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엔젤나이트
안력을 돋우어 봐도 회복되지 않은 시력으로 인해 사물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뿌연 대기가 아직까지 빛바랜 흰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조노량은 그런 시야로 의문의 사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발목까지 이르는 기다란 로브를 둘러쓰고 있는 사내였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굳세 보이는 사각턱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까지는 구분이 갔지만, 그 안에 감춰진 이목(耳目)까지 구분하기에는 시야가 너무 흐렸다.
조노량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자란 말인가?
번쩍하는 순간 세상이 온통 하얘졌었다. 빛의 발원지가 어딘지 짐작조차 못 했다. 또한 지금 나타난 사내와 검의 연관성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노량의 눈에는 아직도 세상이 탈색된 채였다.
사내는 입가에 조소를 매달고 아스르부테를 바라보았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조용히 물러가거나, 이 자리에서 죽는 것!”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공간을 오롯이 갈랐다.
그러자 아스르부테의 숫양머리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놈은 누구지?”
“아까부터 똑같은 질문만 하는군. 너에겐 답을 들을 자격이 없다. 선택하라!”
시이잇!
아스르부테의 뱀머리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위협적인 잇소리를 토해 놓았다. 하지만 사내는 미동도 없이 비웃음만 흘렸다.
숫양의 머리가 말했다.
“말 한마디로 이 아스르부테 님을 물리치겠다고? 가소롭군.”
“그게 네 대답인가? 그럼 죽어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거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먼 거리! 하지만 사내의 거검에서 뻗어 나온 기운은 순식간에 아스르부테의 상체를 세로로 갈랐다.
설마 이렇게 갑자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허공을 격하고 뻗어 온 기운에 아스르부테는 질겁하며 베리어를 강화했다.
쾅!
베리어가 산산이 터져 나가며 아스르부테의 거체를 다시 한 번 밀어 버렸다. 어이없이 밀려난 아스르부테의 거체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마계의 문이라 하더라도 이미 여름, 한파가 몰아칠 계절은 아니다.
베리어가 터지며 함께 터져 나온 냉기가 멀리 떨어져 있는 일행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가까이 있었던 조노량은 들끓는 기혈을 무릅쓰고 운기까지 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냉기를 온몸으로 받았던 아스르부테는 견딜 만했는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크, 좋아! 뭐 대단한 놈인 줄 알았더니, 이 정도 힘이란 말이지?”
“클클, 견딜 만한가? 그럼 이것도 받아 보아라!”
“천만에.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네놈이 받아 보아라!”
둘은 거의 동시에 힘을 방출했다. 십여 미터에 이르는 아스르부테의 거체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과 건장한 몸집이라지만, 이 미터도 안 되는 사내에게서 뻗어 나온 기운이 중간에서 거세게 충돌했다.
쿠르릉!
천둥 같은 울림과 함께 대지가 진동했다. 충돌 지점에서 터져 나온 기파(氣波)에 사지가 절단된 고골리의 몸체가 나뭇잎처럼 나뒹굴었다. 조노량 역시 튕기듯 뒤로 나가 떨어졌다. 겨우 진정시켰던 기혈이 다시 들끓었다.
사내의 로브가 갈가리 찢겨 날아가고, 그 안에 받쳐 입은 은색의 플레이트 아머가 드러났다. 사내는 어깨를 들썩였지만 날리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다만 두 발이 검은 대지를 뚫고 발목까지 파묻혀 있었다.
반면 아스르부테는 쿵쿵거리며 세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나서야 멈춰 섰다.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고위급 마왕이며 침략군의 총사령관인 아스르부테가 중심도 못 잡고 연속으로 밀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스르부테가 손해를 입었다. 산양의 입가에 지저분하게 묻은 초록빛 액체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사내의 몸이 쏘아지듯 아스르부테에게 날아들고, 은빛 거검이 잔상처럼 사내의 몸을 따라 움직이며 아스르부테에게 쏟아져 들어갔다.
아스르부테도 다급성을 흘리며 힘을 개방했다. 강철 같은 베리어가 거체를 감싸고, 길게 뻗어 나온 발톱이 사내를 향해 연달아 날았다.
쿠릉!
쾅! 콰광!
천지를 진동하는 울림이 연속으로 터져 나오고, 슬슬 저물어 가는 대기를 뚫고 불덩이가 비산했다.
조노량은 이를 악물고 고골리의 몸뚱이를 끌고 뒤로 물러났다. 격돌의 여파에 휩쓸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저릿저릿하고 살갗이 찢어졌다. 가까이 있다가는 목숨까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지금의 몸 상태로는 고골리를 끄는 것도 벅찼다.
아스르부테의 거체가 허옇게 얼어붙었다가 붉게 달아올랐고, 사내의 은빛 아머가 아스르부테를 중심에 놓고 번쩍번쩍 자리를 이동했다. 그때마다 묵직한 충격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기술의 대결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힘과 힘의 대결, 한번 밀리면 돌이킬 수 없는 형태의 대결이었다.
일행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그 격돌을 지켜보았다. 감히 손가락 하나 움직일 정신이 없었다.
그 순간 아스르부테의 외침소리가 대기를 갈랐다.
“빌어먹을! 엔젤나이트가 왜 여기 나타난 것……?”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거검이 아스르부테의 가슴을 향해 뻗어졌다. 웬만하면 들어 줄만도 한데, 사내는 아스르부테의 외침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거검에서 뻗어진 은빛 광선이 아스르부테의 가슴을 쩍 벌려 놓고도 모자라 그 커다란 몸체를 두어 바퀴나 굴려 나뒹굴게 만들었다.
아스르부테의 외침에 일행의 눈이 커졌다. 저 사내가 전설 속에 등장하던 그 엔젤나이트란 말인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는 절대 인간의 것일 수가 없었다.
집중해도 모자란 판에 아스르부테는 주의까지 흐트러졌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자 아스르부테는 정신없이 밀렸다. 그가 소환한 빙염의 창은 사내의 손짓 한 번에 소멸되었고, 무형의 칼날은 사내에게 범접도 하지 못했다.
스컹!
쾅!
아스르부테의 손톱이 남아나질 않았다. 어깨가 갈라지고 초록색 얼음 조각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허리에서 한 움큼의 살덩이가 대지로 떨어져 내렸다. 거의 조노량의 몸통만 한 살덩이였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살덩이는 새로 발출된 기세에 충돌하여 조약돌처럼 튕겨져 날아갔다.
그 짧은 시간에 아스르부테는 돌이키기 힘들 만큼 타격을 받았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의미했다.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소멸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지겨울 만치 살아왔다지만, 아직 소멸을 원친 않았다.
아스르부테는 이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왜! 왜! 어째서 이런 곳에 나타난 거냐? 왜 나를 방해하는 거지?”
만신창이가 된 아스르부테의 주위로 검은 기운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회오리쳤다.
“하찮은 마물 주제에 살고는 싶은가 보군.”
검은 회오리 안에서 뿌득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스르부테의 기운이 한순간 사라졌다. 검은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한 후로부터 불과 촌각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검은 기운이 몰려들면서 바짝 긴장했던 기대원들은 아스르부테의 기운이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텔레포트를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는 걸로 착각했던 것이다.
아스르부테가 사라지자 사내의 입가에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사내, 빙하의 기사 글라키에스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응혈을 억지로 삼켰다.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의도치 않게 너무 오래 봉인되어 있었다. 힘의 손실이 너무 컸다.
아스르부테가 조금만 더 버텨 냈다면 글라키에스로서도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니, 틀림없이 밀렸을 것이다. 이 저주받은 땅에서는 힘의 회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분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스르부테의 도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놈에게 미뤄야 하나?’
글라키에스는 마왕 퓨콤뜨리아리트에게 임무를 미뤄야 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하지만 자신이 힘을 쓸 수 없는 바에야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 땅에서라면 그놈의 힘이 극대화될 터. 어쩌면 자신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입가에 흐른 피를 슬그머니 닦은 후 인간들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원 삼십 장이 초토화됐다. 대지가 완전히 뒤엎어져 나무 하나, 풀뿌리 하나 남아나지 못했다. 서리가 내려 허옇게 물들었던 땅이 제 색을 찾아 천천히 짙은 회색으로 변해 갔다.
황망한 시선으로, 동시에 경외의 신색(神色)으로 사내를 바라보던 일행의 눈앞에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을 것 같은 냉막(冷漠)한 표정.
사내는 뚜벅뚜벅 걸어서 조노량의 앞에 섰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붉은색 철제 단검.”
조노량은 언뜻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종아리를 훑었고, 손에는 붉은색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나에게 줄 수 있겠나?”
찬바람이 휭휭 날릴 듯 차가운 목소리, 하지만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을 담고 있었기에 조노량은 저도 모르게 단검을 사내에게 건네고 말았다.
단검을 건네받은 사내는 감사의 인사도 없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의 보조 무기를 거두어 가다니? 뭐, 까짓 단검 하나야 얼마든지 줄 수 있었지만, 뭔가 해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아니지. 일행의 목숨을 구해 줬으니 이 정도는 얼마든지 납득할 수도 있겠다.
뭔가 가치 있는 걸 요구한 것도 아니고 고작 단검 한 자루라니……, 거참.
난데없이 나타나 목숨을 구해 주고 달랑 단검 하나 챙기고 돌아서는 사내를 향해 급히 인사를 건넸다.
“고맙소.”
조노량의 인사에도 사내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충고를 남겼다.
“길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내는 일행과 반대 방향으로 떠나갔다.
조노량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대원들이 멍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정말 저 사내가 전설 속의 엔젤나이트란 말인가?
☆ ☆ ☆
엔젤나이트 글라키에스는 숲을 떠나오면서부터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 기운으로 보아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검에 봉인되어 있었다지만 외부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원한다면 힘을 개방할 수도 있었고, 검의 주인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분에게 자신이라는 존재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치 못할 상황, 결국 자신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히 그분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았다.
붉은 단검이 검명을 발했다. 싸구려 단검 주제에 에고 소드라니?
글라키에스는 냉막한 미소를 지으며 단검에 걸린 봉인을 해제했다. 제법 강력한 봉인이었지만, 스스로를 봉인시킬 만큼 봉인에 일가견이 있었기에 해제는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붉은 단검에서 검은 기운이 무럭무럭 솟구치며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크억! 후와, 후와 살았구나! 답답해서 미치는 줄 알았네. 이보게, 빙하의 기사. 혹시 자네가 나를 버려두고 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아는가? 역시 자네는 의리의 사나이구먼. 이 싸구려 단검이 깨지는 건 아닌가 싶어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아는가? 내 마력의 절반은 이 단검을 보호하는 데 들어갔을 걸세. 에휴! 그나저나 마계의 문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아스르부테란 놈이 나타난 걸 보면 워리놈 님이 이 땅을 탐내는 건가? 벨제뷰트 님이 용인했을 리가 없는데? 어허, 어찌 돌아가는 거지? 그 미천한 기형아 놈이 아직까지 살아서 버티고 있다니? 워리놈의 군대가 들어왔는데도? 거참, 용한 놈일세!”
퓨콤뜨리아리트의 수다를 견디다 못한 글라키에스가 언성을 높였다.
“제발 좀 닥쳐라!”
그 말에 찔끔한 퓨콤뜨리아리트는 조심스럽게 꿍얼거렸다.
“몇 년 만에 입을 열었다고…… 뭐.”
“느꼈겠지만 난 귀천(歸天)해야 한다. 네놈이 당분간 그분을 보호해야 할 거다.”
“이런, 미친? 그 고생을 시키고도 모자라 또 부려 먹겠다고?”
“네놈의 임무도 그걸 텐데?”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막한 음성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난 지켜보라는 명만 받았지, 보모의 역할을 맡으라는 명을 받은 게 아니라고!”
“소멸하더라도 지켜보기만 하라?”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지켜보라고…….”
“소멸하고 나서도 지켜볼 수 있겠나?”
“물론 죽어 버리면야 지켜볼 수 없지. 영혼을 거두는 권능은 군주들이나 가능하니깐 두루…… 육신을 거두는 건 몰라도 그런 건 못해. 죽어 버리면 끝이지, 뭘 어떻게 지켜봐?”
“클클, 그러니 보호해야지!”
“뭣?”
“지켜보려면 살려야 하지 않겠나?”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가?”
“그래! 지난번 인간들이 음모를 꾸밀 때는 그렇게 벙벙 뛰더니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거지? 두려운 건가?”
“아니…… 두렵다기보다는 난 혼자라고! 아스르부테나 그 기형아 놈이나 단독으로 덤비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지만, 꼬붕들을 잔뜩 달고 다니니 혼자서는 벅차다고! 그러다가 놈들 때문에 다시 한 번 마계로 쫓겨 가면? 이번엔 벨제뷰트 님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란 말일세. 응, 내 사정도 어렵다고!”
울상을 짓는 퓨콤뜨리아리트를 바라보며 글라키에스는 냉소를 띠었다.
“그분이 소멸하면 벨제뷰트가 네놈을 그냥 둘 거라고 보나?”
그 말에 퓨콤뜨리아리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금방 시무룩해졌다.
“그렇게 되면 역시 임무를 다하지 못한 거겠지? 나를 가만두지 않겠지? 지난번에 그 미천한 놈에게 쫓겨 돌아갔을 때도 죽을 뻔했거든. 나를 다시 중간계에 내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마력이 소모되는지 아냐며 화를 내시는데, 아 글쎄 오금이 다 저릴 지경이었지. 이런, 빌어먹을! 세상구경도 하고 편하기도 한 임무라고 좋아했더니, 저 죽을 구녕을 찾아 들어왔던 거였군. 아이고, 내 신세야! 이런 박복한 팔자라니.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을꼬?”
“시끄럽다! 난 만나 봐야 할 사람이 있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기 바란다.”
글라키에스는 차갑게 돌아섰다.
“아나? 이보게. 그냥 가면 어쩌나? 글라키에스? 엔젤나이트 님? 간 건가? 가 버린 거야? 그냥 가 버렸네……. 빌어먹을 놈.”
퓨콤뜨리아리트는 혼자서 한참을 투덜거리다가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었다. 밤의 신사, 칠흑의 귀족이라는 별칭에 맞게 어둠 속으로 숨어들자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었다.
☆ ☆ ☆
주운은 엔젤나이트가 사라져 가는 장면을 지켜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왜 노리앙의 안전에 이토록 안도를 하는지도 모른 채 내쉬는 한숨이었다.
하지만 설마 그 검 속에서 엔젤나이트가 튀어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천사의 기운을 흘리고 있었기에 마물들과 상극인 존재가 봉인되어 있을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신의 대리자 혹은 신의 검이라는 엔젤나이트가 봉인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주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천 년을 살아온 자신으로서도 처음 본 엔젤나이트였다. 창조자들이 이 땅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한 지 오래. 흔하게 볼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고, 딱히 만날 일도 없었다.
명불허전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힘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약화된 힘만으로도 마계의 강대한 마왕인 아스르부테를 그 짧은 시간에 격퇴시켰다. 명성대로 절대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저 쓸모없는 가디언을 어쩐다?’
그래도 자신의 가디언이니 회수해서 고쳐 놔야겠지? 라는 생각을 읊조리고 있을 때, 빙하의 기사 글라키에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다른 방향으로 떠나갔는데?
주운은 그의 기운을 느끼자마자 슬그머니 마력을 끌어올렸다.
분명 의도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 아스르부테조차 눈치채지 못한 자신의 존재를 간단히 간파해 내었다. 살기나 적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어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엔젤나이트는 가만히 주운을 응시할 뿐 대답이 없었다.
아니, 지가 찾아와 놓고선 왜 말이 없는 거지? 어쩔 수 없이 다시 말을 이었다.
“봉인을 강화한 건 미안하게 되었소. 어떤 존재인지 알아보지 못했던 거요.”
평소의 괴팍한 말투가 아닌 최대한 정중한 말투였다. 진정 엔젤나이트라면 주운으로서도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다.
엔젤나이트는 그래도 대답이 없이 한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목례를 해 왔다. 주운도 엉겁결에 같이 목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기운이 흐려져 이제야 알아봤소. prædecéssor immortálĭtas.”
글라키에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존칭과 머릿속을 울리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
갑작스런 엔젤나이트의 말에 주운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모든 언어를 아는 건 아니지만 발음이나 어투를 들어 보면 대략 어느 지방의 말인가는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엔젤나이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언어는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고, 그 느낌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귀를 통해 듣는 것이 아니라 마치 뇌리에 직접 꽂히는 듯한 감각, 더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언어를 들었을 때 무척 익숙한 느낌이 든다는 거였다.
하지만 주운은 마법사,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는 비의의 구도자다. 쓸데없는 감상은 곧바로 지워 버리고 엔젤나이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알아봤소’라는 말에 주목했다. 마치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가 아닌가?
“나를 알고 있소?”
“여기 계실 줄은 미처 알지 못했소.”
글라키에스 특유의 냉랭한 말투였지만 정중함이 느껴졌다.
“이제야 알아봤다면서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로 들리오만?”
“검에 갇혀 있었다지만 외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지는 않소. 당신을 인지한 건 오래된 일이오. 다만 확신하지 못했을 뿐!”
“하찮은 마법사를 엔젤나이트가 알아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오. 그리고 봉인에 대해서는 거듭 미안하게 되었소.”
엔젤나이트임을 확인하는 대화, 상대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확인은 한 셈이다.
주운의 반응에 글라키에스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자각이 부족한 거로군?”
“자각?”
미안하다는데 무슨 엉뚱한 소리란 말인가?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것이오? 스스로를?”
무엇이라니? 내가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지만 어쨌든 근본은 인간이지 않은가? 무슨 의도의 질문인가?
“이름을 묻는 건 아닌 거 같소만?”
주운은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질문이었다.
“천 년을 사셨다 하셨소?”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은 것이다. 질문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것일까? 대답은 않고 뜬금없이 자신의 나이를 묻다니? 그래, 천 년을 살았다. 어쩔 텐가? 주운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찌 아셨소?”
“하찮은 피조물 따위가 유전자에 각인된 수명을 거역할 수 있다고 보시오? 또 천 년을 산다고 해서 당신처럼 될 수 있다고 보시오?”
뒷말은 이해를 하겠는데, 유전자라니? 무슨 소리야? 뭐, 하긴 천 년을 산다고 해서 나처럼 되기는 쉽지 않지. 그나저나 또 내 질문은 무시하고 자기 말만 하는군.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미안하오, 실수했소. 내 간섭이 그대의 의지를 거역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오.”
내 의지를 거역해? 무슨 마물 풀 뜯어먹는 소린가? 내 의지가 뭔데? 네가 왜 내 의지를 들먹이는 거지?
주운은 노리앙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형태의 답답함을 느꼈다. 노리앙은 스스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고, 엔젤나이트는 모든 것을 아는 듯한 말투면서도, 전혀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지 않소?”
다시 한 번 끊어지듯 또박또박 질문했다.
“스스로 회오(悔悟)하시오. 그것이 진정한 당신이 원하는 바일 거요.”
“이런 제길! 내가 원하는 바를 당신이 어떻게 안다고 그러시오? 아, 혹시 나 말고 또 다른 내가…… 그러니까 뭐시냐, 나도 모르는 내가, 원하는 바라는 거요? 이거 원 답답해서, 그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또 대답하지 않을 셈이오?”
역시나 엔젤나이트는 침묵을 지켰다.
제 버릇 남 주지 못한다고 주운은 분기가 치솟아 한참을 씩씩거렸다. 봉인에 대한 미안함은 잊은 지 오래다. 하지만 그로서도 엔젤나이트 앞에서 함부로 성질을 부릴 수는 없는 일,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엔젤나이트들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하시오? 아니면 당신만 그런 거요?”
질문이라기보다는 한탄에 가까웠지만 엔젤나이트는 이 또한 응대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대를 찾은 이유는 노리앙이란 자를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함이오.”
천 년을 살면서 이렇게 참아 본 적은 노리앙이란 놈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놈은 스스로 알지 못하니 답답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엔젤나이트는 이야기가 다르다. 하지만 상대는 주운으로서도 경거망동할 대상이 아니었다. 억지로, 사력을 다해 마음을 가라앉힌 주운이 다시 물었다.
“노리앙은 어떤 존재요?”
그가 먼저 보호를 요구했으니 내심 다른 궁금증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가졌다.
“절대 소멸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 외에는 말씀드릴 수 없소. 이 땅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보호해 주시오.”
“허, 참…….”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엔젤나이트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사람을 바보 취급하다니?
“부탁드리겠소.”
엔젤나이트가, 그것도 빙하의 기사로 불리는 광오한 성격의 글라키에스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퓨콤뜨리아리트가 들었다면 놀라자빠지고, 불공평함에 탄식했을 것이다.
“그게 부탁하시는 분의 자세요? 혹 나를 핍박하려는 거요?”
주운은 글라키에스를 몰랐다. 그러니 퓨콤뜨리아리트가 들었다면 또 한 번 까무러칠 만한 대꾸를 했다. 하지만 그런 응대에도 글라키에스의 어투는 오히려 공손했다.
“그대의 본질을 알고 있는 자라면 그대를 핍박할 생각을 하지 못할 거요. 단지 부탁드리는 것이오.”
빌어먹을! 내 본질이 뭔데? 나도 모르는 내 본질이 따로 있단 말이냐? 반대로 주운의 목소리는 결기가 돋아 퉁명스러워졌다.
“싫다면?”
주운이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스스로 후회하실 거요.”
대단한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놈이다.
“내 스스로 후회한다고? 갈수록 모를 소리만 하는구려. 허허, 이거 참, 사람 답답하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시오. 어쨌든 이유는 말해야 최선을 다하지 않겠소?”
역시나 대답하지 않았다.
“까짓것 마계의 문 밖으로 날려 버리면 되는 거요?”
“가능하면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소. 어쩌면 그의 시련도 섭리의 하나, 소멸의 위기만 막아 주시오.”
“나 참, 번거롭기 짝이 없군. 좋소, 이런 부탁에는 뭔가 대가가 필요할 것 같소만? 설마 엔젤나이트씩이나 되어서 공짜를 바라진 않겠지요?”
“퓨콤뜨리아리트라는 마왕이 그분을 보호할 것이오. 대립하지 않으셔도 될 거요.”
나 참, 불리한 말에는 아예 대답을 회피해 버린다. 진정 뻔뻔하기 짝이 없는 엔젤나이트로구나!
하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퓨콤뜨리아리트, 틀림없이 단검에 봉인된 존재를 일컬음일 것이다. 자신의 봉인을 간단히 해제해 놓다니? 엔젤나이트를 상대로 경거망동하지 않기를 잘했다.
그리고 대가를 요구했던 건 애초에 뭘 바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다만 부탁하는 자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기에 비꼰 것뿐이다. 그렇지만 당신,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주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끝내 자기 말만 하는군? 하지만 실수하셨군. 노리앙을 그분이라 칭하셨소?”
실수를 했음에도 글라키에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엔젤나이트가 한갓 인간에게 그분이라는 호칭을 한다? 크크,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터이니, 그만 가 보시오.”
아무리 상대가 엔젤나이트라 해도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다. 주운의 목소리가 고울 리가 없었다.
주운의 기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글라키에스는 목례를 건네고는 스르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주운으로서도 그 존재감을 찾지 못했다. 과연 대단한 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퓨콤뜨리아리트라 했던가? 마왕이 엔젤나이트에게 협조를 한다? 아니, 엔젤나이트가 마왕에게 협조하는 것인가? 한때는 비의의 구도자라고 불렸던 자신이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도 노리앙이라는 존재가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엔젤나이트의 반응에서 다시 한 번 그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이제는 발을 뺄 수도 없었다.
주운은 곧 인지의 범위를 넓혔다. 퓨콤뜨리아리트의 존재를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퓨콤뜨리아리트의 존재감 역시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번거롭기 짝이 없다.
‘노리앙의 보호자라면 언젠가 나타나겠지?’
한 번만 모습을 나타내면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엔젤나이트라면 몰라도, 마왕 정도라면 자신의 법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렇게 된 바에야 토리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한 놈이나 두 놈이나 그게 그거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실패하거나 소환체를 잃게 된다면 귀찮은 일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니 손해가 아니다.
<7권에서 계속>
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