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의혹
소드마스터에 이르면 보통의 검으로는 이를 상대할 수 없다. 검을 맞대지 못하는데, 어찌 그 검을 막을 것인가? 하지만 소드마스터에 다다랐다고 끝은 아니다. 비슷한 수준이라면 검을 맞대지 않을 방법이 없겠으나 월등한 수준이라면 얼마든지 상대와 검을 섞지 않고도 그를 제압할 수 있다. 소드마스터란 검술의 경지라기보다는 하나의 단계 내지는 능력으로 이해해야 할 개념이다.
마나에 대한 감응도가 뛰어난 자가 검을 수련했을 때 그 마나의 흐름을 깨닫고 이를 검에 실을 수 있게 된다면, 소드마스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렇기에 소드마스터라 해도 반드시 검술의 경지가 소드마스터가 아닌 자보다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다. 마나에 대한 감응도는 떨어지더라도 검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난 자라면 어정쩡한 소드마스터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자가 바로 사백 년 전 주트 왕국의 폰요라는 기사다.
그는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 주트 왕국의 국왕 친위 기사단의 단장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살해당하던 그날까지 검에 오오라를 싣지 못했다. 한때 궁정 마법사 겸 친구의 자격으로 그의 신체를 살펴본 주운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는 마나에 대한 감응도가 정말이지 평범함을 넘어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소드마스터도 그를 당하지 못했다. 기사로서는 드물게 주력으로 시미터를 사용했는데, 그와 마주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의 시미터는 상대방의 목줄기를 갈라놓고 있었으니, 그 앞에서는 오오라고 자시고 간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당시 중부 대륙의 최강의 기사라고 불렸던 기사가 바로 이 섬광의 기사 폰요였다.
그런 그도 평생에 걸쳐 두 번의 패배를 맛봤다. 두 번 모두 같은 사내 렛비에 의해서다. 그랜드마스터 렛비. 대단한 자이기는 했지만 처음 폰요를 꺾을 당시만 해도 아직까지 풋내기였던 시절이었다.
그 첫 번째 대결을 곁에서 지켜봤기에 누구보다 둘의 차이를 잘 안다.
그렇기에 주운은 마나를 다루는 애송이와, 마나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검에 대한 자질이 뛰어난 자를 비교할 때 전자에 힘을 더 실어 준다.
전자가 후자를 평생 넘어서지 못할지는 몰라도, 최소한 가능성은 갖춘 것이기 때문이다.
마나에 대한 감응도는 타고나는 것이라서 수련에 의해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검의 경지는 수련으로 극복이 가능한 것이다.
렛비가 그것을 증명했다. 당시의 렛비도 대단하기는 했다. 불과 열다섯에 마나를 이끌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이후 다시 십사 년을 일심으로 수련한 자였다. 그래 봐야 겨우 서른을 바라보는 어린 나이였지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경지를 이룬 소드마스터였다.
하지만 경험이나 실력 면에서는 아직까지 폰요에게 미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수많은 소드마스터를 겪어 왔던 폰요의 입장에서는 렛비 역시 그다지 괘념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단지 동맹국인 리벤스 왕국의 대공(大公) 작위를 이을 후계자에게 예의를 갖춰 가벼운 가르침을 전하는 자세로 임한 대련이었다. 그랬기에 참관인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몇몇 왕정 기사들과 주운 자신 그리고 렛비를 시중 들던 너덧 명의 수행원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의외로 그 대련에서 폰요는 평생 처음 패배를 맛본다. 정당한 대결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생사를 겨루는 승부였다면 그렇게 당할 것도 아니었다.
유난히 승부를 탐했던 렛비 드 제우나르는 당시 폰요가 자신을 베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신하에 방어를 무시한 승부수를 띄운다. 목숨을 건 시합도 아닌 바에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패하더라도 하등의 불명예가 되지 않는 시합이었다.
폰요는 수십 합을 배려해 준 뒤의 단 한 번의 방심으로 침몰했다. 생사를 결하는 승부였다면 당연히 막아야 할 검을, 아니, 지도 대무이기에 배우는 입장에서 더더욱 막아 줘야 하는 검을 렛비는 무시했다. 검의 경로상 자칫 동맹국의 장래 대공을 죽일 수도 있는 검이었기에 폰요는 서둘러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상대가 막아 오면 다시 이를 피해 다른 경로로 연격(連擊)하려 했기에 회수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시점이 절묘했다. 폰요의 검을 막지 않은 렛비의 검이 벌써 폰요의 목덜미를 향해 출발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연격이 아닌 회수, 공격이 아닌 갑작스런 방어를 펼쳐야 했기에 폰요로서도 검을 맞대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폰요의 검이 베어지고, 폰요의 오른쪽 어깨가 베어졌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그로 인해 폰요는 일 년간 검을 들지 못한다.
만약 당시 폰요의 검에 오오라가 실려 있었다면 가볍게 웃고 끝날 대무였다. 하지만 그러지 못함으로 인해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자에게 패하고 만 것이다. 아무리 비열한 수를 썼다고 하지만 변명의 이유로 삼기에는 폰요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폰요는 치료를 위해 물러감을 고했을 뿐, 비열한 수를 쓴 렛비에게 그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다. 참관 중이던 다른 기사들이 항의하려 했으나 폰요는 이마저 막아 버리고 물러나왔다.
그때 주운은 다시 한 번 느꼈다. 목검으로 진검을 상대할 수 없듯이 오오라를 담지 않은 검으로 오오라를 담은 검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짓임을.
수십 년간 소드마스터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평가받았던 폰요조차 결국 한계에 무릎 꿇고 만 것이다.
그 후 이십 년이 흐른 후 두 번째 대결이 벌어졌다. 그 대결은 목숨을 건 시합이었고, 한때 동맹국이었던 두 왕국의 존폐가 갈리는 시합이었다.
둘은 전장의 한가운데서 양쪽에 포진된 수만의 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합을 펼쳤고, 너무나 허무하게 폰요의 목이 떨어졌다.
애초에 승부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나 감응도나 검에 대한 자질 모두 천부적이었던 렛비는 이미 그랜드마스터라는 과도한 칭호를 얻은 상태였고, 폰요는 검을 잡기에 너무 늙은 나이였다.
그런 면에서 노리앙이라는 사내는 렛비에 비견되는 자다. 아직까지는 모자람이 있으나 가능성은 넘쳤다.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으나 마나를 밀집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축적된 근원 에너지를 사용한다.
다른 자들과 달리 신체의 변화를 통해 강해진 것도 아니다. 순수하게 검의 성장으로 그들 중 최강의 자리를 다툰다. 그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나 자신의 가디언들처럼 마법적 보호에 의해 마기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기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다.
그 어떤 생명체도 이곳 마계의 문 안에서는 마기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이 절대적인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호흡을 할 수 없듯, 고래가 아가미로 호흡할 수 없듯, 마기 속에서 호흡하면 허파에 마기가 채워지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이치다.
혹시 마법사일까? 주운에게는 노리앙을 마법사라고 의심할 만한 합당한 증거도 가지고 있다.
언젠가 그가 보여 주었던 윈드 에로우와 윈드 피스트, 손가락을 이용해 구사했던 홀드와 슬립까지, 분명 검사가 사용할 기술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유롭게 마법들을 사용했다.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유연하게 구사했다. 윈드 에로우의 경우는 한꺼번에 여러 갈래를 뿜어내는 고난이도 기술도 보여 주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캐스팅도 없었다.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윈드 에로우가 비교적 위력이 약한 3서클의 공격 마법이라고는 하지만, 동시에 둘 이상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4서클 이상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거기에 이를 캐스팅 없이 시전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5서클 이상의 경지라고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설사 메모라이즈를 해 놓았다고 해도 시동어는 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절대 아니었다. 마법을 사용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지만, 궁극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로서 목을 걸고 장담컨대 그는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자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법의 사용이 가능할까?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이 그가 품고 있는 에너지다. 우주의 근간을 이루는 에너지, 날것 그대로를 에너지를 이용해 편법적인 기술을 습득한 것이 아닐까?
아니 잠깐, 정말 그렇다면 그 또한 궁극의 마법이 아닌가? 캐스팅이 필요 없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면 그 누가 당할 수 있겠는가? 물론 복잡한 배열을 통한 다양한 형태의 마법을 구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증거는 그가 구사하는 마법의 특징에서 드러난다. 그는 오직 몇몇에 한정된 마법만을 구사할 뿐이다. 그것만 해도 법칙에 위배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 역시 마기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그가 보여 주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이 그 증거일지도 모른다.
후, 어쨌든 아직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자신이나 하기에 비하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격이 다른 존재이기에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하다.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손짓 하나로 그 존재 자체를 말살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여명이지만 어느덧 뿌옇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그에 맞춰 주운의 의식도 마무리 단계에 도달했다.
지저분한 분비물 덩어리가 흘러내린 틈새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피부가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어미젖을 먹고 한참 살이 오른 갓난아기의 피부처럼 가는 솜털까지 돋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