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63화 (63/142)

63. 빙산

좀비와의 전투로 반나절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는 정오를 지나 태양의 빛무리가 서쪽으로 살짝 기운 시간이었다.

산의 초입에서 어슬렁거리던 몇몇 마물들을 정리했다. 기계적으로 나가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돌아왔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잠된 분위기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초입을 지나 본격적으로 산을 타기 시작한 후로는 마물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이런 황량한 산길을 어슬렁거릴 이유도 없겠다. 산을 타는 일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덕분에 조금씩 분위기가 회복되어 갔다. 슬픈 일이지만 동료를 잃는 일에도 내성이 생기는 모양이다.

이틀이 지나 산의 중턱에 다다르자 만녕빙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한편 황당하기도 했다. 만년빙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다. 유람 차 갔던 황산(黃山), 그 북쪽 계곡에서도 하얗게 쌓여 있던 만년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응달진 계곡 군데군데 점처럼 박혀 있던 작은 얼음 조각들이 설핏 떠오른다. 여름인데도 녹지 않은 눈을 마냥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곳의 빙설은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눈이 아니라 얼음이었다. 그것도 중턱에서부터 산 전체를 둘러싸다시피 한 얼음덩어리였다.

비록 지금이 여름은 아니지만, 설사 여름이 된다고 해도 녹을 리가 없다.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마계의 문에서 겨울이 온다고 해도 새로 얼음이 생성될 가능성은 만무하다. 증발이 되면 되었지, 쌓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얼음은 결국 마계의 문이 생기기 전부터 얼어 있던 것이 틀림없다. 오백 번의 여름과 맞서고도 꿋꿋이 버텨 낸 얼음인 것이다.

마계의 문에서 이런 얼음을 만난다는 건 매우 행복한 일이다. 물이 얼면 얼음이 되듯, 얼음이 녹으면 다시 물이 된다.

기대원들 모두 정말 오랜만에 배가 터져라 물을 들이켤 수 있었다. 더러운 껍데기를 덜어 내고 빙하의 속살만 파내 가죽 주머니에 담아 불 위에 올렸다. 너무나도 맑고 깨끗한 물이었다.

조노량은 주변 기온으로 인해 급히 식어 버리는 물을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켜 다시 뜨겁게 데운 다음 후후 불어 가며 달게 마셨다.

기대원들도 마신 물이 그 자리에서 소변이 되어 나올 정도로 실컷 들이켰다.

커트리안의 지시에 따라 얼음을 파내고, 각을 잡아 잘라 낸 얼음으로 지붕을 씌웠다. 조노량으로서는 상상도 못 해 본 얼음의 집이다. 집 안에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집이 녹을까 봐 걱정했으나 전혀 녹을 기미가 없다. 그리고 의외로 훈훈하다. 얼음으로 만든 집이 이토록 따뜻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다. 얼음 속에서 보낸 밤이 성지를 벗어난 후 가장 따뜻하게 보낸 밤이었다.

다음 날, 일찍부터 스마르가 설치는 바람에 더 이상 온기를 즐기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짐을 정리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빙산을 넘어야 했다. 경사가 가파른 것도 문제지만 발밑이 미끄러운 것이 더 문제였다. 요철도 없이 평평한 가죽이나 나무토막으로 바닥을 댄 신발은 접지력을 갖기에 무리가 많았다. 그런 상황이니 까닥 잘못 디뎠다간 아래로 죽죽 미끄러진다. 앞엣놈이 미끄러지면 뒤엣놈도 덩달아 미끄러진다. 그나마 완만한 경사나 턱을 만나면 다행이지만 급한 경사에서 미끄러지면 자칫 한없이 떨어져 버릴 수도 있다. 선두에서 기대를 이끄는 스마르를 제외한 실력자들이 맨 뒤에 선 이유다. 마물의 힘줄을 엮어 만든 밧줄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준비하지 못했으니 뒤늦게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산전수전 다 격은 전사들이랍시고, 그렇게까지 어설픈 사람은 없다. 미끄러지는 순간 뒷사람이 잡아 주거나 몸을 납작 엎으려 단검으로 바닥을 찍고 버텼다. 얼마나 힘이 좋은지 단검이 손잡이만 남기고 얼음 속으로 모습을 감출 정도니 떨어져 죽을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몇몇은 번번이 미끄러져 뒤에 가는 사람에게 여러 번 수고를 끼쳤다. 이렇게 말이다.

헛발을 디디며 앞쪽으로 맹렬히 코를 박고 미끄러진 크리들의 등을 조노량이 눌러 멈춰 세웠다.

어느새 빠져나온 크리들의 촉수가 얼음을 긁고 있다. 매끄러운 촉수와 매끄러운 얼음은 애초에 궁합이 맞지 않았다. 얼음에 박아 넣어도 순식간에 빠져 버렸다. 조노량이 등을 밟아 세우고서야 얼음에 단검을 역수로 박아 넣는다.

‘늦었다, 이 친구야!’

코피를 주르륵 흘리며 일어선 크리들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조노량은 크리들이 중심을 완전히 잡은 걸 확인한 후에야 천근추를 풀었다. 조노량이 전진한 후 얼음 위에 선명한 발자국이 하나 찍혀 있었다.

하이오지로부터 아이스 트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빙벽 위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할 수 있는 마물이라 했다. 트롤이야 숱하게 보았으니 익숙한 마물이다. 힘과 회복력이 좋고, 움직임이 유연한 마물이다. 그래 봐야 일검이면 충분한 놈이지만, 이런 지형에서 만난다면 상대할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야 천근추로 버티며 상대하면 된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손톱 한번 변변히 막아 내지 못하고 저 아래로 끝없이 추락할 판이다. 아무리 천근추를 시전한 자신이라 해도, 중구난방으로 휘저어 버리면 막아 줄 방법이 없다.

천만다행으로 아이스 트롤을 만나는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엔 서식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전쟁 통에 불려 갔는지 알 수 없다.

까마득한 정상을 옆으로 끼고 돌며 산을 넘었다.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위험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헉헉대는 다른 기대원들과 달리 마치 평지를 걷듯 여유로워 보이는 조노량을 선두로 내세웠다. 조노량은 적절히 천근추를 발휘해 가며 행군의 속도를 조절했다. 가파른 곳에서는 조금 더 천천히 진행했고, 턱이 보이는 곳에서는 슬슬 미끄러져 내려갔다. 짧은 턱이라도 마지막에 슬쩍 천근추를 발휘하면 단박에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미끄러지는 기대원들을 하나하나 잡아 주며 안전을 확보한 후 다시 하산을 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서야 다시 흙을 밟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마물을 상대하는 게 훨씬 쉽겠다!”

흙바닥을 보자 바닥을 다지듯 쿵쿵 뛴 하이오지가 투덜거렸다.

뭐라고 대꾸를 할만도 한데,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형편없이 지친 탓도 있지만 아직까지 롤을 만난 여파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웃거나 떠드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상스런 대화가 몇 마디 오가고, 걷고, 다시 누군가 입을 떼었지만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말이 많은 크리들조차 입을 꾹 다물고 단답형의 대화만 가끔 주고받을 뿐이었다. 얼음을 녹이고 물을 나눠 담을 때도 묵묵히 일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여드레를 지나 산을 넘었다. 징그럽게 높고 넓은 산이었는데, 그나마 테트리카 산맥 중 가장 좁고 낮은 지역이라서 다른 루트보다 넘기에 용이하다는 고골리의 이야기를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이 세계는 무엇 하나 작은 것이 없다.

고도가 낮아질수록 기온의 차가 확연하다. 어느새 늦봄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조노량도 껴입었던 옷들을 하나씩 벗어 버리고 비교적 가벼운 차림을 했다. 짐이 줄어들자 한결 편안했다.

산을 넘어서 다시 부지런히 싸우고, 동료를 잃어 가며 길을 재촉한 끝에 일행의 여정은 어느 덧 출발일로부터 오 개월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슬픔에 가장 잘 듣는 약은 시간이라는 말이 맞았다. 죽은 동료들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흐릿해져 갔다. 그리고 불과 스무 날 정도면 경계에 도달하리라는 고골리의 말에 기대의 분위기가 확연히 밝아졌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어둠이 짙어졌다. 새벽을 맞아 뿌옇게 동이 터 온다. 완전히 밝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시간만큼은 중원의 여명과 구분하기 힘들다.

조노량은 남들보다 조금 일찍 눈을 떠 가볍게 운기를 하며 기운을 다스렸다. 최근 들어 독맥을 타고 오른 기운이 부쩍 생사현관(生死玄關)을 거세게 두드려댄다. 본능적으로 가장 위험한 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적당히 운기를 마친 조노량이 눈을 떴다. 어느새 완전히 동이 텄지만 유난히 개운치 않은 날이다. 눈살을 찌푸리고 태양을 직시했다. 밝고 깨끗한 햇살 대신 뿌연 햇무리만이 넓게 퍼져 있다. 고개를 돌려 슬슬 깨어나기 시작하는 기대원들을 보았다. 방금 불침번을 마친 기대원이 작게 하품을 한다. 곤할 만도 하다. 마물의 체력을 얻었지만 그간의 고단함은 그런 체력을 상회한다.

“끄응, 잠이라도 실컷 잤으면 좋겠구먼.”

폴이 백발을 질끈 동여매며 투덜거렸다.

“조금만 참으라고! 나가자마자 실컷 쳐 자게 해 줄게.”

능글거리는 하이오지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잠은 됐고, 소금을 듬뿍 뿌린 티본스테이크와 독한 빠블로 한 병을 마시고 싶군. 사 줄 거지?”

“내가 가진 금화가 얼만 줄이나 알아? 걱정 붙들어 매고, 우선 마물 스테이크라도 씹으라고.”

서로에 대한 집착이 커진 만큼 격의가 없다. 클래스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전의 강함이 지금의 강함도 아니었고, 강함을 논하며 서로를 구분 짓지도 않았다.

피식 웃으며 불편한 기분을 날려 버렸다. 과도한 불안이 낳은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다. 언제는 위험하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조노량은 등짐에 걸려 있는 마물의 육편을 떼어 냈다. 불을 피웠을 때 어설프게 훈제해 놓은 놈인데, 강하지도 않은 햇살에 잘도 마른다. 단검을 꺼내 마물의 육편을 작게 베어 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꾸들꾸들하게 잘 말라 있다. 이렇게 말려 놓으니 냄새도 덜하고 은근히 씹는 맛이 있다.

몇 조각 베어 먹지도 않았건만 식사를 마친다. 아침에 많이 먹어 봐야 몸만 둔해질 뿐 득이 없다. 조노량은 등짐 한편에서 검은 이끼를 꺼냈다. 마르지 말라고 가죽으로 잘 싸매 놓았다. 적당히 덜어 낸 후 다시 싸매 넣었다. 씹으니 알싸한 독기가 퍼져 입안을 얼얼하게 한다. 죽지 않으면 됐다. 꼭꼭 씹어 수분을 뽑아내고 질겨진 건더기는 뱉어 냈다. 빙산에서 보충했던 물도 떨어진 지 오래다. 한 손에 수북이 쌓아 놓은 검은 이끼를 거의 다 씹었을 즈음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왔다.

구릉을 몇 개 넘은 후, 행군 중 각자 알아서 점심을 챙겨 먹고 다시 작은 벌판을 지났다. 몇 무리의 마물을 뚫었고, 적당량의 검은 이끼도 취했다.

뒤에서 제우스의 숨소리가 훅훅거린다. 워낙에 빠른 행군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지게에 앉아 있으라고 해도 굳이 내려서 걷기를 자처한다. 뭐, 그러다 지치면 알아서 부탁할 테지만 미리미리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 좋다. 제우스의 몸무게쯤을 부담스러워하는 기대원도 없고 말이다.

그렇게 한동안 달리니 마계의 문에서 보기 드문 울창한 숲이 나왔다. 나무 하나하나가 몇 백 년은 족히 묵었으리라 짐작할 만큼 곧고 높았다.

그래도 빛이랍시고 뿌연 햇무리가 울창한 나무 틈을 비집고 날카롭게 쏘아져 내린다. 어느덧 서쪽으로 많이 낮아져 있다. 앞으로 두어 시간이면 완전히 내려앉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 존재를 발견했다. 시야에 들어오기 전에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 작은 공터, 거기에 그가 있었다. 마계의 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곤청색 연미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젊은 사내.

조노량조차 그 사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에야 존재를 눈치챘다. 아무런 살기도, 아무런 기세도 피어 올리지 않는 잘생긴 사내. 그래서 더욱 수상했다.

그를 발견하자 조노량의 육감은 요란한 경고를 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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