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주운과 하기Ⅱ
주운은 성지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에너지의 파동을 느끼고 있었다.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파동이었으나 주운쯤 되면 꼭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반드시 두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절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생을 연장하기 위한 의식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 년쯤 살다 보면 삶에 미련이 없을 법도 하건만, 막상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안식’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운의 곁에는 헤트르가 검을 빼든 채 서 있었으며, 마법의 등불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는 클라흐가 녹아 있었고, 거신 고골리가 오두막 밖을 지키고 있다.
주운으로서는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다. 세포 활성화 의식 자체야 워낙에 수십 번을 치러 봤던 터라 힘들 것이 없으나, 의식을 행하는 너덧 시간 동안은 아무런 자기 방어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건드리기만 해도 죽어 자빠지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어린아이라도 손에 칼을 쥐어 준다면 전설의 마법사를 쓰러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주운은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하기가 직접 오지 않는 이상 누구도 헤트르의 벽을 넘어설 수 없다.
헤트르의 눈빛에 어린 자신에 대한 적대감 내지는 혐오감을 알고 있었으나, 주운은 그 또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가디언의 영혼에 각인된 주문은 인간으로서는 절대 해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물론, 만약 누군가 주운을 해치려 한대도 헤트르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이를 막아 낼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 동의한 가디언의 숙명이니까.
이렇듯 영혼에 새겨진 맹약은 무거운 법이다.
의식을 행하면서도 주운은 설핏 웃었다. 가디언으로 만들면서 예측도 못 했었다. 설마 저토록 급격한 성장을 보일 거라고는 말이다. 이제 마계의 문에서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존재는 자신과 하기 정도다. 하기의 네 마리 짐승이 동시에 덤비더라도 헤트르를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
주운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자신의 소유물이 다른 이의 소유물보다 뛰어나다는 점에 기쁨을 느끼다니? 아직까지 자신에게 이런 치기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자신의 유치함에 절로 비틀린 미소가 지어졌다.
헤트르 폰티나. 더글라스 가문의 딸인 제이나 더글라스의 장자며, 켈커티스의 명문가인 폰티나 가문의 직계 계승자이기도 했던 자.
두 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한때는 켈커티스의 대권에 도전했을 만큼 막강한 사내였으나 이제는 자신의 의지마저 저당 잡힌 노예가 돼 버린 사내. 노예가 되어서야 영혼의 성장을 이룬 비운의 사내다.
과연 그는 알까? 주인이 그의 조상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물론 주운 자신도 그런 인연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제는 묽어질 대로 묽어져 혈인(血因)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벌거벗은 채 침상에 좌식으로 앉은 주운의 몸에서도 뜨거운 열과 흐릿한 오오라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얼핏 성스러울 것 같은 의식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현재 주운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바로 보기 힘들 정도로 징그러웠다. 피부는 옴이라도 앓는 듯 지저분한 허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에 더해 피부 곳곳이 갈라져 터지고, 터진 틈 사이로 검누른 진물이 걸쭉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굴은 그보다 더 보아 주기 힘든 상태였다. 눈과 코 그리고 귀에서 흐르는 피고름이 벗겨진 얼굴 거죽과 함께 응어리져서, 반죽된 진흙 덩어리처럼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모든 신체 부위가 이와 같았으니 그가 누군지, 심지어는 좀비인지 사람인지조차 구별이 안 되는 상태였다.
하지만 육체적 상태와 무관하게 주운의 의식은 여전히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걸리다 보니 그만큼 잡념이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의 잡념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하기와 노리앙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저 알 수 없는 에너지의 파동에까지 신경이 가 닿았다.
주운은 슬그머니 잦아들어 가는 에너지의 파동을 느끼며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일단 몸을 추스른 후에 확인해 봐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주운의 생각은 다시 하기에게 이르렀다.
어제의 만남. 그때 느꼈던 하기의 힘. 불과 몇 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해진 힘을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수백 년간 크게 성장하지 않던 하기가 요 몇 년, 본토에서 넘어온 마물들을 잡아먹고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이제는 주운 자신도 하기를 제압하려면 상당한 손실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본토를 지배하고 있는 마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아니다. 하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아스르부테나 우코르바흐와 비교한대도 약간의 모자람이 있다. 단신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다가는 그동안 쌓아 놓았던 힘마저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물론 위협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한 하기가 그럴 리는 없다.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하기의 대처는 둘 중 하나다. 첫 번째는 철저히 상대를 멸해 버리는 것, 두 번째는 철저히 상대를 피하는 것.
자신의 힘이 우월하다면 앞뒤 재지 않고 상대를 멸해 버린다. 그리고 불리하다면 무조건 피하고 본다.
침략자들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은 힘의 열세로 인한 회피를 택하면서도 ‘하찮은 것들을 일일이 상대할 이유가 없다’는 말로 드높은 자존심을 지켜 왔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의 힘이 우위에 서게 된다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설 것이다.
‘이 땅의 지배자로서 더 이상 하찮은 것들의 망동(妄動)을 눈감아 줄 수 없다’는 이유를 대겠지?
주운은 자신과 하기를 비교했다. 비슷한 세월을 살아온 두 존재지만 힘과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자신은 지금처럼 늙고 낡은 세포를 활성화하여 젊음을 되찾는 방식으로 존재해 왔다. 의식을 마치면 세포 하나하나가 성장기의 어린 세포들처럼 에너지를 가득 머금고 분열을 시작한다. 그야말로 싱싱한 육체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반면 하기는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 빠져나온 영혼이 대체할 만한 다른 육체를 찾아 다시 기생한다. 그의 치명적인 한계가 이때 발생하는 것이다. 이 영혼은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기생하는 육체와 그 영혼의 영향을 받아 전혀 다른 인격체가 돼 버리는 것이다.
즉, 영생을 누리면서도 스스로 영생을 누린다는 것을 모른다. 과거의 기억 자체를 스스로 무시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걸 영생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일까? 그저 성급한 환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어찌 보면 다른 점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스스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영혼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 탓에, 역시 환생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기와 자신은 각기 다른 배에서 출생했다. 묘하게도 같은 날 같은 시,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은 서로를 의식했다. 동일한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이 그들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 누구보다 친한 친구로, 형제처럼 자랐고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오십 살쯤인가? 하기 아니, 당시 다푸아란 이름의 친구는 벌목장에서의 사고로 죽게 된다. 주운 자신의 앞에서 말이다. 그 친구의 죽음과 그 죽음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젊은 벌목공에게 전이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면서 주운도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자각했다.
충격적인 것은 다푸아가 벌목공의 육체를 차지하고도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 젊은 벌목공은 사고를 목격한 충격으로 한동안 바보가 되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평소의 밝고 쾌활한 모습을 회복했다. 사고 당시의 기억을 잊은 채 말이다.
주운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기에 벌목공에게 접근해 다푸아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 벌목공에게는 더 이상 다푸아의 인격이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 같은 영혼임을 아는데, 다푸아는 더 이상 다푸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원래의 그 벌목공도 아니었다.
그 육체에는 더 이상 벌목공의 영혼이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오직 벌목공의 기억과 인격을 카피한 다푸아의 영혼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때 주운은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다. 자신과 다푸아와의 차이점까지 말이다. 깨달았다기보다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며 손가락 쓰는 법을 깨닫듯 세포를 활성화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주운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말단의 작은 세포 하나까지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운 자신과 하기, 영혼의 교감을 이루고 있는 둘은 수백 년간 서로를 의식하며 공존해 왔다. 묘하게도 둘은 그 껍데기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친근감을 갖는 것은 아니다. 우정을 논하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버렸으니까.
다만 둘은 이복형제처럼 핏줄임을 의식하면서도 거리감을 갖는 존재, 그런 관계라고나 할까?
다만 자신은 다푸아의 첫 번째 죽음을 목격한 그날 이후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는 마법사의 길을 걸었고, 기억의 괴리가 없는 덕에 결국 세상 누구도 도달한 적이 없다는 9서클의 마법사가 되었다.
반면 하기는 매번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평범한 삶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세상 그 어떤 영혼보다도 강한 포식자임에 틀림없었다. 그 어떤 영혼도 하기의 영혼을 상대로 자신의 육체를 지켜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기는 마계의 문으로 넘어와 이를 증명했다. 평범한 사제의 역할을 해 내고 있던 하기의 육체가 마계 원정으로 인해 이곳에서 죽었다.
마계의 문, 현세에 구현된 마계의 땅.
신이 인정한 그들의 영역이며 신이 결계한 마지막 땅이기도 한 이곳은, 그에 속한 존재를 절대 놓아주지 않는 땅이다. 그에 속한 것이라면 누구도, 그 무엇도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다. 설사 그것이 영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 땅에서 죽은 영혼은 이 땅에서 환생을 이룬다. 마치 하기의 그것과도 같다. 하지만 인간으로 환생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인간은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속한 존재, 바로 흄으로서 환생을 이룬다. 마계의 문을 지배하는 신종족, 흄!
애초에는 작고 미약한 전기적 신호를 띤 순수한 에너지의 형태를 갖춘다. 그 순수한 에너지는 이 땅에 가득 찬 마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성장하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 이외의 다른 에너지체와 조우하면 투쟁을 시작한다. 그 투쟁에서 승리한 자가 패한 자의 에너지를 모두 흡수하며 하나가 된다. 이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이지를 갖추고, 육체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 경쟁에서 도태된 영혼들은 환생과 죽음을 무한히 반복하며 먹이사슬의 하부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 흄들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존재가 바로 하기였다. 그 누구보다 강한 영혼의 소유자였기에 그 어떤 흄들도 하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또 한번 굳어진 역학 관계는 이곳 생태계의 구조상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껏 살아남은, 피라미드의 최상위를 이루는 존재들은 하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지닌 하기에게 반항하다가 단 한 번이라도 죽음의 과정을 겪게 된다면, 이로써 그의 영혼은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먹이사슬의 말단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죽음을 겪어야 할 것이다.
하기는 영혼의 향기를 맡을 줄 안다. 때문에 그의 자식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환생할 것을 알고, 환생했을 때 하기에 의해 보호받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품안에서 성장하여 언젠가는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사멸(死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게 흄들이 스스로의 영혼에 하기에 대한 복종의 맹세를 새긴 이유였다.
이제 그 하기가 본토에서 넘어온 마물들로 인해 다시 한 번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마기로 치자면 이곳 마계의 문보다 족히 두 배는 밀도 높은 대기에서 성장한 마물들이 밀려들었다. 역사가 일천한 마계의 문과는 달리 수억 겁의 세월과 충만한 마기로 가득 찬 진정한 마물들의 땅으로부터 말이다.
한동안 이 땅의 존재들이 밀렸던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주운 자신이 보았을 때, 그들은 이 땅을 너무 쉽게 보았다.
본토와는 또 다른 특징, 그로 인해 마계의 한 갈래로서 우뚝 설 수 있는 위대한 권능을 품은 땅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땅의 존재들은 그야말로 불사의 존재들이다. 죽여도, 먹어도 결국은 되살아나는 존재들인 것이다.
침략자들은 거기에 마기라는 에너지를 더해 줄 뿐이다.
또한 이 땅에서 죽은 마물들은 그 순간부터 이 땅에 속하게 된다. 즉, 이 땅의 존재로 부활해 이 땅의 전력으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그 힘은 이 땅을 살찌워 마계의 변두리쯤으로 치부되는 이 땅을 그 어떤 마계의 영지(領地)보다 더 강력한 하기의 영지로 변화시킬 것이다.
애초에 워리놈은 이 땅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냥 없는 땅으로 치부했다면 아무 무리가 없었을 것을, 인간계에 걸친 땅이라 하여 탐욕을 부린 것이 실착이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최강의 전력을 파견해 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든 다음 부활하는 족족 끝없이 먹어 치운다면 당분간은 이 땅을 복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할 수는 없는 일. 결국 그냥 두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는 해결책이다.
주운은 다시 옛 기억을 떠올려 본다.
하기와 자신, 그동안의 자신은 늘 지켜보는 자였고, 돌봐주는 자였지만 오래지 않아 그 관계는 뒤집어질 것이다. 마계의 문이라는 특수한 배경하에 하기는 불사의 육체를 얻었고, 그 육체는 무한대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주운 자신이 지식의 탐구로 힘을 얻었다면, 하기는 순수하게 에너지의 양을 늘림으로써 힘을 키웠다.
지식이 한계를 초월한다 할지라도 에너지의 절대량을 넘어설 수는 없다. 우주의 근간을 이루는 건 지식이 아니라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 에너지에 대한 탐욕스런 포식자가 바로 하기다.
그런 하기의 관심이 천천히 노리앙이라는 사내에게 옮겨 가고 있었다.
‘지켜보되 관여하지는 않는다.’
합의 사항이었지만 지켜질지는 의문이다. 또 어떤 자기 합리화로 변덕을 부릴는지 알 수 없다. 침략군에 맞서는 일이 해결된다면 어떤 형태든지 관여하려 들 것이 틀림없다.
노리앙, 근원을 품은 자. 그럼에도 발휘하는 능력은 보잘것없는 자.
인간인 주제에 마기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전사인 주제에 마법을 다룬다.
주운이 가진 어떠한 마법적 지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근원을 이용한다는 것까지는 알겠지만, 어떻게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