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62화 (62/142)

62. 좀비 폴리스

눈에 보인다고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산의 초입에 다다르기까지도 다시 나흘을 걸어야 했다. 일행이 향하고 있는 곳은 마계의 문 최대의 산맥이라는 테트리카 산맥의 지류인 울투르 산이다. 불러 주는 이 하나 없는 과거 명칭일 뿐이다.

지류라고는 하지만, 울투르 산은 중턱부터 회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계의 문이 형성된 이후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만년설이라는 의미리라. 그만큼 높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성지를 출발할 때 가져 왔던 물도 오래 전에 동이 났다. 검은 이끼로 수분을 보충해 온 일행들은 하얀 눈을 보는 것만으로 갈증을 느꼈다.

“커트리안!”

고골리가 커트리안을 불렀다.

커트리안이 다가오자 고골리가 산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지난번 이야기했던 산이다. 좌측으로 일주일가량 돌아가면 넘기 좋은 재가 하나 나오지. 그 루트를 택하든 가로지르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일정상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 거요?”

“산을 넘는 데 따른 시간을 고려한다면 대략 사흘 정도는 늦어진다고 봐야겠지. 아이스 트롤들을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늦어질지는 알 수 없고.”

커트리안이 신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사흘을 포기하고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산을 넘을 것인가? 빙산에서 만나는 아이스 트롤들은 생각 외로 까다로운 존재들이었다.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작전을 펼친다면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돌아간다면 조금 더 안전하겠지만, 확실히 사흘은 손해를 봐야 한다.

“한 가지 선택이 더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골리가 흥미 있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좌측으로 반나절만 가면 오래된 성곽이 하나 나온다.”

성곽? 마계의 문 한복판에 성곽이라니?

조노량이 그런 의문을 가질 때 고골리의 말이 이어졌다.

“마문이 생기기 전, 이 땅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걸 잊었나? 당시에 제법 흥했던 폴리스가 있다. 이름? 그런 걸 알 턱이 있나? 지금은 폐허나 마찬가지지만, 눈도 비도 내리지 않는 덕에 아직까지 제법 형체는 갖추고 있더군. 뭔가 필요한 게 있을 거다.”

그 순간 커트리안의 눈이 빛났다.

“혹, 시의 재화가 남아 있을 거라는 말을 하는 거요? 피란을 가지 않았겠소?”

마계대전 당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일부는 피란을 갔겠지. 그런데 대부분 남아 있었던 모양이더군. 좀비들이 아주 많아!”

아무리 작은 폴리스라도 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따라서 시민 궁이나 시청에는 상당량의 재화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고대의 무구(武具)나 법기들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까짓 허약한 좀비들이야, 있거나 없거나 문제될 것이 없다. 이 중 누구 하나도 좀비 따위에 당할 만큼 약하지 않다.

커트리안을 지긋이 바라보던 고골리가 다시 한 번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쪽에서 오르는 루트도 있다. 원래 도시는 교통이 편한 곳에 자리 잡게 마련이거든.”

마음을 정했다. 가문이 몰락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자금이었다. 가문의 자금줄이 막히고 가문의 사업이 적자로 돌아서면서 정치적 기반도 함께 약화되었다. 제1 바실레오스 바라흐하왕의 뒷공작에 무력하게 당했던 이유이기도 했고, 자신이 포로의 신세로 전락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켈커티스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자금이 필요했고, 돌아간 이후 재기를 위해서도 자금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반나절이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부피가 작은 물건들로만 적당히 들고 나온다면 이후 이동에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고맙소. 출발한다.”

커트리안이 좌측으로 방향을 잡는 것을 확인한 고골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산허리를 끼고 좁고 뾰족한 검은색 잎사귀가 서너 개씩 뭉쳐 달린 나무들로 가득한 숲을 지나, 자갈투성이 언덕을 돌아 내려갔다. 한때는 가도가 있었을 법한 노지를 건너자 멀리 무너진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성곽의 상층부는 무너졌지만 나머지 부분은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 성문은 나뭇조각 하나 없이 뻥 뚫려 있었고, 성벽 앞 마른 해자에는 벌거벗은 좀비들이 몇 마리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의복은 오래전에 삭아서 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몸에는 인간의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수많은 상흔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마도 썩었다가 복구되기를 셀 수도 없이 반복한 탓일 것 같았다. 덕분에 외형상으로는 인간이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행을 발견한 좀비들이 거침없이 흙벽을 긁고 올라왔다. 일반적인 좀비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해자에 떨어진 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고, 벗어날 이유를 찾지 못했던 모양이다.

“저거 위험해 보이는데?”

하이오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좀 달라 보이긴 하지만 좀비잖아? 제까짓 것들이 무슨…….”

흙벽을 긁고 올라온 좀비들이 일행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일부 기대원들이 나서서 좀비들을 베어 버렸다. 하지만 좀비들의 움직임이 만만치 않다.

베어 버리긴 했지만, 좀비들이 보여 준 모습은 일반적인 좀비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빠르고 강하다날까? 움직임 자체가 어설프지 않았다. 마치 훈련된 전사를 보는 듯 날렵하기까지 하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고골리에게 향하자 고골리가 변명하듯 말했다.

“오백 년 묵은 좀비잖아?”

커트리안이 시선을 거두지 않자, 고골리가 부언하듯 설명을 이었다.

하긴 오백 년 묵은 좀비라는 농담 같지도 않은 말로 상황을 설명하기는 부족했을 것이다.

“좀비니까 썩겠지? 그리고 충만한 마기로 인해 다시 복구가 돼. 그걸 오백 년간 반복했다는 말이지. 오백 년간 마기를 쌓았으니 일반적인 좀비들과는 좀 다른 거지. 특히 이곳은 산자락을 타고 마기가 흘려 모이는 지형이라서 말이야. 험험. 그래 봐야 좀비잖아?”

그제야 커트리안의 시선이 성문 안쪽으로 옮겨졌다.

“다들 주의하기 바란다. 작은 상처라도 입으면 곤란하다. 뮤트, 헤리엇!”

갑옷 부분은 괜찮겠지만 밖으로 노출된 손이나 목 등은 위험했다. 각자 방패를 꺼내 들었다.

“네! 기대장님!”

“해자에 걸칠 나무를 베어 와라.”

“알겠습니다.”

예상한 대로 성 내부는 대부분 폐허나 다름없었다. 나무로 지어진 건물들은 오래전에 무너져 내렸고, 석재 건물들은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좀 더 진입하자 커다란 광장이 나왔고, 시청으로 쓰였을 법한 사 층짜리 석재 건물 하나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석재를 통으로 가공해서 올린 건물이기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가능하면 소리를 죽이며 이동해 왔음에도 벌써 여러 차례 좀비들의 습격을 받았다. 좀비가 조금 강하다고 해서 일행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피해는 없었지만 이 정도 움직임을 가진 좀비가 수천, 수만이 몰려든다면 만만치 않은 상황에 맞닥뜨릴 가능성도 있었다.

폴리스라면 최소 십만 이상의 인구가 상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하라면 폴리스라고 부르지 않고, 마을이나 둔전이라고 부른다. 더구나 성벽의 크기로 보아 폴리스로서 손색이 없는 규모를 갖추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부에도 좀비들이 있을 것이다. 최대한 소리 없이 처리하도록!”

스마르가 몇몇을 향해 지시하자 그들이 먼저 강철로 된 시청 문을 열고 진입했다. 대체로 몸놀림이 빠른 자들이었다. 그들이 진입하자마자 안쪽에서 그르르릉, 큭큭, 툭 등의 작은 소리가 울려 나왔다. 잠시 후 본대도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홀 안에는 벌써 수십의 좀비가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 머리가 뚫리거나 베어져 있었는데, 간혹 상체가 통째로 베인 놈들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아직까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본대가 지나가면서 움직이는 놈들을 마저 정리했다.

“일 층을 먼저 뒤진다. 찾아야 할 것은 금과 보석류 그리고 아직까지 형체를 보존하고 있는 모든 것! S클래스는 홀에 대기하라.”

스마르가 지시하자 기대원들은 눈을 빛내며 각기 흩어져 방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또한 수많은 전장을 굴렀던 이들, 애초에 약탈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중원이나 이곳이나 재물에 대한 집착은 동일했다.

일 층에만도 크고 작은 네 개의 홀과 30여 개의 방이 있었다.

조노량은 어정쩡한 자세로 스마르를 바라보았다. 공식적으로는 S클래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료하면 이 층을 정리해 주겠나?”

조노량의 시선을 오해한 모양이다. 어쨌든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였다.

홀 중앙 돌계단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켜켜이 앉았던 뿌연 먼지가 풀썩풀썩 올라온다. 밟아 보고서야 재질이 돌인지 알 수 있을 정도니,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 층은 중앙이 둥그렇게 뚫려 아래층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된 구조였다. 중앙 홀 천장을 중심으로 바깥쪽으로는 동서남북 네 개의 복도와 수십 개의 강철 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평상시에는 시청의 위용을 돋보이게 하고, 위급 시에는 중앙 홀로 진입하는 적들을 요격하기 쉽도록 만든 구조였다.

제법 방어에 공을 들인 건축물이다.

복도에 수북이 쌓인 먼지 위로 좀비들의 맨발 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잠시 후 일 층에서의 소란을 감지한 좀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더니 조노량을 발견하고는 제법 빠른 움직임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원들 중에서도 최고의 몸놀림을 자랑하는 조노량의 상대는 아니었다. 조노량은 로비에 있던 좀비들을 간단히 베어 낸 후 닫힌 방문들을 하나하나 열어젖히며 지나갔다.

안에 있는 좀비들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의도였다. 이 정도 마물이라면 굳이 하나하나 상대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한 번에 처리하는 것이 편했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달려드는 좀비들은 바로 베어 버리고, 꾸물거리며 나오는 좀비들은 꼬리로 달았다. 그렇게 나온 좀비들 중 일부가 일 층의 인기척을 감지하고 아래로 향했지만 경고해 주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노량은 네 개의 복도를 차례로 거치며 중앙 홀까지 한 바퀴 돌자 어느새 이 층은 좀비들로 득시글거렸다.

거의 모든 좀비가 썩었다가 아물기를 반복한 터라 시커멓게 변색된 몸뚱어리가 전부 상흔으로 덕지덕지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 눈코입귀 등 인지 기관이 떨어져 나간 터라 어떻게 자신을 따라붙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대략 백여 마리가량, 한 층에서 나온 좀비치고는 숫자가 많다. 멈춰선 조노량이 양손을 번갈아 뻗어 내자 펑펑 소리와 함께 달려들던 좀비들이 무더기로 나가 자빠졌다. 파마장이라고 이름 붙인 장법이었다. 암경이 내부를 타격한다면, 파마장은 외부에서부터 타격이 들어간다. 살상력 면에서는 암경보다 약했지만 대상을 튕겨 낼 수 있기에 다수를 상대하기에는 오히려 유리했다. 단점이라면 내공 소모가 좀 심하다는 점이지만 요즘 들어선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대략 오십 마리쯤 남자 이번에는 오첩도를 뽑아 들었다.

조노량이 진기를 끌어올리자 오첩도에 아지랑이 같은 검기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슬쩍 내공을 조정하자 검기가 오첩도의 검첨으로부터 한 자 이상 뻗어 나갔다. 더 길게 뽑아 올릴 수 있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좀비들 한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 ☆ ☆

후룽후룽 하는 묘한 소리와 함께 좀비들의 신체와 시커먼 체액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얼마나 중구난방으로 날렸는지 난간 너머 일 층에서 ‘이크’ 하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날뛰었지만 조노량의 신체에는 단 한 방울의 체액도 닿지 못했다.

그때쯤 일 층을 수색하던 기대원들이 이 층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각 방들에 대한 수색을 맡기고 일 층으로 내려오자 커트리안과 스마르 앞에 몇몇 물품들이 모아져 있었다. 대부분 은제 촛대나 식기류였는데, 쓸모없다고 여겼는지 스마르가 한편으로 밀쳐 내고 있었다.

한참 후 이 층까지 수색을 마친 기대원들이 무언가를 들고 오기 시작했다. 은제품들은 수거해 오지 말라는 주의를 받은 듯 대부분 빈손이었다. 몇몇 기대원들은 금화로 추정되는 시커먼 동전을 챙겨 왔는데 그다지 양이 많지는 않았다.

사 층까지 전부 수색하고서야 10킬로그램 정도의 금화와 낡은 팔찌를 하나 수거할 수 있었다. 오백 년이나 흐른 팔찌가 아직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동전처럼 시커멓기는 했지만 오톨도톨 튀어나온 문양을 살짝 긁으니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닦으면 광채까지 날 것 같다.

“별거 없구먼.”

고골리가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아니, 아직 중요한 곳이 남았소.”

커트리안이 발로 바닥을 퉁퉁 두드리며 마주 미소를 지었다.

“주방에 아래로 통하는 문이 하나 있습지요.”

하이오지가 따라 웃으며 주방을 가리켰다.

“삼 층에도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하나 있던데요?”

폴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백발에, 마물화가 진행되면서 피부가 두꺼운 각질로 뒤덮였다. 그런 탓에 폴은 표정을 짓지 못한다. 그런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우습기도 했고, 기괴하기도 했다. 오첩도를 만들 때 대장간에서 낯을 익힌 사내다.

그때만 해도 멀끔한 얼굴이 백발과 어우러져 귀티까지 흘렀는데, 얼굴이 이 모양이 돼 버리자 백발이 그의 인상을 더욱 괴기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래도 성격은 비교적 밝은 편이었다.

“둘 다 창고겠지만 주방에 있는 것은 식품 보관고일 테고, 삼 층에서 연결된 것이 진짜일 거요.”

커트리안은 고골리와 기대원들에게 일 층을 경계하도록 하고, 폴과 함께 S클래스 둘과 스마르만 대동해 삼 층으로 올라갔다. 수색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느라 지루했던 조노량도 자원하여 삼 층으로 향했다.

곳곳에 좀비들의 시체가 널려 있는 삼 층 중앙 복도를 통과하자, 다른 문들보다 널찍한 철문 하나가 활짝 열려 있는 채로 일행을 맞았다. 척 봐도 시장의 집무실쯤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시장실 안쪽 좌측 벽면에는 과거 책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커먼 먼지 무더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뒤로 뻥 뚫린 공간이 드러나 있었다. 애초에는 책장 뒤에 감쪽같이 감춰진 공간이었을 터였지만, 책장이 썩어 무너지자 자동으로 공개되어 버렸다. 공간 안쪽에 보이는 원형 돌계단은 폴의 말대로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무척 가파른 계단이다.

예니에프가 궁금한 듯 계단 안쪽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어두운데? 횃불이 필요하겠어.”

잠시 후 급조한 횃불을 몇 개 밝히고 아래로 향했다.

계단은 의외로 좁고 깊어서 한 줄로 서서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대략 오 층 이상의 깊이로 추축되었다.

바닥에 도달하자 기다란 복도가 나왔다.

그 순간 조노량이 앞으로 튀어나와 횃불을 들고 앞장서던 폴을 뒤로 밀쳐 내며 오첩도를 뻗었다.

깡!

어둠 속에서라면 누구보다 밝은 눈을 가진 조노량이었다. 횃불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들던 무엇인가가 오첩도에 막혔다.

삼성의 내공을 실은 오첩도를 받아 내고도 상대는 그 자리에 멈췄을 뿐,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횃불의 범위에 든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좀비?”

곧이라도 부스러져 내릴 것 같은 녹슨 체인 메일을 입고 있는 장신의 사내였다. 겉으로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물론, 삭아서 사라진 바지 덕분에 하체도 반쯤 썩어 너덜거리고 있었다. 남성도 썩어서 떨어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동공이 없는 회색의 눈동자는 용케 남아서 횃불 빛을 반사하며 번들거렸다.

“보통 좀비는 아닌 거 같은데? 노리앙의 검을 받아 냈잖아?”

캬아악!

반면 좀비도 상대방이 검을 받아 낸 것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이도 없는 입을 벌려 위협성을 토해 놓았다.

“아이고, 깜짝이야! 사람을 놀래?”

예니에프가 뒤에서 호들갑을 떨더니 뼈로 만든 브로드소드를 흔들며 조노량의 앞으로 나섰다.

“조심해. 좀비가 검을 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다.”

클래스의 경계는 오래전에 무너졌다. 기대장인 커트리안과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스마르를 제외하면, 대부분 말을 놓고 지내는 관계가 된 것이다.

조노량이 경고를 날렸지만 예니에프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연격(連擊)을 날리기 시작했다.

캉!

카캉!

캉!

좀비는 썩어 문드러진 몸뚱어리로 예니에프의 연격을 빠짐없이 받아 내고 반격까지 들어왔다. 빠르고 힘이 넘쳤다.

캉!

카강캉!

의외의 반격에 당황한 예니에프가 두어 걸음 물러서며 깜짝 놀랐다.

“뭐야, 이거?”

좀비의 검술도 놀라웠지만, 오오라가 어린 예니에프의 골검을 받아 내고도 흠집 하나 생기지 않는 좀비의 검도 예사롭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좀비의 검에 검은 오오라가 맺히기 시작하더니 더욱 거세게 예니에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헉헉! 이거 거의 데스나이트급인 거 같은데? 뭐 이리 세! 이랏차!”

공격만 당할 수 없다는 듯 기합을 지른 후, 예니에프의 검놀림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박빙으로 보이는 승부였다.

“마물을 상대로 기사도를 발휘하나? 시간이 없다, 협공해라!”

스마르의 냉정한 음성이 떨어지자 쥬시아누스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때 조노량이 손을 들어 막더니 오른쪽으로 비켜서서 좀비를 사정거리에 두었다.

푸웅!

조노량의 왼손에서 소리 없이 암경이 발출되고, 좀비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조노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좀비를 보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골곤도 한 방에 끝내는 암경을 받아 내고도 움직이다니?

잠시 놀랐던 조노량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암경은 내부를 격탕시키는 것이지, 형태를 파괴하는 기술이 아니다. 몸뚱이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도 움직이는 좀비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때 좀비의 회색빛 눈동자가 짙은 어둠에 물들더니,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예니에프를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욱 사나운 기세가 풍겨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오첩도를 흔들며 앞으로 나섰다.

캉!

핑!

예니에프에게 떨어지던 좀비의 검을 튕겨 낸 오첩도가 다시 원을 그렸다.

그리고 좀비의 목덜미가 삼 분의 일가량 베어져 나갔다.

캉!

이어진 조노량의 검을 막아 내던 좀비가 오첩도에 어린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싸움을 방해받은 예니에프가 막 화를 내려던 참에 조노량이 예니에프를 지나쳐 막 몸을 일으키는 좀비에게 다가들었다. 제현의 뒷골목에서 보여 주었던 걸음걸이, 건들거리는 걸음이었다. 횃불의 범위를 벗어났지만 어둠은 조노량에게 제약 사항이 아니었다.

크르르르!

좀비가 몸을 낮추며 으르렁거렸다.

핑!

조노량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마물의 왼손을 베어 냈다. 마치 어둠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 조노량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시 마물의 오른 다리까지 절단해 내었다.

카아악! 캬악!

중심을 잃고 쓰러진 좀비가 위협적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조노량의 오첩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좀비의 목덜미를 향했다. 좀비는 반쯤 무너진 자세로도 오첩도를 받아 내었다. 훌륭한 대처다. 기대원이었다면 칭찬이라도 해 줬을 터였다.

펄썩!

하지만 오첩도에 어린 기세까지 받아 내지는 못하고 뒤로 몇 바퀴나 굴러가 벽에 처박혔다.

조노량은 다시 건들거리며 좀비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어둠 한쪽에서 새로운 좀비가 튀어나와 조노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팟!

‘좀비 따위가?’

조노량의 오첩도가 달려드는 좀비를 향해 쏘아져 갔다.

퍼석!

다리가 절단되어 나뒹굴던 좀비가 한 발로 몸을 날려 오첩도를 막아 냈다. 아니, 몸으로 받아 내었다. 좀비의 상체가 여지없이 양단되어 미끄러져 내렸다.

의외의 상황에 잠깐 당황한 사이 새로운 좀비가 달려들었지만, 오첩도가 또 한 번 공간을 갈랐다. 달려들던 좀비의 목이 매끈하게 잘려 날아갔다. 아까 놈과 달리 보통 좀비였다. 아니, 보통 여자 좀비였다. 가슴은 썩어 문드러졌지만 체형이나 굴곡만으로도 충분히 여자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 좀비의 머리에는 왕관 비슷한 것이 하나 씌워져 있었다. 머리띠와 같은 간소한 형태였는데, 세월 탓인지 먼저 찾아낸 금화처럼 시커먼 때가 한 꺼풀 입혀져 있었다.

여자 좀비의 머리가 떨어진 것을 본 기사 좀비가 울부짖음을 토해 내며 하나 남은 팔로 필사적으로 기어 조노량에게 다가왔다.

조노량은 무심한 눈빛으로 검을 잡은 좀비의 오른손을 발로 밟은 후, 정수리에 오첩도를 쑤셔 넣었다. 그제야 좀비의 움직임이 멎었다.

뒤에서 다가온 예니에프가 화를 내는 대신 이상한 표정으로 좀비들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을 때는 대단한 기사였을 거 같은데?”

여왕과 기사라?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한 좀비들이다.

예니에프가 감동한 눈빛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사이, 조노량은 무정한 표정으로 좀비의 검을 빼내 커트리안에게 건넸다.

좀비가 죽어서도 주인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기사였든, 여왕을 흠모하던 비련의 기사였든, 조노량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저 오백 년 전에 흙으로 돌아갔어야 할 마물일 따름이었다.

커트리안은 예의 미지근한 눈빛으로 분시된 좀비들을 일견한 후, 수색을 명했다.

지하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었다. 방어를 위해서였는지, 지상과 마찬가지로 강철로 만들어진 문들이었다.

조노량은 그중 하나를 택해 오첩도를 날렸다. 낡은 경첩이 떨어져 나갔다. 문을 발로 차 쓰러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귀중품을 보관하던 방이었는지 썩은 상자 더미 위로 한 무더기의 동전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 습기와 먼지로 덧씌워진 동전들이었다. 한 개를 집어 손으로 문대 보니 누런빛이 드러났다. 금화였다.

대략 열 관은 되어 보이는 동전 더미. 시청 전체를 뒤져 나온 금의 네 배가량이었다. 이곳에서의 가치는 알 수 없지만, 중원이었다면 번듯한 기와집을 짓고 평생 호의호식할 돈이다.

그 외에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양피지 증서가 썩은 먼지 더미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금화와 함께 보관한 걸로 봐서 중요 문서나 전표들일 테지만, 폴리스 자체가 사라졌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썩은 가죽 더미일 뿐이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썩은 상자 무더기를 헤집다가 작은 반지 하나를 발견해 챙겨 넣었다.

낱개로 흩어진 동전 더미는 혼자 들어 나를 재간이 없어서 커트리안에게 보고를 했다.

잠시 후 기대원들이 와서 자루에 옮겨 담아 내갔다.

다른 방에서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조노량이 발견한 금화와 반지를 제외한다면 여자 좀비가 쓰고 있던 금관 하나를 빼냈고, 기사 좀비가 들고 있던 검 하나를 챙겼을 뿐이다.

반지를 살펴본 스마르가 커트리안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마법 저항이 걸린 마법구입니다.”

비록 귓속말이었으나 귀가 밝아진 조노량에게는 또렷이 들렸다.

금화는 홀에 모인 기대원들의 짐에 조금씩 나눠 넣었다. 들것에 실었다가 한 번에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그게 더 안전했다. 물론 조노량은 하나도 맡지 않았다. 쓸데없는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비를 처리하고 수색을 하는 동안에 밤이 찾아왔다. 어쩌면 강철 문으로 막힌 시청이 그동안의 잠자리들 중 가장 안전할지도 몰랐다. 단지 주변에 성한 나무가 없어서 모닥불을 피울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실내라는 것만으로도 정말 안락한 밤이었다.

☆ ☆ ☆

다음 날, 문을 열던 제스가 화급히 도로 닫았다.

“엄, 엄청난 좀비 떼가…….”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다. 제스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내다. 한낱 좀비 몇 마리에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급히 이 층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니, 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좀비들의 모습이 보였다. 못해도 만 단위는 훌쩍 넘을 숫자다.

일반 병사들보다 우수한 신체 능력을 보여 주었던 좀비들이었다. 더구나 공포를 모르는 좀비들이다. 저 정도 숫자라면 결코 만만히 볼 일이 아니었다. 산술적으로만 따져도 기대원 각자가 수백 마리 이상을 베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난전 중 자칫 상처를 입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좀비로부터 상처를 입는다는 건 결국 그들과 같아진다는 의미였다.

쿵!

쾅쾅!

문을 여는 제스를 봤는지 좀비들이 강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 자체야 튼튼했지만 낡은 경첩이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쾅!

문이 쿵쿵 울리며 들썩였다. 썩은 몸이 무너지거나 말거나 온몸으로 들이받는 모양이었다. 속도와 힘은 비례한다. 몸놀림이 빠른 좀비들인 만큼 들이받는 힘도 장난이 아니다.

일부 기대원들이 화급히 문을 받치고 섰다. 아무래도 좀비들보다는 힘이 세서인지 문의 요동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언제까지 막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뚫고 나가든지, 제대로 문을 막아 안전을 도모하든지, 조치를 취해야 했다. 물론 결론은 정해져 있다.

“뚫어야지 별수 있겠나?”

고골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광장의 규모나 좀비들의 숫자로 봤을 때 제우스의 홀리필드로도 어림없었다. 성력이야 충전해 줄 수 있다지만, 소모된 체력은 조노량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각자 갑옷을 최대한 챙겨 입는다. 장갑도 반드시 착용하고, 노출된 목이나 얼굴은 최대한 주의하기 바란다.”

커트리안의 말에 일행은 착용 가능한 모든 장비를 착용했다. 재단 기술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벙어리장갑 형태로 만들었던 장갑까지 꺼내 끼는 기대원도 있었다. 움직임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최대한 노출을 자제해야 했다. 풍뎅이의 껍질을 넣어 만든 레더 아머는 별 걱정이 없었지만 하체와 팔뚝, 손 등은 부드러운 가죽을 이용했기에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있는 옷은 둔할 정도로 겹겹이 껴입었다.

“진형은 전진하는 창! 선두는 고골리 님! 좌측 선은 쥬시아누스, 우측 선은 노리앙! 좌측 후는 스마르! 우측 후는 예니에프! 좌측 삼 선은…….”

커트리안은 치밀하게 진의 위치를 조정했다. 가디언이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고골리에게 선두를 맡겼고, 피부가 마물의 그것처럼 단단해진 쥬시아누스가 좌측 선을 맡았다. 그리고 커트리안이 느끼기에 마물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노리앙을 우측 선에 배치했다. 그리고 스스로 우측 사 선을 맡았다.

롤의 일이 있고 나서 앞뒤 재지 않고 덤벼드는 예니에프가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최소 오 선까지는 좀비 따위에게 당할 염려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위는 밀착만 잘해 줘도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우스와 수송을 담당한 기대원의 위치까지 꼼꼼히 지정해 준 커트리안이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문이 열리자 문에 달라붙어 있던 좀비들이 몸을 날렸다. 역시 예사 좀비들은 아니다. 하지만 고골리의 거검에 나가떨어지고, 쥬시아누스의 도리깨에 순식간에 피떡이 되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들어온 좀비들을 처리한 후 전진을 시작했다.

경험 많은 전사답게 고골리는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진의 속도를 조절했다.

일행이 시청을 나서자 좀비들은 마치 메뚜기처럼 뛰어오르며 일행을 공격해 들어왔다. 하나하나로 보아선 기대원 중 누구에게도 상대가 안 되는 하급 마물들이지만, 숫자가 숫자다 보니 전진이 만만치 않았다.

기대원들은 좀비를 베어 내기보다는 강하게 쳐 내는 형태로 좀비를 상대해 갔다. 몸체를 베어 낸다 해도 살아서 움직이니 차라리 타격을 입혀 밀어내는 것이 더 유리했다. 괜히 죽은 줄 알고 밟았다간 하체를 물릴 수도 있다. 물론 쥬시아누스 같은 경우는 아예 도리께와 투핸드소드로 번갈아 쓰며 좀비를 통째로 부숴 버렸다.

조노량의 파마장도 한몫을 했다. 펑펑 터질 때마다 한 무더기의 좀비가 나가떨어졌다. 그 덕에 우측 후위는 비교적 수월하게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어 내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밀어내는 형태의 전투였기에 들어가는 힘은 배가 되었다. 더구나 메뚜기처럼 뛰어올라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좀비들을 멀리 쳐 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이 소요되었다.

롤처럼 무한 체력을 자랑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마물화된 기대원들이라 하더라도 지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진의 중앙에서 뛰고 있던 제우스가 전방을 향해 홀리필드 주문을 연달아 펼쳤다. 하지만 불과 삼십여 미터가량을 수월하게 전진했을 뿐, 이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최선을 다했지만 제우스의 힘에도 한계가 있었고, 홀리필드만으로 광장을 전부 채울 수도 없는 일이다. 헉헉대는 제우스의 숨소리가 선두까지 들려왔다.

광장을 절반가량 돌파했을 때,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르릉!

캬울

퍽퍽!

익숙한 소리! 웨어울프의 울부짖음이었다. 기대원들의 안색이 변했다. 특히 예니에프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막 좀비 둘의 머리통을 부숴 버린 커트리안이 침중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추격해 온 것인가?”

좀비만으로도 벅찬 판에 웨어울프들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다행인 점은 소리로 들어 봤을 때 웨어울프들과 좀비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다른 마물들처럼 서로 협력을 했다면 아주 난감했을 것이다.

“고골리, 좌측으로!”

커트리안의 외침에 고골리는 좌측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명령이었다. 우측에서 웨어울프들의 소리가 들려오니 좌측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최대한 웨어울프들로부터 거리를 벌리려는 의도다. 좀비와 다르게 웨어울프들은 강력한 존재들이다. 이렇게 좀비 군단에 둘러싸여서는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웨어울프들의 울부짖음은 거침없이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샤마노프는 웨어울프들이 원한이 쌓여도 단단히 쌓인 모양이라고 투덜거렸다.

전진하는 창의 속도를 더욱 높였지만 웨어울프들의 울부짖음은 점점 가까워질 뿐이었다.

“으악! 이 빌어먹을 좀비 녀석이!”

후위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좀비에게 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위험한 상황을 해결한 것인지 알 수도 없었고, 확인할 겨를도 없다. 무사하기를 바라며 전진할 따름이었다.

크앙!

우측에서 커다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과 삼십여 미터 우측, 좀비들 머리 위로 웨어울프의 거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웨어울프들이 손톱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서너 마리의 좀비들이 동시에 찢겨져 나갔다.

하급 마물인 좀비들은 웨어울프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의 좀비들도 일반 좀비들이 아닌 터라, 거침없이 웨어울프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쪽 역시 치열하긴 마찬가지 상황인 것이다. 그래도 좀비의 이빨을 두려워하지 않는 웨어울프들인지라 기대원들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좀비들을 처리하며 일행을 향해 점점 다가들고 있었다.

웨어울프들이 이대로 다가온다면 전진하는 창의 옆구리가 뚫릴 판! 후위의 안전을 도모할 수 없었다. 차라리 방향을 바꿔 선두가 웨어울프들을 정면으로 뚫는 방법이 올바른 판단이었다.

커트리안이 막 그런 명령을 내리려는 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기대와 불과 십여 미터까지 다가온 웨어울프들이 방향을 선회해 일행과 나란히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웨어울프들의 선두에 기괴한 모습의 웨어울프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지금의 외형 어디에서도 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예니에프는 롤임을 확신했다.

‘어쩌면?’

커트리안은 판단을 유보했다.

선두의 웨어울프가 괴성을 지르며 좀비들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웨어울프들의 두꺼운 털가죽도 여기저기 찢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강한 웨어울프들이라 하더라도 수에는 장사가 없는 법. 좀비 하나가 날렵하게 뛰어올라 웨어울프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화가 난 웨어울프의 손톱에 좀비의 몸통이 단박에 찢겨 나갔지만 머리만 살아서 끝까지 웨어울프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커트리안의 앞 열에서 달리던 예니에프가 다시 한 번 고함을 터트리며 웨어울프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롤! 로올!”

하지만 커트리안이 예니에프의 어깨를 짓누르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 이런 상황에 감격의 해후라도 할 생각인가?”

그 순간 쥬시아누스의 커다란 손이 예니에프의 목덜미를 잡아채 자신의 옆에 세워 버렸다. 예니에프가 소리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쥬시아누스의 억센 손이 목덜미를 놓아주지 않았다.

“예니! 제발 정신 차려!”

“알아요. 나도 알지만……. 롤이 저기 혼자 있는데?”

“그는 이미 변했다. 마문을 벗어날 수 없어. 그냥 가는 거다. 인사만 하고 그냥 가는 거야! 롤도 그걸 바랄 거다.”

대화를 하는 동안 쥬시아누스는 맨몸으로 좀비들의 이빨을 튕겨 냈다. 갑옷도 없었건만 좀비의 이빨은 변이된 쥬시아누스의 몸통을 뚫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기대원들은 그렇지 못했다.

“씨발, 물렸어!”

후위에서 다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뒤를 힐끗 바라본 쥬시아누스가 말을 이었다.

“비브리카가 당했다. 다 죽일 셈이냐? 자, 돌아가서 네 역할을 하는 거다!”

어린 비브리카가 당했다. 자신이 이러고 있는 사이에 또 한 명의 기대원이 이별을 고하게 됐다.

예니에프의 시선이 후미를 향했다.

비브리카가 진영을 벗어나 날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주의를 끌고 있는 것이다.

“으아악! 다 덤벼! 여기다! 자랑스런 세스카의 전사, 나 비브리카가 여기 있다!”

세스카? 비브리카도 롤과 같은 폴리스 출신이었던가?

비브리카는 주위에 아군이 없어서인지 마음껏 발광하고 있었다. 푸른 오오라가 맺힌 글라디우스가 전후좌우로 미친 듯이 휘돌았다. 좀비들의 몸이 조각조각 나눠져 비산했다.

하지만 좀비의 이빨이 팔뚝에 틀어박히고, 다리를 물어뜯고, 목덜미에 꽂혔다. 억지로 뜯어낼 때마다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떼어 내는 숫자보다 달라붙는 숫자가 더 많다. 그 무게로 인해 비브리카의 움직임이 현격히 둔화되었다. 오래지 않아 비브리카의 작은 몸체가 좀비들 틈에 묻혔다. 몸통이 가려진 채 그의 검만이 하늘로 솟아 끄덕거리다가 종내 툭 떨어졌다.

예니에프의 심장이 가쁘게 펄떡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부근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 기운이 온몸을 불태울 듯 치달았다. 발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운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폭발적 기운이 예니에프의 검으로 모여들었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기운을 가까스로 자제하며 자신의 자리로 찾아 들어갔다. 예니에프의 검이 미친 듯이 휘돌기 시작했다. 오오라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오오라가 답답한 검을 벗어나 자유를 찾았다. 잠시 허공을 맴돌던 오오라가 좀비들에게 날아들었다.

힘을 주체하지 못한 오오라가 거세게 달려 나가 마음껏 허공을 휘돌며 좀비를 분시했다. 종국엔 불속에 던져진 화약처럼 터져 나가며 산화했다. 그 폭발에 휘말린 좀비들의 육체가 산산이 해체되었다. 다시 제 이, 제 삼의 오오라가 예니에프의 검을 벗어나 날뛰었다.

그 위력에 조노량마저 오첩도를 멈춰 세웠다. 아니,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예니에프의 오오라가 닿는 공간 전부가 비어 버렸기 때문이다. 고골리조차 고개를 돌려 놀란 눈빛을 보내 왔다.

조노량은 그의 경지가 한 단계 더 나아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일행은 전진이 한결 수월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니에프의 오오라도 상대를 잃고 더 이상 발산되지 않았다.

좀비들은 일행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삼십 마리가 넘는 웨어울프들이 일행을 감싸듯 꺾쇠 모양을 이루며 길을 열고 있었다. 마치 전진하는 창을 연상시키는 대형이었다.

일부 후위로 달려드는 좀비들이 보였지만,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곰인지 늑대인지 모를 정도의 거체를 가진 웨어울프들이었지만, 좀비들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런 공포심도 없이 상급의 마물들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육식동물처럼 뾰족하게 변해 버린 좀비의 이빨이 질긴 웨어울프의 가죽에 틀어박혔고, 날카로운 손톱이 웨어울프의 가죽을 찢었다.

크엉!

웨어울프 하나가 결국 바닥에 몸을 뉘였다. 쓰러진 웨어울프 위로 좀비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었다. 가죽이 찢기고 내장 조각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 그럼에도 다른 웨어울프들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우두머리의 뜻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이는 늑대류다운 행동이었다. 웨어울프의 처절한 울부짖음 소리를 뒤로 하고 기대원들도 계속 나아갔다.

또 다른 웨어울프가 비명을 토해 놓았다. 전진은 계속되었다. 광장을 벗어나고 가도를 뚫었다. 반쯤 무너진 담을 뛰어넘고, 석조 건물의 지붕을 달렸다. 성문이 보이고 더 이상 일행의 앞을 가로막는 좀비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만의 좀비들이 날듯이 일행의 뒤를 쫓고 있었다.

뻥 뚫린 성문을 지나 해자를 뛰어넘어 들판을 달렸다. 좀비들도 성문을 지나 해자를 뛰어넘었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십여 마리의 웨어울프들과 롤이 거친 포효를 내지르고 반전했다.

거꾸로 일행을 지나쳐 수만의 좀비 무리들에게 달려들었다. 롤의 몸이 일행을 스칠 때 롤의 붉은 눈동자가 기대원들을 하나하나 스치며 지나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광전사 롤의 붉은 눈, 그 빛이 예니에프의 눈에 가득 박혔다.

“롤…….”

예니에프는 앞만 보고 힘껏 내달렸다. 자꾸 멈칫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다잡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뒤쪽에서 좀비들의 으르렁거림과 함께 웨어울프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들판을 가로질러 산허리를 타 넘었다. 절대 들릴 리가 없는데, 여전히 예니에프와 기대원들의 귓가에 웨어울프들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더욱 멈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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