔다. 아무리 기대원들이라도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는 실족의 위험성이 높다.

어쩔 수 없이 조금 이른 휴식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깨어났을 때, 고골리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골리가 누웠던 바위에는 ‘이대로 가라’라는 글과 함께 화살표가 파여 있었다. 정남이 아닌 서남쪽 방향이었다. 그 밤, 조노량은 물론 불침번을 섰던 자들도 고골리가 사라지고, 바위 깊숙이 그런 글이 새겨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지 중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다녀갔다는 이야기인데, 만약 그 방문자가 악한 마음을 먹었다면 여기 있는 자들은 씨몰살을 당했을 것이다. 소리도 없이 바위를 파 글씨를 새겨 넣을 정도의 실력자였으니까.

“눈치채지 못했나?”

조노량을 향해 커트리안이 물었다.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 면에서는 차츠라보다 앞선 조노량이었기에 묻는 것이다.

하지만 조노량 역시 고골리가 사라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잠들어 있었다고는 해도 조노량의 감각을 속일 정도라면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조노량이 고개를 젓자 커트리안이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흐였겠지?”

커트리안의 물음에 차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일이겠지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만약 적이었다면 기대원들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주운이나 클라흐가 부상당한 고골리를 회수해 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출발!”

넉넉한 휴식을 취한 덕에 기대원들의 생기가 살아났다.

고골리가 사라진 후, 레인저 출신인 차츠라가 선두를 이끌었다.

안 그래도 출중한 레인저인 데다가 이 년간 클라흐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차츠라는 전보다 훨씬 노련했다. 고골리가 무조건 전진하는 스타일이라면, 차츠라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스타일이었다.

쓸데없는 격돌은 최대한 피해 가면서도 속도를 잃지 않았다. 지난날, 조노량과 함께 헤맬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일행이 달리고 있는 곳은 크로아지크 황야를 연상시키는 지형이었다. 뿌옇게 보이는 지평선 끝까지 삼사 미터에 이르는 기암괴석이 듬성듬성 널려 있고, 그 사이사이 평지로 키 작은 덤불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덤불들은 한여름답지 않게 메말라 있었다. 단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이미 죽어 버린 덤불들은 저희들끼리 둥글게 뭉쳐 이리저리 잘도 굴러다녔다. 모순적이게도 살아 있는 덤불보다 죽어 있는 덤불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마치 생(生)을 버려야 비로소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조노량은 본대를 찾아다닐 때처럼 침잠에 빠져들었다.

중원에서의 죽음 그리고 이 세계에서의 삶,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인가? 인간이 죽으면 삼계와 육도(三界六道)를 떠돈다고 했다. 어쩌면 육도 중 아수라(阿修羅)의 세계로 윤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삶이다. 내내 자유를 박탈당하고 살았다. 죽은 자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괴물과 요괴들을 만났다. 삼계 중 욕계(欲界)를 떠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다시 한 번 죽는다면 안락을 찾을 수 있을까? 또 다른 욕계에서 또 다른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아니, 이곳 사람들의 삶도 대부분 정상적이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진 며칠간 소박한 산골마을의 삶을 경험했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검투장에서는 아도니아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엿봤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곳의 삶은 절대 욕계의 삶은 아니다. 그렇기에 희망을 품었다. 이곳만 벗어난다면 다시 한 번 인간답게 살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노리앙!”

조노량이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고 있을 때 다급한 외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뜻 깨어난 조노량의 눈에 열 몇 마리의 마인이 눈에 들어왔다. 기대원들이 벌써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조노량도 오첩도를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마인 몇 마리 정도는 기대원들의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조노량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선두에 서 있던 두 마리의 마인이 네 마리로 늘었다. 무엇인지 안다. 이전 고골리와 접전을 벌였던 마인들이다. 생김새는 비슷하나 전투력에 있어서는 일반 마인들보다 압도적이었던 분화 마인들이다. 심지어는 손에 검까지 들고 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벌써 헤리엇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일반 마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밀리지 않을 실력이다.

깡!

검기를 실은 오첩도가 튕겨 나온다. 마인의 검에도 오오라가 어려 있다. 짙은 묵빛이다. 마치 무림의 고수를 만난 듯한 느낌이다. 정신이 일도(一到)되었다. 어지러웠던 심사가 깨끗이 걷혀 나간다. 승려도 아니고 도인도 아니다. 삼류 무사가 무슨 번민이고 번뇌란 말인가? 이곳이 어딘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싸우다가 상대의 검 끝에 스러지는 것이 무사의 삶이다. 그건 제현의 삼류 무사도 다르지 않다! 인간에게 죽든 괴물에게 죽든 무엇이 다를까?

어깨가 슬쩍 가라앉으며 발끝이 낮게 휘돌았다. 전에 없던 속도다. 마인이 피하지 못하고 종아리를 들어 발차기를 막아 왔다.

어림없다. 발경이 실린 역도가 그리 만만할까!

펑!

마인의 종아리를 단숨에 부러트리고도 모자라 마인의 몸체를 뒤집어 버렸다.

회전하며 떠오른 마인의 상체를 어깨로 받아 버렸다. 어깨에 실린 역도가 만만치 않다.

삼 장이나 튕겨져 떨어지는 마인을 향해 재차 쇄도했다. 충격으로 마비된 마인은 분화도 못해 보고 조노량의 오첩도에 동강 났다.

키야악!

끔찍한 비명이 전장을 울렸다. 그 소리에 다른 마인들이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명의 마인이 조노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넷, 아니 여덟이다. 달려드는 와중에 분화를 해 버린 것이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분비되며 교감신경을 자극했다. 심장이 벌렁대며 기분이 한껏 고양되었다. 알 수 없는 쾌감이 밀려들었다.

마주 달려 나갔다. 여덟이든 열여섯이든 얼마든지 와라!

마인의 네 개의 손톱과 네 개의 검이 날아든다. 그들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왼쪽으로 슬쩍 돌아선다.

검이 옆머리를 스친다. 오첩도가 비어 버린 옆구리를 가르고, 손톱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다른 마인의 팔뚝으로 미끄러진다. 썽둥! 오른 다리로만 진각을 밟으며 재차 몸을 돌린다. 휘도는 이마에 다른 마인의 턱이 걸린다. 빠각! 가슴까지 울리는 타격음을 뒤로하고, 새로 달려드는 마인의 머리를 왼손으로 잡아챈다.

푸웅!

마인이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마인의 뇌는 장심에서 발출된 발경에 곤죽이 됐으리라.

그 틈을 노리고 날아든 검을 오첩도로 받아 냈다. 마인의 검을 내리누름과 동시에 검극이 마인의 인후부를 겨냥한다.

우웅!

오첩도에서 뻗어 나간 검기가 석 자를 넘겼다. 그 끝에 마인의 목이 꿰뚫린다. 이글거리던 검기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오첩도가 목을 가르며 옆으로 빠져나온다.

퍼퍼펑!

몸이 잠깐 스치는 사이에 이어진 동작들이었다. 동작이 마무리되었을 때 한꺼번에 다섯의 마인이 터져 나갔다. 다른 마인들은 몰라도 팔뚝을 잘린 마인만큼은 죽지 않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 마인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다. 팔뚝에서 일어난 폭발이 연쇄적으로 몸통까지 이어져 장기가 터져 나갔다.

촌음의 시간 만에 여덟 중 다섯이 사라졌다.

불과 열여섯 명만 남은 기대원, 크리들과 하이오지가 후방으로 빠져 기도를 올리고 있는 제우스를 보호하고 있다.

다섯을 처치했음에도 마인들의 숫자가 어느새 두 배로 불어나 있다. 기대원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때 제우스의 홀리필드가 전장에 떨어져 내렸다.

열다섯의 마인이 영역 안에 들었다. 마인들 중 절반의 숫자다. 끔찍한 비명이 다시 한 번 전장을 채웠다. 이로써 이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정말 반칙에 가까운 기술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마인들이 제우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가장 위험한 자로 느낀 것이다. 마인들은 달리면서 다시 분화를 시작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든다. 이것도 반칙이다.

조노량이 신형이 쏘아지듯 후미로 향했다. 가로막던 마인의 허리가 그대로 동강 나며 터져 나갔다.

그 순간 제우스의 머리 위로 홀리필드가 떨어져 내렸다. 선두로 달려들던 마인 몇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마인들은 감히 홀리필드의 영역에 다가들지 못하고 멈춰 섰다. 분화 마인들 틈에 섞여 있던 일반 마인들이 불덩이를 날리기 시작했다. 조노량의 신형이 제우스 옆에 떨어져 내렸다. 왼손이 제우스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제우스로서는 그것만으로 족했다. 바닥났던 성력이 급격히 차올랐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십여 번이나 허공을 베었다. 홀리필드까지 뚫고 쏘아지던 불덩이가 그 자리에서 터져 나갔다. 하지만 끊임없이 소환되는 불덩이를 언제까지 막아 낼 수는 없는 일이다. 맥박처럼 요동치는 내공이 달려 나갈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조노량이 달려 나가는 순간, 제우스는 숯덩이가 될 터였다.

뒤늦게 기대원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만 버티면 될 것이다.

그 순간 제우스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거대한 베리어가 제우스를 감싸고 있다. 안도하며 튀어 나가려던 조노량의 발길이 멈춰졌다.

제우스의 손끝에서 백색의 구체가 쏘아져 나갔다. 수십의 구체가 마구잡이로 떨어져 내리며 폭발했다.

퍼퍼퍽!

가슴을 직격당한 마인, 파편에 당한 마인들이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예니에프의 오오라가 검을 벗어나 살아남은 마인들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막 분화를 마친 마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또 다른 마인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거둬들였다. 성장한 것은 자신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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