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다시 만난 오크
기력을 조금 회복하자 건량을 씹으며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사방이 틔어 있는 개활지, 쉴 만한 장소가 아니다. 속도를 늦추지도 못하고 닷새를 달리고서야 징글징글한 벌판을 벗어나 야트막한 구릉지를 만났다. 그 사이에도 쉼 없이 전투를 치러야 했다.
지난 루트가 플라누라 평원에서 가장 좁은 지역이라니, 그 규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일행은 꼬박 하루를 쉬어야 했다. 고골리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움직일 만한 기력이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마물스러운 체력을 지닌 기대원들도 견디기 힘든 일정이었다.
잠깐잠깐 쉬었을 뿐, 제대로 운기조식조차 못 한 조노량도 기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작 휴식을 취하게 되자 운기조식이고 뭐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제우스의 치료로 브리오티스처럼 신체 일부를 잃은 자들도 생명을 건질 수 있었지만 잃어버린 신체가 복구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아물었을 뿐이다.
“주워 오셨으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요.”
제우스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켈켈, 뭐라도 돋아나겠지요. 신경 쓰지 마세요.”
브리오티스가 걸쭉한 웃음을 흘린다.
떨어진 신체를 살려? 뭐가 돋아나? 아,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대화란 말인가. 조노량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다행히 그 후 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대부분의 마물들이 벌판으로 몰렸던 탓인지 군대라 불릴 정도의 마물들과 조우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니면 기대원들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순조로운 일정이 마감된 건 벌판을 지난 지 보름쯤 흘렀을 때였다.
골이 깊은 계곡 사이에서 적당한 동굴을 발견하고 쾌재를 부르며 잠이 든 지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불침번을 서던 뮤트가 일행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이미 몇몇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 있었다. 마물들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와 낮은 으르렁거림이 동굴 안쪽까지 전달되어 왔기 때문이다.
소리로 판단했을 때 적어도 수백은 되는 무리였다. 아직까지 발각되지는 않았지만 시간문제였다.
비교적 깊지 않은 동굴이었고, 마물의 이동 경로 한복판이다. 귀찮게 되었다.
서둘러 모포를 챙기고 등짐을 짊어졌을 때, 촉수 마물 한 마리가 동굴에 들어섰다. 바로 한 굽이만 돌면 일행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 요행을 기대했지만 요행은 없었다.
장기간 씻지 않은 인간의 냄새, 동굴이라는 한정된 공간. 마물의 예민한 후각을 피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마물의 포효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예니에프의 브로드소드가 마물의 목을 끊어 놓았다. 깔끔하게 베어졌지만 늦었음을 알았다. 마물들의 기척 소리가 동굴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반 마물들은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으나, 지난번 보았던 흐림두르스라는 백발 거인이나 데스나이트 등은 껄끄럽다.
고골리가 투핸드소드를 어깨에 들쳐 메며 일어섰다. 고골리를 필두로 무기를 챙겨 든 일행이 동굴을 나섰다.
“껄껄, 어디 어떤 놈들이 몰려왔나 살펴볼까?”
고골리의 입가에 어린 마물스러운 미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촉수가 날아왔다. 고골리의 우측에 자리를 잡았던 쥬시아누스가 그 촉수를 잡아채 당기자, 덩치가 삼 미터에 달하는 갑각류 마물 하나가 쑥 딸려 들어왔다. 그리고 고골리의 왼손 망치에 대가리가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일행 중 가장 약한 자도 기형 마물 한두 마리 정도는 우습게 상대한다. 게다가 고골리는 일백의 마물도 두려워하지 않는 괴물이었다.
소음을 듣고 산발적으로 달려들던 마물들이 순서대로 피떡이 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월한 전투를 치르며 계곡을 벗어났을 즈음에 일행을 긴장시키는 장면을 목도하게 되었다.
계곡 앞에 펼쳐진 너른 벌판, 그 위를 가득 채운 수천의 마물들! 플라누라 평원에서의 지독했던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하지만 곧 그때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받았다. 차분히 살펴보았다.
한눈에 봐도 두 진영 간의 대치 상황이다.
일행의 바로 앞에는 이백여 마리의 기형 마물들과 마인들 그리고 불꽃을 전신에 두르고 있는 거인이 한 마리 보였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족히 천 마리는 넘어 보이는 회색 오크 부대가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규모는 만만치 않았으나 두려워할 만한 상대는 많지 않았다.
배후에 나타난 일행을 발견한 마물들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마인들의 통제하에 있었기에 함부로 일행을 향해 달려들지는 않았다. 앞뒤로 적을 맞은 마물들이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다.
고골리를 발견한 마인들도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두 명의 마인들이 뒤로 돌아 고골리를 살피고 일행의 뒤를 둘러보았다.
“허, 건방진 자식들! 주인을 찾는 것이냐? 이 고골리는 우습게 보인단 말이지?”
조노량은 고골리의 말에서 마인들이 그와 주운을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고골리만 있는 것을 확인한 마인들이 끼끼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자 불꽃 거인이 반전했다. 일부 마인들과 절반의 마물들은 여전히 오크 부대를 경계하고 있었다.
“무스펠인가? 거인족들이 총출동이라도 한 모양이군.”
고골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번 백발 거인의 위용을 본 터라 일행들도 등짐을 풀어 내리고 무기를 고쳐 잡았다. 플라누라 평원에서 워해머를 들고 데스나이트 한 마리를 끝도 없이 내리쳐 짜부라뜨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실로 기괴하기까지 했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긴장감이 일었다. 게다가 지금 보이는 거인은 온몸에 불꽃을 두르기까지 했다.
그런 불꽃 거인과 마인들이 포함된 마물의 군대, 혼전이 벌어진다면 피해를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상대해 보지 못했던 불꽃 거인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난감한 점은 대규모 오크 부대가 혼전에 난입하는 상황이다. 어쩌면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할지도 몰랐다.
주변의 시야를 완벽히 차단할 수 있던 동굴을 발견하고 너무 방심했던 것이 문제였다. 미리 대비를 했었다면 피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쉬움이 일었지만 이미 완전히 노출된 상황, 이제는 교전을 피할 길이 없다.
후룽!
마인 한 마리가 일행을 향해 불덩이를 던지는 것을 시발점으로 고골리가 튕기듯 뛰쳐나갔다. 그 뒤를 이어 쥬시아누스와 예니에프가 달려 나갔고, 제우스의 보호를 담당한 하이오지와 세 명의 기대원을 제외한 전 기대원들이 마물들을 맞아 달려들었다.
조노량 역시 어쩔 수 없이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제일 먼저 몸을 날린 고골리가 무스펠이라는 불꽃 거인을 향해 쇄도했다. 삼 미터에 이르는 고골리도 거인에 비하면 아이처럼 작아 보였다. 하지만 고골리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불꽃 거인을 공격해 들어갔다.
고골리의 투핸드소드가 불꽃 거인의 허리를 향해 날고, 망치 손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거인 역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몸놀림으로 날아드는 투핸드소드를 걷어 내고 팔뚝을 휘둘렀다. 웬만한 통나무보다 굵은 거인의 팔뚝과 고골리의 망치 손이 격돌했다. 고골리의 망치 손으로 불길이 번졌다가 사그라졌다.
거인과 맞닿을 때마다 매번 고골리의 몸에 화르륵 불길이 옮겨 붙었지만 고골리의 신체는 가디언으로서 마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피시식 꺼져 버렸다. 하지만 얼마나 강한 불길인지 거인의 발길이 스쳐 지나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풀과 나무가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백중의 싸움, 놀랍게도 고골리는 불꽃 거인을 맞이해서도 전혀 밀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마인들은 물론 수백의 마물들을 혼자서 때려죽이고도 힘이 남아돌던 고골리다. 선두에 서서 데스나이트를 비롯한 수많은 괴물들을 뚫고 끝끝내 플라누라 평원을 빠져나온 고골리다. 어쩌면 그런 고골리를 혼자서 상대하는 불꽃 거인이 더 대단한 것일지도 몰랐다.
고골리가 혼자서 불꽃 거인을 상대해 주고 있는 사이, 조노량 등은 마인들을 찾아 싸웠다. 커트리안 역시 마인 하나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결코 밀리는 기색이 아니다. 예니에프처럼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는가 하면, 쥬시아누스처럼 묵직한 검격을 날리기도 했다. 워낙 대단한 괴물들만 접하다 보니 특별히 부각되지 않았다 뿐이지 그의 실력도 결코 쥬시아누스나 예니에프의 아래가 아니었다.
전반적인 상황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조노량은 주변 전투 상황을 빠르게 훑은 후 자신의 싸움에 집중했다.
마인 하나가 빠르게 다가온다. 양손에 두 개의 검을 나눠 쥐고 있는 모습이다. 멀리서 불덩이를 던지는 마인과 달리 근접 전투에 특화된 마인으로 보였다. 조노량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검술은 물론 박투를 포함한 근접전은 조노량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불과 서너 번의 칼질이 오고갔다. 제법 현란하고 날카로운 검을 가졌지만 예니에프에 비해서도 손색이 있다.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오첩도가 마인의 가슴을 갈랐다. 조노량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가장 빨리 마인을 잡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발로 벌어진 가슴을 누르고 목덜미에 오첩도를 밀어 넣는 것으로 마인을 마무리했다. 신발에 묻은 질펀한 초록색 피를 마인의 하복부에 슬쩍 문질러 닦았다.
잠시 여유를 찾은 조노량의 눈이 다시 전장을 훑었다.
마인을 상대하고 있는 예니에프나 쥬시아누스는 물론 일반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는 기대원들에게서도 여유가 느껴졌다. 그동안의 전투로 제법 노련해진 모습이다.
샤마노프가 세 마리의 마물에 둘러싸여 제법 애를 먹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체될 뿐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하이오지는 특유의 얍삽한 행동거지와 방어적인 재능 탓에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 처해서도 본질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며 조노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기에 물들어서도 자신의 성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칭찬을 해야 할지,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이기적인 모습에 대해 비난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순간 조노량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일행과 마물들의 혼전이 발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크 부대가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축을 울리는 함성이 건너편까지 전해져 왔다.
지난 이 년간 수없이 접해 본 오크다. 흉성으로 따지자면 마물들 못지않았다. 아니, 이성이 없는 마물들보다 오크들이 더 위험했다. 개별 전투력은 기형 마물들보다도 떨어졌지만 나름 지능이 있는 놈들이다. 협동을 할 줄 알았고, 작전도 펼 줄 알았다. 게다가 두셋만 모여도 힘으로 마물들을 때려잡을 정도로 억센 놈들이었다.
먹어도 탈이 없었고 맛도 나쁘지 않았기에 많이도 잡아먹었던 놈들이지만, 수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면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아직은 마물들에 가로막혀서 따로따로 전투를 치르고 있었지만 결국 일행과 조우할 수밖에 없는 상황. 무려 천 마리가 넘는 놈들이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다.
저들과의 전투를 대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불꽃 거인을 잡아야 했다.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달려드는 마물들을 슬쩍슬쩍 흘려 가며 고골리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불꽃 거인의 뒤로 다가들어 갔다. 일부러 마물들을 베지 않고 피했다. 기세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다. 자연스럽게 불꽃 거인의 뒤, 일 장 이내로 진입했다. 이것이 난전의 묘미다.
그런데 저런 불덩이에게 과연 검기가 통할까?
모르겠다. 부닥쳐 보면 알겠지!
진기를 잔뜩 집중해 도에 담았다.
이글거리는 검기를 담은 오첩도가 불꽃 거인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오첩도가 붉게 발광하며 불꽃 거인의 허리를 두 자가량 베고 지나갔다.
투두툭! 후루룩!
한 자나 뽑아 올린 검기를 감안한다면 거인의 덩치에 비해서도 작지 않은 상처. 오첩도를 받은 자리의 불꽃이 순간적으로 소멸하며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검기와 닿은 어떤 기운이 반응한 느낌이다.
그르르렁!
고골리의 투핸드소드를 받아 내고도 멀쩡했던 불꽃 거인이 이번 상처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불꽃 거인이 고통에 몸을 떨며 조노량을 향해 돌아섰다.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무척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막상 불꽃 거인의 일그러진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자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삼류 시절에도 실력에서는 밀려도 기세에서는 밀리지 말자던 조노량이다.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얼어붙을 조노량이 아니었다. 거인을 상대로는 아직까지 증명되지 않은 실력. 하지만 조노량은 이를 악물어 가며 오첩도에 힘을 실었다.
분노한 불꽃 거인의 주먹이 조노량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 ☆ ☆
미끄러지듯 몸을 흘리며 진기를 가득 담은 오첩도를 비스듬히 세워 들었다. 타격을 흘리기 위한 동작. 완전히 피하지 못할 때를 대비함이다.
거인의 주먹은 조노량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지 못했다. 타격을 받지 않으니 흘릴 필요도 없다. 후웅 소리와 함께 불꽃이 조노량의 옆머리를 스쳐 갈 때, 세워 들었던 오첩도가 원을 그렸다. 거인의 팔뚝이 다시 한 자가량 베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절단되었을 깊이였지만 뼈에조차 닿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투두둑 소리와 함께 거인의 팔뚝에서 기포가 터지듯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확실히 느꼈다. 거인의 몸 내부에 흐르는 특정 기운이 조노량의 기에 반응해 거세게 요동쳤다.
거인이 다시 한 번 고통에 겨운 비명 소리를 토해 놓았다. 덩치에 비해 엄살이 심한 놈이다. 쥬시아누스나 롤이었다면 팔이 떨어져 나간다 해도 신음 한 마디 토해 놓지 않았을 것이다.
방금까지 치열하게 싸우던 상대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돌아선 불꽃 거인을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고골리가 투핸드소드를 고쳐 쥐고 도약했다. 그리고 그 무식한 힘에 체중까지 실어 거인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인간과 격이 다른 힘이 불꽃 거인의 정수리를 파고들었다. 상대를 방치하고 돌아선 대가였다.
웬만하면 몸 전체가 양단이 되고도 남았을 위력이었지만 투핸드소드는 거인의 머리를 가르고 목 언저리에서 멈췄다. 갈라진 머리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양쪽으로 쩍 벌어졌다. 붉고 허연 체액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며 오 미터가 넘는 거체가 앞으로 기울어 넘어졌다.
쿵!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거인의 불꽃이 사그라졌다. 고골리는 거인의 등을 밟고 투핸드소드를 비틀어 뽑아내며 말했다.
“제법이군!”
조노량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골리를 바라보았다.
늘 전사의 자존심을 입에 달고 살던 자가 뒤에서 기습을 하다니? 게다가 칭찬까지?
역시 현실적인 자들이다.
불꽃 거인이 무너져 내리자 마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물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쥬시아누스의 도리깨에 마인 하나가 납작해졌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마인이 전장에서 몸을 빼기 시작했다. 고골리가 어흥 하는 기성을 토해 내며 따라붙었지만, 상대적으로 몸이 작고 빠른 마인은 피아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틈과 틈 사이를 교묘히 빠져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전장을 조망하고 있던 조노량이 마인이 빠지고 있는 방향으로 먼저 접근해 갔다. 오직 고골리의 추적을 피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던 마인은 조노량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려 했지만 덩치 큰 장애물들 탓에 거리를 충분히 좁히지 못했다.
마인은 조노량과 십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좌측으로 빠지고 있었다. 놓쳐도 그만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암경을 발출하고 말았다.
푸웅!
소리 없이 발출된 암경이 십 미터를 격하고 마인의 등에 적중했다.
가벼운 격타음과 함께 마인이 풀썩 고꾸라졌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마물의 두개골도 안으로부터 조각내는 암경이다. 방어력 면에서는 오히려 마물보다 못한 마인이 감당해 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급히 뒤를 쫓던 고골리의 투핸드소드가 마인의 목을 끊어 냈다. 안 그래도 이미 절명했을 마인이지만 겉으로는 거의 표시가 나지 않는 암경이었기에 고골리가 손을 쓴 것이다.
하지만 조노량이 뭔가를 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한 고골리가 조노량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흉측한 미소를 보내 왔다.
“역시 제법인데?”
오늘만 두 번째 칭찬이다. 덩치와 다르게 칭찬에 인색한 자는 아니었나 보다.
남아 있던 몇몇 마인들이 서둘러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보았던 바지만 세가 불리하면 도주를 주저하지 않는 놈들이다. 이놈들도 현실적이긴 매한가지다.
마인들이 사라진 마당에 남아 있는 마물 몇 마리 정도는 순식간에 정리될 상황, 곧 오크 부대와의 조우가 코앞이었다. 일행들 덕에 오크 부대도 그쪽 마물들을 대부분 처리한 상태였다. 만약 불꽃 거인들과 마인들이 오크 부대를 상대했다면 그들로서도 쉽지 않은 싸움이었을 것이다.
“후퇴! 전열을 정비한다.”
커트리안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몇 마리의 마물들을 남겨 두고 기대원들이 일사분란하게 뒤로 빠졌다. 몇몇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던 기대원들도 스마르가 위협하자 뒤로 물러나 왔다.
일행이 빠지자 마물들이 저 죽을 줄도 모르고 달려들었지만, 금방 정리되었다. 목숨을 잃은 자는 없었지만 여럿이 부상을 입었다. 혼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반대편 전장도 거의 정리되는 모습이 보였다. 그쪽에 남아 있던 마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죽었거나 도주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잠시 후 여전히 건재한 오크 부대와 일행이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크들은 아직까지 전투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콧김을 내뿜으며 일행을 포위했다.
일행이 나타남으로 인해 오크 부대는 큰 득을 보았다. 하지만 흉포한 오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는 상황.
그런 오크 부대를 가르며 검은색 오크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섰다.
조노량보다도 작은 키였지만, 옆으로는 쥬시아누스에 필적할 만큼 퍼진 근육질의 오크.
그 순간 고골리의 눈빛이 반짝였다.
“친한 오크?”
순간 조노량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고골리가 말하는 순간 떠오르는 장면. 차츠라, 샤마노프와 함께 본대를 찾아 헤매던 시절, 마물들을 자신들에게 떠넘기고 손을 흔들며 떠나갔던 검은색 오크가 떠올랐다.
그리고 고골리를 따라 본대를 찾아가다 만난 엄청난 수의 오크 무리. 그리고 손을 흔들며 조노량을 보내 주었던 검은색 오크!
그때 고골리가 했던 말이 바로 ‘혹시 친한 오크인가?’였다.
검은 오크가 한두 마리도 아니고 생김새도 거기서 거기인데, 용케 오크의 얼굴을 알아보는 고골리의 눈썰미가 신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오크가 일행을 향해 접근하더니 조노량을 보고 손을 흔드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조노량의 눈에 샤마노프가 마주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어벙벙한 표정이다.
나 참, 친구냐? 조노량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샤마노프를 바라보았다.
결과적으로 오크 부대와 일행은 전투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검은 오크가 다른 오크들을 향해 괴상한 소리를 내자 오크들이 흉성(凶性)을 거둔 것이다.
그 후 두 진영은 묘한 상황을 연출했다. 어쨌든 전장을 벗어나야 했기에 먹을 수 있는 마물들의 살을 적당히 발라낸 후 남쪽을 향해 방향을 잡고 행군을 시작했다. 그런데 오크들도 마물의 시체를 통째로 둘러메고 뒤를 따른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우연히 방향이 같은 것인지, 일행을 따라오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동행 비슷하게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도 고골리는 피식하고 웃을 뿐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원래 오크는 강한 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또 은원(恩怨)이 확실하다. 이곳의 오크도 크게 다르지 않구먼.”
그렇지만 일행들로서는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가능하면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오크들은 일행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접근했다.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물러섰지만 오크들은 무슨 괴상한 걸음걸이냐는 듯 콧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어쩔 수 없이 함께 행군을 하다가 적당한 숲이 나타나자 일행이 먼저 행군을 멈췄다. 격렬한 전투를 치렀으니 쉬기도 해야 했고, 시장기도 달래야 했다.
오크들이 지나쳐 가길 바랐지만, 그들도 함께 행군을 멈췄다. 그렇다고 다시 행군을 시작하기도 뭐했기에 어쩔 수 없이 불을 피우고 마물의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오르자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조노량은 크지 않은 육편 하나를 꼬치에 꿰어 불가에 기대 놓고 휴식을 취했다. 흉포한 오크 무리가 곁에 있었기에 운기조식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때 검은 오크가 조노량에게 접근해 왔다. 슬쩍 경계를 했지만 오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몇 마디 지껄이더니 불이 잘 붙은 통나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조노량을 향해 씩 웃어 보인 후 뒤돌아서 손을 흔들며 자기들 무리로 돌아갔다.
너무 어이없는 상황이라 조노량은 멍청히 검은 오크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오크 진영에서도 곳곳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는데,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물을 통째로 불 위에 던져 놓고 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가 더 가관이었다. 불에 올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방 꺼내서 찢어 먹는 것이 아닌가. 저 정도라면 불에 직접 닿은 부분은 시꺼멓게 탔을 터였고, 속은 전혀 익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해체하자마자 시뻘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마물들이라 생각했던 오크가 불을 피워 고기를 굽는 모습에서는 신기함을 느꼈고, 요령 없이 대충만 그슬려서 먹는 모습에서는 ‘역시나’라는 생각을 했다.
배를 채우고 바로 출발하려 했으나 고골리가 커트리안을 향해 휴식을 취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정도 오크 무리라면 마물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거다. 한숨 자고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동굴에 나타난 마물들 덕분에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도 못했고, 제우스의 치료로 상처는 회복되었지만 체력적인 부담을 안고 있는 자들도 여럿이다. 커트리안도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본대 중앙에 하나, 사방에 한 명씩 다섯 명을 불침번으로 세웠다.
지시를 마친 커트리안은 태평하게 마물의 모피를 깔았다. 조노량으로서는 가장 껄끄러운 잠자리였다. 모닥불이 있다고는 하나 검은 이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일행들처럼 추위에 강해진 것도 아니었기에 이런 잠자리는 질색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조노량은 최대한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망토를 풀어 머리끝까지 둘러썼다.
다음 날도 전날 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천여 마리의 오크들이 난잡하게 행군을 했고, 일행들도 오크 부대에 둘러싸여 대열을 유지하며 행군을 했다. 오크들을 경계했지만 마물들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오히려 편안한 여정이었다. 차츠라 역시 척후에 나서지 않고 일행들과 함께 여유 있게 걸었다. 오후가 되자 조노량을 제외한 일행들은 오크들에 대한 경계심을 거의 풀어 버렸다. 마치 일행 전체가 마물의 부대가 돼 버린 모양새였다.
중간에 적대적인 마물들과 조우하면 오크들이 떼거리로 몰려가서 순식간에 때려잡아 왔다. 반대로 같은 진영의 마물들을 만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갔다. 트롤이나 오우거조차 대규모 오크들의 무리를 꺼리는 듯 알아서 피해 갔다. 편하기는 했지만 정말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그보다 더 어이없는 상황은 저녁 때 일어났다.
오크들이 잡아 온 마물 중 하나를 일행을 향해 툭 던져 준 것이다. 먹이를 나눠 준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조노량이 그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는 사이에 기대원들이 웬 떡이냐는 듯 달려들어 마물을 해체해 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조노량은 일부 기대원들이 오크들과 함께 기형 마물을 사냥하는 황당한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연수가 아주 자연스럽다. 죽이 착착 맞는다.
그렇게 여섯 날을 오크 무리와 함께한 후, 큰 산이 마주 보이는 지점에서 오크 무리가 갈라져 나갔다. 거기서 오크 무리는 방향을 틀어 남서쪽을 향했고, 일행은 그대로 산을 향해 전진해 갔다.
이번에는 대부분의 오크가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샤마노프가 다시 맹한 표정으로 마주 손을 흔들자 일부 기대원들도 따라서 손을 흔들어댔다. 조노량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돌려 먼저 걸어가 버렸다. 끝까지 손을 흔들어 주고 나서야 조노량을 따라잡은 샤마노프가 조노량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앞으로 오크는 먹지 말아야겠습니다, 노리앙.”
앞서 걷던 고골리도 한마디 던져 왔다.
“부족마다 달라. 다른 부족은 먹어도 된다. 어쨌든 맛도 있고, 쓸모도 있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