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48화 (48/142)

48. 하기

*하기*

나는 신관이었다. 그러니까, 마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지.

난 신관이었다. 젊고 혈기왕성하며 희생에 대한 열망으로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신관이었다. 제3차 원정대가 마계의 입구로 파견될 때 나는 열정적으로 지원했지. 그래서 온 곳이 바로 이곳이다. 너희들이 마계의 문이라고 부르는 이곳!

난 수많은 죽음을 보았어.

그리고 그 죽음을 보며 다짐했지. 신이 내게 부여한 사명을 다하는 날까지 쉼 없이 희생하겠다고.

내 몸이 쇠약해지는 것도 마다않고 마지막 신력까지 쏟아 내어 동료들을 치료했지. 한순간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고, 누구보다 솔선해서 사소한 일들까지 최선을 다했지. 무려 1년이었어. 짊어지고 온 식량이 떨어지고 광장을 통해 지원되던 보급품마저 끊겨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도, 힘들지 않았다. 난 순교를 원했으니까.

난 목적을 이룰 수 있었어. 기뻤지. 마지막 신력까지 쥐어짜서 트레이니를 살려 낸 것이 내 마지막 희생이었어.

난 죽었다. 아니 죽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난 깨어나게 된 거야. 의식이라는 것이 생겨난 거지. 죽은 자에게 무슨 의식이 있겠나? 그래서 생각했지. 나의 숭고한 희생으로 결국 난 로리안의 품에 안긴 것이라고 말이지.

어둠 속에서 한없이 부유(浮遊)하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내가 서 있는 곳이 아주 빽빽한 숲인 것을 알 수 있었어. 대지의 여신인 로리안의 세계라면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주변이 너무 어둡고 음산했어. 그렇다고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어. 아니, 싫은 것은 고사하고 너무도 편안하고 안락해서 천국에 왔다고 생각했지. 온몸에 힘에 넘쳤지. 숲의 기운이 내게 힘을 주는 듯했어.

너무나 기쁜 나머지 난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려 했었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서 하는 그 기도 말이야. 무릎을 꿇는 작은 동작, 몸이 허깨비처럼 가볍다는 것까지는 크게 이상하지 않았어. 천국이니까.

그런데 두 손을 모은 것이 문제였어. 손을 맞잡는데 잡히지가 않는 거야. 그리고 보게 된 거야.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내 몸은 있지 않았어. 맞잡아야 할 두 손도, 팔도, 무릎을 꿇었다고 생각했던 다리도 없었지. 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뭉클거리는 검은 연기덩어리뿐. 그래, 애초에 내 몸은 존재하지도 않았어.

정말 끔찍했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했어. 그래 영적인 존재가 육체 따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라고. 억지로 수긍했어. 내심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부정하려 한 거지.

미심쩍은 마음을 접으며 천국을 내달았어. 꿈에 그리던 천국에 들었으니 돌아 봐야 하지 않겠나? 깃털처럼 가볍고 구름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았지.

온통 회색과 검은색으로만 가득 찬 숲을 지날 때 나와 비슷한 무언가를 만나게 되었지. 까만 연기 덩어리에 피처럼 붉은 두 개의 눈이 점처럼 박혀 있는, 어쩐지 꺼려지는 존재였어. 그 존재는 진득한 살기를 뿌려대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잠시 나를 탐색하던 기색을 보이더니 한껏 기세를 올리며 몰아쳐 왔지.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어. 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분노했어. 무섭다기보다는 화가 나고, 한편 알 수 없는 흥분이 나를 지배했지. 나 역시 놈에게 돌진했고, 우리 둘은 하나의 덩어리로 엉켜 돌았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이상한 고통과 역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극도의 쾌감이 공존하는 순간이었지. 얼마나 휘돌았을까, 놈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어. 그럴수록 나의 쾌감은 고조되었고, 환락에 몸부림쳤지. 그러길 얼마 후 나는 혼자서 허공을 휘돌고 있었어. 그래, 놈은 내 안에 흡수된 거야.

여운을 즐기는 동안 난 충만한 힘과 희열감을 만끽했지. 정말 그만큼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었어.

하지만 곧 내가 누군가의 존재를 말살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신관인 내가 누군가를 말살하고 이토록 흥분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밀려든 거지. 그것도 신의 땅에서 어찌 이런 죄악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이성을 찾은 난 급히 현장을 떠났지.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도망친 것이지. 뭐 그건 마물의 선택으로서 당연한 결과였어. 난 천국에 든 것이 아니었으니까. 오래지 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 이곳은 천국도 아니었고, 난 로리안의 품 안에 든 영적인 존재도 아니었지. 익숙한 지형과 익숙한 대기. 이곳은 내가 원정을 왔던 그 땅이었고, 그동안 상대했던 마물들이 바로 나와 같은 존재들이었던 거지.

그 후 긴 시간을 절망하고, 절규하고, 통곡하며 신께 나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지. 대답 없는 메아리더군. 난 마물이 되어 있었던 거야. 생각은 해도 말을 할 수 없는.

내 목에서는 소름끼치는 으르렁거림과 음산한 귀곡(鬼哭)만이 토해져 나왔지.

절망한 나는 본능에 몸을 맡겼어.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나 아닌 모든 존재는 적이었고, 먹이일 뿐이었어. 그래서 싸우고, 먹고, 쾌감에 떨었지. 먹을 때마다 나의 힘은 강해졌지. 강대한 놈을 먹으면 강대한 힘을, 약한 놈을 먹으면 약한 만큼의 힘을 얻었어. 그야말로 정직한 논리지 않은가? 그렇게 수없이 많은 마물들과 싸우면서 십여 년의 세월을 보냈지.

어쩌면 내가 죽이고 먹었던 수많은 마물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었을지도 모르지. 스티어스도 트리노어도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치료했던 트레이니도 내 주린 배를 채우는 먹이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난 광기에 차서 마구 죽였어. 육체가 있는 존재는 그 육체를 찢어발기고, 배를 가르고 그 육즙을 즐겼으며, 육체가 없는 존재는 그 존재 자체를 흡수해 버렸어. 다시 십 년이 흘렀을 때 난 이 땅의 절대 강자가 되어 있었고, 삼십 년 후에는 이 땅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지. 이 땅에서만큼은 신이 된 거야. 경배하는 자가 아니고 경배되는 자가 된 거지.

어느 마물도 감히 내게 대항하려 하지 않았어. 살육 외에는 아무런 이성조차 없어 보이는 오우거도 내 냄새만 맡으면 꼬리를 말고 도주했지. 이 숲에 속한 모든 것이 나에게 무릎 꿇고 복종하게 되었다. 어느새 난 신이 된 거야. 아무리 사나운 휴리아도 내 손짓 하나에 산 채로 먹히기 위해 무릎걸음으로 와서 내 앞에 엎드리는 거지.

이 땅의 모든 것이 나를 경배한다. 난 나 이외의 신을 부정한다. 내 절망에 대답하지 않고, 자괴감을 달래 주지 않던 그리고 간절한 기도에도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던 신을 인정할 수 없다. 난 신을 증오한다. 그리고 그 피조물인 인간들을 증오한다.

그런데 왠지 너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나는군. 마치 그 옛날 내가 살아 있었을 때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런 울렁임이 느껴져. 너는 누구지?

마계의 문, 그곳의 지배자인 그레이트 흄 ‘하기’가 먹구름이 되어 까마득한 상공에서 숲을 굽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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