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44화 (44/142)

44. 사냥

“우, 쌍! 이쪽으로 유인하라니깐!”

롤의 외침에 예니에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물의 오른쪽 옆구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예니에프의 하얀색 검이 선명하게 백열하며 마물의 옆구리 살을 한 뼘이나 갈라냈다. 짙은 초록색 피가 수차(水車)로 뿜어내듯 격렬하게 튀었다.

키가 무려 사 미터에 이르는 골곤이란 마물이다. 마물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거구다. 소를 닮은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교차하며 솟아 있고, 두툼한 어깨에는 세 개의 팔이 기형적으로 돋아 있다. 견갑골에서 뻗어 나온 두꺼운 두 개의 팔 외에 채찍에 가까운 얇고 긴 한 개의 팔이 쇄골 부근에서 삐죽이 솟아 있다.

코끼리처럼 두꺼운 두 개의 다리 사이에는 악어의 꼬리가 자라나 있다. 길이는 바닥에 닿고도 남아서 질질 끌릴 지경이다. 종종 이 꼬리를 휘둘러 공격을 가하는데, 한 아름 정도의 나무는 단번에 박살이 나곤 했다. 절대 검 따위로 막아서는 안 되는 물건인 것이다.

골곤의 겉피는 악어의 피부처럼 우둘투둘한 모양이었는데, 워낙 두껍고 단단해서 오오라를 끌어올리지 않고서는 절대 벨 수 없다. 힘으로 섣불리 들이대다가는 검을 망가트리기 십상이다.

치잇!

몸이 날랜 예니에프가 짧게 베고 빠진 위치로 골곤의 팔이 바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츳!

그 경로에 위치해 있던 굵직한 나무에 여섯 개의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진다. 지나치게 단단해서 목재로도 베어 오지 않는 나무인데, 간단히 패여 버렸다.

저 손톱에 걸리면 인간의 신체 따위는 그야말로 가죽 부대처럼 터져 버릴 터!

퍽, 퍽!

그 순간 어른 머리통만 한 돌덩이 서너 개가 날아와 마물의 얼굴을 강타했다. 아니, 어루만졌다고 해야 할까? 인간 머리에 맞았다면 그대로 으깨 버렸을 만한 돌덩이임에도 골곤은 고개를 내저을 뿐 큰 타격을 받은 눈치는 아니다. 하지만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골곤은 콧김을 뿜어내며 돌덩이가 날아온 방향으로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미련한 새끼.”

예니에프가 비웃음을 날리며 빠지자, 뒤쪽에 도사리고 있던 조노량이 전광석화처럼 골곤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예니에프의 검이 가른 자리 조금 위로 다시 기다란 검상(劍傷)이 새겨진다. 오늘의 목표인 팔뚝뼈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주의해야 한다.

골곤의 거체(巨體)에는 이미 수십 군데에 달하는 검상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골곤의 거죽은 본래의 색을 짐작하지 못할 만큼 초록색 피로 얼룩진 상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거죽에 난 상처에 불과한 것.

더구나 골곤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기에 이런 식의 공격은 거대한 골곤을 쓰러트리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코끝을 맴돌며 앵앵거리는 모기에 격분해 발을 뻗어대는 강아지 새끼처럼 잔뜩 흥분한 마물이 포효를 내지르며 조노량을 향해 기다란 팔을 휘둘렀다.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진 팔이 부웅 소리를 내며 땅에 처박혔다.

팡!

뿌연 먼지가 일어나며 시야를 가린다.

짧은 팔과 달리 길이만도 석 장에 달하는 긴 팔이지만, 조노량의 신형은 이미 그 거리를 살짝 벗어나 있었다.

채찍 끝에 달린 날카로운 두 개의 손톱이 땅을 긁을 때 손목에 해당하는 부위를 강하게 밟아 버렸다.

아무리 길다 해도 촉수와는 달리 명색이 팔인지라 관절이 존재했다. 그 관절을 진각(眞脚)을 이용해 밟아 버린 것이다.

우둑

가늘다 해서 밟는다고 부러질 만큼 약한 뼈는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놈을 잡기 위해 네 명의 정예가 동원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리의 정체는 단지 관절이 어긋나며 빠져 버린 것에 불과했다. 탈골은 관절이라는 기관이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골곤은 괴성을 토해 내며 조노량에게 밟힌 팔을 뽑아내었다. 조노량의 몸무게로는 잠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힘이다.

그럼에도 팽팽히 당겨지는 순간이 있기 마련!

예니에프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잠깐 빠져 있던 예니에프의 신형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그 틈을 비집고 쏘아져 나갔다.

빠각

골곤의 팔꿈치 관절 부근이 그대로 양단되며 떨어져 내렸다.

골곤의 힘에 공중으로 솟아올랐던 조노량이 공중재비를 넘으며 땅에 내려서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골곤은 메뚜기 떼에 습격당한 코끼리처럼 울부짖다가 자신의 팔을 잘라 버린 예니에프를 향해 돌진했다. 사 미터가 넘는 거구가 내딛는 보폭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렇다고 골곤의 돌진에 따라잡힐 만큼 호락호락한 예니에프도 아니다. 오히려 골곤에 맞춰 속도를 조절해야 했다.

삼십여 미터를 달리던 예니에프가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이제 막 속도를 붙이려던 골곤의 거체도 기우뚱거리며 간신히 균형을 잡고 방향을 튼다. 하지만 관성에 의해 몇 미터는 더 진행한 상태라 예니에프와의 거리가 다시 벌어졌다. 이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잃어버렸을 것이 틀림없다. 분노한 골곤은 멧돼지처럼 예니에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퍼석

거의 따라잡았다고 회심의 포효를 내지르던 골곤의 거체가 한순간 땅속으로 푹 꺼져 버렸다.

이놈을 잡기 위해 미리 파 놓은 함정이었다.

함정에 떨어진 골곤의 머리를 향해 나무 위에 고정시켜 놓았던 거대한 바윗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쾅!

함정 아래 설치된 기둥 굵기의 나무창들에 꿰뚫린 데다 떨어지는 바위에 머리가 으깨진 골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생명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상태를 확인한 롤이 거침없이 함정으로 뛰어내렸다.

골곤의 가슴을 밟고 선 롤이 녹슨 글라디우스를 역수로 쥐고 골곤의 목을 연달아 찌르기 시작했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흙벽은 물론 롤의 전신을 질펀하게 적시기 시작했지만 롤은 골곤의 목을 끊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 끊임없이 검을 내려치고 있었다.

지독한 검질에 강한 생명력을 가진 골곤도 더 이상은 움직이지 못하고 경련만 했다.

“아, 진정하고 천천히 하라니까.”

예니에프가 소리를 질렀지만 롤은 또 광기에 젖어 갔다. 한 번씩 광란해 줘야 기분이 풀리는 모양이다.

골곤의 경련이 잦아들 쯤 함정으로부터 요란한 쇳소리가 울려 나왔다.

깡!

롤의 글라디우스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예니에프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한숨을 쉬었다.

골곤의 약점인 목을 공략해 죽이는 것까지는 계획대로였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골곤의 뼈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인원이 이 마물을 찾아 사냥에 나선 이유가 바로 뼈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물들의 뼈는 대부분 단단하다. 그중 이 마물은 특히 단단하고 골밀도가 높았다. 게다가 골수 부분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가공이 용이했다.

즉 일행이 가장 곤란을 겪고 있는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뼈라는 것이다.

지금 사냥한 골곤의 키가 열세 척이 넘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보다 작으면 무기를 만들 만한 길이가 안 나온다. 아무리 큰 놈이라도 개별 뼈의 길이가 최소 글라디우스 정도는 나와 줘야 무기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길이가 짧고 휘어진 갈비뼈나 두개골은 애초에 적절하지 않다. 더더구나 연골로 이어진 척추는 검으로 가공할 수 없다.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오직 팔다리를 이루는 기다란 뼈다. 이 부분도 관절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온전한 길이로 계산할 수 없다. 더구나 이놈들은 기형이라서 팔뚝 뼈와 상완의 길이가 정률이 아니다. 다시 말해 놈의 짧은 팔 길이가 여섯 자라면 대략 다섯 자에 이르는 팔뚝 뼈와 두 자에 좀 못 미치는 상완골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즉 한 개의 온전한 검 하나와 단검 한 자루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긴 팔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검으로 가공하기에는 너무 가늘뿐더러 관절이 열일곱 개나 되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 예니에프가 긴 팔을 잘라 낸 이유도 그것이었다.

비록 멀쩡한 글라디우스 하나를 잃었지만 그래도 손해는 아니다. 더구나 사상자나 부상자가 발생한 것도 아니니 그럭저럭 성공적인 사냥이었다.

사냥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함정 주위로 몰려들었다. 일부 인원들이 주위를 경계하는 동안 서둘러 골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저 덩치를 통째로 옮길 수도 없거니와 먹을 수 없는 초록 피의 마물이기에 뼈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추릴 필요가 없다.

샤마노프가 골곤의 가슴을 꿰뚫고 솟아나온 기둥에 촉수를 뻗어 감고 함정 안으로 뛰어내렸다. 저 정도라면 팔보다 편리하다. 일반적인 팔이 할 수 있는 기능은 다 하는 데다 다섯 가닥이나 되니 손가락 대신도 가능하다. 더구나 길고 힘도 좋다. 근육의 효율이 인간의 근육에 비해 월등한 것이다.

‘계속 자라난다는 것이 문제지.’

그런 생각을 하며 조노량도 함정으로 뛰어내렸다.

조노량이 팔 하나를 차지하고 붉은색 단검을 꺼내 들었다.

롤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손에 익은 놈인데 절단 나 버렸군.”

“그러니까 흥분 좀 하지 마시라니까욧! 다 잡은 놈 마무리하면서까지 흥분해 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껄껄, 기분 좀 내 봤지. 이놈의 초록색 피를 보면 흥분이 된단 말이야.”

“잘나셨소.”

“그나저나 이거 깎아 내려면 죽어나겠군. 빌어먹을!”

예니에프와 롤은 이곳에 와서도 틈만 나면 투덕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

조노량은 단검에 기를 불어 넣었다. 붉은색 검기가 단검에 어렸다. 특이한 현상이다. 오첩도나 다른 검에 검기를 실었을 때는 느낌만 있지, 색 자체는 없다. 유독 이 단검만 붉은색 검기를 띠는 것이다.

조노량은 골곤의 어깨 부위에 단검을 찔러 넣고 돌렸다. 검 끝을 타고 탄력 있는 근육들이 툭툭 터져 나가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절대 인간을 베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다. 그만큼 탄성이 높다는 의미다. 근육 한 올 한 올이 인대로 이루어진 느낌이다.

이 정도 탄성이라면 샤마노프의 촉수와 비견될 만하다. 물론 탄성 면에서는 촉수 쪽이 조금 우위에 서 있다. 뼈로 지지받을 수 없는 촉수가 힘을 받으려면 그 정도 탄성은 나와 줘야 한다.

갈라진 양쪽 단면으로부터 실 같은 섬유질이 뻗어 나오며 서로를 잇기 위해 꿈틀거린다. 스스로 상처를 복원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본체가 죽어 버린 탓인지 섬유질들은 머리만 삐죽이 나온 상태로 곧 움직임을 멈춘다.

조노량은 익숙한 솜씨로 살을 발라내고, 연골을 분리해 내기 시작했다. 늘 해 오던 일이었기에 익숙하다. 덩치가 큰 마물들을 사냥하면 그대로 들고 갈 수 없기에 분해는 필수다.

조노량은 거침없이 골곤의 팔을 난도질해 나갔다. 이 마물의 가죽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도 없다.

허연 팔뚝 뼈가 쑥 뽑혀져 나온다. 비교적 작은 골곤이었지만 어림짐작으로도 넉 자에 가까운 길이다. 이 정도면 손잡이까지 통째로 만들고도 남겠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약간 휘어졌다는 점이랄까? 일관되게 휘어져 있다면 곡도(曲刀)의 형태로 가다듬으면 되겠지만, 이처럼 좌우로 비틀려 있다면 상품이라고 할 수 없다. 하여간 좋은 모양이 나오기 어렵다. 게다가 무게중심을 잡기에도 조금 애매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고골리를 통해 이 마물의 뼈를 가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일행은 나무창이나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일반 마물들의 뼈는 단단하기는 해도 골밀도가 성글어서 둔기로나 쓰지, 검의 형태로 다듬을 수는 없다. 설령 다듬는다고 해도 무게가 너무 가볍고 또 길이도 부족하다. 반면 이놈은 철에 비견할 만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점은 이 뼈가 일행들의 오오라를 견딜 수 있다는 점이었다. 생체를 구성하던 것이라 그런지 오오라를 받아도 구조에 전혀 손상을 받지 않았다. 그야말로 최상의 재료인 것이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단단한 탓에 아무나 가공할 수 없다는 점과 가공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이다.

이 뼈의 유일한 가공 방법은 나무를 다듬을 때처럼 깎아 나가는 방법인데, 검기를 잔뜩 끌어올리지 않고서는 흠집도 낼 수 없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클래스별 역할이 반대로 되어 버리고 말았다. 크로아지크 때와는 달리 소위 말하는 S클래스 인원들이 무기를 만들어 나눠 줘야 했고, 사냥도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했으니 롤이 투덜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조노량도 골곤의 뼈로 오첩도와 비슷한 모양의 검을 하나 만들었지만 왠지 손에 익지 않아 처박아 둔 상태였다.

상박과 하박의 뼈를 발라낸 조노량은 놈의 팔뚝으로부터 몇 가닥 힘줄도 뽑아냈다. 요모조모로 쓸데가 많을뿐더러 쥬시아누스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줄을 갈무리한 조노량은 오첩도를 꺼내 들었다. 골곤의 등을 해체하기 위함이다. 쥬시아누스가 원한 것은 놈의 척추였다. 굵고 무거운 척추를 힘줄로 이어서 도리깨를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도리깨라기보다는 철편(鐵鞭)에 가까운 모양이 나오려나?

한 마리분만 더 모으면 버릴 부분을 버리더라도 대략 오 미터에 가까운 골편이 완성될 것이다.

이 마물의 뼈 무게를 감안한다면 아마 이 골편을 휘두를 수 있는 자는 쥬시아누스나 고골리를 제외한다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식한 놈들 같으니라고.’

벌어진 몸통에 발을 묻은 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척수를 발라내던 조노량이 뻐근해지는 허리를 펴고 하늘을 살폈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 공기도 급격하게 얼어붙고 있다. 어느새 겨울이 가까워 오고 있는 것이다. 조노량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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