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희생
동료들 모두가 추위에 강한 저항력을 보이는 데 반해 유독 자신만은 그러질 못했다. 그렇지만 부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들과 달리 자신은 마물화 진행이 무척 더디다.
똑같이 먹고 똑같은 대기를 호흡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만은 거의 변화가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확연한 신체적 변화도 없고, 피부도 여전히 하얗다. 반면 그 덕에 여전히 고통 받고 있었다. 아니, 한 사람, 그분만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외형상의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물화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외모를 제한다면 그 역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능력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눈동자의 습기까지 얼려 버릴 것 같다. 억지로 실눈을 떠 방향을 가늠한 제우스는 바람을 뚫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끔 방향만 확인하고 절반은 눈을 감다시피 했다.
보온력이 뛰어난 마물의 가죽으로 칭칭 둘렀음에도 바람은 어느 구멍으로 찾아 들어오는지 통기(通氣)가 좋은 리넨 옷을 입은 것처럼 제멋대로 제우스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평소라면 오 분도 안 걸릴 거리를 그 네 배에 달하는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고서야 예의 그 나무 가까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흰색 나무는 여전히 작고 초라하며 심하게 구부러진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이 매운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 있다. 잠시의 추위도 참아 내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동안에도 이명(耳鳴)은 끊임없이 제우스의 귓전을 괴롭혔다. 그 소리에 비하면 바람 소리는 차라리 평화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최소한 감정은 담고 있지 않으니까.
도착했을 때는 이와 턱이 얼얼하여 감각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자신도 모르게 앙다물었던 탓이다.
제우스는 다시 몇 걸음을 걸어서야 나무에 손을 얹을 수 있었다. 잠시 기둥 삼아 부여잡으려 했던 것이다.
땅!
그러나 그 순간 제우스는 번개에라도 맞은 듯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나무에 손을 얹은 그 상태로 서서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제우스는 목숨을 잃었어야 마땅했다. 이런 계절에, 이런 곳에서 기절했다면 그 결과는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 제우스를 보았거나 가까이 있었다면 절대 얼어 죽을 거라는 생각은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타 죽지 않나 의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신체의 윤곽조차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빛이 제우스의 몸을 통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빛뿐만 아니라 엄청난 열기가 함께 주변을 강타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광경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람과 냉기를 막아 내기 위해 창문까지 나무틀을 짜서 꽉꽉 틀어막은 막사, 누구도 이 시간에 밖에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실 제우스는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꿈을 꾸고 있었다.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한 빛무리에 둘러싸여 하얀 공간을 부유하고 있는 꿈이었다.
알 수 없는 설렘과 충만함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가없는 행복감 속에 가라앉아 있던 제우스의 눈에 주변의 빛보다 더 하얀 빛 덩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게 무언지도 모르면서도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부풀어 바라보는 사이에 하얀 빛 덩어리가 제우스의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빛 안에서 흰색 사제복을 입은 정갈한 모습의 노인이 제우스를 굽어보고 있었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하얀 수염, 약간 굽은 허리를 지팡이로 받치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외관이야 어찌되었든 노인에게서는 이제껏 접해 보지 못했던 성스러움이 느껴져 왔다. 제우스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잡고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한 손을 내밀었다. 제우스는 절로 고위 사제를 대하는 예에 따라 무릎을 꿇어 그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노인이 제우스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던 예의 그 소음이었으나 점차 또렷이 뜻이 실리기 시작했다.
[알아듣겠느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음색, 감정,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야, 네가 이곳에 든 것은 주신 아디의 축복이었느니라. 거룩하고도 거룩하도다!]
제우스는 얼굴 가득 함빡 웃음을 머금었다. 노인의 의지가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한없는 행복감이 밀려들고 있었다. 포근하고 든든했다.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와 같은 기분이었다.
빛의 의지대로 둥둥 떠 있는 상태였으나 이보다 편안한 자세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편안한 상태로 제우스는 노인의 말을 들었다.
아주 긴 이야기였으나 이야기의 마지막을 들을 때까지 전혀 시간이 흐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네가 짊어질 짐이 너무 크구나.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제가 태어난 이유입니다.]
신념과 결의에 찬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또렷이 말했다.
노인은 다시 한 번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하나야 마귀가 된들 어떠하랴마는, 이들까지 그리된다면 어찌 가엽지 않겠느냐?]
말과 함께 노인은 천천히 팔을 휘돌려 주변을 가리켰다. 노인의 팔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자 지금껏 보지 못했던 수많은 빛무리들이 제우스의 주변에 둥둥 떠서 한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었다.
평시라면 충분히 놀라고도 남을 일이었으나 제우스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당연히 그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노인을 향해, 주변의 빛무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쓸모없는 허물뿐 아니라 영혼까지 다 바쳐 뜻을 받들겠나이다.]
[고맙고도 고맙구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의 힘이 다하여 줄 것이 이것밖에 없구나. 사용할 수 있겠느냐?]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제우스는 노인이 무엇을 주었다는 것인지 절로 알고 있었다.
[능히 사용할 수 있사옵니다. 심려 놓으소서.]
노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늦지 않아 진정 다행하고 또 다행한 일진저, 이 모두 아디의 축복일지니.]
노인의 감정이 전이된 듯 제우스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경계가 사라지기까지 칠 주야가 걸릴 것이니라. 그 사이에는 떠나야 할 것이니. 육신을 강건히 하고, 정신을 사려하고, 희생하여라.]
노인은 손을 뻗어 제우스의 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마치 세례를 하듯 경건하고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마침내 노인의 손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릇이 완성되었으니. 성도여, 오랜 친구들이여, 그대들 모두의 영혼에 주신 아디와 열두 신들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하노라.]
그 순간 공간 가득 성스러운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귀로 들을 수 없는 성가(聖歌)였으며, 감정으로 전해지는 노래였다. 그리고 그 감정은 오직 하나,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제우스의 가슴까지 절절히 울리는, 절로 눈물이 솟구치게 하는 슬픔 속에서 빛무리들은 하나둘 제우스의 몸을 둘러싼 빛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노인이 소임을 다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우스를 향했다.
[네 머리 위에 아디의 사랑이 충만하길 기원하노라.]
그러고는 왔던 것처럼 한순간에 멀어지더니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노인마저 사라지자 제우스는 텅 빈 공간에 홀로 부유하게 되었다.
제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마치 기억이 전이되듯 순간순간 건너뛰며 했던 이야기들을 되새김해 보는 것이다.
정상적인 대화라면 절대 알아들을 수 없었을 대화였건만, 제우스는 그 미세한 의미와 세밀한 느낌까지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제우스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안타까웠다. 가슴이 저미고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견뎠을까? 어찌 버텨 낼 수 있었을까?
플라비우스 데 로한 추기경을 비롯한 333인의 영혼들.
적게는 471년 52일을, 많게는 499년 183일을 버텨 낸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 마계의 문에 얽힌 역사를 제우스는 모두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네 번의 원정과 그 속에서 죽어 간 1만 7천8백52명의 영혼들. 그리고 죽어서도 마계의 문을 벗어나지 못하고 마물이 되어 윤회와 죽음을 반복해야 했던 처절한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했다.
자신이 먹었던 마물들 중 일부는 자신과 같은 신을 섬겼던 사제였고, 용맹한 기사였으며, 숭고한 희생자였다. 그렇다고 전처럼 욕지기가 난다거나 자괴감이 밀려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고 담담했다.
영혼의 무한함에 견주어 볼 때 허물은 티끌과 같으니, 먹고 강건해진다면 무엇인들 먹지 못할쏘냐?
눈물을 훔친 손을 가만히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다행히 마기에 물들지 않고 성자 플라비우스 데 로한과 함께 그 오랜 세월을 버텨 냈던 333명의 영혼들이 무게가 느껴졌다.
그리고 로한의 따듯한 손길이 그들 영혼 속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의 박동처럼 그들의 의지가 자신의 안에서 맥박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보잘것없는 나무가 되어 무려 498년 355일 동안 이 성지를 만들고 지켜 낸 로한의 숭고한 희생과 굳건한 믿음에 새삼 고개가 숙여졌다.
하지만, 하지만 함께 힘을 보태 주던 333명의 영혼이 다 떠나고 마지막 남은 힘의 한 방울까지 모두 자신에게 전해 준 후 홀로 나머지 시간을 버티기 위해 남은 로한의 희생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것인가?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미어지는 가슴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성자이며 주신 아디의 일급 신관인 플라비우스 데 로한 추기경의 영혼은 남은 칠 주야를 버틴 후 결국 마물이 될 것이다. 마물이 되어 억겁(億劫)의 윤회를 거치며 죽고, 또 죽을 것이다. 그는 결코 귀천(歸天)하지 못할 것이며,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영혼의 안식처 주신의 품으로 절대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굳건한 믿음과 희생의 결과로는 너무 비참하다.
로한은 어리석은 자신을 깨우기 위해, 또한 다른 성도들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기울여 성사(聖事)를 행했다.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는 의식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종내 스스로의 영혼까지 희생한 것이다. 하지만 제우스는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 희생한 로한의 믿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우스 역시 로한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로한의 희생은 성스러운 것이었으며, 로한의 남은 임무 또한 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임무 역시 성스러워야 할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서 믿음을 행했고, 자신은 삶으로서 믿음을 행할 것이다. 죽음과 삶은 중요치 않다. 신을 섬기는 종으로서 제우스 역시 언제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는 것이다.
살아서 이 불결한 땅, 마계의 문을 벗어나 반드시 333명의 영혼을 귀천시킬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절대 죽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죽더라도 마지막 숨은 반드시 마계의 문을 벗어나서 토해 놓을 것임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제우스를 둘러싼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한 빛을 뿜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