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주운Ⅱ
제우스는 얼마 전부터 들려오는 환청을 따라서 다시 이 자리로 와 무릎을 꿇었다. 처음에는 극도로 쇠약해진 육체 탓에 헛것이 들리는 걸로 생각했다. 아니면 미쳤거나!
하지만 아니었다.
노리앙에게서 몇 차례 안수를 받은 후 소리는 점차 또렷해졌다. 명확하게 의미를 짚어 내지는 못하겠지만 소리 자체에 대한 의심은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제우스는 그 소리의 정체가 의미 없는 잡음이 아니라 무언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목소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분명 제우스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바로 이 초라한 나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초라해 보이지만 어쩐지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나무였다.
끊임없이 귓가를 울려대지만 사악하지 않은 느낌. 마음이 안정되고 따뜻해지는 느낌.
제우스는 그 목소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듣기를 원했다.
반드시 들어 줘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제우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회의실을 겸해야 했기에 커트리안의 방은 제법 널찍했다.
“무슨 뜻입니까?”
예니에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커트리안을 바라보았다.
왠지 무거운 분위기. 커트리안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마법사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 그가 그라는 말입니까?”
광란의 주운이라는 별명 외에도 피의 폭풍, 공포의 흑법사, 탈루한의 살육자 등 수많은 별명으로 불렸던 공포의 마법사.
마계대전 직후 복구가 한창이던 시기, 갑작스럽게 등장해 왕국 하나를 통째로 멸망시키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간 마법사의 이름이 바로 주운이었다.
마계대전이라는 공포의 이십 년을 버텨 냈던 역전의 기사와 강성한 군대마저도 그의 앞에서 단숨에 찢겨 나갔다. 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던 그 마법사는 등장했던 것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의 참사는 마계대전만큼이나 공포의 기억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믿어지지 않는 진실에 놀라 반문했지만 커트리안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무려 오백 년 전 사람입니다. 이미 골백번은 죽었을 사람이 버젓이 살아 있다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는군.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랬다. 크로아지크의 전설을 이끌었던 헤트르 폰티나, 결코 헛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혹시 마족인 겁니까?”
커트리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혹시 리치일까요? 거 왜, 마법사들이 영생을 누리려고 라이프 베슬을 만들고 리치가 된다는…….”
커트리안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어딜 봐서 리치라는 건가?”
답답해진 예니에프가 가슴을 두드리며 항의하듯 말했다.
“아니, 어떤 인간이 오백 년을 산답니까?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 해도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예요?”
“쳇, 그 주운이든 아니든 폰티나 님을 가디언으로 둘 정도라면 보통 인물은 아니지.”
신경질적으로 귓구멍을 파고 있던 롤이 나서고 쥬시아누스도 끼어들었다.
“흠, 인간이 가디언을 거느린다고?”
기실 가디언이라는 존재는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지,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다.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는 드래곤, 그 드래곤을 지키는 존재를 가디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인간이 가디언을 거느렸다? 그것도 일행이 익히 아는 존재들, 바로 크로아지크의 전설 삼인방을 가디언으로 만들어?
무슨 영웅놀이도 아니고, ‘넌 이제부터 가디언이다’ 하면 가디언이 되는 것도 아닐 터!
“폰티나 님의 말투로 보아서는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아온 존재인 것 같더군.”
하긴 오백 년 전에 이미 최강의 마법사였다면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살아왔을 것이다. 그 정도 경지를 하루아침에 이루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거야? 그런 괴물들을 종속시키다니?”
마물처럼 변해 버린 삼인방을 이곳에 와서야 처음 접해 본 예니에프는 기본적으로 그들을 존중하지는 않았다.
“괴물이라니. 말을 주의해라, 예니에프!”
쥬시아누스가 엄한 목소리로 예니에프를 꾸짖었다.
“아, 알았다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커트리안의 시선은 한쪽 벽으로 향했다.
“어떤 사람인 것 같나? 차츠라.”
그 순간 예니에프의 흰색 바스타드가 날카롭게 뽑혀져 나왔다.
깡!
예니에프의 검이 스마르의 클레이모어에 가로막혔다.
예니에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검이 스마르의 검에 가로막혔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스마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으니까. 예니에프가 당황한 이유는 자신의 이목을 속인 한 인물 때문이었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방이었건만?
창문 옆 그늘이 일렁이며 하나의 신형이 드러났다. 예니에프도 알고 있는 인물, 커트리안이 불렀던 이름의 주인공, 차츠라였다.
그는 예니에프에게 살짝 눈길을 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말했다.
“클라흐 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영원을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수명 자체가 없다더군요. 드래곤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드래곤보다 오래 존재할 거라 했습니다.”
“영원을 사는 자라? 마법인가?”
“강대한 마법사는 확실하지만, 마법은 아니고 일종의 이능(異能)이 아닐까 합니다.”
말을 하며 차츠라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가 귀신같이 나타난 차츠라의 모습을 더욱 괴기스럽게 보이게 했다.
“빌어먹을 자식, 갈수록 클라흐 님을 닮아 가는군.”
롤이 투덜거렸다.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어째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마치 혼잣말인 듯 나지막이 한 말이지만 차츠라가 대답했다.
“클클, 오래되다 보면 잊히기 마련이지요. 주운 외에 하나 더 알려진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 더?”
“비의(秘儀)의 구도자 빌리언스.”
그 말에 모두들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육백여 년 전, 마계대전이 있기 백여 년 전, 홀연히 나타나 마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마법사!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9서클의 경지를 최초로 넘어섰다는 마법사가 비의의 구도자로 불렸던 빌리언스였다. 그가 정립한 마법 이론은 아직까지도 모든 학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마계대전 당시 그에게 배운 마법사들이 활약하지 않았다면 인류가 생존할 수 없었을 거라는 설도 있었다. 일부 마법사들의 주장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 이야기였다. 마계대전 당시 고위급 마법사들의 활약은 기사나 신관들 못지않았으니까.
“그 외에도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만, 클라흐 님도 그 이상은 알지 못하더군요. 클클.”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몇몇 이름들이 떠올랐다. 시대별로 등장했던 전설의 마법사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 나타나 인간 같지 않은 업적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던 마법사들은 여럿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점. 즉, 수련 과정이나 성장 과정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오백 년 전 피의 광풍을 일으켰던 주운처럼 말이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칩거하고 있는 거죠?”
예니에프가 불쑥 의구심을 던졌다.
본인에게나 할 수 있는 질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차츠라 역시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뭐, 그렇다고 칩시다. 문제는 그런 존재가 아무 이유 없이 우리를 구해 주고, 또 아무 이유 없이 풀어 준다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예니에프의 질문에 롤이 냉큼 끼어들었다.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던데? 오히려 귀찮아하는 느낌이던데?”
예니에프는 롤의 말을 무시하며 커트리안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폰티나 님도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까?”
커트리안과 폰티나는 켈커티스 시절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 비록 나이 차이는 20년 가까이 나지만, 따지고 보면 피도 조금 섞인 관계였다.
감히 말을 붙이기도 어려운 상대, 폰티나와 그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커트리안이 유일했다. 잠시지만 함께 생활했었다는 롤조차 폰티나에게는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을 가디언에게 시시콜콜 읊어대는 주인은 없겠지.”
듣고 있던 차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폰티나 역시 주운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뭔가를 연구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이런 끔찍한 곳에서 휴양을 즐기는 것도 아닐 테고. 너무 오래 살다 보니 게을러졌나? 그냥 시간이나 죽이는 건가?”
너무 무거워진 분위기 탓일까, 커트리안이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사람들은 커트리안의 농담을 기다렸다는 듯 실소를 토해 놓았다. 그 덕에 방 안을 내리누르던 긴장감이 약간 해소되었다.
잠시 미소를 보여 주던 커트리안의 눈이 다시 특유의 미지근함을 담았다. 그럴 때는 누구도 커트리안의 감정을 짐작하지 못한다. 그가 불쾌해하는지 혹은 즐거운 기분인지, 슬픈지 아니면 분노하고 있는지.
“한 가지 유추해 볼 만한 사실은 있네.”
‘모른다’로 귀결될 뻔한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커트리안은 뭔가를 고민하는 듯 창가를 향해 돌아서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노리앙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하네.”
“예에?”
“노리앙에게서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지 않았는가?”
“좀 특이하긴 해도 그다지?”
“아니, 많이 특이하지. 난 노리앙과 비슷한 비예(秘藝)를 가진 종족을 기억하지 못하네. 너무 빨리 강해졌고, 또 그런 재능이 있었다면 애초에 병으로 전쟁에 끌려오지 않았어야 마땅하지. 엔젤나이트인 정오의 기사 제레미엘만의 특징인 투명 오오라를 구사하는 것도 특이하지. 이론적으로는 어떠한 속성도 내포하지 않아야 오오라의 색이 투명해질 수 있는데, 무생물이거나 천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지. 아니, 흙, 물, 나무 등 무생물도 속성을 갖기 마련이지. 그리고 천사라 해도 제레미엘 외에 다른 무속성 천사가 존재할지도 의문이군. 또, 그가 쓰는 암경이나 점혈이라는 마법! 제우스를 회복시킨 안수! 어떻게 해석할 거지?”
예니에프는 어벙한 표정으로 커트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제법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예니에프였기에 커트리안이 말하는 바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그 이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의 노리앙과 붙는다면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이제는 골곤의 뼈까지 단숨에 베어 내는 그의 오오라를 보면 과연 자신이 받아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애써 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뇌까렸지만, 기실 목숨을 걸고 붙어야 한다면 절대 피하고 싶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헤어져 있던 두 달여간 그는 몰라보게 강해져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하루하루 강해지고 있다. 마물화의 영향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빠르다.
처음 검투반에 왔을 때 고작 B클래스 정도였던 자가 아무런 기초도 없이, 전승한 비예도 없이 그 짧은 시간에 A클래스의 최상위 랭커가 되었다? 더구나 이제는 자신도 승부를 꺼려할 정도로 커 버렸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전에 전승한 비예가 있었단 말인데, 커트리안의 말대로 그 정도 비예를 가진 자가 말단 징집병으로 전쟁에 끌려오고 포로까지 되었다는 것이 또 이상하다. 아귀가 맞지 않았다.
무속성? 멋없는 오오라라고 놀렸던 투명 오오라에도 그런 비밀이 숨어 있었다니? 게다가 제우스에 관한 일은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그저 가끔 있는 사이커 중에 하나라고 치부하고 넘겼다. 오히려 사제에게나 효험을 발휘하는 반편이 이능이라고 놀리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렇지. 주운이 노리앙을 납치하듯 데려가던 장면을 기억하나? 그런 대단한 마법사답지 않게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 즉, 그는 노리앙에 대해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른다는 가정이 나오네. 그렇지 않나, 차츠라?”
회색의 마물 가죽을 뒤집어 쓴 차츠라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의 실험 탓에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다더군요.”
“그럼에도 여전히 모르고 있다?”
“지금도 가끔 불려 가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커트리안의 무심한 눈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한 가지 더, 폰티나 님이 묘한 말씀을 하더군.”
차츠라가 질문했다.
“무어라 하셨습니까?”
“주인을 거역하지 못해서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하셨지. 기회가 된다면 노리앙을 단숨에 베어 버리라고…….”
모두들 충격에 빠졌다. 특히 차츠라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