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45화 (45/142)

45. 하이오지

막사 안에는 칸막이로 나눠진 작은 방이 몇 개 있었다. 최고 실력자 몇몇을 위해 준비된 방이다. 조노량도 그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략 침상 두 개를 놓을 만한 공간에 한 개의 침상만 놓인 정도의 크기였다.

“내가 살아남은 방법이지.”

대충 살아온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제법 생각을 하며 살아온 인생이다.

하이오지는 다듬어진 흙바닥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졸개들은 전투의 양상이나 전개 방향을 알 수 없거든. 언제 적의 원군이 우리 옆구리로 들이닥칠지, 혹은 완강히 저항하던 적들이 한순간에 무너질지, 아니면 우리 기대만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적진 한복판에서 포위될지 알 도리가 없잖아?

가장 위험한 건 후퇴야. 밀려서 후퇴를 하든, 아니면 유인책으로서의 후퇴든 졸들에게 있어선 마찬가지지.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거든. 그런 순간을 대비해 항상 힘을 남겨 둬야 해. 괜히 흥분해서 날뛰다간 골로 가는 거지. 생각해 봐, 작전의 윤곽이라도 알 수 있어야 대비를 하든 체력을 안배하든 할 거 아닌가? 그렇다고 본대를 벗어날 수도 없어. 그랬다간 당장 탈영병으로 몰릴 거거든. 또 본대를 잘 따라다니는 것이 더 안전한 경우가 많고.”

하이오지는 단단하게 굳은 마물의 육편을 질겅거렸다. 건달의 풍모가 물씬 풍겨 나온다. 어디가나 삼류 인생들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난 말이야, 크리푸 출신이야. 흔히 말하는 비열한 자들의 도시지. 켈커티스의 아이들이 명예를 배우고 전투를 배울 때 난 싸우는 법과 도망가는 법을 배웠고, 남들이 힘을 집중하는 법을 배울 때 난 반대로 힘을 쓰지 않는 법을 배웠어. 남들이 전술을 공부할 때 난 소매치기와 사기술을 익혔지.

누구한테? 물론 처음은 아버지였어. 그러다가 그 인간이 켈커티스의 떠돌이 용병 놈에게 사기를 치다가 뒈진 후론 이놈 저놈에게 얻어 배우게 됐지. 영악한 꼬맹이는 써먹을 데가 많거든. 굳이 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가르쳐 줬지. 뭐, 어렵진 않았어. 가르치길 원하는 선생들은 널려 있었거든. 도시 전체가 그랬어. 난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에 익숙해졌지. 크리푸에 대해선 좀 아나?”

조노량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하이오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크리푸는 삼십 년 전쟁 동안 네 번이나 말을 갈아탔지. 켈커티스 동맹에서 아도니아 연합으로, 다시 아도니아에서 켈커티스로. 그렇게 적들에게 점령당한 횟수만 세 번이야. 쉽게 말해서 적어도 십 년에 한 번은 도시가 불탔다는 말이지. 크크, 다른 도시 같았으면 버얼써 풀씨나 굴러다니는 폐허가 되었을 거야. 하지만 크리푸는 여전히 살아남아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도시 중의 하나로 취급받지. 그것도 다루기 힘든 골치 아픈 놈들만 모인 도시로 말이야. 그 이유가 뭔지 아나?”

하이오지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듯 어깻짓을 하더니 더 이상 씹히지 않는 육편의 잔존물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뱉어 냈다. 힘줄로 생각되는 허연 덩어리가 바닥을 굴렀다. 심히 불쾌한 모습이지만 뭐라 하진 않았다. 이곳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행동했다. 문화적 차이라 생각하니 참지 않을 수 없다. 조노량의 찡그러진 인상을 살피지도 않고 하이오지는 말을 이었다.

“훗훗, 크리푸 시는 원주민인 크리푸족 외엔 대부분 범죄자들이거나 도둑, 사기꾼, 협잡꾼, 용병, 이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지. 그들은 크리푸를 벗어나선 발붙일 곳이 없어. 설령 이주가 받아들여진다고 하더라도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다른 도시로 떠난 자들의 대부분은 공짜 밥을 먹거나, 아, 공짜 밥 알지? 수용소에서 주던 밥 같은 거 말이야. 공짜 밥 아니면 밥을 먹을 필요가 없는 처지가 돼 버렸거든. 운이 좋아야 다시 크리푸로 돌아오는 거고. 그러니 어떻게든 크리푸에서 비벼 가며 살아야겠거든. 그게 크리푸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지.

그래서 밟히면 일어나고, 불타면 재건하고 용병을 모으고 다른 도시의 범죄자들을 끌어들이고, 싸움을 권장하지. 하하, 아마 전 대륙에서 범죄자들의 이주를 환영하는 도시는 크리푸가 유일할걸? 어쨌든 크리푸는 결코 주저앉을 수 없는 사람들의 도시인 거야. 그들에게 있어선 마지막 보루고 유일한 고향이거든. 도시가 불타면 여자들은 다음날로 돌아와 시체를 치우고 이웃의 집터를 뒤져 쓸 만한 물건을 챙기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을 보수하고 밭을 갈지. 살아남은 남자들은 끼리끼리 모여 약탈을 하러 떠나고.

쓸데없는 소릴 했군. 질문이 뭐였지? 아, 그래.

우리 같은 졸개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접전을 피하지. 그런 표정 짓지 말아.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구! 난 다른 놈들보다 조금 더 똑똑했을 뿐이야. 크크, 자랑스런 크리푸 출신이기 때문이지. 적과 마주쳐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뒤로 빠질 수 있으면 빠지지. 내 목적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적을 죽이는 것도 아니야. 그런 건 윗 놈들이나 걱정하라지. 나 같은 놈들은 씨발, 오직 하나! 살아남는 게 유일한 목적인 거야. 그러려면 힘을 아끼는 것 말고 다른 게 없어. 제대로 된 놈한테는 내 잡기술 따위, 통하지 않거든. 그런 놈들을 미리 알아볼 안목도 없고.

내 신조가 뭔지 아나? 첫 번째, 위험한 일은 옆의 놈에게 미룬다. 두 번째, 칼만 뻗어도 적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래도 위험 요소가 있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세 번째, 어떠한 경우라도 앞에 서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거야. 눈치껏! 지휘관은 물론 옆의 놈도 모르게!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언제든 힘을 남겨 두는 거야. 힘이 빠지면 도망도 가지 못하고, 적의 칼날을 막아 내지도 못해. 최대한 힘을 아껴 둬야 해.

힘이란 적을 제압하는 데 쓰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데 쓰는 거야. 쉴 수 있을 때 쉬고, 먹을 수 있으면 먹어 둬야 해. 졸개들은 언제 어떻게 도망쳐야 할 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거든. 체력이 곧 생명인 거야.”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조노량의 입에서 피식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뒷골목에서 살아남은 방법과 달라 보이지만 맥락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는 눈치껏 요령을 피우지만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비열한 하이오지라는 별명이 그저 붙었겠는가? 살아남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남들의 이목을 속이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비웃지 말라고. 난들 이렇게 살고 싶었겠나? 하여간 이제는 나도 어엿한 전사가 되어 버렸군. 이걸 행운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불행의 시작인 건가?”

나름 철학적인 말도 할 줄 안다. 하긴 삼류 인생이라고 생각이 없을까.

말을 하며 하이오지는 자신의 팔을 힐끗 쳐다보았다. 무심코 보아 넘기기 쉬웠지만, 그의 팔은 거의 무릎에 다다를 정도로 길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 팔에 숨어 있는 힘은 전과 비교해 두 배 이상이었다.

마물화가 진행된 결과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도는 다르지만 살아남은 자의 대부분이 그와 같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오오라를 일으킬 수 없었던 자들조차 이제는 자연스럽게 오오라를 다루고 있다. 매일매일 목숨을 걸어야 하니 성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두 가지 이유로 기대원들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차츠라는?”

하이오지가 나무 벽에 등을 기대며 심드렁히 말했다.

“짐 쌌다니까!”

침상에 걸터앉은 조노량이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갔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둘은 같은 기관 출신이라 했나……? 하긴, 분위기가 비슷하긴 했지.”

애초에 둘이 나누고 있던 이야기는 차츠라에 대해서였다. 한동안 클라흐에게 불려 다니던 차츠라가 아예 짐을 싸서 클라흐에게로 떠나 버린 것이었다. 차츠라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어둠의 클라흐는 그림자로서 정점에 서 있는 자다. 레인저이긴 했지만 정보 쪽 일에 특화되어 있던 차츠라로서는 클라흐 이상의 스승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거참,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그 음침하신 분하고 어떻게 친해질 수가 있는 거지?”

하이오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노량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노량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하이오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넌 음침하지 않은 것 같은가?

뿌우웅

그때 요란한 가죽피리 소리가 들렸다. 하이오지의 스스럼없는 방귀 소리다.

“에이, 훈련 시간이군. 나 먼저 가네.”

시원하게 가스를 내지른 하이오지가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윽.”

그가 나가자 조노량은 콧등을 찡그리며 인상을 썼다.

마물의 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있는 탓인지 방귀 냄새가 유달리 지독하다. 그중 하이오지의 방귀 냄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달걀 썩은 냄새는 유도 아닐 지경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러는데 유독 자신 앞에서는 거침없이 군다. 아마도 크로아지크 검투반의 동기 비슷한 관계였다는 것이 한몫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관계를 새로 정립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 역시 나름 편한 관계가 아닌가? 더구나 그를 비롯한 몇몇은 조노량 자신의 수하들처럼 철저히 따르고 있었다.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금 들어오면 안 되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스마르였다. 그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반장과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다. 엄한 시어머니 같은 존재랄까?

바늘 끝조차 들어가지 않을 듯한 엄정한 표정에 작은 일그러짐이 포착됐다.

하이오지의 방귀 냄새를 맡은 것이 틀림없다.

스마르의 불쾌한 시선이 조노량에게 머물렀다. 스마르는 짧고 간결하게 용건을 전한 후 방을 나가 버렸다.

예니에프 대신에 대원들의 오후 훈련을 맡아 달라는 요구였다.

조노량은 필요 이상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쒸, 내가 아니라니까!’

어쨌거나 냄새나는 방 안에 더 이상 버티고 있기도 뭐해서 조노량은 스마르의 지시대로 공터로 나갔다. 방문을 열어 놓고 나가는 것은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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