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마왕 아스르부테
아스르부테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군주의 명? 풋, 형식적인 이유일 뿐이다. 이 지루함을 달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래서 자원했다. 흥미가 동하는 지역이기도 했고 말이다.
애초에 비정상적으로 생겨난 지역이기에 얼마나 더 유지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이 땅은 분명히 마계에 속한 지역이 되었다. 사실 다른 차원에 영지가 형성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의 법을 다루는 존재라 해서 스스로 마족이라 칭한 생명체들, 그것이 바로 내가 속한 종족이다. 참, 종족이라고 불러도 되나? 워낙 다양한 형태의 집합이기 때문에 종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애매하긴 하다.
잉태된 놈, 난생(卵生)한 놈, 만들어진 놈, 자연에서 생성된 놈, 다른 종족이나 식물에서 변이한 놈, 기생하다 본체를 먹어 버린 놈, 심지어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놈까지 그야말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케이스가 있다. 그들이 모여 세상을 이루고, 차원을 만들어 지지고 볶고 살다 보니 하나의 종족으로 치부되고 있을 뿐, 엄연히 다른 종족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고는 마의 법을 권능으로 다룬다는 점뿐이다. 물론 그 권능을 다루지 못하는 하등한 존재들도 많지만, 어차피 노예들이니 논할 가치가 없다.
마족과 대척점에는 또 다른 존재들이 있다. 창조자들 혹은 균형자들이라고 일컫는 자들이다. 뭐, 이들은 종족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동일한 과정을 거쳐서 생겨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종족이라 부르기 애매하다. 종족은 동일한 조상과 동일한 유전체를 지닌 생명체를 일컬음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그들도 종족이라 부르기 힘들다. 생명체라기보다는 의지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혼돈에서 생겨나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존재를 구성하고 스스로 태어났다. 조상도 없고 후손도 없다. 또 자신처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홀로 서 완전해진 존재라고 할까?
이런 면은 무척 부럽기도 하면서 막상 그리되라 하면 거부할 것도 같다. 그들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 투쟁하고, 부대끼며, 조화를 이루면 산다. 그 안에서 기쁨과 슬픔,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생명을 이어 간다. 그마저도 초월해 버린다면 과연 무슨 재미로 살아간단 말인가? 그마저도 이렇게 지루한데 말이다.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혼돈에서 그들은 태어났다. 아니, 생겨났다.
혼돈이라 함은 태초의 에너지 즉, 근원을 일컫는 말이다. 그 근원에서 발원하여 홀로 수억 겁의 시간 동안 존재했다. 동일한 과정을 겪고 있는 존재가 있음에도 서로를 모른 채 말이다. 그렇게 셀 수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의지를 가지게 되었고, 아주 천천히 우주를 정돈해 나갔다. 때문에 그들은 혼돈을 가공해 질서를 창조하는 힘을 얻었다. 성력을 말이다. 그 힘을 바탕으로 물질을 구성하고 차원을 구분 지었다. 그러다가 서로를 알게 되었고, 같은 의지 그리고 다른 의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 다른 의지 중 일부는 결국 우리가 됐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마족들도 그들 자신이거나 혹은 그들이 창조한 생명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들이 만든 세계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그들에게서 넘어온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족은 그들처럼 혼돈에서 태어나지 못했기에 그들과 같은 힘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 질서를 재구성하는 힘을 연구했다. 다시 수억 겁의 시간 동안 말이다. 그것이 마의 법이다. 우주에 가득한 에너지, 근원을 가공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이며 또한 우리 중 하나인 벨제뷰트의 의지에 의해 전 우주에 그 씨앗이 퍼졌다. 모든 생명체들이 마나를 품고 태어나는 이유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성력이나 마력이나 하나에서 파생된 다른 힘이다. 태초의 근원 에너지를 어떤 방식으로 가공하느냐의 차이일 뿐, 힘의 고하와 우열을 가늠하는 잣대는 아니다. 즉 같은 근원에서 가공된 다른 힘일 뿐이다. 물론 일방적인 흐름은 있다. 보다 근원에 근접한 성력은 마력을 품은 존재들에게 독이 된다. 수많은 시간 동안 분열시키고 재배열해 쌓아 놓은 마력을 다시 원상태의 질서로 환원시키려는 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에너지의 특성에 따른 일방적인 관계일 뿐, 힘의 크기와는 관계없다. 에너지 자체가 갖는 파워는 동일하니까 말이다.
스스로 창조자라 일컫는 존재들은 자신들이 만든 질서에서 태어나 자신들의 대척점에 서게 된 우리를 주목했다. 억겁의 시간 동안 홀로 강성했던 그들은 억겁의 시간 후에 드디어 대척자들의 탄생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족이라는 존재들 역시 그들이 창조한 세계의 질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존재 자체만으로 소멸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들 중 몇이 우리가 되고, 또 우리가 새로운 힘을 얻어 강성해질 때까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것은 자만이었다. 그 자만의 결과는 파괴와 혼돈으로의 회귀라는 위협을 탄생시켰다. 그들 자체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그들이 만든 질서에는 큰 위협이 된다. 말했듯 에너지 자체가 갖는 파워는 동일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홀로 서 있을 때 우리는 번식하고, 복제하고, 확장한다. 그게 우리의 힘이니까.
마의 법은 욕망에서 태어났다. 그렇기에 우리 마족은 욕망을 악이라 규정짓지 않는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인정할 뿐 억제하지도 자제시키지도 않는다.
다른 이들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과 배치된다 해도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다. 물러서지 않는다면 멸하고,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면 그만이다. 얼마나 명료한가?
마족은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고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 결과가 혼돈과 파괴라 할지라도 혹은 공멸일지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창조자이자 균형자인 그들과 다툼이 일었다. 추구하는 바는 물론 존재 이유 자체가 배치되니, 태초에 결론지어진 일이다. 그 다툼은 억겁의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우리는 그 다툼 역시 우리의 법칙대로 해석한다. 그대로인 우리의 욕망과 그들의 욕망이 배치된다면 강한 자의 욕망에 따르면 될 것이다. 그들이 강하다면 그들의 욕망대로, 우리가 강하다면 우리의 욕망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그 싸움은 군주들의 몫이다. 그들만이 유일하게 창조자들과 겨룰 만한 힘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군주 중 일부는 과거 창조자였고, 또 일부는 마의 법으로 그 반열에 든 자들이다.
아무리 강대한 힘을 얻은 마왕이라도 군주나 창조자들의 의지에 반할 만한 자격을 갖추진 못했다. 나 역시 군주 워리놈의 욕망과 의지를 우선하고 그에 배치되지 않는 선에서 나의 욕망에 충실할 뿐, 그 이상을 희망하지 않는다.
난 워리놈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 그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기 때문이다.
그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고 권능을 얻었다. 그 권능이 워낙 강대하였기에 마왕의 반열에 올랐다. 노력 따윈 없었다. 그냥 그렇게 창조되었고, 처음부터 그런 힘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애초에 워리놈이 의도하여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이렇게 저렇게 만들다 보니 나란 놈이 태어난 것뿐이다. 그렇기에 나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군주를 제외한 마족은 대부분 한계가 명확하다. 발전하고 성장하지만 그 끝이 존재한다. 태어나 정점의 힘을 얻을 때까지 성장한다. 그리고 여러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그뿐, 타고난 권능이 한계치에 달하면 그 상태로 고정된다. 미미한 발전은 있을지언정 더 이상의 성장은 없다. 그게 만들어진 존재의 한계다.
반면 태어난 존재들은 성장의 한계가 없다. 부럽냐고?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태생이 천박한 자들을 왜 부러워하겠는가? 성장의 한계가 없다고 하지만 그들의 힘은 미미하다. 그렇기에 마계의 하층부를 이루는 대부분이 그러한 존재들이다. 아무런 권능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힘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고, 작은 힘을 얻더라도 아주 피곤한 성장기를 거쳐야 한다. 한계가 없다 뿐이지 아무리 성장해 봐야 자신의 발가락에도 미치지 못한다. 충분히 성장할 만한 수명도 가지지 못했다. 그저 바닥에서 바득바득 기다가 수명을 다해 소멸하거나 잡아먹힐 뿐이다.
물론 군주 하나와 일부 마왕들은 그렇게 태어나 성장한 이들이지만 억겁의 시간 동안 겨우 몇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미미한 존재 중 하나가 바로 이 변두리 땅을 지배하는 미천한 놈이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 정도까지 자랄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래지 않아 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 아스르부테가 곧 찾아낼 것이니까. 위협이 될 만한 싹은 애초에 짓밟아 버려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아스르부테는 저 멀리서 꾸물거리며 다가오는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미천한 자들, 창조자들에 의해 탄생한 인위적인 존재들이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번식을 하고, 욕망과 균형을 동시에 추구하는 어정쩡한 하등 생명체. 그럼에도 마의 법을 깨닫고 불가능한 성장을 이루기도 하는 신기한 생명체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마족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그나마 지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지성이라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그로 인해 성장할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고통 받기도 한다.
지성이 뛰어난 영혼일수록 고통 받거나 죽어 갈 때 막대한 양의 멘탈 쇼크(Mental shock)를 쏟아 낸다. 그 스피릿 웨이브(spirit wave)는 우리에게 있어 더없이 훌륭한 흥분제다. 그들이 발산하는 쇼크를 흡수할 때마다 놀라운 쾌락을 맛보게 된다. 아,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저들이 어떻게 이 땅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작은 여흥거리를 마련해 줄 것을 알기에 기대를 갖고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자신의 영격(靈格)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그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의 영격으로 인지할 수 있는 부분은 그가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무언가라는 점과, 이해할 수 없는 힘을 몸 안에 가둬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힘은 질서를 창조하는 힘도, 질서를 가공하는 힘도 아니었다. 호기심이 동했다.
절대적인 두 개의 힘 외에 다른 힘이 존재하는 걸까? 억겁의 시간 동안 검증된 힘이 아닌 제3의 파워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우주의 혼돈은 오래전에 창조자들에 의해 정돈되었고, 고정되었다. 이제 와서 새로운 힘이 나타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이질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정말 새로운 힘이라면? 만일 자신이 그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어쩌면, 성장의 한계점을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이란 참 신기한 존재들이다. 하등한 주제에 가끔 마족이나 창조자들을 놀래기도 한다.
아스르부테는 자신의 내부에서 신선한 흥분감과 묘한 기대감이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무척 오랜만에 느껴보는 흥미로움이었다.
그렇지만 아스르부테는 이런 일을 군주에게 보고할 만큼 어리석거나 순진하지 않았다. 새로운 힘이면 얻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버리면 된다. 혹시 아는가? 그 힘이 자신을 새로운 군주로 성장시켜 줄 수 있을지?
그래서 지금부터 알아볼 생각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 ☆ ☆
주운은 조용히 아스르부테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목표인 하기에 대한 탐색까지 포기하고 이런 곳에 있을 이유는 하나뿐이다. 노리앙이라는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보지 못했으면 모르되, 이미 보았다면 강대한 마왕인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매우 번잡스럽게 됐다.
인간들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마계의 문을 벗어나길 바랐지만 틀려 버렸다.
이제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개입하느냐, 아니면 죽게 내버려 두느냐?
속 편하기는 죽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왠지 마음에 걸린다. 정 때문이 아니다. 그의 소멸로 인해 발생할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일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든다.
아무 표정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디언, 헤트르를 힐끗 보았다.
인간임에도 제법 영격을 갖춘 사내. 그가 아니었으면 클라흐나 고골리가 자신의 가디언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를 발견하기 전까지 가디언이라는 존재를 만들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말이다. 막상 만들고 보니 편하기는 했지만.
영격이 높은 만큼 헤트르 역시 본능적으로 노리앙이라는 존재를 의식한다.
하지만 헤트르의 수준에서는 노리앙이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정도까지만 인식하지, 그 이상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 자신이 제어하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노리앙이라는 존재는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가 죽이고자 하는데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최소한 인간들 중에는 없다.
자신이 노리앙이라는 존재에 대해 갖고 있는 느낌은 헤트르와는 또 다르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멸해서도 안 되는 존재.
자신의 영격으로도 거기까지가 한계다. 굳이 헤트르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헤트르는 그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다. 힘을 얻는 대신 영혼을 종속당한 자, 가디언이다.
창조자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있겠지만 물어볼 수도, 확인할 수도 없으니 의미가 없다. 다만 그들이 노리앙이라는 존재를 멸하기는커녕 보호, 아니, 감시일까? 어쨌든 그대로 두고 본다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노리앙이라는 존재에게 붙여 놓은 자들을 자신이 봉인해 놓았으니 이제 와서는 그 역할을 대신할 도리밖에 없다.
그래서 지켜보고는 있지만 매우 번거롭다. 더구나 아스르부테 같은 마왕이 노리앙을 노린다면 어떻게든 개입할 수밖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다행히 아스르부테가 노리앙이라는 존재에 대해 파악하는 선에서 그쳐 준다면 고맙겠지만, 그가 욕망에 충실한 저급한 마왕이라는 것이 문제다. 뭔가 새로운 힘을 느꼈다면 일단 잡아먹고 볼 가능성이 높다. 아니, 후환이 없다는 것만 확인한다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싸워야 하나? 글쎄, 지지는 않겠지만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할 거다. 아스르부테는 그리 허접한 마왕이 아니니까. 하기를 불러올까?
허, 이 정도 일에 남의 손까지 빌릴 생각을 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설사 필요하다고 해도 그래선 안 된다. 하기 역시 마에서 탄생한 존재다. 자신과 합의를 이루었다지만, 막상 노리앙을 대하고 나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어찌 보면 아스르부테보다 더 본능에 충실한 존재지 않은가?
복잡하구나. 내가 왜 이런 번민에 빠져야 한단 말인가? 왜 이런 일에 휘말려 안식을 방해받아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보호자들을 봉인하는 바람에 스스로 번거로움을 자처하기까지 했으니! 어리석도다.
아, 그래! 보호자들? 감시자들? 어쨌거나 그들이 있었지! 그래, 이런 일은 원래 맡았던 자들에게 맡겨 줌이 옳지 않겠나?
주운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간단한 도리를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오래 살다 보니 노망이라도 났던 게지. 클클.
아스르부테의 영격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높아서 노리앙이라는 존재에 대해 확인만 하고 선선히 물러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후후.
☆ ☆ ☆
“이해할 수 없군.”
사내는 일행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고골리의 눈매가 파르라니 떨렸다. 누굴 만나더라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먼저 생각하는 자가 고골리다. 거인을 만나도, 데스나이트를 만나도 일단 달려들고 보는 자다. 그런 고골리가 극도의 긴장감을 보이고 있었다.
고골리가 주춤거리며 일행의 전진을 막아섰다.
“누구시오?”
“아, 소개가 늦었군. 아스르부테라고 하네.”
쿵!
일행의 귓가로 청천벽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옥궁의 유흥을 담당하는 지배인이자 워리놈의 실험체로 태어나 충복이 된 고위급 마왕이자, 침략군의 총사령관!
모든 기대원의 몸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일행의 눈앞에 마왕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곤청색 연미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귀티 나는 삼십 대의 사내. 준수한 외모에 어울리는 황금색 머리카락이 뿌연 대기 속에서 반짝였다.
기형 마물들이 주축이 된 그의 군대를 보며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을 상상했는데, 의외의 모습이다.
“묘하군, 묘해. 어떻게 인간이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질문임을 알지만 잔뜩 얼어붙은 기대원들은 감히 입도 떼지 못했다.
대답을 듣지 못하자 아스르부테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고 조노량을 주시하며 말했다.
“뭐, 상관없겠지. 그보다 그대, 인간인 주제에 묘한 힘을 가지고 있군. 그대는 누구지?”
그 말에 모든 기대원의 시선이 조노량에게 쏠렸다.
아주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존재 아스르부테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다.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지금과 유사한 경험이 있다. 그것도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스런 경험.
“조 노리앙! 내 이름이오. 당신이 말했듯 평범한 인간이오.”
‘평범한’이라는 말에 유난히 강세가 들어갔다.
“인간일 리가 없는데……, 혹시 엔젤나이트인가?”
이제는 별소리를 다 듣는구나. 조노량은 단호히 고개를 저어 대답했다.
“아니오.”
“아니라? 하긴 좀 달라. 그럼 창조자들, 아니, 그대들은 신이라 일컫지? 그 신들과 관계가 있는가?”
왜 자꾸 이런 오해가 발생한단 말인가?
“관계가 없소.”
“묘한 냄새가 맡아지는데? 정녕 아무런 관계도 없단 말인가?”
냄새라니? 조노량은 아스르부테의 질문을 받으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좋지 않다. 주운에게 당했던 끔찍한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배를 가르고 내장을 헤집던 늙은이의 차가운 손! 땀방울 한 줄기가 구레나룻을 타고 흘렀다.
“아무런 관계가 없소. 정말 평범한 인간일 뿐이오.”
끊어 내듯 단호히 말했지만 간절함이 묻어난다. 제발,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
“후후후, 기운을 갈무리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거짓된 말이 통할 거라 생각하나? 어떤 힘을 얻었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아.”
‘빌어먹을. 또 시작인가?’
주운의 경우보다 훨씬 위험하다. 아스르부테는 포식자다. 단지 해부하는 걸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이 덩치를 불려 갔다.
마물과 마인들의 우두머리, 그 흉측한 흄들조차 피해 다니게 만들었던 침략군의 수좌(首座). 현재의 전력으로 과연 그에게 대항할 수 있을까?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예니에프가 바짝 긴장한 채로 침만 삼키고 있다. 쥬시아누스 역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잔뜩 얼어붙어 있다.
어? 커트리안의 시선이 아스르부테가 아닌 자신에게 향해 있다. 예의 그 미지근한 시선이 자신의 입을 주시하고 있다. 왜?
그때 고골리가 입가를 비틀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이거, 이거,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 거냐? 이렇게 무시당해 보긴 실로 오랜만이군.”
역시 고골리다.
“오호, 용감한 자로군. 그대는 누구지?”
“나? 켈커티스의 전사며 위대하신 주운 님의 가디언이지.”
“아하, 그대가 주운의 가디언이었나? 몰라봐서 미안하군. 그런데 좀 조용해 주겠나?”
“그대가 물러간다면 그렇게 해 주지.”
강하게 나가고 있지만 조노량은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알아챌 수 있었다. 미세한 근육의 떨림 그리고 조금씩 빨리지는 호흡, 아스르부테란 이름은 한낱 가디언이 맞상대할 정도로 가볍지 않다.
“오호, 맹랑한 친구로군. 그런데 물러갈 수는 없겠네.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어쩔 텐가?”
“그대를 멸하겠다.”
당당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몸은 긴장으로 인해 굳어 있다.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투견을 위협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푸하하하, 아주 재미있어. 재미있는 농담이었어! 오랜만에 즐거웠다. 그 보답으로 자네는 놓아주도록 하지. 그 늙은 마법사 놈과는 척을 지고 싶지는 않거든. 나 대신 자네가 물러가는 게 어떤가?”
아스르부테가 입가에 미소를 달고 제안했다.
좋지 않다. 그래도 아스르부테에게 대항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빠져나간다면 혼자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조노량의 갈등이 깊어졌다. 자신을 희생시키면 기대원들을 살릴 수 있을까? 자신이 순순히 그의 말을 듣는다면 다른 기대원들은 무사할 수 있을까? 아스르부테의 말에서 그가 주운을 껄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고골리는 놓아주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다른 기대원들의 상황은 다르다.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 맞서는 방법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가득 찬 둑은 작은 돌멩이 하나만 들어내도 걷잡을 수 없이 터지는 법!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도 다르지 않다.
잠시 고골리에게 주의가 돌려진 틈을 이용해 조노량의 손바닥이 슬그머니 아스르부테를 향했다. 아스르부테가 힐끗 쳐다보았지만 경계하는 모습이 아니다.
더 이상 덩치를 불릴 수 없었던 땀방울 하나가 또르르 굴러 내리며 겨우 버티고 있던 다른 땀방울들을 몰아 함께 떨어졌다.
푸웅!
소리 없이 발출된 암경이 아스르부테의 가슴에 꽂혔다.
퍼퍼퍼엉!
“크아악!”
아스르부테의 가슴에서 생각지 못했던 폭발이 발생했다. 파란색 연미복이 갈가리 찢기며 피가 튀었다. 기습을 감행한 조노량조차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
하지만 아스르부테의 가슴에서 터져 나온 폭발의 여파에 조노량을 포함한 전 기대원들이 돌풍을 맞은 가랑잎처럼 뒤로 날렸다. 그건 고골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커다란 덩치가 서너 바퀴나 굴러 흙바닥에 볼썽사납게 처박혔다.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흙바닥에 처박힌 조노량은 몸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생각했다. 거인을 베었을 때 느꼈던 기운과 그 기운이 자신의 기에 반응해 일으켰던 폭발!
아! 그들이 가진 무언가가 자신의 내기에 반응하고 있다?
그들의 수장인 아스르부테의 기운은 거인보다 클 것이다. 더 큰 기운과 그에 따른 더 큰 반응! 후폭풍만으로도 고골리와 같은 거체를 날려 버릴 만큼 커다란 반응! 절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위력이었다.
정신을 차린 조노량이 아스르부테를 바라보았다.
☆ ☆ ☆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아스르부테는 원래의 자리에서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나 비틀거릴 뿐, 쓰러지지는 않았다. 준수했던 얼굴이 흉신악살(凶神惡煞)처럼 일그러져 있다.
크게 찢겨 너덜거리던 아스르부테의 가슴이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아스르부테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곳의 어떤 존재도 자신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런 미천한 것이 감히 이 존귀한 몸에 상처를 입혀? 삼켜 버리리라! 레포노 레스티퉈!”
극도로 분노한 아스르부테가 소리쳤다.
그러자 아스르부테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폭풍처럼 일었다. 흙더미가 회오리치고 자갈과 바위가 비산했다. 그리고 눈부신 빛의 파동이 아스르부테의 전신에서 뻗어 나왔다.
적 앞에서 눈을 돌릴 수도 감아 버릴 수도 없다. 조노량은 차츠라처럼 손 가리개를 만들고, 고개를 비스듬히 해서 새우 눈을 뜨고 아스르부테를 주시했다.
터져 나온 속도만큼 빛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눈이 받은 충격은 쉽사리 해소되지 못했다. 색색의 빛 덩어리가 눈앞에 둥둥 떠 다녔다. 당장 시야가 흐려졌다.
그 빛 무더기 사이로 족히 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괴물의 형체가 드러냈다.
그 괴물은 도마뱀의 몸체에 산양의 머리와 뱀의 머리를 하나씩 달고 있었고, 독수리와 같은 발톱이 대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몸체를 타고 흐르는 번지르르한 진액과 썩은 시체를 연상시키는 악취, 이것이 폴리모프를 풀어 버린 아스르부테의 본모습이었다.
그 순간 두 개의 머리가 각기 다른 목소리로 포효를 내질렀다. 높고 낮은 두 개의 포효,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역을 넘어서는 그 포효에 고골리를 포함한 모든 기대원들이 얼어붙었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굳어졌다.
조노량은 서둘러 일어나 오첩도를 들어 올렸다. 몸서리처지는 두려움이 몰려들었지만, 괴물을 맞이한 인간이라면 응당 느낄 법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무인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스스로 전사라 일컫는 자들이 포효 한 번에 저토록 얼어붙는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무섭기는 자신도 마찬가지다. 저런 괴물을 앞에 두고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대상 앞에서 어쩌자고 저렇게 얼어붙어만 있단 말인가?
조노량은 피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스스로의 스스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뿐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어떻게든 동료들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벌어야 했다. 오첩도가 날았다.
스컹!
쾅!
다시 한 번 일어나는 폭발, 오첩도를 통해 받은 충격은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고 안쪽으로 침범해 들어갔다. 그로 인해 도마뱀의 몸체 일부가 터져 나갔다. 본체로 현신했음에도 다시 입은 상처가 아스르부테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아스르부테는 기둥 같은 팔을 휘둘렀다. 몸을 날려 피했지만 그 여파만으로도 조노량의 몸체가 휘청거렸다.
다시 도를 뻗었다.
터엉!
무언가에 막혀 오첩도가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오첩도와 충돌을 일으킨 보이지 않는 막이 폭발을 일으키며 깨져 나갔다. 그 힘에 조노량의 몸이 통째로 뒤로 날렸다.
그 자리로 아스르부테가 발출한 무형의 기운이 떨어져 내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조노량은 직감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자신도 모르게 검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검을 휘돌렸다. 은은한 검 막이 조노량과 무형의 기운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경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절묘한 순간에 검 막이 완성되었다. 생전 처음 검 막이라는 것을 시전했지만 허무하게도 다시 한 번 나뒹굴고 말았다.
조노량이 튕겨 나간 자리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깊게 패여 나갔다. 흙과 자갈이 비산했다.
나뒹굴고 있는 조노량의 몸 위로 흙더미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전신이 얼얼했다. 만일 막아 내지 못했다면 지금쯤 육편을 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상을 입었는지 메스꺼움이 밀려 올라왔다. 이건 도무지 상대할 방법이 없다.
아스르부테는 자신의 권능에 직격당하고도 몸을 일으키는 조노량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산산이 터져 나갔어야 마땅할 일인데, 터지기는커녕 눈빛도 죽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조노량을 향해 뱀의 머리가 달려들었다. 통째로 삼키려는 듯 한껏 벌린 입에 날카로운 두 개의 독아가 번뜩였다. 거의 글라디우스만 한 길이다. 독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저 무지막지한 이빨에 걸리는 것만으로도 끝장이다. 일위진천환영보가 펼쳐졌다.
자세는 뱀의 머리를 맞이해 달려 나가는 모양새였지만 몸은 좌측으로 빠져 있었고, 뒤로 빠지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몸은 우측으로 돌아가 있었다. 놀라운 속도와 착시효과, 뱀의 머리가 하릴없이 흙바닥을 파헤치고 물러났다.
조노량의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에 짜증이 솟구친 아스르부테가 거대한 빙염의 창을 소환했다.
퍼퍽!
푸앙!
푹! 퍼벅!
반경 십여 미터에 날카로운 얼음의 창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몸을 날렸지만 그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간발의 차이로 창과 창의 틈 사이에 끼어 직격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친 것만으로도 가슴 부근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대지에 반사된 충격에 몸이 튕겼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무와 충돌한 후 흙바닥에 처박혔다. 너무 강한 충격에 등이 마비되었다. 마비된다고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스르부테의 공격을 한 번만 더 허용하면 살아날 방법이 없다. 사력을 다해 몸을 세웠다.
연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빙염의 창, 반격은커녕 피해 내기도 벅차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힘의 차이! 피를 토하며 조노량은 절망했다.
중원에서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강해졌다. 그럼에도 이 빌어먹을 땅에 떨어져 단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했다.
가슴에서 피가 아닌 무언가 치밀어 올라왔다. 내공이 단전을 벗어나 제멋대로 몸을 휘젓기 시작했다. 막혀 있던 혈도 일부가 터져 나갔다. 새로운 혈로를 따라 노도처럼 터져 나온 내기가 방향을 역행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결국 백회(百會)까지 침범했다.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앞이 붉게 변했다. 그 붉은 눈이 아스르부테를 향했다. 육체는 통제에서 벗어나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눈빛에 아스르부테는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끼고 다시 한 번 분노했다. 저런 하찮은 눈빛 따위에 반응한 것이 수치스러웠다. 살기가 치솟았다. 단숨에 찢어 버리지 못하면 이 더러운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새로운 힘이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우선 산산이 찢어 버리고 살과 뼈를 분리한 후에야 생각해 볼 일이다.
그때였다.
“홀리필드!”
아스르부테가 조노량에게 집중하고 있는 사이, 기대원들이 피어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제우스의 홀리필드가 아스르부테의 거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존재가 생성되고 나서 처음 느끼는 소름끼치는 고통, 마력과 상극인 성력의 기운이 아스르부테를 강타했다. 온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들고 일어나 아우성치고, 정신이 갈가리 흐트러지는 느낌에 아스르부테는 거칠게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몸부림에 땅이 패고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산양과 뱀의 머리가 다시 한 번 포효했지만, 피어가 아닌 고통의 절규였다. 하지만 곧 아스르부테의 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반 마물들이었으면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을 터인데, 아스르부테는 포효와 함께 단숨에 홀리필드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이래서 성력이 싫었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홀리필드에서 벗어난 아스르부테가 분노의 피어를 내지르며 일행을 노려보았다. 다시 터진 피어에 몸이 굳어진 미천한 인간들이 보였다. 단번에 죽이는 것은 너무 아깝다. 사지를 하나하나 찢어 내어 고통 받고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들이 발산하는 고통의 절규와 절망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리앙이라는 자를 입에 넣고 그 살을 한 점 한 점 씹어 삼켜 주겠다.
고골리라는 마법사의 가디언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제법 기개가 좋다만, 한낱 가디언 주제에 감히!
아스르부테는 손톱을 찍어 눌렀다. 고골리의 투핸드소드가 아스르부테의 손톱을 받아 냈다. 하지만 거력의 고골리도 아스르부테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무릎이 꺾였다.
아스르부테의 손톱이 고골리의 거검을 튕겨 내고 다시 고골리의 몸을 튕겨 냈다. 육중한 고골리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날아가 떨어졌다. 손톱 한 번 튕기면 끝일 놈들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아스르부테의 거체가 움직였다. 단지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나동그라진 고골리 앞에 섰다. 그러자 고골리의 망치 손이 아스르부테의 발가락을 찍었다. 당연히 상처 따위는 없다.
하지만 욱신거리는 압통, 건방진 놈!
아스르부테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고골리의 몸이 다시 나뒹군다. 죽여주마!
언약을 한 것은 아니나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어 버린 묵계,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마법사와의 묵계도 안중에서 사라졌다. 설사 마법사가 직접 나선다 해도 이제는 말릴 수 없다. 이 아스르부테 님을 분노케 한 대가는 오직 목숨뿐이다. 그것도 가장 비참해야 균형이 맞다.
바람의 칼날이 고골리를 향했다. 왼손의 살 망치가 손목째 날아갔다. 오른팔이 팔꿈치부터 잘려 나갔다. 검붉은 피가 꾸역꾸역 밀려 나온다.
그의 영혼에서 스멀스멀 고통의 기운이 흘러나온다. 맛있다.
그런데, 고통의 향기는 있었으나 두려움이나 절망의 냄새가 없다. 그것이 또 거슬린다.
허청거리면서도 잘도 일어선다.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당당히 허리를 편다. 당장 무릎을 꿇고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건방진 놈!
아스르부테는 자신 앞에 당당히 몸을 펴는 마법사의 노예를 노려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 일어서지 못하게 해 주마.
노려보는 것만으로 바람의 칼날이 생성되었다. 마음을 정하자 바람의 칼날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고골리의 다리를 휩쓸어 버렸다.
썽둥!
고골리의 양 다리가 허벅지부터 깔끔하게 절단되어 날아갔다. 고골리의 육체가 무너져 내리며 나뒹굴었다. 고골리가 팔꿈치로 기어 아스르부테에게 다가왔다. 경배라도 하려는 것이냐?
“크하하!”
아니었다. 광소와 함께 고골리의 잘려진 손목이 아스르부테의 발등을 때렸다.
크크, 간지럽지도 않다. 버러지 같은 놈.
그래, 그렇게 소원한다면 이만 죽어라, 마법사의 노예여!
아스르부테는 마지막 바람의 칼날을 소환했다.
고골리는 웃었다. 사지가 절단된 채 아스르부테의 발치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도 웃었다. 어차피 인간의 생은 포기한 지 오래, 이제 와 죽는다한들 아쉬울 것이 없다. 다만 페라르모를 보지 못하고 감이 아쉬울 뿐.
페라르모…… 너무 오래 잊고 있었구나. 이십구 년 전 전장으로 떠나며 보았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다섯 살배기 아들의 눈에서 느껴지던 자부심. 초롱하게 빛나던 눈동자, 유일한 피붙이, 죽음의 순간이 되어서야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 번쯤 장성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때, 요동치는 내기를 다스리지 못해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조노량의 오첩도에서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왔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섬광이었다. 눈을 감을 틈도 없이 섬광을 맞이한 조노량은 순간적으로 시력이 마비되었다.
조노량이 시력을 회복했을 때, 크게 밀려나 있는 아스르부테의 모습과 그 앞에 고골리의 투핸드소드 못지않게 커다란 검을 한 손에 쥔 사내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