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46화 (46/142)

46. 훈련

보급을 위해 나간 인원을 제외하고 스무 명 정도가 공터에 모여 있었다. 훈련을 지도해 줄 예니에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크로아지크 때와 달리 클래스 임명 등의 절차는 없었지만, 조노량은 이미 S클래스로 인정받고 있었다.

조노량이 나서자 각기 훈련에 열중하던 인원들이 스스로 알아서 정렬을 시작했다. 지도 사범이 바뀌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지도 사범이 예니에프든 조노량이든 딱히 이상해하지도 않는다.

모여 있는 기대원들의 대부분은 크로아지크 출신이었고, 일부는 다른 수용소에서 차출되었던 인원으로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들이다.

현재 총 인원은 서른일곱 명!

마계의 문에 들어올 때 근 이백에 달하던 인원이었는데, 처참하게 줄어든 셈이다. 그중 크로아지크 검투반 출신이 아닌 자는 차츠라를 포함해 단 네 명뿐이었다. 더 이상 검투반이 아니었기에 기대로 명칭을 바꿨다. 단, 크로아지크라는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출신 폴리스가 다른 자들이 크로아지크라는 공통분모를 가졌다는 의미도 있었고, 당시의 굴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기도 했다.

기대치고는 초라한 인원이었지만 개개인의 역량으로 보았을 때는 그 어떤 기대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기대임에 틀림없었다. 애초에 구성원 하나하나가 모두 기대장이나 최소 종사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다. 거기다가 마계의 문에 넘어온 이후로 성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다. 목숨을 건 실전 경험을 넘치도록 쌓았다. 또한 겉으로 진행되었건 속으로 진행되었건 마물화의 영향도 적지 않다. 이 정도 전력을 가진 기대는 북부 전체를 통틀어도 전무할 것이다.

“예정상으로는 진형 훈련입니다만?”

브리오티스가 대표로 조노량의 의견을 물었다.

조노량의 경우 진형 훈련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선호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진형을 운용하는 능력 면에서 앞에 서 있는 누구를 뽑아도 조노량보다 못한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실 이들 중 절반은 본인의 기대를 가졌던 자들이니, 제대로 된 전쟁 경험이나 지휘 경험이 없는 조노량이 진형 훈련을 주도한다는 말 자체가 난센스였다.

“개인 전투술 훈련을 실시한다. 위치로!”

이미 조노량의 훈련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대원들은 각자 상대를 정해 이 열로 늘어섰다.

5분간 한 명을 상대하고 한 칸씩 자리를 옮긴 후, 다시 새로운 상대와 5분간 대무를 벌이는 방식이었다.

늘어선 인원의 삼 분의 이는 골곤이라고 불리는 마물의 뼈로 다듬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나머지는 아직까지 낡은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그들도 오래지 않아 새로운 무기를 갖게 될 예정이었다.

그 큰 덩치를 쭈그리고선 묵묵히 골곤의 뼈를 다듬고 있는 쥬시아누스와 연신 투덜거리는 롤의 모습이 떠올라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아마 지금 다듬는 분량만 마무리된다면 나머지 기대원들에 대한 배급도 완료될 수 있을 것이다.

대원들의 얼굴은 이전과 달리 여유를 찾고 있었다.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연명하던 입장에서 탈출이라는 희망도 생겼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최근 변화된 입장 때문이기도 했다.

사냥감에서 중간 포식자 정도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마물을 사냥해서 먹고 사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느새 이들 중 가장 약한 자도 웬만한 마물 정도는 혼자서도 거뜬히 처리할 만큼 성장했다.

조노량의 신호에 따라 대무가 시작됐다.

서로 간에 약속된 형을 따라 진행되는 대무였지만, 그 흉험함이 만만치 않았다. 마물화가 진행되며 각자의 신체 능력이 월등히 상승된 탓이었다. 게다가 마기의 영향으로 성격들도 흉포해진 상태였기에 자칫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서로를 상하게 하기 일쑤였다.

“교대!”

조노량의 외침에 따라 오와 열을 정렬하고 오른쪽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이제 겨우 한 차례 회전했을 뿐인데, 다들 숨을 헐떡거렸다. 그만큼 격한 대무인 것이다. 서로의 무기에 실린 경력(經力)이 만만치 않았다.

조노량의 시선이 하이오지에게 향했다. 역시 헉헉대며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다지 지쳐 보이지는 않았다.

‘역시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은 것인가?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군.’

상대가 최선을 다하는데, 자신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대단한 능력이다. 보통은 실력이 뛰어난 자가 자신보다 아래의 실력자를 지도해 줄 때나 가능한 기술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상급의 실력자에게 그런 기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격검! 시작!”

조노량의 구령에 따라 다시 흉험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조노량은 번갈아 가며 대무자들의 자세를 바로잡거나 시범을 보이며 일행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니까! 오른쪽으로 돌고 나선 적시에 왼발을 끌어 줘야 제대로 된 공격이 들어간다. 한 호흡에 이루어져야지 두 호흡까지 늘어지면 늦어! 자, 천천히 들어와 봐!”

조노량이 클리브에게 시범을 보이는 와중에 샤마노프의 촉수가 상대의 뒤통수로 돌아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노량의 신형이 늘어나듯 쭉 뽑아지며 샤마노프의 촉수를 향해 오첩도를 뻗었다.

챙!

살과 검이 부닥쳤다고 생각되지 않는 소리가 나며 촉수가 튕겨져 나갔다. 비록 검기를 끌어올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날카로운 오첩도의 날을 감당해 내고도 샤마노프의 촉수는 끊어지지 않았다-끊어졌다고 하더라도 다시 자라나니 놀라운 일이다-.

샤마노프는 화들짝 놀라며 촉수를 거둬들였다.

“상대를 죽일 셈인가? 동료를 상대로 흥분하지 말라니까!”

최근 들어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싸움에 임하면 쉽게 흥분하고 연습에서조차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운다. 평소의 끈끈한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성정이 폭급해졌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비단 샤마노프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마기의 영향으로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조금씩 마물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조노량 자신은 전혀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아니, 한 명 더. 언덕 중간에 서 있는 초라한 흰색 나무 아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제우스까지 포함하여 둘은 마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다.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음식을 먹고 있는 데도 어째서 둘은 마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는 것일까?

조노량은 고개를 저으며 의문을 털어 버렸다. 어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둘인가?

샤마노프는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스스로도 왜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성정은 폭급(暴急)해졌으나 이성은 그대로다. 흥분이 가라앉은 후 자신의 행동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촉수의 위력을 감안한다면 동료의 목숨을 끊어 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수였다. 기대원 모두 육체적으로는 놀랄 만큼 강해졌으나 심리적으로는 잘못 구운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상태다. 자칫 동료를 해하게 된다면 정신적으로 버텨 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훈련에 임한 조노량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였다.

샤마노프와 샤마노프를 상대하던 벤트가 굳어진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나머지 대원들의 대무는 격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촉수를 얻었으면 촉수답게 써야 하지 않겠나? 촉수 마물을 한두 번 상대해 본 것이 아닐 텐데?”

조노량은 위험했던 상황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며 일부러 기술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긴말하지 않아도 샤마노프는 조노량의 마음씀씀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가장 듬직한 동료이며 보호자로 인식되었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지만, 이 개월 넘게 노리앙과 함께한 시간이 샤마노프를 변화시켰다. 충분히 자포자기할 만한 상황에서도 노리앙은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샤마노프 자신은 물론 레인저인 차츠라마저 무너진 상황에서도 노리앙은 흔들리지 않고 일행을 이끌었다. 언젠가부터 자신과 차츠라는 어미를 따르는 오리 새끼들처럼 노리앙에게 의존했다. 그 기억과 관계가 가슴속에 새겨졌다.

그리고 샤마노프는 노리앙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촉수를 얻었음에도 그 운용법은 여전히 이전의 그물을 쓰듯 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습관이 새로운 신체의 장점을 제한하고 있음을 샤마노프 자신도 알고 있었다.

‘무기는 팔의 일부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창술을 배웠지만 정작 신체가 무기화되어 버리자, 이건 뭐 신체인지 무기인지 애매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부러지면 버릴 수 있는 글라디우스 같은 것도 아니고, 무기처럼 사용하자니 부상이 우려되고, 신체처럼 사용하자니 또 애매하다. 다른 무기를 쥘 수도 없고, 오오라를 감당할 만큼 강하지도 않다. 촉수 끝까지 뻗은 신경 조직은 아주 예민하고 빠르게 반응하도록 해 주지만, 자칫 절단되기라도 하면 고통은 둘째 치고 다시 자라날 때까지 빈손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오랜 습관이 고쳐지지도 않는다. 방금 전의 문제도 그랬다. 습관적으로 그물을 치듯 상대의 머리 위로 다섯 줄기의 촉수를 덮어 씌웠고, 살짝 오오라가 어렸던 벤트의 글라디우스가 촉수 중 하나에 상처를 냈다.

그 순간 나머지 촉수가 살수를 펼친 것이다. 예민해진 감각과 촉수의 운동신경은 그물로는 할 수 없는 급격한 굴절을 가능케 했다. 그 결과로 자칫 벤트를 죽일 뻔한 것이다.

단지 훈련일 뿐이었다. 충분히 자제할 수도 있었는데, 왜 그 정도 유혹을 이겨 내지 못했을까? 왜 그토록 흥분한 것일까? 실전에서는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냥 생각했을 뿐인데, 어째서 촉수가 벤트의 뒷목을 뚫기 위해 진행하고 있었던 것일까?

샤마노프는 따뜻함이 묻어나는 노리앙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위축되었다.

훈련을 마친 대원들은 쓰러지듯 맨바닥에 몸을 뉘였다. 대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노리앙이 진행하는 차륜(車輪) 대전이다. 훈련의 양도 양이지만 강도가 극악이다. 마기의 영향인지 감정 조절이 쉽지 않은 탓에 거의 실전에 가까운 격투가 진행된다.

또 노리앙은 한 바퀴가 다 돌 때까지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있는 힘, 없는 힘 전부 끌어내지 않으면 버틸 수도 없었다. 악에 받쳐 휘두른 일검을 감당하지 못하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문제. 이런 식의 대무는 조금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았다. 방심했다가는 목숨이 오락가락할 판이다.

그나마 노리앙이 동분서주하며 치명적인 살수는 차단해 주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는 불상사는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크고 작은 부상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

괴이하면서도 다행인 점은 너나할 것 없이 무서운 회복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촉수를 달고 있는 샤마노프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신체 일부가 잘려 나가도 재생해 버리는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던 크리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머리를 들었다.

“우리 왜 이러는 거지? 마치 짐승이라도 된 것 같잖아?”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서 숨을 헐떡이던 벤트가 대답했다.

“헉헉, 못 들었어? 마물이 된다잖아? 아니, 벌써 반쯤은 마물인 거야. 이 마물 녀석아!”

훈련 중에 죽을 뻔했으면서도 긴장감을 느낄 수 없는 목소리다. 고마웠다.

“흥, 남의 코를 잘라 낸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군. 이거 제대로 재생해야 할 텐데, 샤마노프처럼 코에 촉수라도 돋아나면 곤란한데.”

“캬캬, 볼 만하겠군. 기대되는걸?”

“미친 놈, 그 주둥이를 파내야 입을 닥치겠냐?”

샤마노프는 부상을 입고서도 농담을 해대는 동료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들 간에는 사과나 변명 따위가 필요 없다.

“개새끼 님들 죽고 싶습니까? 왜 가만있는 내 팔을 들먹이는 거.십.니.까?”

“그게 팔이었습니까?”

그 말에 왁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병신이라는 놀림이었지만, 전혀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 그저 웃고 낄낄거릴 뿐이다. 조금 전까지 살기를 풀풀 날리던 사람들답지 않게 격의 없다.

녹초가 되었음에도 누구 하나 이런 훈련에 저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일 년 반 후 봄에 결행될 대장정. 그때까지 최대한 강해지지 않는다면 이곳에 뼈를 묻거나 이성을 잃고 마물이 될 수밖에 없다.

희망이 생기자 절박해졌다. 그래서 더더욱 훈련에 매진하는 것이다.

조노량은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적응하며 살면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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