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반격의 실마리
정신없이 달렸다. 이렇게까지 달릴 필요는 없겠지만 언제 다시 아스르부테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무리하게 달리고 있는 것이다. 체력 안배는 뒷전이었다. 힘닿는 데까지 최대한 빨리,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태양조차 흐릿한 빛무리가 되어서야 겨우 뚫어 내는 탁한 대기다. 달빛이나 별빛은 통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때문에 사위는 그야말로 칠흑 같은 암흑이었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거라곤 거친 숨소리와 다급한 발자국 소리뿐.
야안(夜眼)이 비정상적으로 밝아진 기대원들이었지만 이렇듯 새까만 어둠 속에서는 대책이 없다. 그저 코앞이나 겨우 구분할 뿐!
그나마 멀리 볼 수 있는 사람은 조노량뿐이었다. 조노량은 안력에 조금 더 내기를 집중했다.
“좌측으로 반걸음!”
좌측으로 반걸음만큼 꺾어 달리라는 의미다.
이런 면에서는 무척 답답했다. 16방위를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친다 해도 별빛조차 없는 밤에 동서남북을 구분할 방법도 없다.
이들이 쓰는 몇 도니 몇 시니 하는 개념은 조노량이 알지 못했다. 방위에 대비해서 외워 두면 될 것도 같으나, 이곳에서 쓰는 12방위와는 뭔가 미세하게 차이가 나서 오히려 헷갈린다. 나중에 따로 배워 둬야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다.
다행히 잘 알아들었는지 선두에서 달리던 차츠라가 조노량과 보조를 맞춰 남남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나마 그쪽이 경사가 완만하다. 기대는 양쪽 구릉 사이로 빠르게 나아갔다.
너나 할 것 없이 연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에 바빴다. 그래도 단단한 몸과 마물화된 반사 신경 덕에 큰 부상을 입을 걱정은 없었다. 다만 꼴이 사나울 뿐이다.
만약 일반인들이 이 정도 속도에서 넘어졌다면 팔다리가 꺾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
조노량과 차츠라가 선두에서 기대를 이끌고, 커트리안과 예니에프 등이 좌우와 후미를 맡아 기대원들의 낙오를 방지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벌써 두 시간은 족히 달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죽기 살기로 달렸다. 아무리 마물화된 기대원들이라도 기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헉헉! 안전지대를 찾아보도록!”
커트리안조차 숨을 가누지 못했다.
마침 조노량의 눈에 띈 장소가 있었다. 우전방 삼십여 미터, 커다란 바위틈 사이 움푹한 장소였다. 그나마 조노량이기에 발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조노량은 차츠라의 팔뚝을 툭 치며 우전방을 향해 달렸다. 차츠라도 그 의미를 알아듣고 방향을 틀었다. 선두를 이끄는 둘이 방향을 틀자 자연스럽게 기대의 방향이 정해졌다.
짐작했던 대로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네 개의 바위가 직방형으로 높게 솟아 있고, 가운데는 움푹 파인 곳으로 무언가의 잠자리로 쓰였을 법한 장소였다. 물론 그 무언가는 마물이겠지만, 이제는 주인이 바뀌었다. 마물이 돌아온다고 해도 별 관계없다. 어떤 마물일지는 몰라도 기대에 위협을 줄 만한 마물은 흔치 않다. 누가 나서더라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안정적인 장소를 찾자마자 하나같이 널브러져 버렸다. 특히 고골리를 업어 온 쥬시아누스와 제우스를 업고 온 하이오지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주체하지 못했다.
끓어오르는 내기를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내처 경공을 발휘한 조노량도 애써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조노량은 다른 사람들처럼 널브러지지도 못하고 서둘러 운기조식으로 내기를 다스렸다. 찢어진 혈로를 따라 제멋대로 달리던 내기가 차분히 자리를 잡아 갔다. 죽은피를 몇 모금 토해 내고 내부를 관조하니 다행히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아니, 막혔던 혈도들이 뚫린 덕분에 오히려 내기의 순환이 더욱 빨라졌다. 짐승처럼 흥분했던 내기가 언제 역행했냐는 듯 정상적인 혈로를 치닫는다. 거칠게 확장됐던 혈로가 수축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잡았다. 대로를 따라 치달은 진기가 생사관을 거세게 두드렸다. 한 번쯤 시도해 보고 싶은 욕심이 일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조노량은 천천히 운기를 마쳤다.
여름에 접어든 날씨는 노숙을 하기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기대원들은 널브러진 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쯤, 가벼운 인기척에 정신이 돌아왔다.
번을 서고 있던 크리들이 길게 하품을 토해 놓는다. 그리고 그 옆에서 장비 점검을 끝낸 차츠라가 몸을 일으켰다.
조노량이 깨어난 것을 본 차츠라가 한마디 건넸다.
“조금 더 자 두시오. 잠시 주변을 돌아보고 오겠소.”
정찰은 늘 그늘 속에 녹아드는 재주를 가진 차츠라의 몫이다. 그가 모습을 감추면 조노량조차 신경을 곤두세워야 눈치를 챌 수 있다. 바위 그늘에 숨어들면 바위가 되었고, 나무 그늘에 숨어들면 나무가 되었다. 기척을 감추고 주변 경관에 녹아들면 멀쩡히 보고 있어도 눈치채기가 쉽지 않다. 인간의 눈은 익숙한 경관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차츠라는 그 익숙함을 이용해 기척을 감추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다시 잠이 들었다. 그만큼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기상!”
스마르의 나지막한 고함 소리에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생각보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다.
언뜻 어젯밤에 겪은 일이 떠올랐다.
아스르부테라 했던가? 추상적으로 떠올리던 마왕의 실체를 직접 목격했다. 심지어는 전투를 벌이기까지 했다. 끔찍한 외모만큼 끔찍하게 강했던 존재였다. 중원에도 이와 비슷한 존재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기는 했다.
호랑이의 이빨과 굽은 뿔 그리고 독수리의 다리와 소의 몸을 가진 도철(饕餮), 장님에 귀머거리로 개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혼돈(渾沌), 날개 달린 호랑이의 모습에 고슴도치의 털을 가진 식인 괴물 궁기(窮奇), 인간의 얼굴과 호랑이의 몸을 가진 흉포한 도올(檮杌)이 있다. 이들을 일컬어 사흉(四凶)이라고 하는데, 하나같이 악행을 일삼고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그려지고 있다. 반면 여와(女媧)나 회남자(淮南子) 같은 신적인 존재들도 있었다. 물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간혹 요괴나 이무기, 용 등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조노량은 보지 못했다. 그다지 믿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스르부테를 보고 나니 침을 튀겨 가며 우기던 털보 장칠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온 후로 강시나 이매망량과 비슷한 존재들을 숫하게 보고 나니 기담(奇談)이나 전설(傳說)이 다 믿지 못할 바는 아닌 것 같다. 전설 속의 괴물들이 발에 차이는 세계라니,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아스르부테의 외모는 이야기 속에 전해지는 도철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 흉측한 모습을 떠올리자 입맛이 다 떨어졌다. 어찌 멀쩡한 사람이 한순간에 괴물로 변신을 한단 말인가? 손오공이라도 된단 말인가?
둔갑(遁甲)은 둘째 치고 그가 행사하는 힘도 조노량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힘이었다. 마법인가? 아니면 풍운조화를 부린다는 용과 같은 영능(靈能)일까?
산 넘어 산이었다. 이제는 고수의 반열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터무니없는 힘과 맞닥뜨리고 나니 기운이 쏙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주운도 그렇고, 아스르부테도 그렇고, 심지어는 제우스도 그렇다. 중원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자신의 기에 반응하던 아스르부테의 기운,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마인들과 거인들에게 느꼈던 반응이었고, 아스르부테에게서 다시 한 번 확인했던 반응이었다.
숯과 황에 초석을 섞어 불을 붙이면 멋진 불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잡귀를 쫓는 데 효험이 있다 하여 춘절(春節, 설에 해당하는 중국 명절)이면 폭죽을 만들어 터트리곤 했다. 양을 많이 하면 좀 더 화려하게 터지지만 자칫 사람을 상하게 할 수도 있기에 관에서 단속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와 비슷하다고 할까? 마치 자신의 진기가 초석이나 불씨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강한 놈일수록 더 강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형 미물들은 대부분 반응하지 않았다. 마인들은 느낄 수 있을 정도로만 반응했고, 거인은 확실하게 반응했다. 반면 아스르부테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촌음의 시간차도 없이 반응했다. 마치 화톳불에 황을 한 움큼 집어 던진 느낌이랄까?
자신의 무공은 늘 같았다. 다양하게 배우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마물들마다 반응이 달랐다.
아스르부테의 반응은 끔찍할 정도였다. 그놈도 놀랐겠지만 자신도 놀랐다. 후폭풍에 몸이 날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현격한 차이 덕에 그들의 마기가 자신의 내공에 반응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것도 마기가 강할수록 강하게 반응한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그건 곧 마왕에게도 타격을 가할 수단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무력했던 기대원들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 주어진 셈이다. 최소한 손 놓고 당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물론 그 광범위하고 무식한 공격을 피해 내야겠지만, 반항할 수단조차 없는 것과는 천지 차이다.
아, 그런데 그게 다일까? 단지 기운이 충돌한다는 것만으로 상대가 충격을 받는 것일까? 암경과 검기는 내공이 변화된 모습, 어떻게 보면 자신의 진기가 직접 흘러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만약 제우스에게처럼 내공을 직접 흘려 넣는다면 어떤 반응이 있을까?
기실 원리는 간단하다. 발경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타인의 완맥을 제압할 수 있다. 검에 기를 주입하듯 상대의 혈도로 진기를 주입해 기혈을 헝클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보다 내공이 강해야 가능한 일이다. 완맥이 잡힌 불리한 상태지만 상대방도 당연히 기를 일으켜 저항할 것이니 말이다. 시도해 보지는 않았으나 지금의 자신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다.
그리고 순수하게 내공을 겨루는 대결도 있다. 점잖아 보이지만 기실 손발을 섞는 싸움보다 더 흉악한 싸움이다. 패하게 되면 거의 복구 불능의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장심을 맞대고 서로의 내기를 침범해 들어갔다. 한번 시작되면 그칠 수도 없다. 둘 중 하나는 폐인이 되어야 끝나는 싸움이다. 그렇기에 웬만해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또한 한쪽이라도 회피해 버리면 이루어질 수도 없다. 결국 양자가 모두 동의해야만 벌어질 수 있는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다.
내가의 초절정 고수들은 이를 통해 상대의 진기를 해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기를 침투시켜 내상을 치료하거나 대상의 틀어진 내기를 바로잡기도 한다. 진기도인이 그 일종이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한 경지다.
조노량은 힐끗 기도를 올리고 있는 제우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운도 마기와 마찬가지로 아주 이질적인 기운이다. 그럼에도 그의 기운은 자신의 기운을 맞아 순반응을 일으킨다.
사실 자신은 진기도인 같은 상승의 경지는 깨닫지도 못했고, 단 한 구절도 주워듣지 못했다. 당연히 사용한 바도 없다. 단지 몸이나 데울 정도의 의지를 담았을 뿐이다. 물론 선의가 담기긴…… 아니 잠깐, 혹여 의지의 문제일까? 상대를 해하겠다는 악의?
풋,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말인가? 살기만으로 사람을 해할 수 없듯이 의지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전설 속의 의기상인(意氣傷人)의 경지라면 모를까?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 볼 수야 있겠지만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다. 의혹과 가정일 뿐이다. 함부로 시도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골치가 아팠다.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버린 조노량은 조식(早食)으로 마물의 육편을 꺼내 씹기 시작했다. 아스르부테를 상대할 생각보다는 무사히 도주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