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60화 (60/142)

60. 플라누라 평원

고골리의 위용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대부분의 마물들은 이 선 이상 내려가지도 못했다. 팔 할 이상이 고골리와 쥬시아누스, 조노량의 선에서 절명해 버렸다. 나머지 이 할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넘겨졌기에 삼 선을 맡은 자들에게선 여유마저 느껴졌다.

곳곳에서 마물들이 몰려들었지만 이전에 상대했던 것보다 특별히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진하는 창’ 자체가 상당한 돌파력을 지닌 진형인 데다가 고골리에게서 절반이 죽어 나가니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대략 두세 시간이 흐르고 모두가 조금씩 지쳐 갈 때쯤, 마물들의 실질적인 개체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서너 마리씩 뭉쳐 있던 기형 마물들이 일행을 발견하고도 달려들기는커녕 거체를 쿵쿵거리며 앞쪽으로만 달려간다. 곧 그나마도 모습을 감춘다.

고골리가 손을 들어 진영을 멈춰 세웠다.

“이상하군. 저기 저놈들을 보게. 분명 우리를 봤을 텐데도 앞쪽으로만 달려가는군.”

고골리의 손가락이 멀리 앞쪽을 가리켰다. 일행의 전방에 위치했던 마물들은 이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일행의 뒤쪽에서 전방을 향해 달려가던 마물들이 일행을 발견하고 간간이 달려들 따름이다.

“마인들의 호출이 아니면 저럴 리가 없는데……. 전쟁일까요?”

예니에프가 뒤쪽에서 달려드는 마물 하나를 가로로 갈라 버린 후 물었다.

“그렇게 보이는군. 이 틈에 잠시 숨을 돌리고 출발하지.”

고골리의 제안에 커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여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두어 시간을 넘게 달려왔다. 체력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커트리안의 지시에 따라 원진을 형성하고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사방이 틔어 있는 벌판 한가운데다. 저 멀리 마물들이 뛰는 모습이 건너다보인다. 설마 이런 곳에서 휴식을 취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마물들을 기대원들이 번갈아 나가 처리하는 사이, 조노량은 본진의 중앙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내공이나 체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앞으로 얼마나 더 싸워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미리미리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기대원들도 번갈아 가며 휴식을 취했다.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잠시간의 휴식 후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마물들의 이상 행동 덕분에 충분한 휴식을 취했지만 조노량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물들 간에 전쟁을 벌인다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하필 일행이 향해야 하는 전방인 것이 문제다. 그렇다고 무작정 방향을 트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전장의 위치나 규모도 확인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봐야 그게 올바른 선택이라는 보장도 없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돌아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기대는 전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점까지 그대로 전진했다.

결국 우려하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빛 먼지가 뽀얗게 피어오르는 전방,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일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좌우로 시선을 돌려보았으나 시야가 닿는 지평선 끝까지 자욱한 먼지로 뒤덮여 있다. 방향을 틀었다면 시간만 낭비할 뻔했다.

너른 플라누라 평원을 가득 메우고 벌어지는 일대 격전! 마물들의 수는 수천, 수만을 헤아렸다. 아니, 어쩌면 수십만 단위를 넘길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봐 왔던 전투와는 규모가 달랐다.

“이런 빌어먹을! 저게 다 뭐야?”

하이오지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형 마물들의 거체가 콩알만 하게 보일 정도로 멀었지만, 바글바글 움직이는 모습 정도는 구별이 가능했다. 좀 더 다가가자 마물들의 모습이 더욱 뚜렷이 구별되었다.

기형 마물과 마인, 트롤과 오크 그리고 고블린이나 오우거 등 익숙한 마물들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마물들도 다수 눈에 띄었다.

“서리 거인 흐림두르스가 보이는 걸로 보아 우코르바흐의 권속들이 참여했군.”

고골리가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고골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기형 마물들보다도 큰 덩치를 자랑하는 백발 거인이 날뛰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거인들이 전장 곳곳에 점처럼 박혀 있었다.

“저, 저것들은 듀라한과 데스나이트 같습니다.”

예니에프가 입을 떡 벌리고 놀란 목소리를 냈다.

대표적인 언데드 마물인 듀라한과 데스나이트가 전장 곳곳에서 기형 마물들과 마인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어둠의 기사들. 이미 익숙해진 기형 마물들이나 몬스터와는 차별화된 공포가 밀려들었다. 그야말로 유령이 아닌가?

“마계 원정대의 기사들이로군.”

쥬시아누스가 나지막이 침음성을 흘렸다.

오백 년 전 마계 정벌을 떠났던 최강의 기사들, 전 대륙에서 고르고 골라 뽑은 정예가 그들이었다. 용맹하고 출중했던 그들이 어둠의 기사가 되어 일행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전해져 오는 기운만으로도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투구 틈, 갑옷 틈 사이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암흑 투기와 낙인처럼 찍혀 백열하는 신의 상징들!

그들은 살아생전 최강을 다투던 기사들답게 거인들을 상대로도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대부분의 기대원들이 두려움에 휩싸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커트리안은 냉정하게 전장을 관조했다.

“전장이 너무 두껍군. 좌측이 그나마 얇은가?”

공포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이하기까지 하다. 마물의 군대가 아니라 인간의 군대를 맞이한 지휘관이 전장을 분석하고 작전을 구상하는 모습이다.

늘 미지근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커트리안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거나 감정적이 되는 법이 없다. 내심이 어떻든지 간에 겉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없었다.

싸움에 임해 어지간하면 기세에서 눌리지 않는 조노량조차 인외의 존재를 만나자 절로 긴장감이 이는데, 커트리안에게서는 일말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늘 차분했고,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대처했다. 그렇기에 기대원들은 어려운 상황을 맞을 때마다 그에게 기댔고, 그에게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타고난 성정이 믿음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유심히 전장을 살피던 커트리안의 지시가 떨어졌다.

“전장과 평행을 유지하며 좌측으로 돌아간다.”

일행은 커트리안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행을 발견한 후미의 마인들과 마물들이 반전하여 달려들기 시작했다. 기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지만 따라붙는 마인들의 속도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마물들보다 몸이 빠른 마인들이 먼저 따라붙었다. 엇차하는 사이에 마인들과의 접전이 시작되었다. 대기 중이던 스마르와 예니에프 그리고 커트리안이 후미로 처져 마인들을 맞이해 갔다.

하지만 멈춰 서서 전투를 벌일 수는 없는 일. 그랬다가는 따라붙는 모든 마물들을 상대해야 한다. 후미의 전투가 격화되고 있음에도 주 전력인 고골리나 노리앙 등은 뒤로 빠지지 못했다. 평행을 이룬 전장에서도 일행을 발견한 일부 마물들이 반전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진하는 창의 우측면이 주요 방어선이 되었다.

“이 선으로부터 우측면 교차 침투!”

후위에 처져 있던 커트리안의 외침 소리가 들리자마자 좌측 이 선인 쥬시아누스로부터 일 열씩 건너뛰며 좌측 선들이 우측으로 끼어들었다. 쥬시아누스가 조노량의 후위로 끼어들고, 차츠라가 샤마노프의 뒤로 들어섰다. 브레우스가 그랬고, 뮤트가 그랬다. 그런 식으로 우측 벽이 단단해졌고 좌측면이 약화되었다. 전투력이 강한 선두와 후미는 여유가 있었지만 약한 전력으로 비슷한 수준의 마물을 막아 내야 하는 중간 부분이 위태해졌다. 그로 인해 전체적인 속도도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우스가 날아올랐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플라잉?”

앞쪽에서 날아오른 제우스를 보며 크리들이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 모습에 조노량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날개가 없는 인간이 어떻게 하늘을 난단 말인가?

경공? 절대 아니다. 높이 뛰는 것과 나는 것은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단박에 구분할 수 있다. 제우스는 그야말로 허공에 둥둥 떠서 날고 있었다. 그것도 기대와 속도를 맞춰 가면서 날고 있는 것이다.

조노량이 놀라거나 말거나 제우스는 행동으로 비행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늘로 솟구쳐 오른 제우스의 손에서 작열하는 백색의 구체가 형성되더니, 우측면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연속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색의 구체는 땅과 충돌하며 터져 나갔는데, 터졌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홀리필드와 마찬가지로 꺼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심지어는 터져 나간 파편들까지 빛을 잃지 않고 타올랐다. 그 백색의 구체에 직격당한 마물들은 물론 파편에 닿은 마인들까지 즉시 몸을 뒤틀며 죽어 갔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제우스의 활약에 힘입어 우측면에 가해지던 압박이 해소되었다. 당연히 기대의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기대가 전진해야 하는 라인을 따라 미리 일직선으로 백색의 구체가 떨어져 내렸다.

후미를 문 마물들이 끈질기게 쫓아 왔지만 견제는 확실하다. 소멸되지 않고 이글거리는 소형 홀리필드가 마물들의 추격을 방해했다.

잠시 후 제우스가 조노량 곁으로 내려앉았다. 형편없이 지쳐 있다. 하이오지가 급히 비틀거리는 제우스를 낚아채듯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조노량이 뒤로 처지며 제우스의 몸에 손을 가져갔다. 정해진 규칙처럼 자연스럽다. 곧 한숨을 돌린 제우스가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다. 부담스러운 눈빛이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앞쪽에서도 마인이 달려든다. 하지만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선두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골리의 망치 손 한 방에 저만치 튕겨져 날아간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는지도 몰랐다. 경공을 발휘하고 있었음에도 살짝 숨이 차오른다. 피어오르는 먼지는 한없이 이어져 있다. 전장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돌아가 봐야 의미가 없다. 솟아오르는 먼지의 높이로 보았을 때 그나마 이곳이 성겨 보인다.

조노량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커트리안의 명이 떨어졌다.

“기대 반전! 돌파한다!”

그 말에 선두의 고골리가 전장을 향해 방향을 선회했다.

전방으로부터 회색 먼지가 하늘 높이 피어오른다. 성기다고는 해도 마물들이 가득하긴 여기나 저기나 비슷하다.

전세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혼전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대로 뚫는 수밖에!

뒤에서 다가오는 기세에 마물들이 돌아선다. 제우스가 무리해 다시 날아올랐다. 전방에 떨어지는 소형 홀리필드들, 떨어져 내리는 백색의 구체보다 터져 나가는 파편들이 더 위력적이다. 파편에 어설프게 타격당한 마물들이 발광을 하며 주변의 마물들에게 달려든다. 마인과 마물들이 퍽퍽 쓰러져 나간다.

기대원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덕에 오히려 소형 홀리필드를 목표로 잡고 진격해 들어갔다.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홀리필드와 홀리필드 사이를 건너 달렸다.

☆ ☆ ☆

앞을 가로막고, 추격해 달려드는 마물들이 상당했다. 본격적인 전장으로 들어선 것이다. 고골리의 투핸드소드가 우윳빛 오오라를 번쩍이며 마물들을 갈라 갔다. 쥬시아누스의 거검에도 푸른색 오오라가 작렬한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검기가 팽팽하게 도를 감싼다. 도는 짧게! 그리고 빠르게 돌아 들어온다.

절대 도를 멀리 뻗지 않는다. 마물이 최대한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움직임을 자제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방이 마물의 목을 가른다. 그 한 방으로 절명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이후는 삼 선에 선 샤마노프가 처리할 것이다.

고골리의 측면에서 마인 하나가 블링크를 쓰며 나타났다. 고골리는 지금 다른 마인을 상대하느라 역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오첩도가 날았다. 환영보와 함께 살짝 진을 이탈하며 마인의 옆구리로 쇄도했다. 고골리를 노리던 마인이 다급하게 블링크를 시전하려 했지만 오첩도가 조금 빨랐다. 마인의 옆구리가 갈라지며 초록빛 피가 뿜어졌다.

하지만 그 타격을 입고도 마인은 어느새 블링크로 사라져 갔다. 그 정도면 됐다. 마인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조노량은 빠르게 진에 복귀했다. 대여섯 번의 동작이 연속적으로 이어졌지만 거의 한 호흡 만에 끝났다. 고골리가 힐끗 뒤를 바라보곤 다시 투핸드소드를 날렸다. 인사 따위나 주고받을 만큼 한가롭지 않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와중에 기진한 제우스가 날아내렸다.

조노량이 진의 안쪽으로 슬쩍 빠지자 눈치 빠른 샤마노프가 일 선을 채운다. 골곤의 뼈로 만든 샤마노프의 백색 단창이 푸르른 오오라를 번뜩이며 작열한다.

샤마노프 앞으로 고골리에 의해 상처를 입은 마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신없이 단창을 내지르고 촉수를 뻗어 냈다. 나름 속도 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은 샤마노프였지만, 이 선을 커버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전진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제우스를 향해 다가가는 노리앙을 힐끗 쳐다보았다. 정말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형식적으로는 고골리가 단독 선두였지만, 기실 그의 우측 대부분을 노리앙이 맡아서 처리하고 있으니 투톱으로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샤마노프의 생각은 눈앞에 나타난 마인 때문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단창과 함께 촉수를 쏘아 보냈다. 벅차더라도 최대한 타격을 가하고 삼 선으로 넘겨야 했다. 움직임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호흡이 가빠 왔다.

조노량은 급히 진기를 모아 제우스의 팔뚝을 잡았다. 안수의 충격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제우스를 스마르가 잽싸게 안아 들었다. 성력은 차올랐지만 체력적인 부분까지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잠시 동안은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그 정도 활약을 해 줬으니 그로서는 할 도리는 다했다.

조노량은 서둘러 이 선으로 복귀했다. 샤마노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 열로 물러났다.

미리 떨어져 있던 홀리필드와 홀리필드 사이를 최단 경로로 건넜다. 홀리필드의 지속 시간이 길다는 것이 무척 다행이다.

삼십여 미터 앞에서 마인을 세로로 양단해 버린 데스나이트가 일행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드디어 전장의 중심에 진입한 것이다. 두 군세(軍勢)의 중심, 처절한 혼전의 한가운데까지 파고든 것이다.

고골리는 그대로 데스나이트를 향해 돌진했다. 너비는 둘째 치고 길이만 이 미터가 넘는 고골리의 투핸드소드가 묵직하게 휘돌았다. 데스나이트의 바스타드소드에서 어둠의 오오라가 뭉클 피어올랐다.

깡!

엄청난 기세로 격돌했다. 무형의 충격파가 퍼져 나왔다.

신장만 삼 미터에 이르는 고골리가 가속도를 얻어 부딪쳐 갔음에도 데스나이트는 잠시 꿈틀거렸을 뿐 그대로 버텨 낸다. 대단한 괴물이다.

하지만 진형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엔 쥬시아누스의 투핸드소드가 연속으로 날았다. 고골리의 투핸드소드가 내리누르고 있었기에 데스나이트의 바스타드소드는 쥬시아누스의 투핸드소드를 막아 낼 수 없었다. 데스나이트의 투구가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이 둘의 조합도 만만치 않은 괴물들의 조합이다. 데스나이트를 힘으로 누를 정도라니, 절로 혀가 내둘러진다.

투구 속에서 핏빛으로 번뜩이던 눈이 투구와 함께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목이 떨어져 나갔지만 피 따위는 튀지 않았다. 단지 검은 기운만이 뭉클 피어오른다. 그 기운이 실처럼 늘어지더니 저만치 날아가는 투구와 이어졌다. 자석에 이끌리듯 투구가 다시 목덜미로 돌아와 붙는다. 이들에게 있어서 중력이나 관성의 법칙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된다.

머리와 몸뚱이가 이어지자마자 데스나이트가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을 품은 바스타드소드가 전진하는 창의 옆구리를 가른다. 그 사이에도 진영이 계속 전진하고 있었기에 데스나이트의 바스타드소드는 네 번째 열, 브리오티스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경험 많은 검투사답게 빠르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래도 늦다. 데스나이트의 바스타드소드가 종잇장 하나 차이로 브리오티스의 글라디우스 위를 스쳐 지났다. 그 촌음의 시간차가 통한의 결과를 초래했다.

브리오티스의 팔뚝이 나무토막처럼 끊어져 떠올랐다. 붉은 피를 흩뿌리며 천천히 떠오르던 팔뚝이 꽃잎처럼 내려앉았다.

그 사이로 스마르의 검격(劍格)이 비집고 나왔다. 스마르의 검에 데스나이트의 갑옷이 통째로 갈라짐과 동시에 진영은 앞으로 쑥 치고 나갔다. 목이 떨어지고도 되살아났으니 그 일격에도 죽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과를 확인하지도 못하고 진영은 빠르게 앞으로 밀려 나갔다.

그 이후 결과는 어쩔 수 없이 후위에서 감당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다. 돌아볼 여가가 없다. 질끈 눈을 감고 새로운 적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골리의 옆구리로 이글거리는 어둠을 둘러쓴 말 한 마리가 돌진해 들어왔다. 한 손에는 검,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머리를 받쳐 든 듀라한이라는 괴물이 타고 있다.

처음 상대하는 마물이다. 조노량은 진기를 한껏 끌어올려 말의 머리를 베었다. 다행히 썽둥 끊어져 나갔지만 쓰러지기는커녕 앞발을 솟구친다.

그 순간 고골리가 투핸드소드를 공중에 슬쩍 던져 두고 빈 목을 비틀어 잡았다.

크하하!

그리고 듀라한이 탄 채로 말을 던져 버렸다. 엄청난 힘은 둘째 치고 맨손으로 어둠을 잡아 던질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하강하던 투핸드소드가 자로 잰 듯 고골리의 오른손에 떨어져 내렸다. 감탄할 틈도 없이 새로운 적을 맞이해 갔다. 소의 머리를 달고 있는 거한이 자신의 머리통만 한 망치를 휘둘러 왔다. 화과산의 우마왕(平天大聖)이라도 된단 말인가?

오첩도가 아무리 단단해도 저런 둔기를 감당해 낼 수는 없다. 감히 마주쳐 가지 못하고 슬쩍 비껴 섰다. 진각을 이용해 지면과 충돌하는 망치를 밟고 우마왕의 목덜미에 오첩도를 찔러 넣었다.

푸욱!

오첩도에 전해져 오는 느낌만으로도 얼마나 질긴 가죽인지 알 수 있었지만, 검기를 가득 머금은 오첩도를 막아 낼 정도는 아니다.

오첩도를 회수하는 순간 서리 거인만큼이나 거대한 오우거 한 마리가 뿌리째 뽑힌 통나무를 던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통나무는 마치 투창처럼 진영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날아드는 지점에 하필 힘이 약한 안토니오가 서 있다. 힘이 약한 대신 몸이 잰 안토니오다. 저 정도는 충분히 피할 능력이 있는 자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옆과 뒤의 동료들이 대비도 못하고 휩쓸려 버릴 것이다.

턱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악무는 안토니오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표정에서 피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안토니오는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고 몸을 띄운다. 어떻게든 힘을 흘리려는 듯 보였지만 어림없다. 그의 실력으로는 오우거의 거력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퍽!

가슴 앞에 모았던 두 팔이 차례로 부러져 나가고, 가슴을 보호하던 갈비뼈가 남김없이 함몰해 들어간다. 그러고도 모자라 통나무는 안토니오의 몸을 통째로 달고 저만치 날아가 떨어진다. 지면과 충돌한 후에 뒤집힌 통나무가 안토니오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대로 절명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타격이지만 안토니오는 두어 바퀴 더 구른 후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미 진영에서 이탈한 뒤다. 한 떼의 기형 마물이 그를 덮쳐 들어갔다. 안타깝지만 도울 방법이 없다. 마물의 목 하나가 튀어 오르는 모습이 보였지만 기대는 그대로 전진했고, 조노량도 시선을 거뒀다.

통나무를 던졌던 오우거의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의 허리보다 두꺼운 오우거의 목이 비스듬히 미끄러져 내린다. 차츠라다. 오우거의 몸은 머리를 잃은 것도 모르고 걸음을 내딛다가 그대로 무너졌다. 안토니오를 구할 수는 없었지만 복수는 해 줬다.

그러는 사이 마물들의 구성비가 바뀌어 있었다. 어느새 토착 마물들의 숫자가 현저히 증가했다. 반면 마인이나 기형 마물들의 숫자가 줄어들어 있다. 전장 전체가 혼전 중이었기에 큰 의미는 없었지만, 침략군의 진영을 지나 토착 마물들의 진영 안쪽으로 들어선 것이다.

스켈레톤과 허약한 좀비들이 달려든다. 거침없이 베어 넘기지만 숫자가 너무 많다.

“아악! 이 빌어먹을 좀비 놈이!”

클리브의 목소리다. 좀비의 머리가 으깨졌다. 하지만 토시가 찢겨진 클리브의 팔뚝에 선명한 이빨자국이 새겨져 있다. 약간의 피가 흐른다. 평소라면 절대 당하지 않았을 공격이었지만 난전에서는 언제나 의외의 타격을 허용할 여지가 있다.

“그래, 한번 죽어 보자!”

클리브가 비통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진영을 뛰쳐나갔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 뒤를 따르던 코니터스가 이를 악물고 간격을 좁힌다. 이제 클리브가 돌아올 자리는 없다. 잠깐의 방심으로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가 하필 좀비에 의한 상처다. 상처 자체야 별거 아니지만 감염된 이상 오래지 않아 변이할 것이다. 결국 이 땅에 속한 마물로 되살아날 것이다.

“크허헝!”

진영을 뛰쳐나간 클리브가 마음껏 분노를 토해 놓았다. 처음 검투반에 발을 들인 이후 쭉 함께했던 클리브다. 대장간에서 오첩도를 잡아 주며 함께 웃던 클리브가 홀로 마물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전진하는 창은 계속 나아갔다.

“홀리 블레스(holy bless)!”

진영 내부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기대 전체를 감쌌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빛에 쏘인 마물들이 괴로워하며 물러났다.

“오! 신성 마법이다.”

누군가 감탄성을 토해 놓았다.

일시적으로 기력을 회복시키고 공격력을 증가시켜 주는 대단위 신성 마법! 홀리 블레스의 영향으로 기대원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까물거리던 오오라가 급격히 타오르고, 턱까지 차오르던 숨이 가라앉는다. 진격 속도가 한층 증가했다.

뭔가 기대했던 조노량이지만 다른 자들과 달리 자신에겐 큰 변화가 없다. 조노량은 슬그머니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불만을 토할 틈이 없다. 헉헉대는 제우스에게 안수를 마치자마자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고골리가 다시 광분해 날뛰기 시작했다. 듀라한의 목을 빼앗아 옆구리에 끼고 달리다가 데스나이트를 향해 폭사한다. 암흑 투기의 충돌로 데스나이트가 폭발하듯 튕겨져 나갔다. 참으로 무식한 자다.

얼마나 달렸을까 회색빛 어둠이 사위를 덮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노량과 예니에프가 자리를 바꾸길 몇 번!

어둠 속에서 발산되던 오오라가 비산하고 까무러지기를 몇 번!

제우스의 대단위 회복 마법, 리스토어가 터져 나오길 몇 번!

그런 후 제우스의 리스토어에도 더 이상 기대원들의 움직임이 살아나지 않을 즈음, 회색빛 어둠이 물러가고 회색빛 여명이 오를 즈음, 드디어 전장의 소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끈질기게 뒤를 쫓던 몇 마리의 마물들을 마무리하는 것을 끝으로 모든 기대원들이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다.

“껄껄, 역시 켈커티스의 전사들이군!”

오직 고골리만이 호탕한 웃음을 토해 놓으며 일행을 칭찬했다. 헉헉대던 조노량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고골리를 바라보았다. 원래 가디언들은 다 그런 것인지 혹은 개인적인 특성인지, 그에게는 체력적인 한계가 없는 모양이다.

고골리와 달리 기대원들은 거친 숨만 토해 놓을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난번 질로에 이어 이곳에서 다시 여섯 명의 동료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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