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56화 (56/142)

56. 소멸된 성지

낡은 로브를 걸친 젊은 사내.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잡티 하나 없는 말끔한 피부에는 약간의 광채가 어려 있다. 모든 세포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세포를 활성화하고 젊음을 되찾은 주운의 모습이었다.

서둘러 몸을 정화하고 의복을 챙겨 입은 주운은 곧바로 에너지 파동이 발원한 중심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주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눈앞에서 오백 년간 둥지를 틀었던 장소가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불길한 예측이 사실로 증명된 것이다.

흰나무 숲을 이루던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하룻밤 만에 고사했다. 그 많은 나무가 하나같이 한 줌의 생기도 품고 있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성력을 뿜어내던 나무들이 수백 년 묵은 고목들처럼 회백색으로 푸석푸석하게 말라비틀어졌다. 작고 초라한 나무 하나가 아직까지 유일하게 제 빛깔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이미 그 힘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기로 가득한 이 땅에 성지를 만들고 유지했던 저 작고 초라한 나무, 자신조차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깊었던 기운이 바닥을 드러내고 바람 앞의 등불처럼 까물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운은 그 나무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노리앙 일행과 함께 온 제우스라는 신관이다.

그 사제의 몸은 척 보기에도 신성력으로 충만했다. 그 신성력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자였는데, 그가 이 사건의 원인이라는 것쯤은 정황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성지가 죽어 간다. 아니, 죽었다.

의식 중간에 느꼈던 엄청난 에너지의 파동, 무언가 큰일이 일어난다고 느꼈는데 그 일이 성지의 죽음이었다니? 어째서 불길한 느낌은 한 번도 어긋나지 않는 것일까?

하필 어젯밤에 의식을 치렀다는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내일 치러도 될 일이었고 내년, 혹은 후년에 치러도 될 일인데, 왜 하필 어제였을까?

주운의 눈에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감히 성지를, 내 보금자리를 망가뜨리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이 보잘것없는 신관 놈! 단숨에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주운의 손이 천천히 들려졌다. 손짓 한 번이면 분자 단위로 흩어질 것이다.

주운이 막 손을 쓰려고 할 때 초라한 나무에서 흰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신관의 몸을 감싸는 것이 보였다. 그 뿌연 막은 신관을 감싸고 밀도 높은 베리어를 형성했다. 마치 주운의 의도를 알아채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주운은 그 막이 성지를 이루는 근간과 동일한 기운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성지의 중심, 오백 년간 마계의 문에서 성지를 유지했던 위대한 힘이 신관을 감싸고 있었다.

주운은 나무의 의지를 읽었다. 나무는 성지를 포기하는 대신 이 어린 신관을 선택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어린 신관의 의지가 아니라 나무 자신의 의지가 그리한 것임을 어필하는 것이다.

주운의 눈 속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들었다.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따지고 보면 자신 역시 이 나무의 배려 아래 오백 년간 이곳에서 편히 지내 왔던 것이 아닌가?

그랬다. 이 성지의 주인은 저 초라한 흰색 나무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그 주인의 선택인데, 빌어 살고 있는 자신이 그 의지에 반하여 분노하는 것은 성지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실 오랫동안 그리 생각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수백 년간 둥지를 틀고 살다 보니 내 집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 성지를 만들고, 이 영역을 지켜 왔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저 작고 초라한 흰색 나무였다. 사랑방에 오래 거했다고 집주인 행세를 하려든 셈이 아닌가? 누가 누구를 벌한단 말인가? 주제 넘는 짓이다.

‘주인이 나가라면 나가야지, 제길!’

비의를 추구하는 자로서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이제 짐을 싸고 새로운 둥지를 알아봐야 했다. 이곳도 점점 시끄러워지는 탓에 자리를 옮길까 생각했었는데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주운은 오백 년간의 임대료를 대신해 뭔가 작은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저 신관, 엄청난 힘을 얻었군.’

어떤 위험이 닥쳤었는지도 모른 채 신관 제우스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돌아서는 주운의 등 뒤로 회색빛 여명이 조금씩 세력을 넓혀 갔다.

☆ ☆ ☆

“떠날 준비를 하십시오.”

확정적이며 단호한 선언이었다. 그동안 부드럽게 설명했던 것과 달리 결론에는 이견(異見)의 여지가 배제되어 있었다. 제우스의 말이 끝나자 커트리안답지 않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이미 대상 없는 항의가 있었고, 한탄과 체념이 휩쓸고 지나갔다.

예정보다 빨랐다. 통곡의 계절이 지나간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 출발 시기로는 매우 부적절했다.

비록 기대원들이 추위에 강해졌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노지(露地)에서 밤을 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계절이다. 동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최상의 상태에서도 장담할 수 없는 여정을, 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쫓기듯 시작해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주일이 분명하오?”

그저 관성적으로 내뱉은 말일 뿐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제우스가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확실하지 않으면 저렇듯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을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단 하루도 연장될 수 없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이다.

자연 재해나 다름없다. 누구를 대상으로 설득하고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인가. 낮이 가면 밤이 오듯, 성지가 없어지는 것도 정해진 사실이라는데 달리 도리가 없다.

“준비를 서둘러야겠군. 성력이 걷히는 날 출발하겠소.”

자신들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일, 더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커트리안은 스마르를 통해 이 사실을 전 기대원에게 알리도록 지시했다.

그날 이후 성지는 무척 부산해졌다. 탈출을 위해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비상식량으로 삼을 마물들을 사냥해 오고, 그 육편을 훈제했다.

갑옷이 상한 자들은 서둘러 무두질한 가죽을 찐 후 이중으로 박음질해 그 사이사이에 풍뎅이의 등껍질을 오려 만든 스케일을 넣었다. 완성된다면 웬만한 촉수는 무시해도 좋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체형에 맞춰 제작한 진흙 틀 위에 잘 펴서 말렸다. 빨리 마르라고 그동안 모아 놓은 땔감을 아낌없이 때 막사의 온도를 높였다. 덕분에 막사 안이 후끈후끈하다.

그동안 미뤄 두었던 골곤의 뼈를 서둘러 가공하여 여분의 무기도 준비했다. 방패나 무기는 전투 중 언제라도 잃어버리거나 상할 수 있는 문제였기에 여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았다. 조노량도 골검과 단검 몇 개를 개인 짐에 챙겨 넣었다.

각자 마물의 위장으로 만든 휴대용 물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도 추가로 장만해야 했다. 검은 이끼가 있더라도 물보다 나을 수는 없었다. 외부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충분히 준비해 둬야 했다.

조노량은 무두질한 털가죽으로 망토를 만들었다. 마물의 이빨을 이용해 단추를 만들고 털가죽을 이중으로 겹쳤다. 단추를 풀어 펼치면 노숙을 할 때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덮을 수 있는 길이다. 제법 묵직했지만 다른 자들과 달리 추위에 약한 조노량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여차하면 하이오지에게 맡기면 된다. 체력이 뛰어난 하이오지라면 부담 없이 맡아 줄 것이다.

커트리안의 명에 따라 앞뒤로 두 사람이 드는 들것도 서너 개 만들어 짐을 실었다. 여차하면 부상자를 나르는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다. 체력이 약한 제우스를 위해 들쳐 메는 지게도 준비했다.

신기하게도 조노량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제우스를 짐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부산스러운 와중에도 주운이라는 노마법사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조노량 역시 한동안 주운을 보지 못했기에 슬쩍 궁금해지기는 했지만 뭐, 좋은 인연도 아니니 안 부르면 오히려 좋았다.

그런 와중에 뜻밖에도 고골리가 길 안내를 자처해 왔다.

“짧은 여정이 아니다. 길을 모른다면 반년이 아니라 일 년이 걸려도 마문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노인네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는 걸 보면 일말의 우려와는 달리 애초에 일행을 잡아 둘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고골리는 땅바닥에 그려 가며 일행이 거쳐 가야 할 지역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는 질문에는 ‘주인의 심부름으로 서너 번 다녀왔지’라고 대답했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원들의 기분은 수시로 바뀌었다. 드디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며 들떴다가도, 살아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기도 했다. 마물화가 두드러진 사람일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이런 성정(性情)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조노량의 우려와는 별개로 칠 주야는 정신없이 흘러갔다.

마지막 날 아침, 정찰을 나간 차츠라를 제외하고 모두가 막사 안에 모여 있었다. 고골리까지 포함해 총 서른한 명이 숨 쉬고 있었지만 막사 안은 고요했다. 막상 출발이 코앞에 닥치자 기대보다는 두려움이란 감정이 앞선 것이다.

그때 차츠라가 막사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성막이 걷히고 있습니다.”

제우스의 확언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조노량의 가슴에도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제 목숨을 건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고향에 가자.”

커트리안이 일어서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씨발, 가자!”

누군가 소리쳤다.

그 소리에 기대원들은 각자의 등짐과 무기를 챙겨들고 몸을 일으켰다. 의외로 주저하는 사람은 없다.

막사를 나서자 우윳빛 성막이 점멸(點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소멸할 듯 흐릿하게 깜박이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우스가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오백 년간 마계의 문에서 333인의 영혼을 지켜 낸 성자 로한이 생을 마감하는 모습이었다. 로한의 기억을 공유했던 제우스였기에 슬픔이 차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주일 전 그날, 제우스의 입을 통해 성지에 대한 역사를 전해 들었던 커트리안도 그가 눈물 짓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은 의지를 담아 제우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이제는 로한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커트리안은 고골리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님께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고골리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떠나라셨다. 이대로 가자.”

커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 자, 출발이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아고투스, 아르고스!”

한편에 서서 일행을 바라보는 고골리를 제외한 생존자 서른한 명, 전원은 결의에 찬 함성을 지르며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떠나는 일행의 뒤로 열려 있던 막사 문이 거센 바람을 맞아 덜컹거렸다. 그리고 성막이 소리 없이 까무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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