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홀리필드
출발은 순조로웠다. 검은 숲을 지나 회색빛 벌판을 건넜다. 이미 충분히 숙지된 지역이었고, 늘 사냥을 다니던 장소였기에 거리낌 없이 전진할 수 있었다. 한나절가량 지나자 비로소 낯선 지역에 들어섰다. 그때까지 몇 무리의 마물들을 조우했지만 일행의 발걸음을 늦출 정도는 아니었다. 서너 명이 앞서 나가 베어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렬로 복귀했다.
조노량은 다른 일행들과 달리 둔해 보일 정도로 옷을 껴입었다. 두꺼운 망토까지 둘러쓰고 있는 탓에 작은 곰을 연상케 했다.
통곡의 계절은 지났다지만 아직도 겨울의 한복판이다. 비단 마계의 문이 아니더라도 대륙 최북단의 겨울은 정상적인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날씨가 아니다. 옷깃 사이로 끈적한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렇게 첫날은 순조롭게 지나갔지만 둘째 날부터는 그렇지 못했다. 수시로 대규모 마물의 무리와 조우해야 했다.
“노리앙! 그쪽!”
스마르의 외침이 아니었어도 이미 인지하고 있는 상황. 조노량은 순간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대략 한 장 반! 마물의 키를 넘어서는 높이다.
달리던 기세를 멈추지 못하고 고개만 위로 치켜든 마물의 이마를 향해 오첩도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검기를 잔뜩 머금은 오첩도가 별 저항 없이 쑥 들어간다.
두개골이 뚫리면 아무리 마물이라도 견딜 수가 없다. 맥없이 쓰러지는 마물의 등을 밟고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좌측에서 뻗어 오던 촉수가 절단되었다. 절단면으로 투명한 액체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한 바퀴 더 회전하며 촉수를 뻗었던 마물의 목을 쳐 떨군 후에야 회전을 멈췄다. 이전보다 월등히 짙어진 검기가 신기루처럼 이글거리며 피어오른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오첩도가 물 흐르듯 원을 그린다.
골곤의 짧은 팔이 조노량을 향해 휘둘려진다. 너무 가깝다. 벨 수는 있겠지만 자칫 골곤의 단단한 뼈에 막힐 수도 있다. 쓸데없는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살짝 몸을 틀자 주먹 하나 차이로 골곤의 팔이 스쳐 지나간다. 조노량의 왼손이 오첩도에서 떨어지며 골곤의 팔을 끌어당겼다. 단지 넉 푼의 힘, 내공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진행하던 방향으로 끌어당기니 골곤의 거체가 힘없이 딸려 온다. 골곤이 급하게 중심을 잡으며 멈췄지만 이미 늦었다. 도를 쥔 조노량의 오른손 팔꿈치가 골곤의 하복부에 틀어박힌다.
지잉!
팔꿈치에서 뻗어 나간 암경이 골곤의 내부를 격탕시켰다. 아무리 단단한 뼈를 가졌다지만 내장이 전부 으스러지는 데야 버텨 낼 도리가 없다.
조노량은 쓰러지는 골곤의 거체를 피해 슬쩍 물러섰다.
아직까지 발이나 무릎으로는 어렵지만, 진동을 발할 수 있는 팔꿈치까지는 암경이 가능했다. 조금만 더 수련한다면 머리, 발, 무릎, 어깨, 엉덩이 등으로 범위를 더 넓힐 수 있을 것 같다. 단, 공간을 격하고 쏘아 내려면 장심(掌心)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아직 이론적으로 구상만 하는 단계, 몸의 각 부위를 전부 이용하는 조노량은 암경의 경지를 그 단계까지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암경은 그야말로 공간을 격하고 내부를 진탕시키는 공격술이다. 소림의 백보신권이 그러하다고 했다. 중원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대단한 무공이다. 반면 파마장은 기를 뭉쳐 쏘아 보내는 기술이다. 암경과 달리 겉을 타격한다. 발경의 응용인 셈이다.
한껏 감각을 높여 전장을 둘러보았다. 백여 마리에 이르던 마물들이 대부분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를 듣고 산발적으로 모여드는 마물들은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 년을 넘게 훈련 대상으로 삼았던 마물들이다. 마물 몇 마리 처리 못 할 기대원은 아무도 없다. 난전만 아니라면 기대원들이 위험에 처할 일은 없었다.
마물들과 비교해도 처지지 않는 덩치, 거신 고골리는 유희를 즐기듯 망치 손과 투핸드소드를 휘두른다. 가볍게 몸이라도 푸는 모양새다. 하긴, 일반 마물들은 고골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과거 본진을 쫓아 헤매던 시절 절벽 위에서 바라보았던 고골리의 충격적인 위용, 일백이 넘는 마물들과 두 마리의 마인을 가볍게 격퇴시켰던 자이니 이 정도 마물들은 혼자서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기대원들도 마찬가지다. 쥬시아누스는 골곤의 척추뼈를 이어 만든 도리깨를 마음껏 휘두르며 기분을 내고 있다. 어지간한 마물들은 도리깨질 한 방에 퍽퍽 나가떨어진다. 다른 한 손에 든 투핸드소드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다. 한편 예니에프의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은 절정고수를 보는 듯하다.
남은 마물들도 오래지 않아 정리되었다. 후위에서 제우스를 보호하고 있던 인원들이 합류하자 바로 출발이다.
첫날의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매일 매일이 전투의 연속이었다. 마물들 간의 전쟁이 격화되었는지 평소보다 배는 풀려 나와 있었다. 때로는 기형 마물을, 때로는 놀이나 트롤, 오크, 오우거를 상대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어느 진영의 마물이든 간에 자신들과 동류가 아니라면 무조건 공격을 해댔다. 조노량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루하루가 수련의 연속이었다. 역시 무공은 실전을 통해서 발전한다.
기대 또한 마물들을 피하지 않았다. 워낙에 많이 풀려 있는 터라 피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돌아가는 만큼 일정이 늦어질 것이고, 그건 마계의 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원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게 자신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전 기대원, 특히 변이가 심한 기대원들은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일정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선두에서 길을 여는 고골리만 하더라도 마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침없이 진격했다.
행군은 속보와 가벼운 구보를 번갈아 가며 진행했다. 일반인들이라면 한나절도 버티지 못할 강행군이었지만, 마물화가 진행되면서 체력적으로 월등해진 기대원들은 매일매일 그렇게 달려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았다. 제우스라는 신관이 조금 문제였지만 기대원들이 번갈아 지게에 메고 달렸다.
달리다 마물과 조우하면 별다른 지시가 없어도 적당 수의 인원이 먼저 나가 정리하고 행군을 이어 갔다. 때로는 대규모 마물의 무리와 조우하는 경우도 발생했는데, 그런 경우는 제우스를 호위하는 일부만 남고 전체 기대원이 달려들어 빠르게 처리했다.
간혹 부상을 입는 기대원들도 있었지만 부상이 일행의 발걸음을 늦추진 못했다. 놀라운 치유력을 발휘하는 제우스를 차치하더라도 기대원들 자체가 믿기지 않는 회복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나가자 일정은 원래 예정보다 닷새 이상 당겨져 있었다.
조노량은 과거 마물들을 피해 본대를 추적했던 기억이 떠올렸다. 왜 그렇게 따라잡기가 힘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행군 속도였다.
낮은 구릉을 몇 개 넘고 음습한 계곡에 들어섰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한때는 물이 흘렀을 법도 한 완만한 계곡이었는데, 계곡 가득 거대 슬라임들이 모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마계대전 당시 선호되었던 식량이라는 말을 믿기 힘들었다. 하나하나가 일반 마물들의 두서너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회색 덩어리였다. 사람 정도는 푹 파묻혀도 표시가 안 날 것 같다.
그런 슬라임들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 꿈틀거리다가 일행을 발견하자 꾸물꾸물 달려들기 시작했다. 일부 기대원들이 앞으로 나가 검을 휘둘렀지만 검이 지나가고 나면 베어진 상처가 그대로 메워져 버렸다. 짧은 검으로는 상대할 방법이 없었기에 투핸드소드를 다루는 고골리, 쥬시아누스 등이 나서서 반 토막을 냈다. 그러나 슬라임들은 숫자만 불어날 뿐 죽지 않았다. 몇 토막을 내도 마찬가지였다.
고골리조차 ‘불을 피워야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난감해했는데, 마물과 다름없이 흉측한 고골리의 얼굴에 어린 곤혹스런 표정은 희극적이기까지 했다. 마법사가 없는 이상 웬만한 불로는 상대가 불가하다.
어쩔 수 없이 계속 물러나며 견제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들어온 길로 돌아서 후퇴할 수는 있었지만, 거의 하루를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제우스가 손을 들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 미천한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고 성령의 축복을 내리사, 이 오염된 대지를 로리안의 성스러운 빛과 정화의 역사로 가득 채우소서. 홀리필드!”
그리고 일행들은 기적을 보았다. 대지로부터 솟아나온 이글거리는 빛이 지름 삼십 미터에 이르는 동심원을 가득 채웠다.
그 빛을 쐰 슬라임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녹아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반복된 기도와 함께 뒤쪽 계곡에도 똑같은 크기의 동심원이 떨어졌다.
단 두 방에 대부분의 슬라임들이 녹아 버렸고, 몇 마리 남지 않은 슬라임들도 그 빛을 보고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도를 마친 제우스가 탈진한 듯 쓰러지는 것을 하이오지가 받아 내었다.
“제 미천한 성력으로는 두 번이 한계군요.”
제우스는 하필 조노량을 향해 두 번이라는 말을 강조해 가며 힘겹게 이야기했다.
두 개의 동심원은 무려 십여 분간 이글거리다가 소멸되었는데, 그 놀라운 장면에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제우스가 그런 기술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제우스는 성자 로한으로부터 무거운 사명을 부여받으며 넘겨받은 성법(聖法) 중 하나라 했다. 어떤 기술이 더 있는지 물어 보았지만 빙긋이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대규모 마물을 만날 때마다 제우스는 홀리필드를 시전했고, 그 범위 안에 들어간 마물들은 예외 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어 갔다. 일행이 처음 성지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홀리필드 안에 들어갈 때마다 찔끔한다니까.”
하이오지가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그 말에 쥬시아누스도 덩달아 진저리를 쳤다. 그 덩치가 진저리를 치는 모습을 보자 당시 고통스러워하던 쥬시아누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물들이 워낙 끔찍하게 죽어 가는 걸 본 탓인지, 아니면 실제로 영향을 받고 하는 말인지 조노량으로선 짐작할 수 없었다. 정작 자신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아무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홀리필드의 범위 안에 든 마물들은 예외 없이 죽어 갔지만 같은 범위 안에 든 기대원들은 멀쩡했다. 이보다 더 좋은 싸움 환경이 또 어디 있으랴.
그렇게 전투의 형태도 변화되었다. 기대원이 먼저 달려들면 그 위로 제우스의 홀리필드가 떨어져 내렸다. 적당히 정리하면 끝이었다.
조노량 입장에서 한 가지 난감한 점은 제우스가 탈진할 때마다 번번이 안수를 요구해 온다는 점이다.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을 접하면 수고를 마다할 수가 없었다.
하긴 수고랄 것도 없긴 하다. 손바닥이나 덥힐 정도의 내공만 운용하면 탈진했던 제우스가 초롱초롱 살아난다.
아니라는 건 알지만, 원래 멀쩡하던 자가 자신을 놀리느라고 그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마물과의 전투로 지쳐 있던 하이오지에게도 안수를 해 봤다.
하지만 하이오지는 왜 만지냐는 듯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의문을 담은 하이오지의 눈빛을 무시하고 돌아섰다.
마찬가지로 다른 기대원들에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유독 제우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뭔가 일관성이 없다. 빌어먹을!
최근의 애로 사항은 물이었다. 아껴 먹는다고 먹었지만 벌써 떨어져 갔다. 때문에 검은 이끼를 섭취하는 비율이 크게 늘었다. 걱정스러운 부분은 원래도 회색에 가까웠던 일행들의 안색이 검은 이끼를 섭취하고부터 점점 더 어두워진다는 점이다. 조노량과 마찬가지로 마물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제우스의 얼굴조차 그다지 희게 보이지는 않았다.
고골리의 말에 따르면 성지를 벗어남으로 인해 더 이상 마기를 정화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란다. 먹고, 호흡할 때마다 마기가 조금씩 축적된다는 거였다.
최대한 빨리 마계의 문에서 벗어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홀리필드에 들어가 본 고골리가 일행에게 홀리필드에 들어가 있기를 권했다. 성지와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나? 마물화 진행을 막는 데도 틀림없이 도움이 될 거라는 의견이었다.
그 덕에 제우스는 밤마다 홀리필드를 시전해야 했다. 더불어 조노량도 밤마다 사내놈의 몸에 손을 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